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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 현암사 / 199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는 문단구분이 없는 소설이다. 한 문단이 하나의 소설인 셈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시야를 공격하는 그 단어들의 나열이 그다지 고통스럽거나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이야기 속으로 동화되는 작용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소설의 서사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의 머리 속에서 시간 개념이나 순서 없이 회상되는 기억을 엿보는 것과도 같다. 한편으로 그 무질서한 이야기들은 대단히 흥미롭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말해 주인공(혹은 작가)의 지극히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세계와 인간에 대한 기괴한 탐구이다. 이는 베른하르트 소설의 큰 특징이기도 하다. 줄바꾸기를 단 한 번도 하지 않는 이 고집스러운 소설은 요약이 불가능한 작가적 신념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베른하르트는 스스로를 일컬어 ‘이야기 파괴자’라고 부른다. 그것은 이 소설이 자서전이면서 동시에 소설이라는 애매한 위치에 서 있는 점에서도 증명된다. 한편으로 고정된 플롯 속에서 진행되는 서사란 그가 말하고자하는 주제에 정면으로 배치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작가는 고전적 서사를 파괴하고, 인물에 대한 두서없는 묘사를 하며, 난데없이 신랄하게 문명 비판을 하기도 하며, 어느 사이에 그 장황한 서술을 끝맺음한다. 또한 그의 어조는 굉장히 반복적이다. 그의 문장은 다음 문장을 확대시켜가면서 끊임없이 맞물려진다. 설명에 대한 설명, 부연 설명, 확대 설명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그들은 점점 더 많은 정신력을 (그들 머리의) 창밖으로 내던지는데, 이와 동시에 정신력은 그들의 머릿속에서 점점 더 많아지고 따라서 당연히 점점 더 위협적이 되며 결국 그들의 정신력을 (그들 머리로부터) 내던지는 속도가 정신력이 불어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기에 이른다. …… 모든 미친 철학자의 머리도 결국에는 정신력을 빠른 속도로 내던지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에 폭발한 것이다.(토마스 베른하르트 작, 윤선아 옮김,『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현암사, 1997) p. 34

인용한 부분에서 작가는 미친 철학자에 대한 서술을 하기 위해서 집요하게 반복하는 문장을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삶에 대한 서술이 끊임없는 반복과 확대의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베른하르트는 철저한 재앙의 사상가이기도 하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작가의 애정은 매우 역설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비트켄슈타인의 조카』와 『옛 거장들』에서 화자는 공통적으로 인간을 증오하고 자연을 증오하며 예술을 증오한다. 동시에 화자는 인간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며 예술을 미친 듯이 사랑한다. 그러한 이중적인 면모는 화자와 대상의 거리를 매우 밀접하게 만든다. 사랑하고 증오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그 대상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그 속성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탐구한 뒤라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른하르트의 이러한 이중적인 서술들은 ‘애증의 미학’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의 큰 이야기 줄기는 폐병을 앓아왔던 나와 정신병을 앓아왔던 파울―즉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의 우정이다. 이 우정은 기묘하고 정신병적인 것이지만, 파울이 죽을 때까지 계속 유지된다. 베른하르트의 자전적 수기 혹은 자서전 형식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는 병적이고 예술적인 인간형에 대한 탐구 또한 엿볼 수 있다.

파울 비트겐슈타인과 그의 삼촌이자 철학가인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그들의 가문이 낳은 돌연변이들이었다. 비트겐슈타인 가문은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정신과 예술의 영역에는 가치를 두지 않았다. 루드비히와 파울은 바로 그 정신과 예술의 세계를 사랑하는 광인들이었다. ‘파울은 삼촌 루드비히 만큼이나 철학적이었고 반대로 철학적인 루드비히는 조카 파울만큼이나 미치광이(위의 책, p.38)’였던 것이다. 그리고 루드비히는 철학으로 유명해졌고 파울은 광기로 유명해 졌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두 사람의 두뇌는 모두 너무나 비상하였지만 한 사람은 자신의 두뇌를 세상에 알렸고 다른 한 사람은 그러지 않았다. 나는 심지어 한 사람은 자기의 두뇌를 세상에 발표했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의 두뇌를 실천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같은 책, p.39)’ 광기를 어떻게 발현하느냐에 따라서 철학자와 미치광이의 구분이 생기는 것이다. 
 

