달님 안녕 하야시 아키코 시리즈
하야시 아키코 글ㆍ그림 / 한림출판사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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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 동화책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같이 좋아하면서 보면 좋겠다란 생각을 많이 한다. 그런면에서 지희에게 처음으로 사준 이 동화책은 나중에 사준 어떤 동화책보다 예쁘고 맘에 든다. 특히 군더더기없는 그림과 몇글자 안 되는 내용 속에서 나름대로 내용이 완성되어가는 모양은 이미 여러번 동화책을 봐서 어떤 내용인지 훤히 아는데도 자꾸 다음장을 넘기게 만든다.

 지희가 아이였을 때 가만히 누워 꼬물거리며 몸을 움직이면 나는 그 옆에 가만히 누워 이 책을 읽어주곤 했다. 멀뚱거리며 책을 보던 아이가 달님이 나타나 '안녕'이라고 말하자 알아듣기라도 한듯이 방싯방싯 웃는다. 그럴때면 이건 책이 아니라 아파트 숲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 달님이 정말, 아이에게 살짝 귓속말을 속삭이는 것 같기도 했다.  

 달님의 자리에 아이 이름을 넣어서 부르거나, 자신 혹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러도 좋다. 

지희 안녕, 

이모 안녕,  

누구누구 안녕, 

 안녕이란 말은 Hi보다 울림이 크다. 안녕이란 말을 해줄 때면 이 울림이 목언저리를 간지럽힌다. 간지러워 웃다가보면 정말, 내가 인사를 건넨 누군가가 반가워지고만다. 안녕은 만날 때, 헤어질 때, 어색할 때, 무진장 반가울 때도 쓰이며 가만히 나에게 속삭이는 달님을 끌어안고 싶을 때도 해줄 수 있는 말이다. 그래서 어린 지희가 자기 전에 꼭 읽어주곤 했다. 달님을 끌어안듯이 작은 너를 이렇게 꼭 껴안아주고싶어. 안녕, 지희야.

 한글을 익히는 나이가 되면서 나랑 지희는 내가 한권, 지희가 한권씩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책을 고르는건 전적으로 지희 몫이었다. 그럴때면 자기 책은 주로 글자가 없는 아주 꼬맹이였을때 읽었던 것을 집어오고, 내가 읽을건 글자가 그야말로 바글거리는 책을 가져오는 아이. 이 책은 지희가 자신이 읽을 것으로 많이 가져온 책이기도 하고, 내가 그거 읽으면 구름 아저씨 목소리 정말 잘 낼 수 있다며 지희에게 나도 한번 읽자며 많이 조른 책이기도 하다. 

 안녕, 자기 전에 인사해요. 

 달님,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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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게임의 묘미는 별거 아닌 질문에도 뜸을 들이기가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벌칙과 진실을 말하는 것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며 지켜보는 눈들을 감질나게 하면서, 질문자체가 그다지 파격적이지 않음을 사람들이 깨닫고 눈을 돌리기 전에는 말을 해주는 센스 말이다.

 진실게임 시뮬라시옹일 수도 있겠으나 사람들은 진실게임을 통해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적당한 재치와 살짝살짝 분위기를 데쳐주는 거짓말, 리듬을 타는 용어사용과 과장되지 않으나 조금 민망해하는 표정을 구사해줘야 '게임'으로서의 진실게임은 모두를 만족시킨다. 그런면에서 곧이곧대로 진실을 말하거나(나처럼) 요령있게 넘길줄 모르거나 부득불 어떤 주제의 질문에서는 자포자기해버려 딜을 못하는 사람은 '게임'의 재미뿐 아니라 진실을 알기보다는 진실인척하는 얘기들 속에서 빛을 바래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게임이 아닌 형태에서의 진실은 유효할까.

 취중진담은 숨겨진 맘을 들어내게 하는데 효과적이나 악용하는 사례와 술먹고 개되는 상황들이 속출하니 제쳐두고, '사실은'. '진짜로', '정말'을 빈번하게 쓰는 언어습관을 가진이의 경우, 거짓말로 의심을 받아본적이 있거나 말하는 자신도 본인의 말에 굳이 부사를 붙여야 안심이 되는 경우로 볼 수 있겠지. 연인 사이에선 바람을 피웠는지의 여부, 정치인들 사이에선 팩트 놀음으로 전락해버린 진실의 실체, 장사꾼의 거짓말, 언론에서 기사의 배치와 사실보도란 함정, 결혼 안 한다는건 3대 거짓말 중의 하나라는 것 등등.

