씬1. 

 이런 기분이구나. 일을 하면서 처음으로 난 자신감에 넘쳤고, 나 자신이 정말 이 일을 재미있게 생각하고 있다란 느낌에 사로잡혔다. 내가 하는 말들과 행동은 격식이 있었고, 손님을 대하는 눈빛마저 의기양양했다. 평소에 내게 지적질을 해대는 매니저마저 뭔가에 홀린듯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옳지. 이런 느낌이었어!는 거의 확신에 가까워졌다. 

 내가 상황을 통제하고, 상황에 몰입하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위치란게 얼마나 매혹적인건지 정말 오랜만에 느꼈다. 억지로 하거나 누군가의 눈치를 받거나 하는 수 없이 하는 일이 아니라 내 일이고, 내가 잘 해낼 수 있다는 믿음. 부지불식간에 찾아온 인디언 썸머처럼 아주 반짝, 신나는 기분이었다. 

씬2. 

 처음엔 두명이었다. 마른 사람 네명이 간신히 앉을만한 벤치에 앉아 있던 사람은 딱 두명이었다. 그런데 한 두명씩 늘기 시작하더니 몸집이 제법 큰 네명의 성인이 옹기종기 벤치에 앉게 되었다. 시에스타 대신 한낮을 즐기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어 일하는 틈틈히 그들을 지켜봤다. 내쪽에선 뒷모습만 보이던 그들은 서로 무슨 얘기를 했고, 지나가는 친구에게 인사를 했다. 그들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남미 특유의 낙천적인 몸짓(이런걸 어떻게 말로 풀어내지?)으로 느긋하게 대화하는 모습도 . 선량하고 군더더기 없는 뒷모습이 귀엽고 예뻐서 한참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중 한명의 여자친구로 보이는 분이 다리 아픈 시늉을 하는게 보였다. 

 오른쪽 끝에 앉아있던 남자가 일어나 여자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벤치의 적정 인원수에서 넘쳐나던 부피감이 줄어드는가 싶었는데 여자를 앉힌 후 일어났던 남자가 여자 옆에 냉큼 앉는거다. 자신의 엉덩이 반절을 벤치 밖으로 빼놓고선. 그게 난 또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어 미술관 옆 동물원의 춘희가 사진기를 들이밀듯이 손가락을 네모지게해서 찰칵, 머릿 속에 저장했다.  

 

씬3.  

 밖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영화를 찍나했는데 드라마라고 했다. 김태희와 이병헌이 나오는거라며 주위 사람들이 술렁이는 소리도 들렸다. 옆가게를 빌려 드라마 촬영을 했고, 실제로보니 샤프한 이병헌이 몇번 뛰는 장면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병헌을 실제로 보는 것보다 더 재미있었던건, 

 테라스에 앉아 있다가 행여 카메라에 옷깃이라도 나올까 노심초사하던 불륜 커플이 안쪽으로 자리를 옮긴거며, 단지 촬영장 옆 가게란 이유로 우리 가게에 들러 콜라가 리필되냐는 질문을 하고선 테라스에 앉아 이병헌을 보는 젊은 커플의 깜찍한 발상이었고, 딸은 던킨 도너츠 가자는데도 굳이 우리 가게로 들어와서 역시 굳이 주문을 받는 내게 저 배우 이름이 뭐냐며 사인 받아도 되냐고 아무런 관련없는 내게 묻던 필리핀 여자였고, 주위의 시선을 느끼고 손짓하며 사람들을 불러모아 사인을 해주던 쿨한 이병헌의 자태였다.  

 이태원에 있다보면 이병헌보다 더 멋진 사람들을 보는 나로선 유명인이고 익히 알지만 직접 보는 것과 다르단 이유로 촬영장이 흥미로울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병헌, 생각보다 더 멋지던데. 음흐. 

 

씬4.  

