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터미널. 서울로 가려는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졸음이 쏟아지는 얼굴로 프린트물을 보는 사람들. 사람들의 손에 쥐어진 시험지는 어떤 목표일까. 혹은 어떤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우리를 실어다줄 버스가 왔다. 부족한 잠 때문에 간질거리는 몸뚱이를 진정시키며 자리에 앉았다. 새벽 세시에 일어나 버스를 타는 지방 시험생은 무슨 생각을 할까. 그냥 한번 시험 보는 정도였는데 새벽부터 부산을 떨다보니 이 수고를 하면서 해야 할 뭔가가 내게 있을까란 생각이 떠올랐다. 생각한지 얼마 안 돼 잠이 와서 그 다음은 기억이 안 나지만.
시험은... 역시나 내가 공부하지 않은 부분에서 나왔다. 역시 난 뻔한데다 뻔뻔하다. 어쨌든 시험이 끝났다. 당락은 며칠 후 결정 나니 그 전에는 신나게 놀 일만 남았다.
지난 서울의 여름을 어떻게 보냈을까. 들어가는 곳마다 소름 돋을 정도로 강한 에어컨 바람은 사람 진을 쏙 빼놓는다. 계속 비가 와서 그렇게 후덥지근한 날씨도 아닌데 에어컨을 이렇게 틀어놓으면 어떻게 하나(어떻게 하긴, 우리 사랑은 빙글빙글 도는~) 종로에 갈까 이태원에 갈까하다 사람 많은 홍대에 갔다.(UV짱!) 서울에 왔으니 색다른걸 먹어야할 것 같아 인도 음식점에 가서 난과 탄두리 치킨 샐러드, 볶음밥을 시켰다. 시장은 반찬이라 샐러드가 좀 묵은 듯해도 볶음밥의 재료가 통조림에 있었던 것 같아 닝닝한데도 맛있었다. 친절하지도 무뚝뚝하지도 않은 인도분의 서빙도 맘에 들었다. 무엇보다 좋았던건 음식을 남기지 않은데다 요새 한창 중독된 밥 먹고 그릇 치워놓기를 깔끔하게 마친 것.

밖으로 나오니 비가 오락가락한다. 놀고 싶은지 피곤해서 쉬고 싶은지 모르겠는 꼭 지금 나처럼. 홍대에 남아있는 몇 개 안 되는 골목을 돌고 상상마당에서 디자인 상품을 구경했다. 파랑 치마랑 어울릴만한 환한 노랑티를 사고 팅커벨 홀로그램 티도 샀다. 콘도 매니아에서는 콘도가 아닌 콘돔 구경을 했다. 다양한 체위에 대한 책자를 보고 그 실현 가능성의 불투명함에 대해 a와 궁시렁거리기도 했다. 상수역 근처에 있는 까페를 갈지 자주 가던 바에서 얼음을 갈고 민트잎을 잔뜩 넣은 모히토를 먹을지 달콤한 고민을 하면서 놀이터 쪽으로 걸었다. 빗발이 굵어지고 있었다.
바는 소주 칵테일 주점으로 바뀌었고, 까페 역시 포차로 바뀌었다. 홍대의 모든 게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수 있는 것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몇몇 사람이 즐겨 찾고 좋아하는 곳이 아니라 짐작할 수 없는 누군가의 입맛을 맞추려고 다들 비슷해지는거다. 내가 갈 곳이 없었다. 가고 싶지도 않고. 서울까지 와서 내가 사는 곳에도 허다한 프랜차이즈 커피숍을 가기도 싫고 캐쥬얼한 술집에서 대낮부터 낮술을 먹을 수도 없는 일.
상수역에서 다시 홍대 쪽으로 오다가 운좋게 국수집을 발견했다. (상호가 요기였나) 방금 난이랑 볶음밥을 잔뜩 먹은 배 생각은 안 하고 a에게 ‘초간단’한 요기를 하자고 했다. 우선 국수를 시키고, 국수 하나로 둘이 먹긴 서운하니까 납작 만두를 시켰다. 국수 국물 맛이 아주 깔끔하니 오뎅국도 조미료 맛이 아닌 담백할거란 내 꼬임에 속아 오뎅 국물에 빠진 가래떡도 시켰다. 정말 멋진, 아니 맛있는 국수였다. 국물이 살짝 매우면서 시원했다. 무엇보다 감동적이었던건 냄비가 무거웠던 것. 헬렌 니어링의 책을 읽고나서부터 내게도 묵직하고 든든한 냄비 하나 있으면 좋겠다란 생각을 했는데 얕지만 무게가 제법 되는 국수집 냄비가 꼭 그랬다. 소박한 밥상을 보니 강경한 채식주의자보다는 원칙에 너그러운 사람(그게 자기합리화로 기울어지는게 아니라)이 더 낫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요새 구운 고기 대신 튀기거나 양념에 절인 고기를 가끔 먹는데 이건 너그러워지는건지 자기합리화의 포즈인지 모르겠다.
돌아오는 길에 뭔가 읽고 싶어 가판대를 둘러봤다. 김여진 기사가 있는 씨네21을 볼까, 무비위크를 볼까. 패션잡지도 보고 싶고 페이퍼도 읽고 싶다. 결국 정가 할인 없이도 사고 싶은건 ‘인물과 사상’이었다. 근 6년만에 제대로 보는 것 같다. 최규석에 관한 글은 내가 늘 쓰는 글의 느낌과 비슷해 별로(최규석이란 사람에 대한 호불호와 별개로)였지만 ‘트루맛쇼’의 김재환 감독 인터뷰는 참 좋았다. 어떤 점이 좋았냐면 지는 게임에 내기를 건다는 부분. 모두가 이기는 곳에 돈을 거는건 재미없다고 한 부분. 나 역시 이기는 게임에만 돈을 거는 부류여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세상을 재미있게 만들어가는걸 보면 즐거워진다. 나도 누군가를 즐겁게 하고 싶지만 내 패는 너무 뻔하다. ‘미국인의 자동차 생활 꼭지’도 재미있다. 포드의 성능위주에서 고의적 진부화 단계를 넘어 SUV, 섹스와 자동차의 관계까지. 그가 여전히 글을 써줘서 참 감사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a의 엉덩이 사이에 발을 집어넣었다. 졸다 골든벨 퀴즈 맞추다 티격태격하다 집에 도착했다. 도착해 축축한 신발을 다시 신고 후끈거리는 초여름 밤공기를 들이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