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읽고 있는 책은 누군가 추천한 책이거나 관심있는 분야라 따로 메모해 놓았던 책들이다. 특히 이 두권의 책은 정말, 재미있다. 철학이 일상과 어떤 연관이 있고, 철학적으로 사고하는게 어떤건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일상과 철학이라는 범주는 나의 책 연대기로 보자면 알랭 드 보통에서 시작하는데 어렴풋이 감만 잡고 있다가 이유선의 책을 통해 개화했다고나 할까. 아직 그 꽃의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이유선이 제시하는 '철학을 통해 생각하는 법'은(저자는 그저 에세이를 쓴 것이기 때문에 이런 규정이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리처드 로티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데 절대적인 사조나 지향점 없이도 생각의 결을 단단하게 만들어 준다. 









 







 소시민의 삶을 다룬 부분과 책의 제목이기도 한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는 다른 소제목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그 둘을 같은 맥락으로 읽어내려가면 두개의 생각을 묘하게 관통하는 정서가 보인다. 결국 소시민으로 살아도 남들에게 지탄받거나 자신의 삶을 변명하지 않아도 괜찮으려면 그런 삶이 가능하도록, 태평하게 사는 것도 가능할 수 있는 삶의 조건들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 어떻게보면 당연한 진리를 까맣게 잊고 어떤걸 선택하도록 강요받은적이 참 많았던 것 같다. 이유선이 보여주는 글쓰기의 장점은 생각을 강요하거나 행동에 옮기기를 촉구하지 않는데도 고민하고 어떻게 하면 변할 수 있을까란 생각에 이르게 하는 점이며 그러면서도 재미까지 있다는 것이다. 고민하면서 재미까지 느끼기란 알다시피 쉬운 일이 아니다.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는 구조주의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사소한 내용만 서술하거나 저널리스트의 숙고 대신 글쓰는 기계 같은 일본의 전문 분야 저자들의 책을 신뢰하지 않는 편이라 저자가 우치다 타츠루라는게 맘에 걸렸지만 이 책은 우려를 단숨에 불식시킬만큼 매혹적이다. 구조주의에 대해서 처음 듣는 사람이라도 푸코나 라캉의 이름은 익히 들어봤을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많이 들어본 이름이지만 그들의 책을 읽자니 낯선 용어에서 어려운 문체까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우치다 타츠루는 구조주의의 개념에서 시작해 각각의 학자들의 중심 사상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제시해주고 있다. 방대하거나 논점이 분산돼서 읽다가 쉬이 지치는 철학책 대신 간략하고 읽기 편한 형식으로 말이다. 푸코의 '성의 역사' 부분과 바르트의 어려운 개념들을 이렇게 알기 쉽게 풀어서 써준대다가 구조주의 철학자의 저작을 꺼내서 읽고 싶게 만드는건 이 책의 초초 강점!

 요즘 큰 즐거움이 되고 있는 두권의 책을 2010년 올해의 책 페이퍼로 추천해준 빵가게 재습격님께 감사의 배꼽인사를 드린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19세기 영국의 상황, 오전에 온 사람이든 오후에 온 사람이든 같은 1데나리우스로 합의한 성경의 내용을 보고 이 책을 읽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간디, 톨스토이, 버나드 쇼까지 존경한다는 사상가의 책이라니. 왠지 권위에 호소하고 싶은 생각까지 든다.
 헌데, 도덕 교과서 같은 선언과 좋은 취지를 소개하는데서 그치고만 이 책은 그다지 재미있지 않다. 19세기 영국이라면 모르겠지만 자본의 속성을 자세히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데다 자본주의 이후와 대안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있는 요즘과는 어울리지 않는달까. 어쩌면 자료를 파고들고 책 자체가 완결성을 갖고 있는걸 좋아하는 내 취향 탓일지도. 적극 추천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영 아닌 것도 아니기에 출판사의 책 정보를 붙여놓는다. 

