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분을 자신있게 찍었고,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서 우리에게도 이런 대통령 한분쯤 있으면 참 좋겠다란 그저 순진한 생각으로 그분을 지켜봤다.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나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란 생각을 처음으로 불러일으킨 분이었고, 모든면이 흡족한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이었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믿을 수 있는 지점들이 분명히 있었다. 

 산골의 안 터지는 전화기로 굳이 당도한 문자 한통에 어안이 벙벙해서, 그런데도 잘 실감이 안 나서 뜬구름처럼 동네분들과 얘기를 하다가 

 관절염 때문에 잘 걷지도 못하는 할머니께서 고통받더니 참 힘들었나보네라고 하셨을 때도, 

 노부부가 번갈아가며 사람이 참 힘들었겠지 싶었다라고 할 때도, 

 여전히 실감할 수 없었는데 

 생전 그분 모습을 보니, 손녀딸에게 꽝꽝 얼은 아이스크림을 손으로 말랑말랑하게 해주고, 차가울까봐 휴지로 싸주는 그 모습을 보니 이제서야 우리가 잃어버리게 뭔지 분명히 알 것만 같았다. 

 우리가 얻은건 정치적 우위도 아니고, 다시 투쟁할 수 있는 원동력도 아니다.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걸 물론 경계해야겠지만, 아직은 슬퍼할 때, 

 시골 촌부처럼 그저 당분간은 슬퍼할 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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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5-25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복을 빕니다.
 


 섹스를 한번도 해보지 않았을땐 대부분 첫경험에 대해 상상하곤 한다. 누구와 어떻게 어디에서 할까. 뭐 육하원칙을 비켜난데도 상관없다. 단지 내 역사에 기록될 첫경험은 대체 어떤식일까란 궁금증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난 첫경험보다 그 후의 일들을 앞서서 걱정하고 있었다.

 내가 섹스에 환장하게 되면 어떡하지?

 얼음중독말곤 중독 증세가 없는 난 섹스를 시작하기도 전에 섹스중독을 겁내고 있었다. 중독의 속성상 ‘적당한 외면에서 나오는 품격’-다다이스트 마르셸 뒤상에 관한 책에서- 도 유지할 수 없을 뿐더러 그건 일테면 온갖 상징으로 엉클어진 여자의 지위에 관한거였기 때문이다.


 밝히는 년은 치우기 안 좋아하는 성격이래도 걸레란 소릴 들어야만 하고 수순처럼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한다. 섹스를 한번도 안 했던 내가 간접적으로 사회적인 폭력을 예감했던 것은 예민한 오지라퍼의 재간일 뿐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알게 모르게 그런 기제들은 여자의 사고와 행동을 제약한다. 그렇다고 이게 면면히 모든 상황에서 적용되는건 아니다. 예컨대 성적인 담론이 왕성하게 교환되는 자리에서 태연하게 자신은 그다지 성욕이 없다고 말하는 여자는 십중팔구 생뚱맞은 반응을 마주할지도 모를 일이니까.


- 아니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네요.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나지 못했나봐요.


 이어지는건 어떻게 자기는 안될까 싶어 끈적거리는 눈빛. 

 
 혹은,

-미개척지가 상당한 수준인가본데.


 라는 진단. 종알대는 입에다 주먹을 먹이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비폭력주의자이다.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나든 신이 주신 섬세한 감각의 소유자로서 성생활이 화려하든 여잔 늘 이분법의 수사에 걸려들어 있다.

창녀와 성녀의 극점을 말하는게 아니다.

 밝히지는 말되 너와 하는 상대와는 느껴라. 느끼지 못하면 느끼는 척이라도 해라. 여성은 사회적 관념을 수동적으로 답습하면서 성적인 역할극은 제대로 해내란 말씀이다. 슈퍼우먼은 결혼 전에도 통용되는 코드.

