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집안 사정과 재정에 이르기까지의 광범위한 내용을 약 1분여만에 다 나누고 옥찌와 통화를 했다. 어렸던 옥찌는 몰라 몰라 하면서 전화를 끊어버리기 일쑤였는데 이젠 좀 컸다고 아주 살살 녹는 전화 통화 매너를 보여준다. 

 이제 내려가서 옥찌랑 살거라고 하니까 계속계속 사는 거냐고 물어본다. 그렇다고 하니까 팔짝팔짝 뛰면서 좋아하는 리액션은 TV용이고, 옥찌는 그러냐는 말만 남겼다. 이모랑 놀거 생각하라니까 방에서 씽씽카 타도 된다는 얘기를 한다. 그래서 이모랑 같이 씽씽카 타는거냐고 물어보니 아무말도 안 한다. 그렇게 보려는게 아닌데도 아이들이랑 통화할 때는 꼭 에프라임 키숀의 '개를 위한 스테이크'가 떠오른다. 에프라임 키숀이 해외에서 집에 전화를 하는데 아이들은 통화료는 아랑곳도 안 하고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한다. 누가 아파서 안 나왔고, 누구누구는 무슨 일이 했다는둥, 그것도 한참 뜸을 들여 얘기를 해서 에프라임 키숀은 전화 통화하다 식은땀이 난다고까지 했다. 옥찌도 내가 뭔가를 물어보면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응이라고 말꼬리를 늘린 후, 그런데로 시작하는 엉뚱한 소리를 한다. 이모의 예리한 눈이 안 보이니 말할 맛이 안 나는걸까?(그건 니 생각이고!) 

 한참 동안 통화를 하다 옥찌가 흥분된 목소리로 오늘 숙제를 안 해도 된다는 얘기를 한다. 왜냐고 물었더니 계속 숙제 안 해도 된다고 해서 그런가보다하고 말았는데 한참 후에야 미술 학원에서 숙제를 했기 때문이란 답을 들려줬다. 당연한거 아냐, 옥찌. 숙제를 했으니까 안 해도 되는거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옥찌에게 당연한게 어디 있어. 옥찌가 숙제를 안 해도 되는거면 그런거야.  

 지희가 할말이 없는지 민을 바꿔주는데, 이 녀석은 큰 이모야? 라고 물은 후 끊을게, 하고선 전화를 끊어버렸다. 민, 친해지길 바래. 

 그래, 난 집에 가서 살거다. 

 언니네 이발관이 아니었어도 알고 있었다. 난 정말 보통 사람일 뿐이란 것을. 보통 사람이니까 모두가 서울로 몰리는건 문제라면서도 서울에 붙어 있었고, 선택의 문제가 아닌 경제력을 굳이 선택인양 믿고 버텼으며, 고향엔 젊은 총각이 없어서 내려가기 싫다는 핑계를 익살맞게 이마에 쓰고 다녔다. 보통 사람인 나는 동생이 느끼는 양육의 부담을 나몰라라 했으며, 기껏 날개짓을 해놓고서도 날개가 부실해서 얼마 날지 못했다며, 정말 하고 싶었던건 이게 아니라며, 악착같이 버티지 못했다.  

 보통의 존재인 나는, 이제 고향에서 살 것이다. 현실도피도 아니고, 낙오된 것도 아니다. 내가 발 붙이고 있는 곳은 어디든 현실이니까. 더 나은 희망이나 화목한 가정 운운은 정말 아니다. 전화 통화 대신 보드라운 손을 만지며 옥찌들과 대화하고 싶고, 옥찌들이 좀 더 힘을 낼 수 있을 때까지 옆에 있어주고 싶고, 근근히 살아가는 것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 그게 다다. 생각해보면 더 나올지도 모르고 계속 양쪽에서 우왕좌왕할게 분명하지만 아직은 괜찮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자평하는거라면 씁쓸하지만 그게 딱 아치인걸 어떡하겠나.  

 직장도 잡고, 주말이면 옥찌들이랑 산과 들로 쏘다닐거다. 그러고보니 우린 아직 동물원도 같이 못가본 사이잖아. 풍문으론 전주 동물원에는 코없는 코끼리가 있다는데 진상 확인겸 따스한 날에 오지명 애기들이랑 소풍을 가야겠다. 덥기 전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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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9-05-19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옥찌들 얘기가 더 자주 올라오겠군요? ^^
<개를 위한 스테이크>중의 저 부분, 생각나요 ㅋㅋ

Arch 2009-05-19 17:06   좋아요 0 | URL
글쎄요. 장담은 금물인지라.^^ 저는 스테이크 포장보다 저 부분이 더 웃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