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을 안 본지 어언 몇주째, 실은 틈틈히 출발 비디오 여행과 심슨은 챙겨봤지만 넋놓고 TV를 들여다볼 시간이 없었다. 요리하랴, 빨래하랴, 고구마랑 스파티, 테이블야자 물주랴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즘의 TV는 너무 재미가 없다. 예능프로 속 그들이 안간힘을 내면서 웃기려고 들수록 나는 점점 냉담해졌고, 드라마는 오래전부터 안봤기 때문에 요새 뭐가 하고 뭐가 유행인지도 모른다. 예전에 그사세, 연애시대, 달콤한 나의 도시, 네멋대로해라, 삼순이 등등을 보면서 맘 졸이고 어쩔줄 몰라했던 드라마 폐인이 이렇게  돌아선데에는 다른 잔재미를 찾은 탓도 있지만, 드라마의 도식적인 구조에서 전혀 자극이나 신선함을 느낄 수 없는데다 내가 좋아했던 드라마들은 이제 시청률 어쩌고 하면서 만들기를 꺼려하는, 그래, 굳이 말을 안 보태도 되는 식상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백지영이 무릎팍에 나온걸 본 후에 내 글을 봤는데 맘이 짠해져서 막 술먹고 싶다란 생각이 들었다고 했을 때도 굳이 그녀가 나온 방송을 챙겨볼 생각을 안 했다. 강호동의 건강한 이미지는 좋지만 우악스럽고(나랑 너무도 비슷하게) 설정된 포맷대로 고만고만한 방송을 '생산'해내는게 그다지 맘에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뒹글대던 토요일 오후,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대며 환각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가 우연히, 그녀 방송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참 오랫동안 백지영이란 사람을 오해했구나란 생각에 나 역시 맘이 짠해졌다. 

 그녀에 대한 소문들은 잠시 접어둬야겠다. 그건 아무것도 확인된게 없으니까.  

 분명한 것은 그녀가 살아남았다는 것, 노래가 너무 하고 싶어서 자신의 삶을 포기할 수 없었다는 것에 있다.  

 몇년 전 섹스 스캔들이 일어났을 때 맨 처음 든 생각은 그걸 막아줄 배경이 없는 사람인가란 터무니없는 억측이었고, 왜 당당하지 못한건지, 자기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성인이 섹스하는게 죄가 되냐, 그걸 유포한 녀석이 문제다, 왜 울어, 바보같이. 보란듯이 더 잘 살아야지, 섹스하는 여성, 느끼는 여성, 잘하는 여성들에 씌워진 굴레들이 참 답답했고, 이 일을 계기로 그녀가 그런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길 바란 마음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대는 과도했고, 그녀가 연예인이란 고려도 없었다. 

 여성주의적 시각이나, 의식화되었다고해서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틀을 적용할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명백하게 자신의 잘못이 아니지만 모든 사람이 '섹스하는 자신의 얼굴'을 봤을테고, 그 시선에서 자유롭자면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는가. 만약에 그녀가 기자회견에서 내 잘못도 아닌 일로 내가 괴로워하고 싶지 않다, 법적 대응을 하겠다는 등등의 얘기를 했다면 어땠을까. 대중의 시선과 호감에 따라 노래를 계속 부르느냐 마냐의 갈림길에 서는 대중 가수가 그렇게 당차게 나갔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상황이 가능했을까? 아마도 잠시동안의 이슈는 됐을망정 지금의 자리까지 오려면 배로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힘들었는데 말이다. 뮤직비디오에서 몸을 비트는 것과 슬쩍슬쩍 속살을 보여주는 것으로 섹시함의 미덕을 자랑하는 가수들이 오락프로에 나와서는 '집안이 엄해요','여자가 담배피는건 좀 그렇지 않나요.''남자가 기가 빠지면 안 되잖아요.' 등등을 자연스럽게 내뱉는, 2009년인데도 여전한 뭔가 아귀가 안 맞는 상황이 진행중인데 그녀의 도발적인 눈빛이 그때 당시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까? 자기만 주장한다면 된다고? 휴, 가족들이며 자신이 노래하면서 설 수 있는 무대는? 난 그녀에게 너무 과도한 주문을 했었다. 

 단단과 정신력이 빵빵 박힌 자막 앞에서 그녀가 눈물을 보이고, 눈물을 닦은 후에는 다시 환하게 웃는다. 아버지의 사표를 반려한 직장 상사와 자신의 곁을 지켜준 남자친구에게 고마운 말을 전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뭔가를 자꾸 던지던 술취한 손님에게는 물을 갖다줬고, 이제는 20대의 막연한 두려움이 이미 한번 겪은 일로 조금은 괜찮다란 얘기를 해준다. 난 그녀에게 참 고맙고, 미안했다. 

 앵무새처럼 입을 움직여 노래하는 가수일 수도 있고, 성형수술로 가끔보면 얼굴이 일그러져보이기도하고, 대단한 삶의 내공으로 무릎팍 도사란 프로를 통해 확실한 이미지 메이킹을 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쉬쉬하는 소문의 당사자가 되어 그녀가 감내해야했을 고통과 침묵의 시간들, 9층 건물에서 여기라면 깨끗하게 죽을 수도 있었겠구나란 절망 속에서도 다시 살아온, 여전히 살아있는 그녀가 참 멋있다. 어느 늦은 오후에 텔레비전을 보며 그녀의 춤을 따라하기도 했던 녀석이 이제는 조용한 팬이 되어서 그녀를 응원할 것이다. 그녀가 성공해서가 아니라, 여전히 자기 삶을 긍정하고, 끊임없이 부풀어오르는 상채기를 조용히 보듬을 수 있는 사람이라, 아무렇지않게 말하는 기술이 아닌, 아무렇지않게 보이는 내공을 갖고 다시 우리 앞에 선, 이 여자의 삶을 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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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2 0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22 0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22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22 0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9-03-22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감동적인 글이네요. 백지영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런 글은 맘을 울리는군요.
어떤 스캔들이 터졌을때 무조건 비난하거나 매도하지 않으려고 침묵합니다.
사실과 진실의 경계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생각에~~

Arch 2009-03-22 23:48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 실은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으로 자꾸 발언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는 입장입니다. 물론 순오기님 말씀처럼 무조건적이어선 안 되겠지만.

뷰리풀말미잘 2009-03-23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백지영이 돋보이는 건 그녀를 둘러싼 더럽고 짜증나고 역겨운 것들을 딛고 결국 저 만큼 성장했다는 사실인 것 같아요. 어쨌든 저는 백지영에는 별 관심 없고, 백지영을 응원하는 아치님을 응원할랍니다. ^^

Arch 2009-03-23 12:29   좋아요 0 | URL
늘 이런식이야, 이런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