 무심코 던져대는 말들에 한번씩 발끈하는건 이 때문이다. 그게 어떤식으로 상처가 되는지 니가 아냐란 감정적이니 대응만은 아니다. 나도 고달프지만 그렇게 말하는 너도 대충 무슨 소린지 알거 아니냔 인간적 호소다. 뭐 대개는 자궁의 습기가 많은 히스테리 정도로 씨부려 감정적으로 개거품 물며 덤비게 하지만.


 나는 좋은게 좋은거다란 말을 정말 싫어한다.

 
 좋은게 좋은 것이 되기 위해선 좋은 것이 선결이 되어야는데 한번도 그 부분을 제대로 환기시킨 적이 없다. 나도 좀 별론거 알지만 뭐 어쩌겠어, 한번 웃고 넘어가는거지란 태도가 읽혀지는 말, 총칼 들고 싸울 정도로 격한게 아니라 버럭대며 대들 수도 없는 일. 정말이지 잠깐만 생각하면 될 일인데도 말이다. 헌데 아무 것에도 눈뜨지 않고, 암흑을 태초의 진리처럼 맹신하는 긍정적인 마인드라...... 긍정의 힘을 믿긴 하지만 이건 별로다.


 나 역시 긍정적이고 사회순응적인 지표를 행운처럼 이마에 붙이고 다녔다. 하지만 요게 자꾸 내 맘을 헝클어 놓는다. 주체적이란 단서가 붙어 막 되먹게 몸을 굴리진 않으나 여전히 남성욕구에 부합하는 여성성과 안락한 가정을 요새처럼 지키는 여성성. 다양한 욕구와 감정들이 엉키고 분발하고 누락된다.


 정해진 길은 없지만 가고자하는 방향은 있다.

사랑에 씌워진 환상성과 관음적인 시선을 벗어던지고 솔직하게 상대방을 배려할 수 있는 마음가짐 갖기. 개별적인 성을 존중하며 다름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강박이 아닌 차이를 인정하고 조화롭게 발전하는 관계.
이거 좀 이상하다고 인식하는 순간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진 분명해진다. 그건 이렇게 해라란 강권이 아니라 이건 어때란 질문 내지는 대안.
 

 첫경험을 우습게 시작했던 난 나날이 밝히고 밝히는 여자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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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2009-05-21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적당한 외면에서 나오는 품격'을 외면하기는 정말 힘들지요. 저 같은 경우는...

뷰리풀말미잘 2009-05-21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추천!

무해한모리군 2009-05-21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나도 밝히는 여자가 되고 싶소..
그러나 현실은 내눈에 섹쉬한 남자가 발견되지 않이하는 고통.. 삼고에 더해 삶의 네번째 고통으로 넣어주소서..

Arch 2009-05-21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처럼님, 그러니까요. 저도 배우고 싶은 태도 중에 하나예요.

미잘, 씨익^^

휘모리님, 음... 밝히는 여자에 대한 개념과 어떤 대상에 홀리느냐는 상관없는 것 같아요. 왜 내가 굳이 '밝히는 여자'운운을 했는지는 글에 잘 나와있으니까요.

무해한모리군 2009-05-22 09:16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성이 아니라 모든 관계가 상호 존중과 자기 감정에 솔직하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저 요즘 나의 고충은 의욕상실과 게으름에서 비롯된 관계맺기 부제에 있는듯해서 단 댓글이라오 ^^
 

란, 카테고리를 만들어서 산과 들로 알라디너를 찾아나서는 로맨틱 어드벤쳐 블록버스터급 아치의 여정을 그려보려고 생각 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는 안 될 것 같다. 더 이상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으니까. 만날 사람은 다 만났고, 오금이 저리고 팔이 아려올 정도로 강하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으니까. 혹은 그들을 만난 후, 내 얼굴에 있는 점의 개수까지 알아버린 그들에 의해 페이퍼로 뻥쳐대는 습관에 제동이 걸릴까 염려되니, 그래 사실은 늙고 기운 빠져서 여력이 생기지 않는다는게 제일 그럴듯하다. 아주 정확한 것일 수도 있고. 