한편으로 그 구분은 파울과 베른하르트(이후의 글에서 화자를 베른하르트라고 지속적으로 칭하는 것은, 이 소설이 자전적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에게도 적용된다. 파울과 작자의 차이는, ‘파울이 광기에 완전히 지배당한 반면에 나는 파울의 광기만큼이나 지독한 나의 광기에 단 한 번도 완전히 지배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른바 그의 광기와 하나가 된 반면 나는 평생 나의 광기를 이용하고 지배했다.(같은 책, p.32)’ 이는 베른하르트가 작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반면, 파울은 단지 환자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킨다. 통제되지 않은 광기는 아무리 천재적인 영감을 내포하고 있다고 해도, 결국 정신병원의 침대 위에서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광기를 종이 위에 올려놓은 철학자와 작가는, 광기를 생산적으로 사용한 셈이다. 그러므로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과 베른하르트에게 광기는 한편으로 창조적인 영감의 보고인 것이다. 철학자와 작가는 자신의 광기마저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철저히 이용할 수 있는 존재이다.

반면 비상한 두뇌와 광기를 그대로 실천한 파울의 삶은 고단하고 고통스러웠다. 그는 자기의 광기를 다스릴 수 없었고, 자기의 광기에 지배당하는 것에 속수무책이었다. 파울은 종종 그의 광기에 대한 세상의 몰이해에 부딪혔으나, 해명은 불가능했다. ‘뻔뻔스러운 철학자’는 세기적으로 남은 반면, ‘뻔뻔스러운 미치광이’는 다만 초라하고 쓸쓸한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베른하르트에 의해서 씌어지지 않았다면, 우리에게는 파울의 정신적이고 광적인 삶에 주의를 기울일 이유조차 없는 것이다.

베른하르트가 파울을 처음 만난 것은, 교향곡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였다. 베른하르트 자신도 음악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교향곡에 대한 파울의 광적인 열정은 섬뜩할 정도라고 표현했다. 또 파울의 식견은,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달랐다. 왜냐하면 그는 예를 들어 그가 들은 음악, 찾아간 연주회 그리고 공부한 거장들과 교향악단들을 거의 쉴새 없이 비교할 수 있었고 이 비교를 언제든 다시 검증(같은 책, p.26)’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한 폭넓은 식견은 마치 ‘기억의 천재 푸네스(보르헤스의 단편 제목.)’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푸네스가 너무 뛰어난 기억력으로 인해 정보의 중요도를 판단하지 못한 것과 달리, 파울은 기억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그것을 언제든지 재생할 수 있었다는 점이 다르다. 오페라에 대한 파울의 광적인 정열은 빈에서 공연된 오페라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할 정도에 이른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오페라는 그보다 더 철저하고 더 지독한 실패는 있을 수 없을 만큼 결딴(같은 책, p.41)’이 나고 말았으니 말이다.

또한 파울은 어떤 분야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베른하르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서슬되고 있다. 베른하르트가 파울에게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해도 얘기할 수 있고, 그 주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같은 책, p.51)’는 찬사를 바칠 정도로 말이다. 또한 베른하르트가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분야에 대해서도 파울은 종종 높은 식견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자주 내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해 주었다. 나는 자주 내가 아니라 그가 철학자이며, 내가 아니라 그가 수학자이고, 내가 아니라 그가 전문가라고 생각했다(같은 책, p.79)’는 부분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베른하르트에게 있어서 파울과의 우정이 어떤 깊이를 지닌 것이었는지를 파악하게 한다. 파울과의 우정 속에서 베른하르트는 영감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파울이라는 존재를 전면에 내세운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이 그 단적인 결과이다.

한편 두 사람은 통찰력이라는 측면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파울은 구걸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러나 파울은 그 가난을 만든 구조와 가난한 사람들이 그러한 동정을 받기 위해 비열한 수를 쓸 수 있다는 사실에는 모른 척 했다. 그는 오로지 표면적인 가난의 모습만을 보았을 뿐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파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고 베른하르트는 말한다. 그러나 베른하르트는 이와 반대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단 한 번도 ‘피상적인 부분’만 보는 것으로는 만족해하지 않았다. 이는 독특한 인간애를 발휘하는 파울과, 작가적인 통찰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는 베른하르트의 모습을 대비시킨다.