 취중진담의 아류라고 할 수 있는 KTF의 부가서비스 중 콜중진담이란게 있다. 전화통화를 하면서 이 기능을 켜놓으면 상대방 억양의 고저, 머뭇거림 등을 체크해 평소와 다를 경우를 선별, 거짓말을 판단한다고 한다. 실효성이나 그렇게까지 해야할 정도면 차라리 믿지 않는게 낫지 않을까란 것은 둘째치고, 그게 과연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다시 진실게임으로 돌아가보면, 어제 어쩌다가 진실게임을 하게 되었는데 난 내가 이런 게임을 굉장히 만만하게 본다고 서슴없이 지껄였었다. 난년이예요까지는 아니고, 숨기거나 꺼려지는게 없을 수도 있고, 물타기나 분위기 맞추는게 재능이 없으니 이실직고 말하는 것 밖에 수가 없단 고백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질문들이 이상했다. 허를 찔렸다고 할까.

 '알라딘에 정이 떨어져도 남고 싶게 만들 정도로 믿는 사람이 누구예요', '알라딘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예요.' 주위에선 왜 그런걸 물어서 질문을 낭비하냐는 분위기였지만, 난 난감해지고 말았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라고 해야할지, 머릿 속에서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사람을 얘기해야할지, 아니면 한참 고민하는척 하다가 향후 별 문제가 없을만한 이성을 언급했어야할지(다분히 작위적으로) 답이 안 나왔다. 잠시 머뭇거리다 믿는 사람은 없고,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누구라고 말을 했다.

 순간, 멍텅구리같은 대답이란 생각이 떠올랐다. 누구도 믿지 않는다는 말이 가져다준 진실이 섬뜩하기도 했고, 이러니저러니해도 내 껍데기는 여전히 단단하게 날 둘러싸고 있다란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모두에게 열려있고, 당신을 알고 싶어요, 세상은 봄날처럼 싱그러운 순간들로 이뤄져있다라며 어쩔줄 모르겠는 언어를 쓰던 내가, 진실을 말하지 말아야할 시점에서 '어쩌면 진실'을 발설해버린 것만 같았다.

 서재가 내 삶의 중심도 아니고, 발을 동동 굴리며 서재만 바라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아니라고 믿고 싶은건지도.- 글을 쓰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지켜보고는 있지만 이건 전에 라주미힌님이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 로그인을 하지 않으면 서로간에는 불통이 되어버린다.

 요점이 불통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인지, 으레 그렇듯이 '아무도 믿지않아.'모드인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말들은 진실이었다고 생각하는건 위악의 증거인지, 당혹스러우면 아무거나 튀어나오는 습관탓인지도 여전히 모르겠다. 조금 선명해지는건 아무도 믿지 않는다고 말할 때 꽤 겁이 났고, 감당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 그 느낌에서 시작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불편한 진실, 진실게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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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3-23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를 찔린 진실게임이었군요. 그리고 저도 잠깐 생각해봤어요. 알라딘에 정이 떨어져도 남고 싶은 사람은 누구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지?
그런데 온라인상에서 '믿음'이라는게 그 실체가 있는건지 좀 불안해요. 우리는 알고 있잖아요. 그토록 설레임을 주던 레오와 에미가 결국은 어떤 결말에 이르렀는지.

알라딘을 좋아하고, 알라딘의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사람 때문에 머무른다고 하더라도
그사람이 만약 갑작스레 난 알라딘이 싫어, 하고 이곳을 떠나버린다면 혹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오랜 시간 잠수를 탄다거나 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공중에 붕- 뜨게 되잖아요.

결국 중심을 잡아야 하는 건, 주체가 되야 하는 건, 나예요.
라고 쓰면서 결론이 나오네요.


그래도 여전히 좋은 사람 몇몇은 존재하지만.

뷰리풀말미잘 2009-03-23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니터를 바싹 끌어당겨서 읽었어요. ㅎㅎ 진실게임이 그런 것이었군요, 아치님은 그런 상황에서 그런 생각들을 하시는군요.. 으음, 으음.. 재미있어요. 내일 또 읽어봐야겠어요.

