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집안 사정과 재정에 이르기까지의 광범위한 내용을 약 1분여만에 다 나누고 옥찌와 통화를 했다. 어렸던 옥찌는 몰라 몰라 하면서 전화를 끊어버리기 일쑤였는데 이젠 좀 컸다고 아주 살살 녹는 전화 통화 매너를 보여준다. 

 이제 내려가서 옥찌랑 살거라고 하니까 계속계속 사는 거냐고 물어본다. 그렇다고 하니까 팔짝팔짝 뛰면서 좋아하는 리액션은 TV용이고, 옥찌는 그러냐는 말만 남겼다. 이모랑 놀거 생각하라니까 방에서 씽씽카 타도 된다는 얘기를 한다. 그래서 이모랑 같이 씽씽카 타는거냐고 물어보니 아무말도 안 한다. 그렇게 보려는게 아닌데도 아이들이랑 통화할 때는 꼭 에프라임 키숀의 '개를 위한 스테이크'가 떠오른다. 에프라임 키숀이 해외에서 집에 전화를 하는데 아이들은 통화료는 아랑곳도 안 하고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한다. 누가 아파서 안 나왔고, 누구누구는 무슨 일이 했다는둥, 그것도 한참 뜸을 들여 얘기를 해서 에프라임 키숀은 전화 통화하다 식은땀이 난다고까지 했다. 옥찌도 내가 뭔가를 물어보면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응이라고 말꼬리를 늘린 후, 그런데로 시작하는 엉뚱한 소리를 한다. 이모의 예리한 눈이 안 보이니 말할 맛이 안 나는걸까?(그건 니 생각이고!) 

 한참 동안 통화를 하다 옥찌가 흥분된 목소리로 오늘 숙제를 안 해도 된다는 얘기를 한다. 왜냐고 물었더니 계속 숙제 안 해도 된다고 해서 그런가보다하고 말았는데 한참 후에야 미술 학원에서 숙제를 했기 때문이란 답을 들려줬다. 당연한거 아냐, 옥찌. 숙제를 했으니까 안 해도 되는거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옥찌에게 당연한게 어디 있어. 옥찌가 숙제를 안 해도 되는거면 그런거야.  

 지희가 할말이 없는지 민을 바꿔주는데, 이 녀석은 큰 이모야? 라고 물은 후 끊을게, 하고선 전화를 끊어버렸다. 민, 친해지길 바래. 

 그래, 난 집에 가서 살거다. 

 언니네 이발관이 아니었어도 알고 있었다. 난 정말 보통 사람일 뿐이란 것을. 보통 사람이니까 모두가 서울로 몰리는건 문제라면서도 서울에 붙어 있었고, 선택의 문제가 아닌 경제력을 굳이 선택인양 믿고 버텼으며, 고향엔 젊은 총각이 없어서 내려가기 싫다는 핑계를 익살맞게 이마에 쓰고 다녔다. 보통 사람인 나는 동생이 느끼는 양육의 부담을 나몰라라 했으며, 기껏 날개짓을 해놓고서도 날개가 부실해서 얼마 날지 못했다며, 정말 하고 싶었던건 이게 아니라며, 악착같이 버티지 못했다.  

 보통의 존재인 나는, 이제 고향에서 살 것이다. 현실도피도 아니고, 낙오된 것도 아니다. 내가 발 붙이고 있는 곳은 어디든 현실이니까. 더 나은 희망이나 화목한 가정 운운은 정말 아니다. 전화 통화 대신 보드라운 손을 만지며 옥찌들과 대화하고 싶고, 옥찌들이 좀 더 힘을 낼 수 있을 때까지 옆에 있어주고 싶고, 근근히 살아가는 것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 그게 다다. 생각해보면 더 나올지도 모르고 계속 양쪽에서 우왕좌왕할게 분명하지만 아직은 괜찮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자평하는거라면 씁쓸하지만 그게 딱 아치인걸 어떡하겠나.  