  알라디너 급만남의 마지막 타자는(이래놓고 또 만나도 어쩔 수 없다. 말만 아치겠는가.) 서재 초창기 멤버이며 본인은 무슨 분야의 대가(당신과 나만 알아요)라고 했으나 내 보기엔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이었다. 정말 알라디너를 만날때마다 느끼는거지만 아니, 대체, 만나서 뭘하려고 우린 이렇게 달의 인력보다 여섯배는 강한 집착을 보일까란 의문이 든다. 알라딘에 최면이라도 걸린건지. 만나면 무조건 좋으면서도 만나기 전에는 온갖 잡생각들이 머릴 튕겨댔다.

 뭘 선물할까, 책은 많이 있을테고, 케잌을 사갈까? 뻔한 파리바게트의 뻔하지 않은 블루베리 쉬폰케잌은 이미 동이 나버려 역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아이스크림집에서 그분의 딸을 닮은 토끼 케잌을 샀다. 결국 케잌은 잘못된 선택이었던게 꼬마는 크림을 싫어했고, 아이스크림도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멋쩍게 웃으며 내가 거즘 다 먹었지. 에잇! 

 아냐아냐. 이런 후기를 쓰고 싶진 않아.  

 난 그분이 했던 얘기들을 적고 싶었다. 적은 이야기 그대로 페이퍼에 쓰고 싶었다. 하지만 왜 말을 듣지 않고 적냐고 물으면 배시시 웃으면서 딴청을 피울게 뻔해서 적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적는 순간 그분의 표정에서 피어나던 말의 느낌과 분위기를 지나치게 되잖아. 그래서 계속 들었다. 계속 듣고 궁금한건 물었다. 그분은 알라딘에 대해서, 여자로 사는 것, 아이들과 일상을 보내는 일, 자신이 갖고 있는 꿈,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얘기를 해주었다. 많은 이야기들이 모두 제자리를 찾아가듯 분명하고 명료했다. 그중에서 논쟁과 사람에게 집착한 얘기는 자꾸 허벅지를 쳐가며 공감이 돼서, 나랑 생각이 다른데도 이렇게 자석처럼 끌어당기는건 오직 당신의 '대가다운 능력'에 있는거 아니냐며 히죽히죽, 나도 집착이 너무 심해서 혼자 텅빈 전화기를 바라볼 때 가장 비참했노란 얘기를 덧붙이며 끄덕끄덕. 모든 이야기들은 의태어와 의성어, 말들의 잔치 사이사이로 스며들고 엉켜들며 반짝였다. 모처럼 나 역시 즐거웠다.

  페이퍼에서 얼핏 본 것보다 더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는 혼자서 잘 놀았다. 엄마와 내가 방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동안 낮잠 시간을 놓친 아이는 다른 때보다 더 부지런히 뛰고, 말을 했다. 그분은 가끔씩 남편이랑 이런 농담을 한다고 했다. '아이가 우리 몰래 무슨 약을 먹는게 아닐까.'란. 하지만 농담은 정말 농담일 뿐, 아이는 아이대로 내가 본 그분의 느낌을 고스란히 빼다 닮아 있었다. 나는 손가락 거미를 만들어 아이를 간지럼 태우고, 나보고 자꾸 이모이모라고 부르는 조그만 입술과 부드러운 머릿결을 거미 손가락으로 만졌다.  

 그리고 이젠 아이의 양말 벗은 발에 대해 얘기해야겠다. 

 발은 보드랍고 애처러운 느낌을 자아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이 발로 어떻게 뛰어다니고 장난을 칠지 상상이 안 됐다. 가슴에 없는 물렁뼈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와 물컹물컹 애잔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는데 아이가 벌떡 일어나 베란다와 부엌을 오가며 신나게 뛰는거다.  

