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일하는 분 중에 보면 볼수록 예쁜 분이 있다. 물론 남자다. 성실하고 잘생겼으며(앗흥) 참 친절하다. 며칠 동안 바빠서 별다른 얘기를 못했는데 오늘 시간이 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에 이 분이 자기는 꼭 혼자서 영화관에 가보고 싶다는 얘기를 하는거다. 그래서 내가 

- 어머(주책맞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빈틈 많은 추임새였음.) 아직 한번도 혼자서 영화를 못봤어요? 여자 친구하고만 봤구나. 그런데 왜 혼자서 영화를 보려고 해요?

- 카라멜 팝콘 먹으면서 영화 보고 싶거든요. 

- 네? 

- 여자 친구랑 영화 볼 때 팝콘을 못먹게 해서 한번도 팝콘 먹으면서 영화를 못봤거든요. 

 이잉? 그러면 줄곧 팝콘을 못먹게하는 여자들만 만나왔단 말인가? 슬쩍 눈짓을 주며 '나랑 영화볼 때는 팝콘 먹어도 되는데.'하려다 깜짝 놀래서 경계할까봐 차마 해보진 못했다.  

 물론 나도 영화 보면서 뭔가 먹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한다. 나 역시 이 친구를 만났었다면 영화 볼 때 뭔가 먹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래도 정, 먹고 싶다면 그래도 안 먹길 바란다며 영화 끝나고 먹자고 강요했을 것이다. 바스럭거리는 소리와 냄새, 번잡한 손놀림도 신경쓰였지만, 영화를 보는게 단지 킬링타임으로 구겨지는게 싫어서이기도 했다. 영화 볼 때 팝콘은 그렇다치고 

 전에 만났던 남자는 내가 패밀리 레스토랑을 안 좋아한다며 그거 하나는 맘에 든다(다른건 볼거 없음이라고 달리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던거야?)며 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가 자기는 맛대가리도(정확하게 맛대가리라고 했다.) 없는 곳에서만 밥을 먹으려고 해서 쥐약이었단 말을 한적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럼 다른데서 먹자고 하면 되지 않았냐고 묻자, 지루하고 따분했던 표정이 반짝 살아나더니 좋아하니까 대체로 맞추고 싶었다는 대답을 해줬다. 대체로 맞추는 것까지는 좋다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연애 기간 동안만 살아나는 '감정 노동'을 훌륭하게 해내려는 의지야 좋다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서로 잘 얘기해서 원하는 것을 맞춰가는게 더 매력을 끌 수 있을텐데 말이다.  

  단순하지만 않은 남자들을 '토이남'이라 칭하며 그들의 섬세한 취향과 부드러운 말투, 일관되게 예민한 정서를 다룬 기사를 본적이 있다. 기사에는 토이남은 햇살이 잘 드는 까페를 알고 있고, 옷차림은 늘 선선한 가을 바람 같으며, 그가 지니고 다니는 물건은 유독 센스있는 안목을 보여주는 것 밖에 없다라고 적혀 있었다. 여자들은 토이남 문화 취향의 다양함과 다루기 힘든 남자란 인상에 호감을 느낀다고도 했다. 오죽했으면 문화자본이란 말이 나왔으며, 문화자본이 상대적으로 풍부한 사람들은 여자에게 인기가 많다는 소프트웨어적인 문화자본가가 자조적으로 내뱉은 말까지 있을까. 그런데 기사 말미에는 사실 토이남의 세련됨도 끌리지만 그것보다는 투박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애정표현에 안정감을 느낀다는 소리가 나온다. 그러니까 말짱 꽝, 다시 그저 총론에 힘쓰는 남자가 되길 바래 정도. 아마 여기서 떠올릴 수 있는게 김어준의 인문학적으로 각성된 마초론일 것 같다.   

 단순, 무식, 과격하지 않고 매너있으며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하고, 연애관계에 있어선 순정을 모조리 바칠 수 있는 남자. 혹은 여자를 lady first입장에서 보살펴주는 남자. 어설프게 변호했다간 마초로 몰려 뼈도 못 추릴까봐 먹물들마저 닥치고만 있더라만, 늠름하면서 인문학적으로 각성한 마초, 그거 가능한 거라고. 인간에 대한 예의 지키며 덤덤하게 세련된 수컷, 불가능한 게 아니라고. 과묵한 열정, 단호한 감성, 있는 거라고. 왜들 그렇게 자잘해졌나. 아, 쪽팔려, 씨바. 땅에 떨어진 돌쇠의 도를 되찾을, 네오 마초가 필요한 시대다. 