 직장도 잡고, 주말이면 옥찌들이랑 산과 들로 쏘다닐거다. 그러고보니 우린 아직 동물원도 같이 못가본 사이잖아. 풍문으론 전주 동물원에는 코없는 코끼리가 있다는데 진상 확인겸 따스한 날에 오지명 애기들이랑 소풍을 가야겠다. 덥기 전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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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9-05-19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옥찌들 얘기가 더 자주 올라오겠군요? ^^
<개를 위한 스테이크>중의 저 부분, 생각나요 ㅋㅋ

Arch 2009-05-19 17:06   좋아요 0 | URL
글쎄요. 장담은 금물인지라.^^ 저는 스테이크 포장보다 저 부분이 더 웃겼어요.
 

 차가운 사케를 야금야금 먹었다. 그와는 두번째 만남이다. 그는 첫번째 만남에서 여자친구가 있다고 밝혔고, 굳이 물어보지도 않은 직장 얘기를 했으며, 술을 핑계로 사는게 퍽퍽하단 푸념을 늘어놨던 사람이었다. 

 가끔씩 올리던 그의 글이 사랑스러워 내가 덥석 만나자고 해서 우린 만났고, 거의 일년만에 두번째 만남을 갖았다. 다시 만나자며 약속을 잡고 약속 장소에 나갈때까지도 조금은 반신반의했다. 처음 보자고 했을때보다 더. 처음에야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은 어떨까란 호기심과 적어도 내가 죄다 쪽쪽 빨아먹은 글로만 이야기를 해도 몇시간은 떠들 수 있을 것 같다란 자신감이 있었으니까. 게다가 일테면 난 '의문의 여인'이었다. 

 물론 처음 만남에도 고비는 있었다. 바쁘다며 자꾸 튕기는 이 사람의 번호를 간신히 받아내 전화를 걸었을 때 목소리가 너무 좋은게 아닌가. 목소리가 좋으면 얼굴이 별로일텐데, 아니 얼굴은 왜, 여자친구가 있는 양반이라고! 아니 그래도 혹시, 혹시 뭐! 아니 그래도. 이런식이었다가 먼 발치에서 본 그의 모습에 후다닥 도망가고 싶어서 혼이 나기도 했고, 가까이서 보니 전화 목소리가 연상되면서 글의 면면이 떠올라 괜히 피식거리며 웃게 만들던 사람. 그렇게 나쁘지도 그렇게 좋지도 않은 고만고만한 사람이었다.

 첫만남은 쉽다. 

 의욕의 비중에 호기심이 충만하면 의기양양하게 덤빌 힘이 생긴다. 하지만 두번째부터는 어려워진다. 한번 만나서 모든걸 알 수 있는건 아니지만 대체적인 호기심의 영역은 채워졌고, 이제부터는 계속 봐야할, 계속 보고  싶어지는 서로간의 매력을 찾아야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느끼하거나 속내가 빤히 보이는 눈을 깜빡거렸고, 때로는 관계설정의 맥락을 맘대로 타고 넘어서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곤혹스러움에서 끝나는 경우라면 정리하기 쉽지만 앞서 말한 그처럼 딱히 호불호가 결정되지 않은 상대와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이렇게 말하는걸 보면 관계의 주도권은 내가 쥐고 있다고 볼 수 있겠지만 결국 관계는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그들의 반응과 생각에 따라서 내 선택의 범위는 바뀔 수 있다. 

 어쩌면 전에 말했던 것처럼 51과 49의 얘기가 다인지도 모르겠다. 맹렬한 것과 소극적인 것, 유보적인 것과 쟁취하게 만드는 사안에 이르기까지. 절대적인건 없고, 계속 뱅글뱅글 도는 사람의 마음만 있을 뿐이다.  

 앞서 말한 그 사람과 다시는 안 볼 것 같다. 우린 서로를 의욕하는게 49밖에 안 되는데다 난 이미 그가 갖고 있는 기표의 깊은 속내를 봐버렸으니까. 어쩌면 49에서 가까스로 50을 채우는 힘은 알듯 모를듯 감질나게하는 기술이 다일지도. 그는 내 눈에 띌 정도로 기술이 부족했고, 난 나대로 그의 기술을 눈감아 줄 정도로 그가 좋지 않았다. 혹은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막막한 느낌의 부재일지도.  

