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보면 제목만 그럴듯 할 때가 많은데 오늘 역시 그 우려, 만만치 않다. 

 일도 제끼고, 꾸물거리는 굼뱅이처럼 침대 위에서 자세만 바꾸며 텔레비전을 시청하길 어언 4시간째. 머리도 무거워지고, 배도 고프고-배는 늘 고프다.-, 어깨가 결려서 분연히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때는 오후 4시. 한창 달아오른 해가 이제 돌아갈 때를 알아채곤 따스한 기운을 대지 위에 드리우고 있을만한 시간. 세수를 안 했지만 뒹굴대다가 떨어졌는지 눈꼽 하나 남지 않은 얼굴을 쓱 거울에 비춰보고선 밖으로 나갔다. 밖은 생각보다 더 기분좋게 따스했고, 사람들의 옷차림은 봄을 지나 여름이 왔다며 속살을 남김없이 보여주는 스타일인지라 달랑 손 밖에 노출 안 된 내 차림새가 쑥쓰럽기까지 했다.  

 밖에 나온 목적은 장보기였지만 부리나케 장만 보고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제일기획 앞에서 이태원 역을 지나 우체국까지 쭉쭉 걸었다. 테라스에서 해를 쬐는 사람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새에서 서로 놓칠새라 손을 꼭 잡고 잇는 연인들, 벤치에 누워 사람들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집없는 사람들, 이곳의 비둘기는 날개짓을 할 때 평화와 자유의 각질이라도 떨어뜨리는지 그들의 날개짓마저 멋져보였다. 그러니까 난 일요일, 아니 일요일이 아니어도 몸에서 자연 산화반응이 생길 정도로 해를 쬐고 싶은 날에 당신들에게 이태원으로 여행 올 것을 얘기하는거다.

 여기에서 살게 된데는 직장이 근방이란 이유가 다였지만 살면 살수록 이곳이 가져다주는 활력에 도취되고, 이곳이 심어주는 신선한 날것의 냄새들로 흥분된다. 다른것이 불러일으키는 불균형함은 어긋나는 패턴들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어슷썰기가 쭉 이어지면 일정한 패턴이 되듯이 다양한 사람들이 뭉쳐있는 곳만으로도 그럴듯한 무늬가 그려지는데 이태원이 바로 그렇다. 

 케밥을 만드는 터키 아저씨들은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도 서두르는 기색없이 농담을 하면서 일을 하고, 마마처럼 보이는 두 여인은 우아하게 프린트 된 원피스를 입고 걸으면서 나로선 하나도 못알아들을만한 억양 센 영어를 구사하고, 가족끼리 나와서 나처럼 길 양쪽 끝을 그저 천천히 걷기만 하는 사람들도 있고, 알록달록한 팔찌들을 늘여놓고 파는 세네갈에서 온 처녀는 연신 예쁘단 소리를 하며 언니들 기분을 좋게 하고, 큼지막한 가방을 들고 걷는 여행객들, 사우나 앞에서 진을 치는 일본 사람들까지. 거리는 혼잡했지만 적당히 자신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을만큼만 복잡했으며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선언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많은 것들로 인해 활기가 넘쳐났다.  

 터무니없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맛도 별로 없는 음식점에 지나치게 상업화된 이태원의 색깔에 유감이 없는건 아니다. 하지만 모퉁이만 돌아서면 누구든 몇천원으로 멕시코 뷔페를 양껏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있고, 자기들끼리 신나게 얘기하다가도 눈만 마주치면 'hey pink'어쩌고 하는 느끼한 남미계 총각들이 있으며, 새침한척 책을 읽지만 누군가 다가가서 말이라도 걸면 금세 얼굴 가득 웃음을 띄울 수 있는 여유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다. 잘 웃을지 모르는 나도, 그리고 당신들도 이곳에서라면 썰렁한 말에도 히죽대며 자신은 더 썰렁한 말들을 생각하며 어깨를 들썩일테니까. 외국 사람 때문은 아니고 이태원의 분위기, 햇살이 쨍하고 내려쬐는 날엔 산책이 도리인 것처럼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이 걷고 싶게 만드는 이태원의 풍경, 사람들, 이태원의 맛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막상 이태원에 오면 특별히 가볼만한데도, 화끈하게 재미있는 곳도 없을지 모르겠다. 내가 제시하는 여행은 단순히 이태원의 메인 스트리트를 왕복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여행을 꼭 무언가를 구경하고, 무언가를 사고, 무언가를 해봐야 맛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내 제안이 싱겁기만 해서 할리피뇨를 자꾸 씹어대게 만드는 요리처럼 별 감흥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행을, 떠남과 시작함, 공간 안에서 자신의 숨소리마저 달라지는 느낌을 체험하는 것, 다르면서도 같은 것들을 깨닫고 볼 수 있는 심미안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것 저것 아니어도 봄날의 끄트머리를 잡고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에 몸을 맡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아니아니 그저 이태원에 호기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괜찮다. 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상을 볼 수 있을테니까. 이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기이하거나 특이한게 아니라 자신이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감각의 문제란건 따로 말하지 않겠다. 어떻게 보면 무책임하게도 '이태원으로 놀러와'라고 해놓고선 못느끼면 네 책임이라고 못박는 것 같지만 결국 모든 여행서가 전제하는건 그런게 아니겠는가. 게다가 여행서는 따로 돈을 주고 사기라도 하지, 아치의 페이퍼는 공짜잖아. 

 가끔은, 

 조금만 짧은 스커트를 입고 약간 늦은 시간에 이태원 거리를 걷는다면 내가 일평생 받아볼 수 있는 예상 가능 헌팅수를 초과할만한 실적을 올릴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도 해보지만, 에이, 안 그래도 남자는 차고 넘치는걸, 이라고 써보고 싶은 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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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3 22: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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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4 00: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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