 출처: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http://www.hani.co.kr/arti/SERIES/153/333394.html

 김어준의 이 말, 그럴듯하다. 게다가 허지웅의 마초론은 또 얼마나 빛나는지.  

1) 부러 먼저 인사하지는 않더라도 누가 아는 척을 할 땐 허리 굽혀 답례할 수 있는 아량.
2) 전쟁이 일어나 핵폭풍이 눈앞에 불어 닥치더라도 내 여자만큼은 솜털 하나 그을리게 하지 않겠다는, 미칠 듯 고색창연한 책임감.
3)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취했을 때 자빠져 자든지 집에 가든지 적확한 선택의 시점을 놓치지 않는 기민함.
4) 천박한 것이란 가장하는 것이고 솔직한 것이란 화장하지 않는 것이라는 걸 확연히 구별할 수 있는 지혜로움.
5) 형 동생을 계급이 아니라 시간을 공유해 마음을 섞을 친구로서 인식하는 공정함.
6) 아무리 큰 실연의 공포와 아픔이라도 꿋꿋하게 버티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다음 인연에게까지 영향을 드러내 보이지 않을 강인함.
7) 그것이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매상황의 이해득실을 떠나 또렷하게 고수할 수 있는 자기 논리를 갖는 꼿꼿함.
8)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이 없고 다만 분노해야 하는 순간에 분노할 줄 아는 화끈함.
9) 남의 가치관과 나의 가치관이 대립하더라도 그 두 가지를 정확히 평등한 시점에서 바라보며 따뜻하게 감싸주고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는, 체온 실린 객관성.
10) 호돌이 티셔츠와 파란색 반바지, 하얀색 긴 양말에 쓰레빠를 질질 끌고 청담동을 활보하더라도 주위 시선 아랑 곳 없이 의연할 수 있는 여유로움.

출처:나의 마초론 

 그러니까 인문학적으로 각성되고, 본래 의미의 마초라면 상관없다는건데 과연 그럴까. 이들이 말하는 마초는 예전 시대로 말하면 젠틀맨이며 씬시티에서 과도한 남성성과 시크함으로 영화를 장악하는 거친 남자들에 관한 것 같은데 그럼 그 남자들과 관계하는 여자들은 어떨까. 그녀들 역시 이렇게 멋들어진 마초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까? 그런데 내게는 그녀들의 목소리가 안 들린다. 이건 새벽에 잠도 안 자고 페이퍼를 써대는 예민함 때문일까? 

 마초가 전제하는 세계는 여성, 즉 타자를 배제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물론 각론상 도와줄 수는 있다. 하지만 대상화된 도와줌의 대상이 자신의 의사를 밝히는 순간, 마초가 세워둔 찬란한 마초피아는 산산조각이 나버린다. 그때쯤에서야 마초피아야말로 제대로 된 시뮬라시옹의 징후란걸 제대로 느낄 것이다. 타자화된 이들은 침묵하고, 순종해야하며 말을 하더라도 마초피아의 구성원답게 덜 멋지거나 마초적인 우월함을 이어주는 정도로만 똑똑해야한다. 혹은 멋진 마초의 사랑을 투박하게나마 받아들이는 역할을 잘 해내기라도 해야한다. 그래서 난 각성이 되든, 굳이 나의 마초론을 내세우든, 마초 역시 반대다.  