동시에 미치광이이자 삶의 철학자이기도 한 파울과 베른하르트는 이 시대를, 이 세계를 거부하는 인물들이었다. 두 사람은 어떤 사람에 대해서건, 어떤 사안에 대해서건, 지독한 독설을 퍼부어댈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독설들은 세계에 대한 지독한 저주이자 동시에 지대한 관심의 표명이기도 하다.

그는 남을 관찰하는 일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냉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늘 남의 잘못을 비난할 이유가 있었다. 일단 그의 눈에 들어온 사람치고 최소한 몇 분 동안 그에게 비난당하지 않는 법은 결코 없었다. 그들은 벌써 혐의를 뒤집어썼으며 범죄를 저질렀거나 아니면 최소한 어떤 범행을 저질렀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무엇이든 곧 우리의 혹평을 받았다. 우리는 몇 시간이라도 자허 호텔 카페 테라스에 죽치고 앉아 사람들을 헐뜯었다. 우리는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온 세상을 철저하게 헐뜯었다. (같은 책, p.83)

그들은 현대 사회를, 그리고 역사를 철저히 부인하는 대화를 종종 나누었다. 그들은 ‘과거도 미래도 없으며 원자학적인 우둔함의 제물이 된 현대 사회’를 경멸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문제삼듯이 예술과 예술가를, 정부를, 국회를, 전 민족을 문제삼았다. 하지만 그들은 ‘자연을 사랑했고 증오했으며 그와 똑같이 예술을 사랑하고 증오했다(같은 책, p.139).’ 이것은 지극히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발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미치광이와 정신착란증, 그리고 폐병 환자, 예술가와 작가의 숙명이기도 한 것이 아닐까. 광기는 어쩔 수 없이 통찰력을 동반한다. 그것은 병자 또한 마찬가지다. 병자는 건강한 자들의 위선을 관통할 수 있다. 세상은 건강한 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으며, 병자가 잠시 내어준 자리는 그들이 당당하게 차지하고야 만다. 병자와 미치광이는 아웃사이더이며, 세계에 단 하나의 발만 걸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건강한 자와 미치지 않은 자(일명 정상인)들과 끊임없이 부딪히는 삶에 한 발을 걸치고 있지만, 나머지 한 발은 광기와 죽음에 걸치고 있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는 병과 죽음에 관해서도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먼저 정신과 의사들에 대한 극렬한 증오를 표명하는 데에서 현대 의학의 맹점을 꼬집는다. 의사들은 ‘비인간적이고 살인적이며 치명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치료를 한다. 심지어 정신과 의사는 ‘가장 무능력한 의사이며 설사 학문적으로 뛰어나다 해도 강간 살인범에 더 가깝다(같은 책, p.15)’고 까지 비난할 정도다. 의사들은 ‘다른 모든 의사가 그러듯이 자신을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해 (환자를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매 순간 다른 학술 용어로 도피(같은 책, p.14)’했다. 의사들은 환자에 대한 무지와 무능력을 감추고, 치료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그들의 관료적인 치료와 환자를 대하는 무관심한 태도는 환자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의사들은 베른하르트가 직접 두 눈으로 죽어나가는 걸 본 환자들을 치료하듯이 그를 치료했고, 그들에게 한 말과 똑같은 말을 그에게 했으며, 그와 나눈 농담과 똑같은 농담을 그들과도 나누었다. 따라서 병자는 자신의 앞길도 이미 죽은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베른하르트는 파울이 십 년이 넘도록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한다. 친구의 죽음을 예감하고, 그가 죽음으로 다가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역시 그들 우정의 한 면모였다. 또한 죽음을 예감하는 사람은 매 순간 광기어린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는 매일이 영원히 소멸되는 모습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들은 내일이 존재할 수 없다는 가능성 또한 잊을 수 없다. 삶과 죽음에 대한 편집증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것은 삶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지독하게 증오하게 만든다.