   
  성경의 한 구절로부터 시작한 존 러스킨의 이야기는 사회경제체계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한편 약자의 고통과 상처를 따뜻하게 감싸안는다.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나중에 온 사람’이란 사회경제적 약자의 다른 이름이다. 마지막 남은 일자리라도 붙잡기 위해 해질녘까지 인력 시장을 떠나지 못하는 노동자, 냉혹한 경쟁 속에서 능력으로 인간성마저 심판받아야 하는 고용인들, 그리고 불안한 처지에 놓은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존 러스킨은 오늘 이 순간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물음을 던진다. 사회의 마지막 자리에 서 있는 이들은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
러스킨은 노동자의 노동할 권리와 공평한 보수로써 생존할 권리를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선택받는 것은 유능한 노동자가 당연히 받아야 할 보수’이다. 또한 존 러스킨은 ‘나중에 온 사람들’이 동등하게 배려 받는 ‘조화로운 불평등’을 추구하는 사회가 더 큰 사회적 부(富)를 생산한다고 주장하며,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사회의 불평등과 고용문제들을 돌아보게 한다
 
   

 








식품주식회사는 익히 마이클 폴란과 에릭 슐로저에 의해 얘기되어온 식품산업을 영화화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 책이다. 에릭 슐로저의 인터뷰와 식품주식회사를 영화화한 내용까지 읽고나니 다수의 저자 글이 나온다.

 식품산업에 흠집을 내고, 유기농을 주장하고, 근거리 농산물을 생산 소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흥미롭지만 책에서 보이는 일관된 줄기가 안 보이니 좀 답답하다. 여러 명의 저자가 참여하는 책의 경우 그 모든 내용들을 기획하고 편집하는 사람의 역할이 중요한데 일종의 짜집기같은 느낌이 드는건 어쩔 수가 없다. 우리의 경우라며 소개한 내용도 좀 부실한 느낌이고. 좀 더 읽어봐야겠지만 절반 정도 읽은 느낌은 이 정도.

 한권의 완벽한 책이 탄생하기 위해선 어떤 과정이 필요한걸까. '저자의 죽음' 이후 '독자의 탄생'을 선언했던 바르트의 말대로라면 책을 읽는 행위는 단순히 앎이나 지적 만족뿐 아니라 의미를 재생산하고 복사해서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내는 것까지 이어져야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정도의 품평에 갈증나면서도 두 번 읽어서 새로운 의미를 찾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게으르다. 어쩌면 책을 추천하는건 그 책이 완벽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내가 갖고 있는 성향 문제일 수도 있겠다. 뭔가 좀 어렵고, 몇번은 읽어야만 될 것 같은 책들이래야, 흠집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흠집이 있어도 내가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책들이래야 추천할 수 있는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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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1 0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1 1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좋은 여행, 나쁜 여행, 이상한 여행 - 론리플래닛 여행 에세이
돈 조지 지음, 이병렬 옮김 / 컬처그라퍼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여러 사람의 글을 모은 것 중에 괜찮은건 드물다.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몇 개의 책만 해도 분별없거나 맥락 없이 뒤죽박죽이니까. 가끔 가다 특출 난 누군가의 글이 돋보이긴 하지만 한권의 책을 놓고 봤을 때는 여전히 뭔가 아쉬울 때가 많다. (한겨레 인터뷰 특강은 나름대로 선전하고, 현장감과 밀도감 있는 글이 맘에 들지만-비슷한 기획으로 프레시안이 기획한 불량사회와 그 적들도 있다.) 아무래도 쓰거나 하고 싶은 이야기보다는 출판사의 요청에 못 이겨 주제나 기획에 맞는 글을 써야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여러 명이 경험한 여행에 대한 책은 어떨까. 에세이를 좋아하고 그 중에서도 여행 책을 좋아하지만 괜찮은 여행 책은 드물다. 그래서 괜찮은 여행 책을 발견할 때마다 작고 예쁜 보물을 찾는 것 같다. 어떤 장르라고 말하기 애매한 여행 에세이류 중에서 괜찮은 책은 독자층이 얇을테고 그렇다면 ‘괜찮은 여행 책’을 찾아낼 확률도 다른 것보다 낮을거 아닌가. 그럼 나의 발견은 꽤 희소성 있지 않을까란 김칫국. 물론 이런 얘기는 하나마나한 소리지만.
 