 사랑의 환상, 설레임과 중독의 징후들이 보여주는 옅은 감각적 즐거움을 깰 수는 없다. 앞서 말한 힘겨운 감정 노동의 초입에 서 있는 사람이든, 토이남이든, 마초든 다 마찬가지일테니. 하지만 주관없이 휘둘리는 것보다, 주관이라는 것을 다른 남자와의 위계를 통해 확인받는 것보다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유동적으로 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 굳이 거대한 '멋진 남자'를 들먹이며 자신의 현 상태를 찌질함으로 처박아버리고 안달복달 하지 않길,  

 남자, 이제부턴 먹고 싶은걸 먹어. 혹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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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09-05-13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ㅡ 토이남이라고 하는군요!
내친구들이랑 나는 세련둥이라고 하는 남들이네요- ㅋㅋㅋ

저렇게 이론화해서 적어두고 보여주기까지 해야하는 마초론이라니, 난 정말 별로-_-

Arch 2009-05-13 10:45   좋아요 0 | URL
토이의 노래에서 따온 작명이라고 하더라구요. 세련둥이가 더 귀엽네.

뽀님, 그래서 별로였구나. 난 왜 그 생각을 못했지?

L.SHIN 2009-05-13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남자가 나는 어떻게 성욕을 푸냐고 했을 때 아마 난 다른 대답을 들려줄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 실타래도 아닌데 풀긴 뭘 풀어. 

- 그게 풀리는거가니? 

 혹은 남자와 여자가 섹스를 할 때의 접근방식과 흥미롭게 여기는 부분에 대해서 말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요새는 먹고 살기 힘들어서 원초적인 욕구에 대해 무례하게 내치는 중이란 얘기를 했을지도. 친절한 성격은 아니지만 굳이 까칠할 필요도 없었고, 性과 관련된 주제는 예전만큼은 못하지만 날 즐겁게하는 이야기 중의 하나였으니까. 그런데 난 대뜸 소리치듯이 그에게 말하고 말았다. 

그걸 왜 풀려고 해. 그냥 놔두면 되잖아. 

 그의 질문 자체를 무력화시키고 더 이상 이 주제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표현한건 아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같은 주제의 말을 다시는 꺼내지 말길 바라는 어투와 표정, 말의 고저였다. 왜 그랬을까. 

 이젠 나이 들어서 한창 때처럼 야한 이야기, 야한 농담, 야한 분위기, 야한 것들의 총집합에 관심이 없어진걸까. 아니면 질문한 사람도 눈치채지 못한 질문의 저의를 미리 간파한걸까. 그것도 아니면 대체 왜? 

 질문의 밀도가 너무 성겨서? 

 그러니까 너무 뻔했다. 난 우리 나이가 몇개인데 고작 그런 질문을 하냐는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질문자로서 나도 형편없는 범주에 속하는 주제에 실망 운운은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정말 그랬다.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들을 굳이 질문해서, 말은 대부분 습관적으로 단어를 조합하는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것을 간과한채 끊임없이 질문해서 짜증이 났던 걸까? 그의 무엇이 나를 감당할 수 없는 표정으로 몰아갔을까. 

 아마도 역시 욕망의 문제겠지. 

 박쥐에서 김옥빈과 송강호의 욕망이 집요하면서도 전혀 추하지 않았던건 애처롭게도 그들 각자의 욕망이 서로 맞닿아 있기 때문이었다. 한쪽에서만 발화되는 욕망은 다른 쪽의 사람을 쉬이 지치게 한다. 내가 갈급하지 않았고, 뒤도 안 돌아보고 싶을 정도로 달아오르지 않았던거다. 내 본위의 생각일지도 모르고, 순진한 낯을 간과한 발언일지 모르겠으나 글쎄, 정말, 우리 나이가 몇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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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09-05-12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에- 역시, 첫 번째 대답이 좋긴 하군요.^^

뜬금없지만, 아치님의 이미지 밑 글 말입니다. 문득 궁금했어요.
인간이라면 모두가 자유로운 걸까요?
 

 이렇게 공연 무대에 서는 것도 타협하지 않으려는 당신만의 몸부림인가. 

 물론! 스스로를 새롭게 발명하는 것이다. 그저께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가 말하더라. 90년대가 나의 황금기였다고. 나는 약간 바보스럽게도...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다이아몬드기겠네!(박장대소) 나는 지금 내 경력에서 가장 창의적인 때를 맞이하고 있다. (손바닥과 주먹을 강하게 부딪히며) 예전에는 누군가를 만족시키고 싶었다! 사랑받고 싶었다! 나는 한명의 병사였다! 천사였다! 무엇이든 해내고 싶었다! 모든 것을 원했다!(웃음) 하지만 지금의 나는 더욱 강해졌다. 그림을 그리고, 공연을 하고, 누구와 영화를 하고 싶은지를 직접 결정한다. 하지만 우리는 왜 그렇게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걸까. 한 사람의 경력은 분절되지 않은 거대한 아치다. 피카소에게는 청색시대가 있고, 분홍시대가 있고, 입체파 시절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시절은 한 사람의 내면 속에 있는 거다.  