 두번째 만나서 더 좋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욕심쟁이 아치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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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5-05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님께서 이렇듯 누군가 낯선이를 만나고 온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조금쯤 더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아치님께서 만난 분을 저는 만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치님 글 속에서는 반짝반짝 빛나던 사람이 제 앞에서는 그 빛을 모두 잃을까봐.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반드시 한가지 방향만 있는건 아닌데, 제 앞에서 그 빛이 다 사라지면 몹시 서운할 것 같아 아치님께 빛났던 사람은 만나고 싶지 않아져요. 그리고 저는 빛이 나고 싶고요.

써놓고 나니 문득, 이 문장들이 이해 가능한 문장인가 의심스러워지네요.

Arch 2009-05-05 20:06   좋아요 0 | URL
저만큼 미친 문장도 아닌데요, 뭘. ^^

음... 그래서 내가 익명으로 올리잖아. 다락방님이 비교 못하게. 몰랐어요? 히히
제가 다분히 미화시켜서 그런걸 수도 있고, 정말 그 분들이 '빛 맛 좀 볼래'하는 맘으로 저를 대하셔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다락방님도 다 보고, 느끼고 아시면서!

페이퍼 쓰는 다락방님한테선 빛이 나요. 요새 안 쓰대~^^
 

 지난번,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한줄도 안 하고 헌책방과 색채심리사를 가장한 도인의 얘기만 했구나. 어흑!   

 그러니까 홍대역 입구에서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떼기 시장처럼 인도엔 '기다리는 사람들'이 천지에 널려 있었고, 그 중 하나로 별 특색없이 있으면 그 사람이 나를 못알아볼까봐 글자가 촘촘하게 씌어진 책을 보다가 그 사람은 어떻게 생겼을까란 상상에 웃음 짓다가 혹여 그 순간,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오면 저물녘의 하늘을 보면서 실실 새는 웃음을 흘리는 사람이 나라며 한번 찾아보란 얘기를 해서 처음보는 사람을 반쯤 넋나가게 만드는 재능을 좀 보일까 싶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벨이 울렸다. 그리고 단번에 그 사람을 알아봤다. 

 오호, 당신이군요. 당신이야. 얼굴을 알아봤다기보다는 그 사람의 소도구와 느낌을, 두리번거리는 시선과 기다리는 사람이 풍기는 이제 막 도착한 냄새로 그 사람인줄 단박에 알아봤다. 말끝을 살짝 늘리는 어투와 감기로 인한 콧소리, 나와 쌍인 보라색, 보라색. 그 사람과 홍대 골목을 걷기 시작했다. 해가 다 지기 전의 하늘이 좋다는 그 사람 옆에서 우리 만남은 즐거울까, 신날까, 등등의 생각을 하다가 그만, '그런데 이제, 무슨 얘기를 하지?'에 이르자 약간 난감하기도 했지만, 음식이 눈 앞에 있으면 문제없을거란 생각에 잠시 안도했다. 

 고깃집에서 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리며 그 사람에게 색채심리사 어쩌고의 얘기를 곁들여 어딘가로 끌려가 덤탱이 씌우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나 덤탱이의 대부분을 도맡고 있는 아치란 사람의 얘기를 들려줬다. 그 사람은 아주 착하고 좋은이라 궁상과 어거지티가 조금씩 배어나오는 이야기들 꼭꼭 씹으며 들어줬다. 그리고 자기 얘기도 해줬다. 그 사람 얘기의 많은 부분들은 요즘 눈뜨면 술인 내 생활로 인해 잘 기억은 안 나지만, 풋풋하고 재미있었다. 으음, 당신은 그렇게 살고 있군요. 당신이 골목을 돌아다니는걸 좋아하는 것만큼 나도 그래요, 등등. 