조선인 2009-03-24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이라는 인터넷서점에 정이 떨어져도 남게 할 만한 서재지인이라... 질문 자체가 좀 이상한데요? 우리가 정을 가지고 있는 건 서재지인이지, 알라딘 서점 그 자체는 아니잖아요? 알라딘에서 더 이상 책을 사지 않는다 해도 서재를 유지할 것인가 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한 질문일 듯. 굳이 서재지인을 믿느냐 안 믿느냐라는 질문으로 비약하실 필요는 없다고생각해요. ㅎㅎ

웽스북스 2009-03-24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럴 정도로 좋은 사람은 알라딘이라는 매개를 통하지 않고도 계속 볼 수 있도록 하면 되지 않을까,
라는, 말을 꼭 남말처럼 한번 해봅니다. ㅋㅋㅋㅋ (나는 그럴 수 있냐고. -_- ㅎㅎㅎㅎㅎㅎ)

Arch 2009-03-24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그래요. 여전히 좋은 사람 몇몇이 존재하고, 그 안에서 둥지를 트는 내가 있는거겠죠. 제가 좋아하는 분들은 개인적인 사정인지는 모르겠으나 간간히 글을 올리는 분들도 있는바, 역시 제가 중심을 잘 잡고 있어야겠다란 생각이 문득 또 드네요.온라인 관계라 지칭되는 관계들이 왜 그런지에 대해 심도있게 분석해서 다음에 페이퍼로 써보아요. (남 얘기처럼 말한다. 흐흐)

미잘님, 눈 나빠지는데. 난 자꾸 쉴라가 남같지가 않아져요.

조선인님, 서재를 알라딘이라고 한거예요. 알라딘에서 더 이상 책을 안 살 일은 없을 것 같고, 제겐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며 서로 뭔가를 주고받았다고 생각했던 공간인데 일테면 '부루투스 너마저!'이런 느낌? 비약인가요. 흐음.

웬디양님 자기말 맞아요^^ 민의 페이퍼가 뜸해지니 웬디양님을 어떻게 붙들어놓을지 궁리궁리.

hnine 2009-03-24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rch님, 알라딘을 많이 좋아하시나보다... 이 페이퍼를 읽으며 전 그 생각부터 드는걸요. 알라딘 사람들인가? ^^
이곳에 멋진 분들 꽤 있으시지요. 정이 떨어진다는 것은 떨어질 정이 있었다는 것이니까, 그것을 전제로 하고 한 질문이겠지요.
옥찌랑 민이, 잘 있지요? ^^

Arch 2009-03-24 19:42   좋아요 0 | URL
hnine님 오랜만이에요^^ 많이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질문에 답을 개떡으로 해놓은걸 보면서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아, 정말 내 맘은 뭘까란 생각이 들었었죠.

네, 잘 있죠. 웬디양님과 hnine님의 소소한 궁금증에 힘입어 옥찌들 페이퍼를 하나 물밑 작업할까 생각중이어요.
 


 그는 내게 몇개의 처음을 선물한 남자다. 추파춥스 한통이 얼마나 무거운지, 받을땐 꽃처럼 미소지을 수 있지만, 몇개월에 걸쳐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일은 얼마나 버거운지 알게한 남자이며, 나를 누군가에게 소개할 때 똑똑한 녀석이라고 했던 사람이며, 노을을 바라보며 밝았던 하늘이 이렇게 소리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자신도 그러면 어떨까에 대해 생각해본적이 있다고 말한 사람이며, 처음으로 마술같은 모항을 알려준 남자였다.


 그리고 그는 처음으로 내게 'NO'라고 말한 남자다.


 바래다준다며 차를 끌고 나온 그는, 잠옷 바람이었다. 잠옷을 보자 난 단박에 잠이 생각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책없이 무모했던지라

-같이 자고 싶어.

란 말을 내뱉었고 그는,

-다음에 같이 있자.

라고 말해줬다.

 피곤하다거나 귀찮음, 쿨한체 하거나 거절당한 내가 자동차에 머릴 찧어대며 거절당한 여인네 연기를 펼칠까 에둘러 건넨 'NO'가 아니었다. 그냥 담백하게 지금은 아니야.

난 그게 참 산뜻했다.

거절은 은밀하게 과즙이 배어나오는 자두 씨앗을 핥듯 입맛을 동하게 한다. 그게 꼭 지금 자지 말고 나중에 연애 비스무레한거 하면서 단계를 밟잔식이거나 지금은 꼴리지 않는단 원초적인 감각 때문은 아닐 것이다.

