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 카테고리를 만들어서 산과 들로 알라디너를 찾아나서는 로맨틱 어드벤쳐 블록버스터급 아치의 여정을 그려보려고 생각 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는 안 될 것 같다. 더 이상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으니까. 만날 사람은 다 만났고, 오금이 저리고 팔이 아려올 정도로 강하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으니까. 혹은 그들을 만난 후, 내 얼굴에 있는 점의 개수까지 알아버린 그들에 의해 페이퍼로 뻥쳐대는 습관에 제동이 걸릴까 염려되니, 그래 사실은 늙고 기운 빠져서 여력이 생기지 않는다는게 제일 그럴듯하다. 아주 정확한 것일 수도 있고.
알라디너 급만남의 마지막 타자는(이래놓고 또 만나도 어쩔 수 없다. 말만 아치겠는가.) 서재 초창기 멤버이며 본인은 무슨 분야의 대가(당신과 나만 알아요)라고 했으나 내 보기엔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이었다. 정말 알라디너를 만날때마다 느끼는거지만 아니, 대체, 만나서 뭘하려고 우린 이렇게 달의 인력보다 여섯배는 강한 집착을 보일까란 의문이 든다. 알라딘에 최면이라도 걸린건지. 만나면 무조건 좋으면서도 만나기 전에는 온갖 잡생각들이 머릴 튕겨댔다.
뭘 선물할까, 책은 많이 있을테고, 케잌을 사갈까? 뻔한 파리바게트의 뻔하지 않은 블루베리 쉬폰케잌은 이미 동이 나버려 역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아이스크림집에서 그분의 딸을 닮은 토끼 케잌을 샀다. 결국 케잌은 잘못된 선택이었던게 꼬마는 크림을 싫어했고, 아이스크림도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멋쩍게 웃으며 내가 거즘 다 먹었지. 에잇!
아냐아냐. 이런 후기를 쓰고 싶진 않아.
난 그분이 했던 얘기들을 적고 싶었다. 적은 이야기 그대로 페이퍼에 쓰고 싶었다. 하지만 왜 말을 듣지 않고 적냐고 물으면 배시시 웃으면서 딴청을 피울게 뻔해서 적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적는 순간 그분의 표정에서 피어나던 말의 느낌과 분위기를 지나치게 되잖아. 그래서 계속 들었다. 계속 듣고 궁금한건 물었다. 그분은 알라딘에 대해서, 여자로 사는 것, 아이들과 일상을 보내는 일, 자신이 갖고 있는 꿈,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얘기를 해주었다. 많은 이야기들이 모두 제자리를 찾아가듯 분명하고 명료했다. 그중에서 논쟁과 사람에게 집착한 얘기는 자꾸 허벅지를 쳐가며 공감이 돼서, 나랑 생각이 다른데도 이렇게 자석처럼 끌어당기는건 오직 당신의 '대가다운 능력'에 있는거 아니냐며 히죽히죽, 나도 집착이 너무 심해서 혼자 텅빈 전화기를 바라볼 때 가장 비참했노란 얘기를 덧붙이며 끄덕끄덕. 모든 이야기들은 의태어와 의성어, 말들의 잔치 사이사이로 스며들고 엉켜들며 반짝였다. 모처럼 나 역시 즐거웠다.
페이퍼에서 얼핏 본 것보다 더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는 혼자서 잘 놀았다. 엄마와 내가 방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동안 낮잠 시간을 놓친 아이는 다른 때보다 더 부지런히 뛰고, 말을 했다. 그분은 가끔씩 남편이랑 이런 농담을 한다고 했다. '아이가 우리 몰래 무슨 약을 먹는게 아닐까.'란. 하지만 농담은 정말 농담일 뿐, 아이는 아이대로 내가 본 그분의 느낌을 고스란히 빼다 닮아 있었다. 나는 손가락 거미를 만들어 아이를 간지럼 태우고, 나보고 자꾸 이모이모라고 부르는 조그만 입술과 부드러운 머릿결을 거미 손가락으로 만졌다.
그리고 이젠 아이의 양말 벗은 발에 대해 얘기해야겠다.
발은 보드랍고 애처러운 느낌을 자아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이 발로 어떻게 뛰어다니고 장난을 칠지 상상이 안 됐다. 가슴에 없는 물렁뼈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와 물컹물컹 애잔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는데 아이가 벌떡 일어나 베란다와 부엌을 오가며 신나게 뛰는거다.
문득, 이 분이 가지고 있는 고민과 걱정, 염려스러움, 화남과 좌절도 혹 아이의 양말 벗은 발같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지켜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노심초사하게 만드는데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팔짝 뛰어오르는 아이의 발처럼, 그분의 갈망도 곧 폴짝 뛰어서 어딘가에 다다를거란.
기억하나요? 내가 자꾸 난 별거 아닌거에 엄살을 잘 부린다고 했더니 누구나 자신의 아픔이 더 크게 느껴진다고 했던 말. 나도 그 말 알고 있어요. 난 엄살 대왕이니까 그 말이 내 행동을 부추기거나 옹호하는 말이 될거란 것도 분명히 알고 있어요. 그런데도 덮어놓고 그렇다고, 자기 말만 믿으라고 하니까 괜히 좋아서 어쩔줄 모르겠더라구요.
사부로 모시겠다고 했다. 다른 분들에 대해선 페이퍼로 그들 각자의 인생에 대해서 쭉쭉 휘갈기듯 썼지만 적확하게 짚어낸 것의 반의 반절도 날 잘 모르는(아냐, 모른척 한게 분명해요. 내가 집착하라고! 누구만 스토커 기질이 있는건 아니에요.) 당신이 사부다운 전문성으로 날 알아보는 그날까지 그날 이후로도 계속 사부로 모시겠다란 말인줄 알고 있나요?
정체불명의 아치를 만나줘서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