 문득, 이 분이 가지고 있는 고민과 걱정, 염려스러움, 화남과 좌절도 혹 아이의 양말 벗은 발같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지켜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노심초사하게 만드는데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팔짝 뛰어오르는 아이의 발처럼, 그분의 갈망도 곧 폴짝 뛰어서 어딘가에 다다를거란. 

 기억하나요? 내가 자꾸 난 별거 아닌거에 엄살을 잘 부린다고 했더니 누구나 자신의 아픔이 더 크게 느껴진다고 했던 말. 나도 그 말 알고 있어요. 난 엄살 대왕이니까 그 말이 내 행동을 부추기거나 옹호하는 말이 될거란 것도 분명히 알고 있어요. 그런데도 덮어놓고 그렇다고, 자기 말만 믿으라고 하니까 괜히 좋아서 어쩔줄 모르겠더라구요.  

 사부로 모시겠다고 했다. 다른 분들에 대해선 페이퍼로 그들 각자의 인생에 대해서 쭉쭉 휘갈기듯 썼지만 적확하게 짚어낸 것의 반의 반절도 날 잘 모르는(아냐, 모른척 한게 분명해요. 내가 집착하라고! 누구만 스토커 기질이 있는건 아니에요.) 당신이 사부다운 전문성으로 날 알아보는 그날까지 그날 이후로도 계속 사부로 모시겠다란 말인줄 알고 있나요?  

 정체불명의 아치를 만나줘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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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0 2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20 2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20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21 0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씬1. 

 이런 기분이구나. 일을 하면서 처음으로 난 자신감에 넘쳤고, 나 자신이 정말 이 일을 재미있게 생각하고 있다란 느낌에 사로잡혔다. 내가 하는 말들과 행동은 격식이 있었고, 손님을 대하는 눈빛마저 의기양양했다. 평소에 내게 지적질을 해대는 매니저마저 뭔가에 홀린듯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옳지. 이런 느낌이었어!는 거의 확신에 가까워졌다. 

 내가 상황을 통제하고, 상황에 몰입하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위치란게 얼마나 매혹적인건지 정말 오랜만에 느꼈다. 억지로 하거나 누군가의 눈치를 받거나 하는 수 없이 하는 일이 아니라 내 일이고, 내가 잘 해낼 수 있다는 믿음. 부지불식간에 찾아온 인디언 썸머처럼 아주 반짝, 신나는 기분이었다. 

씬2. 

 처음엔 두명이었다. 마른 사람 네명이 간신히 앉을만한 벤치에 앉아 있던 사람은 딱 두명이었다. 그런데 한 두명씩 늘기 시작하더니 몸집이 제법 큰 네명의 성인이 옹기종기 벤치에 앉게 되었다. 시에스타 대신 한낮을 즐기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어 일하는 틈틈히 그들을 지켜봤다. 내쪽에선 뒷모습만 보이던 그들은 서로 무슨 얘기를 했고, 지나가는 친구에게 인사를 했다. 그들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남미 특유의 낙천적인 몸짓(이런걸 어떻게 말로 풀어내지?)으로 느긋하게 대화하는 모습도 . 선량하고 군더더기 없는 뒷모습이 귀엽고 예뻐서 한참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중 한명의 여자친구로 보이는 분이 다리 아픈 시늉을 하는게 보였다. 

 오른쪽 끝에 앉아있던 남자가 일어나 여자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벤치의 적정 인원수에서 넘쳐나던 부피감이 줄어드는가 싶었는데 여자를 앉힌 후 일어났던 남자가 여자 옆에 냉큼 앉는거다. 자신의 엉덩이 반절을 벤치 밖으로 빼놓고선. 그게 난 또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어 미술관 옆 동물원의 춘희가 사진기를 들이밀듯이 손가락을 네모지게해서 찰칵, 머릿 속에 저장했다.  

 

씬3.  

