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한줄도 안 하고 헌책방과 색채심리사를 가장한 도인의 얘기만 했구나. 어흑!   

 그러니까 홍대역 입구에서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떼기 시장처럼 인도엔 '기다리는 사람들'이 천지에 널려 있었고, 그 중 하나로 별 특색없이 있으면 그 사람이 나를 못알아볼까봐 글자가 촘촘하게 씌어진 책을 보다가 그 사람은 어떻게 생겼을까란 상상에 웃음 짓다가 혹여 그 순간,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오면 저물녘의 하늘을 보면서 실실 새는 웃음을 흘리는 사람이 나라며 한번 찾아보란 얘기를 해서 처음보는 사람을 반쯤 넋나가게 만드는 재능을 좀 보일까 싶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벨이 울렸다. 그리고 단번에 그 사람을 알아봤다. 

 오호, 당신이군요. 당신이야. 얼굴을 알아봤다기보다는 그 사람의 소도구와 느낌을, 두리번거리는 시선과 기다리는 사람이 풍기는 이제 막 도착한 냄새로 그 사람인줄 단박에 알아봤다. 말끝을 살짝 늘리는 어투와 감기로 인한 콧소리, 나와 쌍인 보라색, 보라색. 그 사람과 홍대 골목을 걷기 시작했다. 해가 다 지기 전의 하늘이 좋다는 그 사람 옆에서 우리 만남은 즐거울까, 신날까, 등등의 생각을 하다가 그만, '그런데 이제, 무슨 얘기를 하지?'에 이르자 약간 난감하기도 했지만, 음식이 눈 앞에 있으면 문제없을거란 생각에 잠시 안도했다. 

 고깃집에서 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리며 그 사람에게 색채심리사 어쩌고의 얘기를 곁들여 어딘가로 끌려가 덤탱이 씌우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나 덤탱이의 대부분을 도맡고 있는 아치란 사람의 얘기를 들려줬다. 그 사람은 아주 착하고 좋은이라 궁상과 어거지티가 조금씩 배어나오는 이야기들 꼭꼭 씹으며 들어줬다. 그리고 자기 얘기도 해줬다. 그 사람 얘기의 많은 부분들은 요즘 눈뜨면 술인 내 생활로 인해 잘 기억은 안 나지만, 풋풋하고 재미있었다. 으음, 당신은 그렇게 살고 있군요. 당신이 골목을 돌아다니는걸 좋아하는 것만큼 나도 그래요, 등등. 

 난 주도면밀한 아치인지라 우리가 만나기 전에 그 사람에 대한 사전조사를 한답시고 서재를 들었다 놓았다, 긁적긁적 뒤적인적이 있다. 그때, 좀 아차 싶었던게 있었다. 그러니까 우린 너무 다르고, 다른 차원의 사람이었다는거다. 우리는 책을 읽는 분야가 달랐고, 그 사람의 말대로 난 너무 진지하고 골타분(골의 파생어)했으나 그 사람은 간단명료한데다 직관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무엇을 걸치고, 어디에 가고, 무엇을 먹으며,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 어느 곳을 여행했고, 한달 수입은 얼마인지까지. 따지고보면 우리를 나누고 차곡차곡 분류할 수 있는 범주들은 셀 수 없이 많이 있다. 그래서 아차 싶었던거다. 과연 다름에서 부딪히는 경쾌음이 아니라 불협화음 내지는 이해불능의 상태로 치닫으면 어쩌나 싶은 우려도 있었다. 혹은 습관적인 뒷방 노인네적인 오바센스일지도 모르고. 

 맛있는 삼겹살을 꿀꺽꿀꺽, 우적우적, 야금야금 다 먹어치울때쯤이었나. 이 사람은 자신이 여행했던 얘기를 들려줬고, 난 그만 조금쯤은 반하고 말았다. 여행이란 것에서 내가 갖고 있던 생각. 일테면 중국에 갔다와서 어쨌냐고 물었더니 '크다'란게 다인 아이에게서 느낀 당혹스러움에서 비껴난 지점에 이 사람의 여행기가 있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분류나 범주의 의미는 하나가 통하는 순간, 정말 굉장히 하찮고 부질없게 느껴지는 것들이니까. '타인의 취향'이 마지막 장면이 좋았던 몇 안 되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그 영화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는건 바로 그 취향이란게 알고보면 의미없는 수사에 불과하단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얼마만큼 서로에게 집중하는지, 어느 정도로 나와 같은 혹은 다른 감각으로 살아가는지, 얼마나 각자의 삶을 충실하게 꾸려나가는지가 중요한거고, 그런 면에서 이 사람은 별다른 무리없이 나와 통했다. 

  홍대에서 아는 장소 중 하나인 민속주점에선 계속 김광석의 노래가 나온다. 누룽지 막걸리가 너무 맛있다며 입맛을 다시며 난 참 오랜만에 달게 취했다. 알딸딸해서 기분이 좋아지고 있는데 서른 즈음이 나왔다. 형이란 호칭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호칭에서 비롯되는 관계맺음의 통속스러움을 모르는건 아니지만 김광석에게는 왠지 광석이 형이라고 불러야할 것 같다. 공동경비구역JSA에서 송광호가 '김광석은 왜 이렇게 빨리 죽은거야.'라고 했다면 대사빨이 안 살았을 것처럼.  

 그래, 광석이 형의 '서른 즈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사가 어느 때보다 맘에 박혀서 빠지질 않는다. 누군가는 서른 즈음에 넥타이를 메고 사는 삶은 너무 무거워서 그때까지 살고 싶지 않다란 얘기를 했고, 다른 누군가는 서른보다는 서른 하나가 더 견디기 힘든 순간이란 얘기를 했는데. 서른이란 결국은 인생의 분기점 문제가 아니라 살아가는 것, 살아지는 것의 얘기란 것을, 그날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안녕, 당신. 잘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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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4 02: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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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4 02: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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