 난 주도면밀한 아치인지라 우리가 만나기 전에 그 사람에 대한 사전조사를 한답시고 서재를 들었다 놓았다, 긁적긁적 뒤적인적이 있다. 그때, 좀 아차 싶었던게 있었다. 그러니까 우린 너무 다르고, 다른 차원의 사람이었다는거다. 우리는 책을 읽는 분야가 달랐고, 그 사람의 말대로 난 너무 진지하고 골타분(골의 파생어)했으나 그 사람은 간단명료한데다 직관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무엇을 걸치고, 어디에 가고, 무엇을 먹으며,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 어느 곳을 여행했고, 한달 수입은 얼마인지까지. 따지고보면 우리를 나누고 차곡차곡 분류할 수 있는 범주들은 셀 수 없이 많이 있다. 그래서 아차 싶었던거다. 과연 다름에서 부딪히는 경쾌음이 아니라 불협화음 내지는 이해불능의 상태로 치닫으면 어쩌나 싶은 우려도 있었다. 혹은 습관적인 뒷방 노인네적인 오바센스일지도 모르고. 

 맛있는 삼겹살을 꿀꺽꿀꺽, 우적우적, 야금야금 다 먹어치울때쯤이었나. 이 사람은 자신이 여행했던 얘기를 들려줬고, 난 그만 조금쯤은 반하고 말았다. 여행이란 것에서 내가 갖고 있던 생각. 일테면 중국에 갔다와서 어쨌냐고 물었더니 '크다'란게 다인 아이에게서 느낀 당혹스러움에서 비껴난 지점에 이 사람의 여행기가 있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분류나 범주의 의미는 하나가 통하는 순간, 정말 굉장히 하찮고 부질없게 느껴지는 것들이니까. '타인의 취향'이 마지막 장면이 좋았던 몇 안 되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그 영화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는건 바로 그 취향이란게 알고보면 의미없는 수사에 불과하단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얼마만큼 서로에게 집중하는지, 어느 정도로 나와 같은 혹은 다른 감각으로 살아가는지, 얼마나 각자의 삶을 충실하게 꾸려나가는지가 중요한거고, 그런 면에서 이 사람은 별다른 무리없이 나와 통했다. 

  홍대에서 아는 장소 중 하나인 민속주점에선 계속 김광석의 노래가 나온다. 누룽지 막걸리가 너무 맛있다며 입맛을 다시며 난 참 오랜만에 달게 취했다. 알딸딸해서 기분이 좋아지고 있는데 서른 즈음이 나왔다. 형이란 호칭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호칭에서 비롯되는 관계맺음의 통속스러움을 모르는건 아니지만 김광석에게는 왠지 광석이 형이라고 불러야할 것 같다. 공동경비구역JSA에서 송광호가 '김광석은 왜 이렇게 빨리 죽은거야.'라고 했다면 대사빨이 안 살았을 것처럼.  

 그래, 광석이 형의 '서른 즈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사가 어느 때보다 맘에 박혀서 빠지질 않는다. 누군가는 서른 즈음에 넥타이를 메고 사는 삶은 너무 무거워서 그때까지 살고 싶지 않다란 얘기를 했고, 다른 누군가는 서른보다는 서른 하나가 더 견디기 힘든 순간이란 얘기를 했는데. 서른이란 결국은 인생의 분기점 문제가 아니라 살아가는 것, 살아지는 것의 얘기란 것을, 그날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안녕, 당신. 잘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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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4 0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04 0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끔 보면 제목만 그럴듯 할 때가 많은데 오늘 역시 그 우려, 만만치 않다. 

 일도 제끼고, 꾸물거리는 굼뱅이처럼 침대 위에서 자세만 바꾸며 텔레비전을 시청하길 어언 4시간째. 머리도 무거워지고, 배도 고프고-배는 늘 고프다.-, 어깨가 결려서 분연히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때는 오후 4시. 한창 달아오른 해가 이제 돌아갈 때를 알아채곤 따스한 기운을 대지 위에 드리우고 있을만한 시간. 세수를 안 했지만 뒹굴대다가 떨어졌는지 눈꼽 하나 남지 않은 얼굴을 쓱 거울에 비춰보고선 밖으로 나갔다. 밖은 생각보다 더 기분좋게 따스했고, 사람들의 옷차림은 봄을 지나 여름이 왔다며 속살을 남김없이 보여주는 스타일인지라 달랑 손 밖에 노출 안 된 내 차림새가 쑥쓰럽기까지 했다.  