자야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긴 어렵다. 결국은 타이밍의 문제.

그때의 타이밍이 적확했음은 마술처럼 그가 내 맘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혹은 떠보거나, 행여나 피곤한데, 그럼에도 부리는 억지.

나보다 그가 더 내 마음에 닿아있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그때의 그 분위기가 나를 사로잡았지만, 그렇다고 명백하게 모든 상황에서 흡족한 행태를 보인건 아니었다. 무려 몇 번씩이나 잘거냐고 물으며 구질구질하게 몸을 비틀어댄적도 있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상황모면의 발작이었거나 그야말로 저질스러운 짓이었다란 후회가 들기도 한다.  

 가슴이 뛰고 싶다면, 섹스를 지루한 의식으로 처박지 않으려면 환상범벅 사랑 사탕을 조금 더 입안에서 굴리고 싶다면 지금 여기에서 좀 더 멀어질 것.


 존재의 품격은 적당한 외면에서 나온다. 예술계에 센세이셔널하게 데뷔했지만 체스에 빠져 지냈던 뒤샹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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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텔레비전을 안 본지 어언 몇주째, 실은 틈틈히 출발 비디오 여행과 심슨은 챙겨봤지만 넋놓고 TV를 들여다볼 시간이 없었다. 요리하랴, 빨래하랴, 고구마랑 스파티, 테이블야자 물주랴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즘의 TV는 너무 재미가 없다. 예능프로 속 그들이 안간힘을 내면서 웃기려고 들수록 나는 점점 냉담해졌고, 드라마는 오래전부터 안봤기 때문에 요새 뭐가 하고 뭐가 유행인지도 모른다. 예전에 그사세, 연애시대, 달콤한 나의 도시, 네멋대로해라, 삼순이 등등을 보면서 맘 졸이고 어쩔줄 몰라했던 드라마 폐인이 이렇게  돌아선데에는 다른 잔재미를 찾은 탓도 있지만, 드라마의 도식적인 구조에서 전혀 자극이나 신선함을 느낄 수 없는데다 내가 좋아했던 드라마들은 이제 시청률 어쩌고 하면서 만들기를 꺼려하는, 그래, 굳이 말을 안 보태도 되는 식상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백지영이 무릎팍에 나온걸 본 후에 내 글을 봤는데 맘이 짠해져서 막 술먹고 싶다란 생각이 들었다고 했을 때도 굳이 그녀가 나온 방송을 챙겨볼 생각을 안 했다. 강호동의 건강한 이미지는 좋지만 우악스럽고(나랑 너무도 비슷하게) 설정된 포맷대로 고만고만한 방송을 '생산'해내는게 그다지 맘에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뒹글대던 토요일 오후,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대며 환각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가 우연히, 그녀 방송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참 오랫동안 백지영이란 사람을 오해했구나란 생각에 나 역시 맘이 짠해졌다. 

 그녀에 대한 소문들은 잠시 접어둬야겠다. 그건 아무것도 확인된게 없으니까.  

 분명한 것은 그녀가 살아남았다는 것, 노래가 너무 하고 싶어서 자신의 삶을 포기할 수 없었다는 것에 있다.  

 몇년 전 섹스 스캔들이 일어났을 때 맨 처음 든 생각은 그걸 막아줄 배경이 없는 사람인가란 터무니없는 억측이었고, 왜 당당하지 못한건지, 자기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성인이 섹스하는게 죄가 되냐, 그걸 유포한 녀석이 문제다, 왜 울어, 바보같이. 보란듯이 더 잘 살아야지, 섹스하는 여성, 느끼는 여성, 잘하는 여성들에 씌워진 굴레들이 참 답답했고, 이 일을 계기로 그녀가 그런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길 바란 마음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대는 과도했고, 그녀가 연예인이란 고려도 없었다. 