 세계적인 전문 여행 작가들과, 세계적인 여행가이드북 론리플래닛 홈페이지에서 후원한 여행 수기 공모 대회를 통해 응모한 작가들의 여행기를 엮은 책은 길 위의 모험과 우연한 사건들에 관한 이 31개의 여행담 속에는 쓴 웃음이 나는 것에서 박장대소하게 만드는 이야기까지 모든 영역의 유머가 담겨 있다. 장소와 주제, 어조 모두 천차만별이지만 이 모든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여행에서 얻는 큰 보물은 우리를 웃게 만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상황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알라딘 책소개 중>

 이 책엔 여행을 한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만치 다양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책을 처음 집었을땐 빌 브라이슨의 책을 읽을 때처럼 ‘얼마나 나를 웃기나 한번 보자’란 심보였다. 우연찮게 랜덤으로 펼친 챕터마다 재미있었고, 생각지도 못한 장소의 여행담을 들을 때마다 정말 이런 곳도 있나 싶어 자꾸 갈증이 났다. 하지만 이것도 얼마 못 갔다. 걔중엔 좀 지루한 글도 있고 어디에서 웃어야할지 모르겠는 부분도 생겨났기 때문이다. 역시 여러 저자들의 글을 모은건 이러저러한 한계를 넘어설 수 없을까.

 하지만 이런 부분들, 누군가의 경험과 스치듯 짧게 기록되는, 그래서 결국은 몇백개의 단어 중 하고 싶은 말은 한줄 정도 밖에 안 되는 여행서를 넘어서는 이런 구절 앞에선 속없이 기분이 좋아지고 만다. 

간단히 말해, 황량한 땅 끝 마을에 오면 나는 늘 섹스를 하고 싶다.

 남편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는 노란 잡종개와 ‘수브마리노스(핫초콜릿의 일종)’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비밀은 작은 포일에 싸인 초콜릿에 있지.” 엉덩이를 땅에 대고 숨을 헐떡이며 듣는 개에게 남편은 강의를 하고 있었다. “뜨거운 우유에 초콜릿들을 넣고 아주 적당한 속도로 저어줘야 한단다.”

 “우리 방에 가서 할까?” 나는 물었다.

 남편과 개 둘 다 내 존재를 잊고 있었던 듯 깜짝 놀라며 내게 고개를 돌렸다. 개는 관심 없는 듯 낑낑댔다.

“그거 좋지.” 남편은 말했다. 남편에 대해 내가 늘 감탄하는 한 가지는 시간과 날씨에 구애 없이 이런 거라면 언제든 환영한다는 것이다.

 '빗나간 여행 계획은 당신을 어딘가로 데려가 사람들과 이어주고 어떤 상황으로 당신을 몰아간다. 그렇게 당신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 놓을 수도 있다.<미국에서 살고 싶어요 중에서>' 로또 같은 여행을 기대하는걸까. 이번은 반반이었지만 아마 나는 앞으로도 한동안 여행 책을 읽을 것 같다.

  p.s 정말 이 책의 정체는 뭘까 싶어 다시 책을 뒤적이는데 앞에 있는 구절만큼 통통 튀는 누군가의 여행담이 넘쳐나는거다. 어떤 이야기는 좀 심심해, 저건 좀 더 밀어붙여야했어. 라고 했지만 여행병 걸려서 세계 방방곡곡을 다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시 읽어도 재미있었다. 글이 아니라 그저 여행담으로는꽤 괜찮은 책이란 결론.
 
 이런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 총잡이와 함께하는 묻지마 프라하 시티투어, 사파리에서 사자가 아니라 코끼리와 잠을 잔 사연, 후지산에 오른 바보들, 화장실만으로도 여행기를 만들 수 있는 더그 랜스키의 씁쓸한 유머 챕터, 요리의 카오스 법칙, 원정대의 별명짓기 놀이, 히피 남자들과 함께 살다 위장결혼에서 진짜 결혼까지 하는 ‘미국에서 살고 싶어요’, 삼촌 덕분에 더없이 즐거운 버몬트 주 여행(그 장소를 잘 알고 좋아하는 사람과의 여행은 참 괜찮은 방식), 죽으라고 고생한 에티오피아 여행기, 펜과 양을 맞바꾼 사연, ‘카펫 말이’ 놀이(나도 해보고 싶어!), 말뿐인 바탐방의 쾌속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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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7-20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다.
저 분홍색 인용구 읽을 때, 아치, 내 생각 나지 않았어요? 어쩐지 그랬을 것 같아요. 그런데 '뜨거운 우유에 초콜릿들을 넣고 아주 적당한 속도로 저어줘야'하는 그 음료, 내가 마셔 보고 싶어요. 마시자마자 눈을 감게 될, 그러니까 황홀함에 취하게 될 그런 음료가 될 것 같아서요. 아, 나는 여행책은 정말 별로라 인데, 아웃오브안중 인데, 이거 읽어볼까요, 말까요?