 밖에 나온 목적은 장보기였지만 부리나케 장만 보고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제일기획 앞에서 이태원 역을 지나 우체국까지 쭉쭉 걸었다. 테라스에서 해를 쬐는 사람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새에서 서로 놓칠새라 손을 꼭 잡고 잇는 연인들, 벤치에 누워 사람들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집없는 사람들, 이곳의 비둘기는 날개짓을 할 때 평화와 자유의 각질이라도 떨어뜨리는지 그들의 날개짓마저 멋져보였다. 그러니까 난 일요일, 아니 일요일이 아니어도 몸에서 자연 산화반응이 생길 정도로 해를 쬐고 싶은 날에 당신들에게 이태원으로 여행 올 것을 얘기하는거다.

 여기에서 살게 된데는 직장이 근방이란 이유가 다였지만 살면 살수록 이곳이 가져다주는 활력에 도취되고, 이곳이 심어주는 신선한 날것의 냄새들로 흥분된다. 다른것이 불러일으키는 불균형함은 어긋나는 패턴들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어슷썰기가 쭉 이어지면 일정한 패턴이 되듯이 다양한 사람들이 뭉쳐있는 곳만으로도 그럴듯한 무늬가 그려지는데 이태원이 바로 그렇다. 

 케밥을 만드는 터키 아저씨들은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도 서두르는 기색없이 농담을 하면서 일을 하고, 마마처럼 보이는 두 여인은 우아하게 프린트 된 원피스를 입고 걸으면서 나로선 하나도 못알아들을만한 억양 센 영어를 구사하고, 가족끼리 나와서 나처럼 길 양쪽 끝을 그저 천천히 걷기만 하는 사람들도 있고, 알록달록한 팔찌들을 늘여놓고 파는 세네갈에서 온 처녀는 연신 예쁘단 소리를 하며 언니들 기분을 좋게 하고, 큼지막한 가방을 들고 걷는 여행객들, 사우나 앞에서 진을 치는 일본 사람들까지. 거리는 혼잡했지만 적당히 자신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을만큼만 복잡했으며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선언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많은 것들로 인해 활기가 넘쳐났다.  

 터무니없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맛도 별로 없는 음식점에 지나치게 상업화된 이태원의 색깔에 유감이 없는건 아니다. 하지만 모퉁이만 돌아서면 누구든 몇천원으로 멕시코 뷔페를 양껏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있고, 자기들끼리 신나게 얘기하다가도 눈만 마주치면 'hey pink'어쩌고 하는 느끼한 남미계 총각들이 있으며, 새침한척 책을 읽지만 누군가 다가가서 말이라도 걸면 금세 얼굴 가득 웃음을 띄울 수 있는 여유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다. 잘 웃을지 모르는 나도, 그리고 당신들도 이곳에서라면 썰렁한 말에도 히죽대며 자신은 더 썰렁한 말들을 생각하며 어깨를 들썩일테니까. 외국 사람 때문은 아니고 이태원의 분위기, 햇살이 쨍하고 내려쬐는 날엔 산책이 도리인 것처럼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이 걷고 싶게 만드는 이태원의 풍경, 사람들, 이태원의 맛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막상 이태원에 오면 특별히 가볼만한데도, 화끈하게 재미있는 곳도 없을지 모르겠다. 내가 제시하는 여행은 단순히 이태원의 메인 스트리트를 왕복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여행을 꼭 무언가를 구경하고, 무언가를 사고, 무언가를 해봐야 맛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내 제안이 싱겁기만 해서 할리피뇨를 자꾸 씹어대게 만드는 요리처럼 별 감흥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행을, 떠남과 시작함, 공간 안에서 자신의 숨소리마저 달라지는 느낌을 체험하는 것, 다르면서도 같은 것들을 깨닫고 볼 수 있는 심미안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것 저것 아니어도 봄날의 끄트머리를 잡고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에 몸을 맡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아니아니 그저 이태원에 호기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괜찮다. 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상을 볼 수 있을테니까. 이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기이하거나 특이한게 아니라 자신이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감각의 문제란건 따로 말하지 않겠다. 어떻게 보면 무책임하게도 '이태원으로 놀러와'라고 해놓고선 못느끼면 네 책임이라고 못박는 것 같지만 결국 모든 여행서가 전제하는건 그런게 아니겠는가. 게다가 여행서는 따로 돈을 주고 사기라도 하지, 아치의 페이퍼는 공짜잖아. 