 ... 당신의 예술적 페르소나는 자기 파괴적인 여자들이다. 

  자기 파괴적이라는 말은 쓰지 말자. 내가 연기한 여자들은 헤어지고, 잃어버리고, 쓰러지고, 내면의 지진을 겪었다. 그것을 통해서 삶을 재건설했다. 우리는 진정한 내면의 지진을 통해 진정한 삶을 만들 수 있다. 바닥에 쓰러진 뒤 두발로 다시 일어서면서 삶의 또 다른 층을 발견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 ... 연기는 나에게 감정들을 탐험하게 허락한다. 감정의 부조리함을 이해하도록 허락한다. 연기는 어떤 감정을 내 몸과 내 내면을 통해 창조하는 일이고, 촬영이 끝나는 순간에는 그 감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웃음) 그림도 마찬가지다. 나의 손과 붓을 통해서 감정이 피어난다. 하지만 감정에 얽매이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해방된다. 나는 사람들이 감정과 이성을 구분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 마음은 감정과 이성의 합작품이다. 

-씨네 21. 2009.04.07. no.697. cine interview. 글 김도훈,  나에게 반복은 폭력이다 중에서 발췌함. 

 인터뷰 중간에 아치란 말이 나와서가 아니다.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 사람을 처음 본 것도 아니다. 예술가들이 각자의 포즈를 갖고 있는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니까. 다이아몬드기라는 표현이 산뜻해서도, 열정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배우여서도 아니다. 물론 이 말은 모두 맞고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 안에 포함되겠지만 그녀의 인터뷰 기사를 읽자마자 단박에 그녀가 좋았던 이유는 다른데 있다. 자기 삶의 절대적 긍정과 자기 확신. 그건 태생적인 것도 아니고,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 이리저리 부대끼고, 좌충우돌 충돌하며 얻어낸 이토록 유머러스하면서도 강렬한 확신, 난 이토록 빛나는 배우를 본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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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5-07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사랑해서 뭐라 말조차 못붙일 것 같은 배우.

프레이야 2009-05-07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부신 배우! 에요.
한 사람의 경력은 분절되지 않은 거대한 아치다, 정말 아치님 이름이^^

Arch 2009-05-07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드님, 그렇죠! 사랑해 파리에서 이 배우가 나온 것도 모르고 싱싱한 남자들에게만 눈길을 준 아치는 정말 쯧!

혜경님, 히히.. 이 순간을 노린 작명은 아니었지만.

웽스북스 2009-05-13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별히 예쁜 것도 아닌데, 왜 눈을 떼기가 어려운 걸까요. 그녀에게는.
 


 이태원에 오면 특이하고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거라고 믿는 사람과 데이트를 하는건 약간 지루하다. 재미는 자기가 찾는거잖아라고 말해도 무슨 말인지 못알아들을 때면 더더욱. 저녁을 단단하게 먹은 내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거리를 지날 때면 의무적으로 먹어야하는 닭꼬치와 오뎅국을 핥아대는 것을 볼 때 그의 눈이 잠깐 반짝인 것 말고는 시종일관 그 역시 나만큼이나 무료해하고 있었다.