 여성주의적 시각이나, 의식화되었다고해서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틀을 적용할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명백하게 자신의 잘못이 아니지만 모든 사람이 '섹스하는 자신의 얼굴'을 봤을테고, 그 시선에서 자유롭자면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는가. 만약에 그녀가 기자회견에서 내 잘못도 아닌 일로 내가 괴로워하고 싶지 않다, 법적 대응을 하겠다는 등등의 얘기를 했다면 어땠을까. 대중의 시선과 호감에 따라 노래를 계속 부르느냐 마냐의 갈림길에 서는 대중 가수가 그렇게 당차게 나갔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상황이 가능했을까? 아마도 잠시동안의 이슈는 됐을망정 지금의 자리까지 오려면 배로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힘들었는데 말이다. 뮤직비디오에서 몸을 비트는 것과 슬쩍슬쩍 속살을 보여주는 것으로 섹시함의 미덕을 자랑하는 가수들이 오락프로에 나와서는 '집안이 엄해요','여자가 담배피는건 좀 그렇지 않나요.''남자가 기가 빠지면 안 되잖아요.' 등등을 자연스럽게 내뱉는, 2009년인데도 여전한 뭔가 아귀가 안 맞는 상황이 진행중인데 그녀의 도발적인 눈빛이 그때 당시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까? 자기만 주장한다면 된다고? 휴, 가족들이며 자신이 노래하면서 설 수 있는 무대는? 난 그녀에게 너무 과도한 주문을 했었다. 

 단단과 정신력이 빵빵 박힌 자막 앞에서 그녀가 눈물을 보이고, 눈물을 닦은 후에는 다시 환하게 웃는다. 아버지의 사표를 반려한 직장 상사와 자신의 곁을 지켜준 남자친구에게 고마운 말을 전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뭔가를 자꾸 던지던 술취한 손님에게는 물을 갖다줬고, 이제는 20대의 막연한 두려움이 이미 한번 겪은 일로 조금은 괜찮다란 얘기를 해준다. 난 그녀에게 참 고맙고, 미안했다. 

 앵무새처럼 입을 움직여 노래하는 가수일 수도 있고, 성형수술로 가끔보면 얼굴이 일그러져보이기도하고, 대단한 삶의 내공으로 무릎팍 도사란 프로를 통해 확실한 이미지 메이킹을 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쉬쉬하는 소문의 당사자가 되어 그녀가 감내해야했을 고통과 침묵의 시간들, 9층 건물에서 여기라면 깨끗하게 죽을 수도 있었겠구나란 절망 속에서도 다시 살아온, 여전히 살아있는 그녀가 참 멋있다. 어느 늦은 오후에 텔레비전을 보며 그녀의 춤을 따라하기도 했던 녀석이 이제는 조용한 팬이 되어서 그녀를 응원할 것이다. 그녀가 성공해서가 아니라, 여전히 자기 삶을 긍정하고, 끊임없이 부풀어오르는 상채기를 조용히 보듬을 수 있는 사람이라, 아무렇지않게 말하는 기술이 아닌, 아무렇지않게 보이는 내공을 갖고 다시 우리 앞에 선, 이 여자의 삶을 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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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2 0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22 0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22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22 0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9-03-22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감동적인 글이네요. 백지영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런 글은 맘을 울리는군요.
어떤 스캔들이 터졌을때 무조건 비난하거나 매도하지 않으려고 침묵합니다.
사실과 진실의 경계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생각에~~

Arch 2009-03-22 23:48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 실은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으로 자꾸 발언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는 입장입니다. 물론 순오기님 말씀처럼 무조건적이어선 안 되겠지만.

뷰리풀말미잘 2009-03-23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백지영이 돋보이는 건 그녀를 둘러싼 더럽고 짜증나고 역겨운 것들을 딛고 결국 저 만큼 성장했다는 사실인 것 같아요. 어쨌든 저는 백지영에는 별 관심 없고, 백지영을 응원하는 아치님을 응원할랍니다. ^^

Arch 2009-03-23 12:29   좋아요 0 | URL
늘 이런식이야, 이런식^^
 

 먼저 블로그를 운영하는 입장에 대해서, 특히나 다른 곳이 아닌 알라딘에 둥지를 튼 이유에 대해서 밝혀야할 것 같다.  

 처음에는 단순히 '친해지고 싶어서'란 이유가 컸다. 요새 자꾸 친구해요, 친해지고 싶어요 타령을 해대는 것을 보니 잠시 산이라도 다녀와야할 것 같다. 아무튼, 평소에 난 책을 좋아하거나 남들과 다른 것에 대해 궁금해한다는 이유로 맥없이 '4차원'으로 규정되는 틀이 나만큼이나 엉뚱하단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몇년동안 곁눈질로 지켜본 알라딘에서는 다른 것이, 다른 무언가로 규정지어지는게 아닌, 정신적인 유희를 가능하게하는, 즐겁고 유쾌한 부딪힘이 되어가는 과정이란 것을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도 그들과 같이 고차원적인 유희까지는 아니어도 즐거움의 각질이라도 접하길 바라마지 않았다. 알라딘에 둥지를 틀며 나의 자원으로 과연 제대로 집을 지을 수 있을까, 우물 안 개구리처럼 좌우 사방팔방으로 헛스윙이나 날리지 않을까란 고민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친절한 알라디너들은 선뜻 아치, 시니에의 인사를 반갑게 받아주었다.  