 가끔은, 

 조금만 짧은 스커트를 입고 약간 늦은 시간에 이태원 거리를 걷는다면 내가 일평생 받아볼 수 있는 예상 가능 헌팅수를 초과할만한 실적을 올릴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도 해보지만, 에이, 안 그래도 남자는 차고 넘치는걸, 이라고 써보고 싶은 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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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3 2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04 0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예전에 유행하던 짤막한 글이 있는데 시작은 이렇다. 

 여러분, 남들 다 잘하는 연애가 나만은 안 된다고 의기소침하셨죠. 저도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연애도 노력이 아닐까요. 저는 연애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동호회 모임에도 나가고, 술자리가 있으면 시간, 장소 불문하고 나가서 얼굴 도장이라도 찍고, 누군가를 만날 기회만 있다면 언제든 참여했습니다. 그래서 애인이 생겼냐구요? 

 안 생겨요. 

 모임에 나가서 웃긴 소리를 하고, 눈빛도 몇번 마주치고, 자칫하면 제게 맘이 넘어올 것처럼 위태로운 사람들도 봤지만,  

 안 생겨요. 정말 안 생겨요.

 요즘이 딱 그렇다. 되게 되게 바란다거나 무척이나 미친 듯이 원하는건 아니지만, 즐찾수가 늘지를 않는다. 안 생겨요의 서재버전이다. 딱 그 숫자를 채우고 거기서 몇분이 몇일 단위로 뺐다가 넣었다가 장난을 치다 혹은 심사숙고하는 과정을 거치다가 제자리수를 벌써 몇달째. 대체 즐찾수가 뭐라고 이 집착을 하며, 이젠 나름대로 아치스런 스타일도 잡아가는데 그놈의 즐찾수를 매일 확인하면서 멍때리는건 왜일까란 의문에 사로잡혀 식음을 전폐하길 딱 아침 나절, 문득 배가 고프단 생각이 들고야 말았다.

 댓글이야 내가 잘 달지 않으니 안 달리려니하고, 추천도 내가 안 날려서라기보다는 남들이 볼 때 추천할만한 글이 아니라서 별로 못받는다고 치자. 글이 올라온 날이 아닌데 내 서재에 들어오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정체, 정체없는 사람들의 조용한 발자국이 좀 더 적극적으로 표출된게 즐겨찾기라서 이러는건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더욱 알 수 없는건 원하는 어떤 방식의 소통을 전제하지 않음에도 끊임없이 서재에 쓰고 있다는 사실.  

  애초에는 서재에서 근근히 지낼 수 있기만 한다면 바랄게 없었고, 그 다음에는 옥찌들의 얘기로 좀 더 친해지길 바랐고, 그러다 어느 순간 친해진다는게 누구 말대로 로그아웃하는 순간 사라지는 관계성이라면 부질없겠구나 싶어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재인건 왜일까란 생각을 하다보니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글을 쓰고 싶은데다 내 글을 읽어줬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란걸-이런 고백은 너무 낯뜨거워서 애초엔 시도하지도 않았다. 이런 허접한 글을 읽길 바라는 맘 자체가 으으으.-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일기를 쓰는게 아닌 이상 누군가가 뾰족한 꼬챙이로 쑤욱 찔러주는 자극을 원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틈새로 곧장 내 안으로 쳐들어오기를 바라기도 한다. 아니면 그저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는 얘기를 좀 더 편하게 하려는 정말, 나 좋으려는 심보일지도. 그래서 어쩌다 걸려서 서재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꾸준히 나를 볼 생각이 있는 사람들의 흔적에 집착했던거고. 이런 방식은 묘하게도 에너지를 모두 내 안에 축적하려는 것으로 느껴지다가도 그만큼 그들과 나 사이의 피드백을 갈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란 생각도 해본다.  