 밖에다 널었던 빨래에서 비오는 날 돌아다니다 집에 들어온 개털 냄새가 났다. 섬유유연제의 강렬한 유혹에 콧털들이 한꺼번에 봉기하는 듯 했지만 내 냄새랑 섞이면 문제없을거란걸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다. 물론 내 방에서 홀아비 냄새 저리가라 싶은 퀘퀘한 냄새와 대체 이건 어디서 기원한지 모를 온갖 잡내가 풍기는걸 내가 아닌 동생을 통해 익히 알고 있지만 섬유 유연제를 쓰기는 뭐랄까, 속임수 같다. 늦은 봄 바람과 한낮의 열기로 바싹 마른 빨래에서 개털 냄새가 아닌 피죤이나 인디언 계열의 색감이 맡아지면 너무 포근해져서 자꾸 그 옷들을 끄집어내거나 여러겹 겹쳐 입으려는... 에잇! 억지다. 물이 오염된다고 굳이 빨래비누로 초벌빨래하고 세탁기를 자주 돌리면 안 될 것 같아 오랫동안 빨랫감 모아놓는데 냄새 난다고 섬유 유연제를 쓰기가 멋쩍고, 왜인지 향나는 아치는 전혀 아치스트랄답지 않달까. 

  

씬5.  

 별 얘기 안 했다고 생각했는데 남자와 1시간 가까이 통화를 했다. 부엌이었다. 전화가 점점 뜨거워지니까 손이 따뜻해진다며 변태적인 상상을 하는 나와 전철 소리로 시끄러운 다른 편의 그가 있었다. 우린 이제 슬슬 꽤 괜찮은 친구로 자리매김해가는 것 같다. 불발로 그친 연애라기보다는 알아서 속아주는 상황을 겪은 나에 대해 그가 적절한 코멘트를 해줬고, 난 그의 최근 소개팅에 대해 진심으로 감축했다. 

 이 남자와는 처음에 어쩜 이렇게 지루할 수 있냐고 할 수 있는 하품을 죄다 한 사이였는데... 자꾸 전화를 해서 대체 의도가 뭐냐고 캐묻게 됐던 남자였는데... 가까스로 두번째 만났을 때는 이거 왜 날 막대하냐니까 자긴 내가 너무 편해서 남자처럼 대하고 있는거라고, 남자들끼린 다 이런다고 해서 흥미진진하게 만들었었는데... 호기심과 어깃장으로 그와 잔 날, 그의 어머니가 새벽녘에 전화를 걸어와 의미심장하게 '지금 밥 했으니까 얼른 들어와서 밥 뒤집어야돼'에서 미친듯이 날 웃게 만든 남잔데... 이젠 아무것도 가리지 않고, 누가 더 버라이어티한 일상을 보태고 채웠는지 내기하듯 신나게 수다를 떨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관계가 무척 좋다. 연애 비스끄레무레한 국면으로 흐르지 않고, 있는듯 없는듯 계속 있다가 가끔씩 얼굴보고, 술도 먹고, 산책도 하고, 팔짱도 끼고, 그러다 분위기 좋으면 섹스도 할 수 있는. 얄팍한건가? 상처받지 않으려고 하는거야? 글쎄. 섹스를 위한 관계가 아니니 얄팍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니까 미리 도망치는 것도 아니잖아. 이렇게 좋은 감정으로 지내다가 어느 날엔가 서로 흔들리게 될 수도 있고, 여전히 딱 이 정도가 좋을 수도 있는거니까. 

 모처럼 생각났다. 시오노 나나미의 책. 

이 책엔 그녀가 봤던 영화들에 대한 얘기와 그녀가 영화를 보고 느꼈던 점들이 나온다.  그 중 가장 날 홀리게 했던건 

각자의 가정을 갖고, 같이 늙어가는 두 남녀가 가끔씩 만나 섹스도 하고 얘기도 하고 서로가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영화 얘기였다. 

 연애를 하면서, 혹은 같이 오랫동안 살기로 맘을 먹으면서 내가 가장 희구했던 점은 설레임이기도 했고, 갈망과 열정이기도 했지만 다른 무엇보다 서로의 역사를 기록해주는 성실한 관찰자의 입장이었는데 이 영화가 딱 그런 얘기인 것만 같았다.  

 오늘 대화가 즐거웠다고 버닝의 정도가 좀 지나쳤고 글로 쓴 것 만큼 우리 관계가 단순하진 않을 것 같지만 어쨌든 즐거웠다. 꽤, 흠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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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09-05-21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허 일기가 왜이리 분위기있는건지-_-
난 왜 이렇게 못하는 걸까요 ㅎㅎ

Arch 2009-05-21 09:52   좋아요 0 | URL
어? 일기 아닌데... 페이퍼라구요! 뽀님^^
뽀님도 잘 하고 있는걸요, 괜히 그러는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