 밖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영화를 찍나했는데 드라마라고 했다. 김태희와 이병헌이 나오는거라며 주위 사람들이 술렁이는 소리도 들렸다. 옆가게를 빌려 드라마 촬영을 했고, 실제로보니 샤프한 이병헌이 몇번 뛰는 장면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병헌을 실제로 보는 것보다 더 재미있었던건, 

 테라스에 앉아 있다가 행여 카메라에 옷깃이라도 나올까 노심초사하던 불륜 커플이 안쪽으로 자리를 옮긴거며, 단지 촬영장 옆 가게란 이유로 우리 가게에 들러 콜라가 리필되냐는 질문을 하고선 테라스에 앉아 이병헌을 보는 젊은 커플의 깜찍한 발상이었고, 딸은 던킨 도너츠 가자는데도 굳이 우리 가게로 들어와서 역시 굳이 주문을 받는 내게 저 배우 이름이 뭐냐며 사인 받아도 되냐고 아무런 관련없는 내게 묻던 필리핀 여자였고, 주위의 시선을 느끼고 손짓하며 사람들을 불러모아 사인을 해주던 쿨한 이병헌의 자태였다.  

 이태원에 있다보면 이병헌보다 더 멋진 사람들을 보는 나로선 유명인이고 익히 알지만 직접 보는 것과 다르단 이유로 촬영장이 흥미로울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병헌, 생각보다 더 멋지던데. 음흐. 

 

씬4.  

 밖에다 널었던 빨래에서 비오는 날 돌아다니다 집에 들어온 개털 냄새가 났다. 섬유유연제의 강렬한 유혹에 콧털들이 한꺼번에 봉기하는 듯 했지만 내 냄새랑 섞이면 문제없을거란걸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다. 물론 내 방에서 홀아비 냄새 저리가라 싶은 퀘퀘한 냄새와 대체 이건 어디서 기원한지 모를 온갖 잡내가 풍기는걸 내가 아닌 동생을 통해 익히 알고 있지만 섬유 유연제를 쓰기는 뭐랄까, 속임수 같다. 늦은 봄 바람과 한낮의 열기로 바싹 마른 빨래에서 개털 냄새가 아닌 피죤이나 인디언 계열의 색감이 맡아지면 너무 포근해져서 자꾸 그 옷들을 끄집어내거나 여러겹 겹쳐 입으려는... 에잇! 억지다. 물이 오염된다고 굳이 빨래비누로 초벌빨래하고 세탁기를 자주 돌리면 안 될 것 같아 오랫동안 빨랫감 모아놓는데 냄새 난다고 섬유 유연제를 쓰기가 멋쩍고, 왜인지 향나는 아치는 전혀 아치스트랄답지 않달까. 

  

씬5.  

 별 얘기 안 했다고 생각했는데 남자와 1시간 가까이 통화를 했다. 부엌이었다. 전화가 점점 뜨거워지니까 손이 따뜻해진다며 변태적인 상상을 하는 나와 전철 소리로 시끄러운 다른 편의 그가 있었다. 우린 이제 슬슬 꽤 괜찮은 친구로 자리매김해가는 것 같다. 불발로 그친 연애라기보다는 알아서 속아주는 상황을 겪은 나에 대해 그가 적절한 코멘트를 해줬고, 난 그의 최근 소개팅에 대해 진심으로 감축했다. 

 이 남자와는 처음에 어쩜 이렇게 지루할 수 있냐고 할 수 있는 하품을 죄다 한 사이였는데... 자꾸 전화를 해서 대체 의도가 뭐냐고 캐묻게 됐던 남자였는데... 가까스로 두번째 만났을 때는 이거 왜 날 막대하냐니까 자긴 내가 너무 편해서 남자처럼 대하고 있는거라고, 남자들끼린 다 이런다고 해서 흥미진진하게 만들었었는데... 호기심과 어깃장으로 그와 잔 날, 그의 어머니가 새벽녘에 전화를 걸어와 의미심장하게 '지금 밥 했으니까 얼른 들어와서 밥 뒤집어야돼'에서 미친듯이 날 웃게 만든 남잔데... 이젠 아무것도 가리지 않고, 누가 더 버라이어티한 일상을 보태고 채웠는지 내기하듯 신나게 수다를 떨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관계가 무척 좋다. 연애 비스끄레무레한 국면으로 흐르지 않고, 있는듯 없는듯 계속 있다가 가끔씩 얼굴보고, 술도 먹고, 산책도 하고, 팔짱도 끼고, 그러다 분위기 좋으면 섹스도 할 수 있는. 얄팍한건가? 상처받지 않으려고 하는거야? 글쎄. 섹스를 위한 관계가 아니니 얄팍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니까 미리 도망치는 것도 아니잖아. 이렇게 좋은 감정으로 지내다가 어느 날엔가 서로 흔들리게 될 수도 있고, 여전히 딱 이 정도가 좋을 수도 있는거니까. 