Arch 2011-07-20 17:58   좋아요 0 | URL
글을 다시 써야할 것 같아요. 생각해보니까 이 책에는 멋쩍은 듯 개에게 저런 조리법을 설명해주는 남자를 보는 듯한 몇몇 풍경이 있거든요. 그걸 다 살리지 못했어요.
의외로 다락방 생각이 나지 않았어요. 해남이 생각났달까.(유먼데..ㅡ,.ㅜ;)

나는 다락방을 좋아하지만 우리 취향은 그리 맞지 않아요. 그래서 난 추천 못하겠어요. 게다가 이번건 반반이니까 더더욱. 그렇지만 각각의 에피소드는 어떻게 보면 단편소설 같아요. 그 점은 추천. 추천 역시 반반? ^^

다락방 2011-07-20 18:18   좋아요 0 | URL
나는 '그거 좋지'라고 말하는 남자가 좋아요.

승주나무 2011-08-04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는 정체를 모르는 책은 무서워서 잘 안 읽게 되는데, 아치님의 모험심이 항상 부럽습니다. 예전부터...

Arch 2011-08-05 10:57   좋아요 0 | URL
크~ ^^
 
왜 날 좋아하는거야?
마담 보베리 - 세미콜론 그림소설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포지 시먼스 글.그림, 신윤경 옮김 / 세미콜론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어제 눈이 빠지려고 하는데도 끝까지 다 읽은 (책 한권을 끝까지 다 읽은게 얼마만의 일인가) 책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너무 괜찮은 만화책 '푸른 알약'을 낸 세미콜론 출판사에서 나온 '마담 보베리'가 바로 그 주인공. 그린비 출판사 홈페이지에서 여성주의 글을 쓰는 분이 언급한 책인데 책을 읽고 나니 감상이 전염되듯 '과연 사람을 안다는건 어떤걸까'란 생각이 떠올랐다.

 플로베르의 '마담 보봐리'에서 마담 보봐리를 빵집 주인이 지켜본다면 어땠을까. '마담 보베리'는 그런 의문에서 시작한게 아닐까 싶은 만화책이다. 빵집 주인 주베르는 영국 여자인 보베리가 자기 마을로 올 때부터 비상한 관심을 보인다. 그녀의 몸매나 얼굴, 취향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이름, 보베리 때문이다. 주베르는 보베리의 삶을 소설 속 여주인공의 것처럼 상상하고 소설에서 벌어진 비극을 막으려고 애쓴다.

 그렇다면 보베리는 소설 속 보봐리 부인과 비슷한 사람일까. 겉으로 보이는 면은 그럴지 모르겠다. 어쩌면 희극도 비극도 아닌 죽음까지도 닮았는지도. 하지만 보베리는 소설 속 보봐리처럼 단순명쾌하지 않다. 보베리는 애인과 헤어지고 찰리와의 관계에서 희망을 찾다가 서로의 진면목과 자신이 바란 시골생활의 지리멸렬함을 깨닫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고민하는 여자다. 바람을 피우며 자신이 좀 더 너그럽고 남편의 아이들에게도 다정함을 보일 수 있어  활력을 얻는 여자이며 바람의 상대인 애송이 에르베가 갑작스럽게 결별 통보를 했을 때 그전 이별처럼 무너지는 대신 자신을 좀 더 추스릴 수 있는 여자이다. 기분을 낸다며 과소비를 한 덕에 밀린 카드빚은 집을 팔고 일을 더 많이 하는 식으로 정리 할줄도 아는 여자인거다.

 내가 인상깊게 본 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보베리 부인의 맘 상태와 쓱쓱 그린 듯 보이지만 촘촘한 글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그림이었다. 활자형 인간인 것도 아닌데 만화를 볼라치면 그림도 봐야지 글도 읽어야지 정신이 없었는데 이 책은 정말 푹 빠져서 한쪽 분량의 글을 읽은 다음 눈을 쉬게 하려고 그림을 보는식이어서 그 조합이 꽤 괜찮았다. 과장하지 않고 그렇다고 성의없는 것도 아닌 그림은 글이 가진 한계를 벗어나 소설적인 묘사를 제대로 보여준다.