광기는 극단적인 삶을 부른다. 파울과 베른하르트는 치열하게 삶을 산 인물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그들의 모든 가능성을 넘어서까지, 모든 것을, 모든 가능성을 넘어서까지 이용했다. 그들은 그들 자신과 모든 것을 병적으로 돌보지 않았다. 파울의 삶은 자꾸만 되풀이하여 정신병원에서 끝나고 단절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주변 세계에 대해 극도로 반항하고 정신병원에, 혹은 폐병원에 실려 들어갔다. 그들은 세계 속에서 벗어나려고 정신병원과 폐병원으로 돌아와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그들의 광기는 보도블록에 정확하게 발을 내딛거나 끊임없이 수를 세는 일처럼 기하학적이고 대칭적이며 수학적인 것에 집착하는 편집증으로도 나타났다. 한편 베른하르트는 한 곳에 절대로 머무를 수 없는 불우한 향수병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일반적으로 인간 친화적이며 긍정적으로 묘사되곤 하는 자연의 본질을 꿰뚫어본다. 자연은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악질적이고 가차없는 냉혹성 또한 지니고 있는 것이다. 자연은 폐병 환자가 의사들의 요구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견뎌내야 하는 장소이다. 베른하르트는 자신은 인공적인 도시에서 비로소 숨을 쉴 수 있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그의 약한 폐는 도시에서 살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이동하는 자일 수밖에 없다. 그의 딜레마는 다시 시작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듯 나는 늘 내가 없는 곳에, 이제 막 도망쳐 나왔던 그 곳에 있으려 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내가 금방 떠나 온 곳과 달려가는 곳 사이, 자동차에 앉아 있을 때만 행복하다. 오직 자동차 안에서만 그리고 가는 길에서만 나는 행복하다. 나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불행하게 도착하는 사람이다. 내가 도착하는 곳이 어디든 상관없이 도착하면 나는 불행하다. 나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견뎌 내지 못하고 떠나 온 곳과 가는 곳 사이에 있을 때만 행복한 인간 중 하나이다. ……나는 가장 행복한 여행자이고 가장 행복한 움직이는 사람이며 가장 행복한 차 타는 사람이고 가장 행복한, 차를 타고 떠나는 사람이며 그 누구보다 불행한 도착하는 사람이다. (같은 책, p.119~120)

베른하르트에게 시골은 정신적인 고통을 주고, 도시는 육체적인 고통을 준다. 즉 그의 광기는 이 세상에 어느 곳에서라도 만족하게 살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이동하고 끊임없이 이동한다. 그 소모적인 여행의 도중에서만 그는 유일하게 만족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정신병적인 한 인간에게 자기 자신조차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존재인지 말해주고 있다. 그가 끊임없이 이동하는 것은, 그가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서, 현재에서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인 것이다.

한편으로 베른하르트의 작가적 양심은 자신의 영감과 실존을 위해 파울과의 우정을 이용하였다고까지 고백한다. 그는 죽어가는 친구로부터 ‘살아남는 데 필요한 힘의 대부분을 얻어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파울이 자신의 실존을 좀더 견디기 쉽게 해주기 위해, 적어도 그의 삶의 기간을 연장해주기라도 하기 위해 죽어야 했다고까지 생각했다. 파울이 죽은 다음에 작가는 단 한 번도 그의 무덤에 찾아가지 않았다고 소설을 끝맺고 있다. 그러한 고백은 그들 우정의 기괴함을 다시 한 번 증명해주기도 한다. 그들은 많은 일을 함께 했으며, 많은 대화를 나눴으며, 서로를 삶의 동반자로도 여겼으나, 동시에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그러하듯 서로에게 무용한 존재였다. 광기와 죽음은 철저히 자신의 영역이며, 아무리 가까운 친구나 근친이라도 대신해줄 수 없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는 파울과 베른하르트라는 이처럼 삶과 예술 속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두 기인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광기는 예술적 영감을 가져다주는 보고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삶을 파괴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기도 하다. 광기는 철학자와 작가를 탄생시킬 수도 있지만, 정신병원의 침대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미치광이를 탄생시키기도 한다. 예술가는 자신의 광기를 잘 통제해야 건강하고 정상적인 세계―광기를 철저히 통제하거나 광기를 무시하는 세계―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광기는 정신의 선물이자 육체의 저주이다. 또한 광기는 삶을 치열하고 극단적으로 살게 하는 원동력이다. 통찰력과 관통력, 창조력을 지닌 미치광이들은 우리 시대의 기형적 괴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한 광인인 파울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정상인과 광인으로 구분되어진 세상 속에서 그는 격리되어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구분에는 인간의 다양성과 창조성을 무시하는 체제적 요구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베른하르트는 소설과 수기라는 장르를 없애고, 이야기와 생각이라는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창조적인 실험을 한 셈이다. 파울이 광기를 삶 속에서 실천했다면, 작가 베른하르트는 종이 위에 실천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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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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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여섯 살의 인도 소년이 가족을 모두 잃고 태평양 바다 한 가운데에서 227일 동안 살아남는다. 이백 오십 킬로그램이 나가는, 벵골 호랑이 한 마리와 함께.

