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게임의 묘미는 별거 아닌 질문에도 뜸을 들이기가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벌칙과 진실을 말하는 것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며 지켜보는 눈들을 감질나게 하면서, 질문자체가 그다지 파격적이지 않음을 사람들이 깨닫고 눈을 돌리기 전에는 말을 해주는 센스 말이다.
진실게임 시뮬라시옹일 수도 있겠으나 사람들은 진실게임을 통해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적당한 재치와 살짝살짝 분위기를 데쳐주는 거짓말, 리듬을 타는 용어사용과 과장되지 않으나 조금 민망해하는 표정을 구사해줘야 '게임'으로서의 진실게임은 모두를 만족시킨다. 그런면에서 곧이곧대로 진실을 말하거나(나처럼) 요령있게 넘길줄 모르거나 부득불 어떤 주제의 질문에서는 자포자기해버려 딜을 못하는 사람은 '게임'의 재미뿐 아니라 진실을 알기보다는 진실인척하는 얘기들 속에서 빛을 바래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게임이 아닌 형태에서의 진실은 유효할까.
취중진담은 숨겨진 맘을 들어내게 하는데 효과적이나 악용하는 사례와 술먹고 개되는 상황들이 속출하니 제쳐두고, '사실은'. '진짜로', '정말'을 빈번하게 쓰는 언어습관을 가진이의 경우, 거짓말로 의심을 받아본적이 있거나 말하는 자신도 본인의 말에 굳이 부사를 붙여야 안심이 되는 경우로 볼 수 있겠지. 연인 사이에선 바람을 피웠는지의 여부, 정치인들 사이에선 팩트 놀음으로 전락해버린 진실의 실체, 장사꾼의 거짓말, 언론에서 기사의 배치와 사실보도란 함정, 결혼 안 한다는건 3대 거짓말 중의 하나라는 것 등등.
취중진담의 아류라고 할 수 있는 KTF의 부가서비스 중 콜중진담이란게 있다. 전화통화를 하면서 이 기능을 켜놓으면 상대방 억양의 고저, 머뭇거림 등을 체크해 평소와 다를 경우를 선별, 거짓말을 판단한다고 한다. 실효성이나 그렇게까지 해야할 정도면 차라리 믿지 않는게 낫지 않을까란 것은 둘째치고, 그게 과연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다시 진실게임으로 돌아가보면, 어제 어쩌다가 진실게임을 하게 되었는데 난 내가 이런 게임을 굉장히 만만하게 본다고 서슴없이 지껄였었다. 난년이예요까지는 아니고, 숨기거나 꺼려지는게 없을 수도 있고, 물타기나 분위기 맞추는게 재능이 없으니 이실직고 말하는 것 밖에 수가 없단 고백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질문들이 이상했다. 허를 찔렸다고 할까.
'알라딘에 정이 떨어져도 남고 싶게 만들 정도로 믿는 사람이 누구예요', '알라딘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예요.' 주위에선 왜 그런걸 물어서 질문을 낭비하냐는 분위기였지만, 난 난감해지고 말았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라고 해야할지, 머릿 속에서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사람을 얘기해야할지, 아니면 한참 고민하는척 하다가 향후 별 문제가 없을만한 이성을 언급했어야할지(다분히 작위적으로) 답이 안 나왔다. 잠시 머뭇거리다 믿는 사람은 없고,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누구라고 말을 했다.
순간, 멍텅구리같은 대답이란 생각이 떠올랐다. 누구도 믿지 않는다는 말이 가져다준 진실이 섬뜩하기도 했고, 이러니저러니해도 내 껍데기는 여전히 단단하게 날 둘러싸고 있다란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모두에게 열려있고, 당신을 알고 싶어요, 세상은 봄날처럼 싱그러운 순간들로 이뤄져있다라며 어쩔줄 모르겠는 언어를 쓰던 내가, 진실을 말하지 말아야할 시점에서 '어쩌면 진실'을 발설해버린 것만 같았다.
서재가 내 삶의 중심도 아니고, 발을 동동 굴리며 서재만 바라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아니라고 믿고 싶은건지도.- 글을 쓰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지켜보고는 있지만 이건 전에 라주미힌님이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 로그인을 하지 않으면 서로간에는 불통이 되어버린다.
요점이 불통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인지, 으레 그렇듯이 '아무도 믿지않아.'모드인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말들은 진실이었다고 생각하는건 위악의 증거인지, 당혹스러우면 아무거나 튀어나오는 습관탓인지도 여전히 모르겠다. 조금 선명해지는건 아무도 믿지 않는다고 말할 때 꽤 겁이 났고, 감당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 그 느낌에서 시작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불편한 진실, 진실게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