 소설은 사람과 삶, 생각에 대해 거대하지만 조밀한, 세세하게 뻗었나 싶으면 중간은 과감히 생략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렇지만 소설 속 삶과 인물은 모종의 일관성을 보여야할 숙명을 갖고 있다. 독자들은 소설 속 인물들이 개연성 있는 행동을 통해 이야기를 끌어나갈 때 납득하기 때문이다. 주베르가 보바리 부인으로 재구성한 보베르 부인의 경우, 주베르가 바라는건 소설 줄거리와 비슷할 뿐 아니라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누군가를 잘 안다고 섣불리 말할 수 없는건 바로 이 때문이다. 인간을 일관성있는 잣대로 측정할 수 없는데다 모험이나 일상이란 말을 섣부르게 들이밀 정도로 구분이 안 되는 상황, 단계들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경험해본적이 있다거나 납득할 만하다면서 누군가에 대해 '안다'는 말로 내세울 수 있는게 뭐가 있단 말일까.

 좋아졌다, 싫어졌다, 어떤 감정일까, 내 감정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밀당을 해야만 긴장이 생기는 연애에서 진정성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보베리 부인의 생각은 어느 소설 속 인물보다 더 직접적으로 감정이입을 불러일으킨다. 책의 일정 부분이 보베리 부인의 일기를 통해 이야기되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이토록 사소한 서술은 소설적으로 그다지 주목받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주베르가 소설을 통해 보베리 부인의 삶을 재구성한다면 나는 어떤식으로 누군가에 대한 판단을 내릴까. 줄리언 바지니의<가짜 논리>에서는 부모님 얘기만 나오면 오이디푸스니 일렉트라 컴플렉스 등의 얘기를 꺼내 그 사람을 '안다'고 하는건 엉터리란 얘기가 나온다. 결국 주베르의 촌극을 비웃었지만 내가 그렇지 않닸단 법은 없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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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의 터미널. 서울로 가려는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졸음이 쏟아지는 얼굴로 프린트물을 보는 사람들. 사람들의 손에 쥐어진 시험지는 어떤 목표일까. 혹은 어떤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우리를 실어다줄 버스가 왔다. 부족한 잠 때문에 간질거리는 몸뚱이를 진정시키며 자리에 앉았다. 새벽 세시에 일어나 버스를 타는 지방 시험생은 무슨 생각을 할까. 그냥 한번 시험 보는 정도였는데 새벽부터 부산을 떨다보니 이 수고를 하면서 해야 할 뭔가가 내게 있을까란 생각이 떠올랐다. 생각한지 얼마 안 돼 잠이 와서 그 다음은 기억이 안 나지만.

 시험은... 역시나 내가 공부하지 않은 부분에서 나왔다. 역시 난 뻔한데다 뻔뻔하다. 어쨌든 시험이 끝났다. 당락은 며칠 후 결정 나니 그 전에는 신나게 놀 일만 남았다.

 지난 서울의 여름을 어떻게 보냈을까. 들어가는 곳마다 소름 돋을 정도로 강한 에어컨 바람은 사람 진을 쏙 빼놓는다. 계속 비가 와서 그렇게 후덥지근한 날씨도 아닌데 에어컨을 이렇게 틀어놓으면 어떻게 하나(어떻게 하긴, 우리 사랑은 빙글빙글 도는~) 종로에 갈까 이태원에 갈까하다 사람 많은 홍대에 갔다.(UV짱!) 서울에 왔으니 색다른걸 먹어야할 것 같아 인도 음식점에 가서 난과 탄두리 치킨 샐러드, 볶음밥을 시켰다. 시장은 반찬이라 샐러드가 좀 묵은 듯해도 볶음밥의 재료가 통조림에 있었던 것 같아 닝닝한데도 맛있었다. 친절하지도 무뚝뚝하지도 않은 인도분의 서빙도 맘에 들었다. 무엇보다 좋았던건 음식을 남기지 않은데다 요새 한창 중독된 밥 먹고 그릇 치워놓기를 깔끔하게 마친 것.