 알라딘에 있으면서 너무나도 민망하고, 황송하게도 칭찬을 받기도 했고, 내가 지금껏 바라마지 않았던 소통의 형태는 이런게 아닐까란 흥분에 아주 많이 까불거리기도 했다. 애초의 '친해지고 싶다'란 것이 그저 형식적인 수준에서 머무르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그들의 손을 덥석 잡는 것에서 나아가 만나고, 얘기하고 내가 가진 얘기들과 그들이 가진 얘기들이 부딪히며 얽혀들어가는 것을 흥분하며 지켜보기도 했다. 글로는 이렇게 장황하지만 실제로는 아마 100분의 1도 다 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리뷰보다는 옥찌들의 얘기로 사람들과 가까워졌고, 옥찌들 얘기를 그만 쓰며 아치란 닉으로 바꾼 후부터는 아이를 매개로 이어지던 관계가 소원해지고 아치스트랄의 이야기를 가끔 접하는 사람들만이 서재에 드나들게 되었다. 

 댓글 마케팅이란, 이름만 산업적이지 꽤 따스한 정서의 소통이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괜한 조급함에 나도 댓글을 달아주고 다니며 인지도를 높이려고 낑낑댄게 사실이다. 흑, 비루함. 옥찌들 얘기가 아니어도 내 안에서 숨겨진 이야기들을 차근차근 풀어낼 수 있으련만 조급했고, 안달나 있었다. 차라리 미워하고, 맘에 안 드는게 낫지, 잊혀지는건 두렵다란 생각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일을 하면서 글을 제대로 읽고 댓글을 달고, 그것도 유의미한 댓글을 다는 일이 보통이 아니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별로 달지도 않은 주제에) 그러면서 가끔 내 글에 달린 댓글들의 진정성이 의심되었다. 전에 글에도 쓴적이 있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닌데 갑자기 몇가지 단어로만 축출이 가능한 댓글을 볼때면 좀 더 깊게 의심이 들기도 했다. 실은 댓글 자체가 소통보다는 상부상조, 품앗이 같은게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다. 거기에서부터 내가 정말 의견을 보태고 싶거나 해줄 말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댓글 안 달리 페이퍼가 안쓰럽거나(내 서재에서 왕왕 발생하는)  이 알라디너가 전에 나한테 댓글을 달아줬기 때문에 예의상 품을 보태준다거나, 다음에 쓸 나의 글의 댓글을 미리 저축하는 심정은 아닐까란 것까지 발전했다. 아, 이 진화의 속도란.(알겠지만, 진화는 나아진단 의미가 아니다.) 품앗이와는 무관하게, 서로가 댓글을 달아주는 빈도의 격차가 크다면 분명 댓글을 많이 단 축은 서운하겠다란 생각까지 미치자, 게다가 그즈음 적막하기 이를데없는 아치의 서재에 댓글마저 안 달리자 의혹과 복잡함이 최고조로 도달해 댓글을 달 수 없게하는데까지 이르고 말았다. 

 직접적인 계기는 변방에서 누군가의 한떨기 댓글을 기다리는 Arch스러운 비참함이 주효했지만. 

 애초에 내가 이곳에 문을 연 계기를 생각하자, 늘상 모자란 구석이 있긴 했지만 이번엔 그 강도가 더했다란데까지 생각이 미치고야 말았다. 친해지고 싶다고 했으면서 혼자 괜히 이러는건 또 뭔가. 일기를 쓰는게 낫지, 대로변에서 홀딱 벗고있는데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아 더욱 민망해지는 경우랄까.  