 이렇게 즐겨찾기를 욕심낸다는 페이퍼를 올리자마자, 그런 욕심 난 사양일세라며 자신의 즐찾에서 아치를 슬그머니 빼는 알라디너가 없을리 없겠지만 이왕 버린 몸- <증거>: 배 나왔다고 진즉 올렸던 수많은 페이퍼- 또 버린다고 배로 버려지는 것도 아니고. 무어 대수겠으랴. 라고 말하고 싶지만 소심해서 임시저장으로 화살표가 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 자꾸 알라딘 배포 운운해서 안 그러고 싶은 반작용도 무럭무럭 자라나고. 에잇! 즐찾 블라인드 기능이라도 요청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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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09-05-02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저처럼 욕심을 버리고 적은 숫자에 만족을 하심이-
아놔 오늘 외로운가봐요~ 이동네 저동네에 다 떠돌아다니면서 댓글달고 있네-_- 게다가 막 뱃속이 허해서 이시간에 자꾸 밥먹고 빵먹고 ㅋㅋㅋㅋㅋㅋ

나는 댓글달리는 게 참 좋은 걸 떠나서, 가끔 진짜 우울할 때 댓글이 달리면 좀 위로받는 기분이 될 때가 있어요-
그래도 집착은 하지 말자고 맨날 마음을 다잡죠 ㅎㅎ

Arch 2009-05-03 00:19   좋아요 0 | URL
오늘도 너무 먹어서 신트림이 계속 나왔다니까요. 그래도 배는 하나도 안 나와서 깜딱 놀랐지 뭐예요.(미친^^) 뱃속이 허할때는 회충약을 복용하면 직효임.

으응, 즐찾 빼지 말아요. 집착 조금만 할게요.

이매지 2009-05-02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찾수에 일희일비하시다니.
알라딘 중독 증세가 ㅎㅎㅎ

Arch 2009-05-03 00:20   좋아요 0 | URL
아니, 여적 보고도 모르셨나요? ^^
이매지님이 반갑단 인사를 한 후로 쭈욱 중독으로 인한 손떨림과 좌우 시력 불균형, 손가락 근육 강화, 장시간 앉아서 뭔가를 끄적거려서 나온 배 등등의 증상이 있죠.

뷰리풀말미잘 2009-05-03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귀엽다는 말은 이럴때 돌려줘야겠죠. ㅎㅎ

Arch 2009-05-03 00:32   좋아요 0 | URL
엄훠, 누구세요.

순오기 2009-05-03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찾 한두 명 늘었다가 다시 한 명 빠지고~~~ 그래가면서 하나씩 늘어나더라고요.^^

Arch 2009-05-03 17:35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그러니까요. 한두명 늘면 막 흥분했다가 언제 늘었냐는 듯이 빠지면 침체되고. 조증유발 가능성이 다분한 서재 즐겨찾기란...

Kitty 2009-05-03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아치님 ^^ 제가 얼마전에 즐찾했는데 ^^;;; 이렇게 수면 위로 떠올라봅니다. ^^

Arch 2009-05-03 17:59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몇개월째 정체된 즐찾이 갑자기 하나 늘어서 '오잉'했는데^^ 키티님이셨구나.
그러고보니 저 고양이는 가끔 윙크도 하는군요.

반갑습니다.^^

hanalei 2009-05-04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린,그래도,즐찾을 나누는 사이인가요?

Arch 2009-05-04 00:32   좋아요 0 | URL
레이님 반가워요.
네, 아마 그럴거예요.(신비주의 전략은 아니고, 다 아셔서 물어보리란걸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