   

 밖으로 나오니 비가 오락가락한다. 놀고 싶은지 피곤해서 쉬고 싶은지 모르겠는 꼭 지금 나처럼. 홍대에 남아있는 몇 개 안 되는 골목을 돌고 상상마당에서 디자인 상품을 구경했다. 파랑 치마랑 어울릴만한 환한 노랑티를 사고 팅커벨 홀로그램 티도 샀다. 콘도 매니아에서는 콘도가 아닌 콘돔 구경을 했다. 다양한 체위에 대한 책자를 보고 그 실현 가능성의 불투명함에 대해 a와 궁시렁거리기도 했다. 상수역 근처에 있는 까페를 갈지 자주 가던 바에서 얼음을 갈고 민트잎을 잔뜩 넣은 모히토를 먹을지 달콤한 고민을 하면서 놀이터 쪽으로 걸었다. 빗발이 굵어지고 있었다.

 바는 소주 칵테일 주점으로 바뀌었고, 까페 역시 포차로 바뀌었다. 홍대의 모든 게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수 있는 것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몇몇 사람이 즐겨 찾고 좋아하는 곳이 아니라 짐작할 수 없는 누군가의 입맛을 맞추려고 다들 비슷해지는거다. 내가 갈 곳이 없었다. 가고 싶지도 않고. 서울까지 와서 내가 사는 곳에도 허다한 프랜차이즈 커피숍을 가기도 싫고 캐쥬얼한 술집에서 대낮부터 낮술을 먹을 수도 없는 일. 

 상수역에서 다시 홍대 쪽으로 오다가 운좋게 국수집을 발견했다. (상호가 요기였나) 방금 난이랑 볶음밥을 잔뜩 먹은 배 생각은 안 하고 a에게 ‘초간단’한 요기를 하자고 했다. 우선 국수를 시키고, 국수 하나로 둘이 먹긴 서운하니까 납작 만두를 시켰다. 국수 국물 맛이 아주 깔끔하니 오뎅국도 조미료 맛이 아닌 담백할거란 내 꼬임에 속아 오뎅 국물에 빠진 가래떡도 시켰다. 정말 멋진, 아니 맛있는 국수였다. 국물이 살짝 매우면서 시원했다. 무엇보다 감동적이었던건 냄비가 무거웠던 것. 헬렌 니어링의 책을 읽고나서부터 내게도 묵직하고 든든한 냄비 하나 있으면 좋겠다란 생각을 했는데 얕지만 무게가 제법 되는 국수집 냄비가 꼭 그랬다. 소박한 밥상을 보니 강경한 채식주의자보다는 원칙에 너그러운 사람(그게 자기합리화로 기울어지는게 아니라)이 더 낫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요새 구운 고기 대신 튀기거나 양념에 절인 고기를 가끔 먹는데 이건 너그러워지는건지 자기합리화의 포즈인지 모르겠다.

 돌아오는 길에 뭔가 읽고 싶어 가판대를 둘러봤다. 김여진 기사가 있는 씨네21을 볼까, 무비위크를 볼까. 패션잡지도 보고 싶고 페이퍼도 읽고 싶다. 결국 정가 할인 없이도 사고 싶은건 ‘인물과 사상’이었다. 근 6년만에 제대로 보는 것 같다. 최규석에 관한 글은 내가 늘 쓰는 글의 느낌과 비슷해 별로(최규석이란 사람에 대한 호불호와 별개로)였지만 ‘트루맛쇼’의 김재환 감독 인터뷰는 참 좋았다. 어떤 점이 좋았냐면 지는 게임에 내기를 건다는 부분. 모두가 이기는 곳에 돈을 거는건 재미없다고 한 부분. 나 역시 이기는 게임에만 돈을 거는 부류여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세상을 재미있게 만들어가는걸 보면 즐거워진다. 나도 누군가를 즐겁게 하고 싶지만 내 패는 너무 뻔하다. ‘미국인의 자동차 생활 꼭지’도 재미있다. 포드의 성능위주에서 고의적 진부화 단계를 넘어 SUV, 섹스와 자동차의 관계까지. 그가 여전히 글을 써줘서 참 감사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a의 엉덩이 사이에 발을 집어넣었다. 졸다 골든벨 퀴즈 맞추다 티격태격하다 집에 도착했다. 도착해 축축한 신발을 다시 신고 후끈거리는 초여름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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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1-07-04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원에도 인도카레 전문점있는데!!! 서빙보는 사람은 몰라도 요리사는 확실히 인도인인데!!!