극한 상황에서의 인간의 생존 능력은 정말로 재미있는 소재다. 우리 대부분은 지극히 평화로운 삶 속에서 살고 있다. 물론 지금 이 순간, 지구의 어느 곳에서는 폭탄이 터지고, 누군가는 살해당하고, 누군가는 물에 빠지고, 누군가는 맹수에게 목숨을 앗기고 있을지 모른다. 누구나 다 그 재난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연의 산물이다. 그렇지만 재난이 일어나기 0.1초 전까지는, 재난은 없는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재난’의 경험을 갖고 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것은 아니지만, 나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검은 물체-자동차-에 받혀본 적이 있다. 버스에서 내릴 때, 횡단보도를 건널 때, 내가 그 재앙을 겪게 되리라는 걸 예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일어난 일은, 그냥 일어난 일이다. 어쩔 수 없다. 원망과 후회는, 일의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얼마나 빨리 파괴된 일상을 원래대로 복귀시키느냐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파이는 그 일을 해냈다. 그는 살아남았고, 위대해졌다. 그 위대함은 무엇보다도 그가 특별한 인간이 되었다는 데 있다. 그는 자신이 믿는 ‘신’을 태평양 바다 한 가운데에서 발견했다. 무엇보다 그가 살아남음으로 신의 존재는 그 안에서 증명된 것이다. 그는 어떤 조난자보다 오래 살았다. 그것도 누군가를 ‘길들이면서’ 말이다.

그의 아버지가 동물원을 운영했었다는 것은 복선이 된다. 그렇지 않았다면 열 여섯 살의 소년이 도대체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아무튼 동물원 운영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존재다. 그래서 파이의 아버지는, ‘동물원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뭘까요?’라고 적힌 질문을 따라 가면 거울이 나오는 기지를 발휘하고 있다. 아버지는 파이와 그의 형에게 동물을 사랑하는 방법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동물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각인시켰다. 그리고 서열이야말로 동물의 생존을 지배하는 법칙이며, 동물은 ‘지배적인 인간’에게 복종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동물은 인간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두려워해서 공격한다. 인간이란 동물에게 ‘특이한 종족’이다. ‘조련사의 꼿꼿한 자세, 차분한 태도와 흔들림 없는 눈길,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가는 태도, 이상한 소리(채찍 휘두르는 소리나 호루라기 부는 소리)’ 등이 그런 증거다.