 다시 댓글을 열고, 이것저것 생각지 말고 그저 나와 닿으려는 누군가와, 내가 닿고 싶은 누군가의 이야기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예의를 차리면서 복잡하고 번잡하게 하지도 않고, 친해지는 것을 넘어서,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얘기하고, 가려운 등짝을 같이 긁어주는 것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역시 욕심이었던거다. 자기는 그만큼 하지도 않으면서 상대에게 바란, 그러면서도 남들만큼은 해보고 싶은 정말, 옥찌만도 못한 욕심이었던거다.  물론 이런 얘기가 처음으로 나온건 아니다. 전에 서재의 성격 어쩌고 하면서도 칭얼댔으니. 서재 이미지도 너무 괴팍하고 좀스러워 다른 느낌을 주고 싶다란 생각도 들어 뿌옇고 뭐가 뭔지 구분 안 되는 사진을 물색 중이다. 이런, 또 욕심을 부린다. 욕심은 나의 힘? 서재 타이틀이라도 바꿔야할까.

 욕심꾸러기 Arch는 오늘 루이보스차를 마시면서 부지런히 페이퍼를 쓰거나, 일기를 쓰거나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려합니다. 할매꽃 후기는 끙끙대며 다 썼고, 시뮬라시옹 숙제는 아아, 맞다. 페이퍼는 보류, 일기는 자기 전에. 책을 얼른 읽지는 못하겠으나 부지런히 읽어야지.

식후 30분 후부터 정자세로 앉아 시뮬라시옹을 읽어야겠다. 모처럼 한가한 토요일인데, 앗흥.  

 점심 잘 먹고, 내일 비온다니까 봄냄새가 물씬 풍기는 오늘은 휘적휘적 외출이라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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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3-21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응!! 오늘 날씨 진짜 끝내줘요! 자켓을 벗고 나올걸 괜히 입고 나와서 들고다니느라 거추장스러워요. 팔랑팔랑, 원피스 입고 외출했어요. 공연 하나 보러 나와서는 기다리는 중예요.

봄냄새가 물씬 풍기는 오늘, Arch 님은 휘적휘적 외출중인가요?

Arch 2009-03-21 23:33   좋아요 0 | URL
원피스는 역시 팔랑팔랑이죠. 아, 원피스 입고 막 휙휙 날아다니고 싶다. 전 단잠 자고, 뭐를 해먹고, 방도 치우고 그랬죠. 남들 가슴에 봄바람만 집어넣고 전 방콕했어요. 히^^

가시장미 2009-03-22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가는 부분이 많은 글이네요. ^^
눈팅만 하려고 왔다가 너무 공감이 되어서 댓글을 남겨요.
저처럼 요즘 댓글 달 시간도 없는 사람은 솔직히 페이퍼를 올리면서도 늘 미안하죠.
제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다른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에는 귀기울이지 못 하는 것 같아서요.
근데..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제 글에 댓글 남겨준 사람에게는 답글을 남기려고 노력하는데..
그런 과정에서 서로 뭔가를 주고 받고 있다는 게.. 가끔은 의심스럽기도 해요.
그런데 꼭 말이 아니라도 와 닿는 뭔가가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되더라구요.
오랜 시간 이 곳에 머물다 보니 몇몇 사람들과는 진심이 오가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아요.
그게 착각일 지도 모르지만요. 착각이라도.. 뭐 유쾌한 일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지내죠. 으흐

Arch 2009-03-22 00:38   좋아요 0 | URL
눈팅족이로군요. ^^
미안함도, 빚진 것 같은 느낌도, 조금 덜어놨으면 좋겠어요.
또 고백하자면, 전 제가 댓글 남겼는데 별다른 반응이 없으면 같이 나누고 싶은 얘기가 있어도 조용히 눈으로만 훑고 건너뛴적이 있었어요. 제 친구의 전문용어를 빌리자면, 좀 추접해지는 상황인거죠.
그래서 중요한 것, 원하는 것, 가장 강하게 끌리는 것에 방점을 찍어두려고요.
가시장미님 말처럼 저도, 진심으로 맘이 오간다란 느낌을, 역시 나 홀로 착각일 수 있겠지만, 갖고 가려구요. 다른 사람을 배제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말이죠.
실은 이 글 쓰고 누군가 댓글로 저를 몰아대는 꿈을 꿔선, 원. 낮잠은 좀 위험해요.

웽스북스 2009-03-24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다시 아치님이 댓글기능 열어놔서 좋은걸요 ^-^ 가끔 달고 싶었다고요.
그리고, 옥찌와 지민 소식도 궁금한 1인. 헤헤헤. (마케팅에 제대로 낚인건가 ㅋㅋㅋㅋㅋ)

Arch 2009-03-24 17:40   좋아요 0 | URL
^^*! *<--이건 드물게 붙여주는거 알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