 모처럼 생각났다. 시오노 나나미의 책. 

이 책엔 그녀가 봤던 영화들에 대한 얘기와 그녀가 영화를 보고 느꼈던 점들이 나온다.  그 중 가장 날 홀리게 했던건 

각자의 가정을 갖고, 같이 늙어가는 두 남녀가 가끔씩 만나 섹스도 하고 얘기도 하고 서로가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영화 얘기였다. 

 연애를 하면서, 혹은 같이 오랫동안 살기로 맘을 먹으면서 내가 가장 희구했던 점은 설레임이기도 했고, 갈망과 열정이기도 했지만 다른 무엇보다 서로의 역사를 기록해주는 성실한 관찰자의 입장이었는데 이 영화가 딱 그런 얘기인 것만 같았다.  

 오늘 대화가 즐거웠다고 버닝의 정도가 좀 지나쳤고 글로 쓴 것 만큼 우리 관계가 단순하진 않을 것 같지만 어쨌든 즐거웠다. 꽤, 흠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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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09-05-21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허 일기가 왜이리 분위기있는건지-_-
난 왜 이렇게 못하는 걸까요 ㅎㅎ

Arch 2009-05-21 09:52   좋아요 0 | URL
어? 일기 아닌데... 페이퍼라구요! 뽀님^^
뽀님도 잘 하고 있는걸요, 괜히 그러는거죠?
 
에스프레소 만들기 - 최고의 바리스타가 제안하는
가도와키 히로유키 지음, 김진경 옮김 / 우듬지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일하는 곳엔 에스프레소 머신이 있다. 평소에 커피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커피 전문점에서 수증기를 피워내고, 휘소리를 내는, 뚝딱 커피 한잔을 만들어내는 기계에 대한 호기심은 있었던지라 반가웠다. 다른 분이 알려준대로 포르타 필터에 갈아낸 원두를 수북히 담아 탬퍼로 강하게 눌러 머신에 장착, 내 생애 첫 에스프레소를 만들어봤다. 맛? 끝내줬다. 누군가 먹지 않는다면 장금이 부럽지 않을 요리솜씨이니 말 다했지. 

 무언가에 꽂혀 달아오름이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겠지만 에스프레소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졌다. 같이 일하는 분 중에서 서비스란 이런거구나를 몸소 보여주는 분께서 책을 빌려주셨는데 그 책이 바로 '에스프레소 만들기'이다. 전일본 바리스타 챔피언인 저자의 커피 만들기는 생각보다 쉬웠고, 실용서적이 갖춰야할 디테일한 면에서도 기대치를 만족시켜줬다.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원두를 골라서 볶고, 갈고, 커피를 내리는 전과정과 저자만의 커피 레시피. 커피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원두 갈기의 분쇄기 종류, 매시의 모양, 기구에 담기, 기계의 설정, 추출, 스팀밀크 만들기, 원두의 배합과 볶기에 대해 상세한 설명이 나와 있다. 커피란게 손맛이 발휘될 종목은 아니지만 커피 알갱이의 크기에서 갓 볶은 원두를 어떻게 보관하고 어떤 원두를 섞는지, 템퍼를 누르는 손의 힘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걸 보면 각 과정에서 저자의 개인적인 노하우가 들어있는건 시행착오를 겪게될 예비 바리스타들에게는 유용한 정보가 되리라 생각한다.  