 사람들 구경에도 심드렁해질 즈음 우리는 펍에 들렀고, 남자는 이때다 싶었는지 주문을 내게 맡긴 후 미친 듯이 다트판으로 돌진했다. 의도했던 생각은 아닌데 남자의 뒷모습은 흡사 개가 목줄을 끊고 도망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들고간 잡지를 다 본 후에도, 소음 때문에 클라이막스만 강하게 들리는 노래가 꽤 많이 흐른 후에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이 진파랑 시스루를 입은 여자가 내 옆에 자리가 있냐고 물어서 당신이 앉으면 자리란 농담을 하고 싶게 만들었고, 나랑 자꾸 눈이 마주치는 나이든 외국인에게 윙크라도 한방 날려줘야는게 상도덕에 걸맞는게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다. 바 안쪽에서 무표정하게 칵테일을 만드는 바텐의 눈가에 기묘한 모양의 다크서클이 보여서 자세히 관찰하다 그가 일을 안 하고 멍하니 있는 순간 동종업계 사람으로서 묘한 동질감도 생겼었다. 그래,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남자는 아예 자리를 깔고 옆의 외국인과 내기 다트를 시작했다. 이곳, 고함을 질러야 옆사람과 얘기가 통할거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게코스. 이러다 귀가 머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신없고 정신없는 곳에서 난 남자를 기다리며 검고 진한, 금세 식어버리고만 맥주를 들이켰다. 며칠째 술을 '퍼'마신 덕에 뒷골이 당기는데도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입맛까지 다시면서 맥주를 마셨다. 깊고 풍성하게 취하기 위해서 맥주는 쭉 들이켜야하는 법이니까.

 남자의 다트 실력은 회가 거듭될수록 퇴보하고 있었고, 같이 하는 외국인은 '이거 바보아냐'란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난 방금, 다크서클 바텐이 엉덩이골 사이의 깊숙한 곳으로 손을 넣는걸 봤다. 바텐은 칵테일을 만들고 3000을 따르다 흐른 맥주를 쓱 훔치던, 가끔 음식을 나르던 손으로 엉덩이 사이를 '후비고' 있었다. 다크서클 바텐이 슬쩍 주위를 둘러보다 손을 빼고선 다시 한번 더 시도하려는 순간, 그의 다크서클은 기묘한 문양을 비껴서서 괴기스럽게 얼굴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피곤하고 귀찮았던거다. 오픈된 바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특정 부위를 긁적이는걸 보면.

 핏줄이 도드라진 당신의 손  

절대로 씻지 않는 당신의 손  

 이젠 뭘 만질건가요?

 눈으로 바텐과 대화를 하다가 다시 꿀꺽꿀꺽 맥주를 마시는데 다트를 끝낸 남자가 돌아왔다. 난 남자를 위해 멋있는 목소리로 주문을 했다. 여기요, 손이 가장 많이 닿을 수 있는 칵테일을 주세요. 다트를 하느라 갈증이 났던지 남자는 다크서클 바텐이 가져다준 칵테일을 쭉쭉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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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9-05-07 0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
그런데 그 바텐이 없었다면 다트를 끝낸 남자가 돌아오셨을 때, 어떻게 하셨을지.. 궁금하네요.
저라면 어떻게 했을지도 상상해보고 있습니다 ㅋㅋ

Arch 2009-05-07 18:14   좋아요 0 | URL
침묵 고문을 하지 않았을까, 실제로도 그랬구요.
글에는 다 사실만 들어있는건 아니지만.

실은, 남자가 다트에 더 버닝하길 바라기도 했어요.
가시장미님은 순하고 고운 분이라 힘껏 꼬집어주지 않았을까?(농담이에요^^)
 

 어제는 어린이날이라고 사상 최고로 바빴다. 끊임없이 손님들이 밀려왔고, 난 로봇처럼 물잔을 내려놓고 음식을 나르고 테이블을 치웠다. 초반엔 이러다 살 빠지는거 아냐란 생각도 들었고, 다들 잘하고 있는데 나 혼자 힘든척 할 수 없다란 생각에 좀 더 오바해서 웃고 움직였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손님들은 줄어들 기세를 안 보이고, 매장 안은 온통 사람들의 복작거림으로 터질 것만 같았다. 당연히 아무 생각도 안 났다. 가게가 포화 상태를 못이기고 터지기라도 했다면 아마 그 틈새로 빠져나간 사람들은 다른 가게로 들어가 그곳의 종업원들을 기계처럼 부리겠지. 아직, 터지지 않아서 다행이야. 무념무상의 상태로 서빙을 하다가 그릇이 부족한 비상사태를 핑계로 좀 더 정적인 워셔파트로 긴급 투입됐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 일이나 이 일이나 도찐 개찐이었다. 