Arch 2011-07-05 09:13   좋아요 0 | URL
수원 오라구요? ^^

조선인 2011-07-06 08:21   좋아요 0 | URL
네 네 네네네

숲노래 2011-07-05 0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어컨 없이 더위를 받아들이기란... 힘들겠지요..

Arch 2011-07-05 09:14   좋아요 0 | URL
힘들겠지요.. 그런데 전 좀 과하단 생각이 들었어요.

에디 2011-07-25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대에서 나름 이름있는 맛집인 '요기' 를 우연히 들어가셨다니 먹을 복(?)이 있으신거에요! : )

Arch 2011-07-26 10:04   좋아요 0 | URL
히히
 

 어제 강정마을 청원 서명에 좀 더 힘을 보태려고 아는 분들에게 부탁을 했다. 내가 있는 부서에서는 반응이 시큰둥했는데 다른 부서에서는 꽤 호의적이었다. 누가 시켰냐고 묻더니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한다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 서명을 해주시는거다. 내친김에 '종이컵 왠만하면 쓰지말지' 운동본부(그런게 있다면)에서 나온 팀장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며 시크릿식 '간절하게 바라면 이루어진다'란 강의까지 들을 수 있었다. 이 얘기는 좀 더 나중에 깊게 얘기할 기회가 생길 것 같다.

 몇 사람의 서명을 받고 주소를 기입하고 우편번호를 찾고 있는데 심상치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우리과 팀장님이었다.
- 아치씨, 지금 뭐해.
- 강정마을이라고 있는데요. 거기에 해군기지를 만든대요. 그런데 그곳은 제주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에요. 그런데 주민 동의도 받지 않고 마구잡이로 공사를 밀어부치고 있거든요. 그리고......
- 자네. 여기 일하면서 정부주관 공사에 반대하면 되겠어?
- 그게......
- 여기 있는 사람들 멍청해서 가만히 있는거 아냐. 다들 똑똑하고 잘났지만 안 하는거야.(왜요?) 자네만 생각있고 할말 있는거 아니네.

 평소 스타일이라면 조목조목 따지며 그 말이 왜 틀렸고 내가 왜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지를 얘기했을 것이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논리로도 감성으로도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감동시키는 능력이 없으니 자기만족으로 지껄였을테지만. 하지만 이번엔 슬몃 웃었다. 다시 또 얘기를 꺼내길래 말끝을 흐리며 배시시 웃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듯이 상대방 역시 하고 싶은 말만 할 것이다. 결국 그 순환을 벗어나려면 서로의 진심이 통해야하는데 일전에 팀장과 얘기한바로는 그분이나 나에게는 그럴만한 진정이 없다는걸 깨달았다. 결국 하고 싶은 말 대신 웃는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한참동안 고민. 민간인 사찰도 한다는데 서명한 사람들 조사해서 나뿐 아니라 서명을 해준 사람들에게 불이익이 생기진 않을까. 정말 똑똑한 사람 많은데 난 왜 시끄럽게 일을 만드는걸까. 고작 서명 하나인데 이게 뭐 그리 대수라고 이런 고민을 하고 앉았을까. 그런데 정말 이러다 짤리는거 아냐.

 밖에 나오니 비가 퍼붓고 있었다. 조금밖에 걷지 않았는데 운동화가 흠뻑 젖었다. 바지도 축축하게 젖어버렸다. 그제서야 맘이 진정됐다. 진정됐지만 진정으로 내 맘을 다 알았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등기로 보낸 우편물이 무사히 도착했음 좋겠다. (치니님, 혹시 보냈을 다른 분들의 서명도) 희망버스와 청문회가 한진중공업을 압박했듯이(그런데 왜 맘대로 협상을 해버린거에요.) 사람들의 희망과 간절한 바람이, 번거롭게 보내야했던 서명 우편이 절대보전지역 해제처분을 직권해제(너무 길다.)할 수 있는 작은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손바닥만한 걱정으로 그치는 일에도 이렇게 고민을 하는데 그분들은 어떨까. 그 맘에 가닿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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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11-06-30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