 실용서적은 책만 읽어서는 안 된다. 책의 정보와 실제를 같이 병행해야, 앎이 체화되는 과정을 거쳐야 복합적인 상승체험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 역시 해봤다는거다. 저자가 일러준대로 조심스럽게 커피를 갈아 포르타 필터에 원두를 담은 후 탬퍼로 꾹 누른 후 톡톡 쳐서 가장자리에 남은 커피 가루를 내려주고 다시 평평하게 다시 한번 눌렀다. 에스프레소 머신의 버튼을 눌러 커피를 추출해봤다. 처음엔 신맛이 났고, 쌉싸름한 맛이 도드라지다 설탕을 넣지 않았는데도 달콤한 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마지막엔 아련한 맛이라 일컬어지는 이 모든 풍미를 잠재운 후 나른한 감각을 깨우는 맛이 잠복해있다 도드라졌다. 아아, 신맛만으로 신이 났는데 이건 너무 좋잖아! 쌉싸름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부드러운 까페라떼, 풍성한 스팀밀크와 계피 가루를 뿌린 카푸치노. 차가운 우유와 카라멜 시럽과 좀 더 진하게 내린 커피로 만든 나만의 아이스 카라멜 마끼아또까지.  

 '커피맛이 다 거기서 거기지'는 평생동안 커피믹스를 드시던 아빠가 헤이즐넛을 드신 후 더 이상 하지 않게 된 말이다. 나 역시 먹는데 유난을 떨거 없다란 생각을 지금도 하고 있다. 하지만 이왕 먹을거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맛이 뭔지 알고 싶다면 유난떤단 생각은 잠시 접어둬도 된다. 게다가 이 맛들은 또 어떤가. 

 2001, 전일본 바리스타 챔피언을 따게 한 Mon Cheri(프랑스어로 사랑하는 사람이란 뜻). 초콜릿과 핑크색 케잌 모양이 층을 이룸. 만드는 방법? 긴 유리잔에 화이트 초콜릿 소스를 넣는다. 스팀밀크를 붓고 잘 섞는다. 딸기 시럽을 넣고 폼드 밀크가 떠오르면 밑부분을 머들러로 살살 젓는다. 에스프레소 리스트레토를 넣은 후, 코코아 가루를 뿌리고 박하 잎으로 장식한다. 젤라토 콘 까페는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에 커피를 넣어 만든거고, 모카치노는 에스프레소에 스팀밀크로 얼룩을 낸 듯한 모양을 보여주고, 칵테일풍의 카페 사게라토, 초콜릿 맛 술인 크렘 드 카카오를 넣은 카페 알렉산데까지. 

 디자인 카푸치노로 만드는 나뭇잎과 하트, 눈사람은 어찌나 해보고싶음을 충동질하는지. 

 나는 커피 주문이 들어올 때 가장 즐겁다. 특히나 에스프레소. 잔을 데운 후 다른때보다 더 힘껏 템퍼로 누른 후 정성껏 추출한 커피엔 크레마가 생긴다. 크레마는 커피가 식는 것을 막아주고 향이 날아가는 것을 방지한다. 에스프레소에 각설탕 하나를 넣어 수저로 휘저은 후 잔을 입가에 갖다대는 손님들의 얼굴을 보면, 얼굴에서 이만하면 괜찮다란 표정이 떠오를 때면 난 서슴없이 뿌듯해져서 몸둘바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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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9 0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9 17: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09-05-19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용서적은 책만 읽어서는 안된다' 음...
저도 그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요 ^^

Arch 2009-05-19 17:07   좋아요 0 | URL
우리에겐 드립과 커피믹스, 그 밖에 요상한 차들이 있잖아요. 라고 했는데
hnine님은 에스프레소 머신이 있다면. 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