 워셔, 말이 씻는다지 순전히 설겆이를 몸이 닳도록 해야하는 일은 디가 담당을 하고 있다. 디는 정신 장애가 있지만 야무지게 일을 잘해내는데다 우스개 소리와 춤에 일가견이 있다. 주방 안으로 들어가자  디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고 있었다. 자칫 누군가 실수라도 하면 정신없이 상황이 악화될만한 일촉즉발의 순간, 디가 울면서 주문같은 말을 쏟아냈다. 평소에도 기분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 신경쓰지 않고 같은 말을 반복하거나 큰소리를 내기는 했지만 디가 우는건 처음 봤다. 이렇게 바쁜게 디로써는 힘들고 답답했으리란게 느껴졌다. 디야, 울지 말고, 언니가 도와줄게. 내가 나타났잖아란 말을 하려고 미끄러운 바닥을 딛고 다가가는데, 해물 파스타를 만들던 트레일러가 별안간 들릴듯 말듯 욕을 했다. 

- 아, 씨발, 지금 뭐하자는거야. 

 잘못 들었겠지. 그래, 일하다 짜증나서 그런거겠지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아니었다. 디가 다른 국면을 만들까 약간 눈치를 보며 디에게 직접적으로 하는 말. 평소에 점장이 디의 행동에 대해 약올리거나 업장 뒤쪽으로 불러 꼬집거나 '살짝' 때릴 때 느꼈던 불편함과 맞닿아 있는 폭력적인 언사는 여러가지 것들을 생각나게 했다. 

 씻고 닦고, 다시 씻고 닦는 단순한 일을 하면서 생각을 할 수 있는 머리가 있다는 것에 이따금 감사한다. 

 화나는 순간, 사람들에게서 감춰진 면이 드러난다는 것과 화를 낼 만한 상황과 화를 낼 수 있는 대상에 관한 이야기. 사람의 진면목은 도박과 여행, 술을 통해 알 수 있다고 하는건 의외의 상황 안에서 가둬진 욕망과 본성이 나올거란 예측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난 여기서 다시 지극히 개인적인 입장으로 돌아가 디를 보는 트레일러의 눈처럼 나도 옥찌를 보지 않았나란 생각을 해본다. 

 다시 화나는 순간. 디처럼 옥찌도 정신이 없었다. 옥찌가 정신이 없는만큼 나도 정신이 없었고, 어떻게 해야하냐며 나에게 묻는 옥찌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적이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라면 절대로 하지 못했을 말과 행동을 옥찌한테 얼마나 많이 했던지. 관찰 비디오라도 설치되어 있다면 지적받을 짓이 너무 많아 구석에 숨어서 아무것도 못할 정도로 문제가 많은 이모다. 내가 디를 대하는 사람들의 관습적인 태도를 비난하는 와중에 옥찌들을 떠올린건 비난은 고스란히 내게로 향한다는 것을 비교적 분명하게 알기 때문이다.  

 요 며칠 누군가를 만나면서 내가 이렇게 잔인한 사람이었나, 이렇게 깐깐했나, 이 정도도 못참을 정도로 예민했었나 싶은 작태를 사람들에게 많이 보여줬다. 왜 나만 그들을 보고 그들을 느끼고 그들에 대해 쓸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비난은 고스란히 내게도 향하는데. 내게로 향해서 비수처럼 꽂히지 않은건 그들이 어수룩하거나 덥수룩해서가 아니라 관심 부족과 잠 부족이 다일텐데 말이다.  

 '나라면' '나라도'에 감춰진 함정이 있는건 인정한다. 자기를 대입해서 '너라면 안 그럴 수 있겠냐'고 묻는건 우문이다. 그렇다고 옥찌에게 화내거나 디에게 욕을 한 트레일러의 입장까지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제공했을 비난거리를 떠안고 있는 주제에 상대의 흠을 찾아내서 찧고 까부는 짓은 이제 그만 해야겠다.  

 디는 울음을 그쳤고, 옥찌는 지꼴리는대로 해대는 이모에게 가끔씩 편지를 보낸다. 젠장, 뒤끝없는 사람 제일 싫은데. 그럼 앞끝없는 사람 어쩌고의 농담이 떠오르긴 하지만 농담 안 해. 그 대신 꾀부리지 않고 디를 도와 접시를 닦았으며 옥찌에게 다시 또 화를 내면 서재 금지령이라도 내려야겠다란 생각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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