또 한편 동물원의 경험은 파이에게 동물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인식을 길러주었다. 야생의 동물이어야만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다. 동물의 자유는 인간의 자유와 완전히 다르다. ‘야생동물들은 가차 없는 서열체계의 지배를 받는다. 언제나 공포를 느끼고, 먹잇감은 부족하고, 영역을 사수해야 하고, 기생충을 참아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자유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야생동물들은 공간도 시간도 자유롭지 못하고, 관계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발언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동물원은, 인간의 집과 같은 역할을 동물에게 한다. 풍부한 먹이, 적당한 기후와 자연 조건, 천적이나 동족으로부터 영역을 사수해야 하는 긴장감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동물을 가두는 것이 최상이라는 말이 아니다. 동물에게는, 그 영역이 밀림의 한 부분이든 동물원의 좁은 부분이든 크게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동물원은 이미 확고한 동물의 영역이 되어 있는 셈이다. 동물원에서 적응하고 있는 동물을 갑자기 쫓아내는 행위는, 우리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누군가가 우리에게 자유라고 외치며 밖으로 내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동물은 관성의 법칙에 충실하며, 장기판의 말처럼 규칙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파이에게 동물은 같이 공존해야 할 위험한 적이었다. 그리고 호랑이 리처드 파크는 어떠한가. 그는 파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만약 리처드 파크가 죽는다면, 파이에게는 오로지 고독과 절망만이 남겨질 것이다. 호랑이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태평양 바다 한 가운데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그것은 파이에게 의지를 주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야말로 삶을 흥분하게 만들고, 깨어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겪기 힘든 그 공포가, 파이에게는 태평양의 극한 상황에서 주어졌다. 파이는 호랑이를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호랑이는 이 작은 주인에게 복종했다. 도대체 사방에 물밖에 보이지 않는 방수 보트에서, 이 사람은 어떻게 나에게 먹이를 주는 것일까? 그리고 이상한 호루라기 소리는 동물원에서 얌전히 자란 유순한 청년 호랑이를 겁먹게 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이 실화 같지 않은 실화는, 실제 경험자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방수보트 위에서의 조난기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리얼하다. 처음부터 배 위에 두 개체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얼룩말, 오랑우탄, 쥐, 하이에나도 함께 있었다. 얼룩말과 오랑우탄은 하이에나에게 잡아먹혔고, 하이에나는 리처드 파크에게 잡아먹혔다. 심장을 멎게 할 정도의 공포 속에서, 파이는 살 길을 찾는다. 방수보트는, 조난자를 위한 보물 상자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중요한 물과 식량, 그리고 물을 만들 수 있는 태양증류기나 몸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담요 등은 파이의 생존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닳아지고, 없어지고, 찢어졌다. 태양과 소금물, 파도와 벼락 등은 시시각각으로 파이와 리처드 파크의 삶을 노린다. 채식주의자였던 파이는, 한 번의 살생 이후, 거침 없는 사냥꾼이 된다. 모든 종류의 물고기와 새까지 먹어치울 수 있는 비위를 갖게 된 것이다. 파이는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에서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얻어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 먹여살려야 하는 대형 호랑이를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 놀라운 생존기는,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파이가 잠시 눈이 멀었을 때, 눈 먼 다른 조난자를 만나는 장면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슬프게도, 조난자는 리처드 파크의 밥이 되고야 말았다.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만난, 대화를 나누는 인간을 먹이로 줄 수밖에 없었던 파이를, 비난할 수만은 없다. 파이는 수도 없이 죽었다 다시 살아났다.

한편 파이는, 기묘한 화초섬에서 식물의 먹이가 된 인간의 치아를 목격하기도 한다. 현대의 과학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식충섬에서 다시 한 번 죽음의 위기에 처한다. 지구에는 아직도 우리가 모르는 생명체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러나 파이의 섬 이야기는, 눈으로 볼 수 없으므로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마침내 그들이 멕시코에 도달하는 순간의 희열을 잊을 수 없다. 리처드 파커와 파이의 관계는, 여타의 동물 이야기에서 보이는 감동의 수순을 전혀 밟지 않는다.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뒤, 리처드 파커에게 사랑한다고 외치는 파이의 감정은, 본능으로 움직이는 호랑이를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파이에게 있어 리처드 파커와의 이야기는, ‘사랑이 얼룩진 악몽’인 것이다. 그런데 리차드 파커는 그렇게 불쑥, 파이의 곁을 떠나버릴 수 있었을까? 단 한 번의 뒤돌아봄이나 망설임도 없이, 리처드 파커는 밀림 속으로 쑥 사라져버린다. 그렇게 생사의 위기를 함께 겪은, 파이와 생명을 나눠가진 호랑이는, 그저 앞으로 나아갔을 뿐이다. 밀림 속으로. 그러나 리처드 파커가 돌아봤다고 말한다면, 그렇게 믿고 싶다 해도, 그것은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 천진성이, 자연스러움이, 이 이야기를 더욱 빛나게 했고, 리처드 파커를 더욱 신성하게 만들어주었다.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똑바로 삶을 향해 걸어나가는 그 본능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경이로운가. 자신만만하게, 전 존재를 걸고 순도 높게 무언가에 몰두하는 그 순간, 동물은 대소를 불문하고 너무나 아름다워보인다.

제 3부는 파이가 탄 배가 추락한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일본인 두 사람과의 대화가 주를 이룬다. 파이의 이야기는, 그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파이는 결국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간이 나오는, 끔찍하지만 ‘있을 법한’ 이야기 말이다. 혹자는 호랑이가 나오는 파이의 이야기가 거짓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거짓이라면, 엄청나게 교활하면서도 놀라운 거짓말이 아닌가. 그리고 나는 이토록 재미있는 ‘거짓말’은 최근에 본 적이 없을 정도다. 서술은 재치가 넘치고, 유머러스하고, 비극적인 상황들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따뜻하다. 도대체 열 여섯 짜리 소년이 어떻게 이토록 영리할 수 있단 말인가, 라는 질문도, 이야기의 독창성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정도다.

‘파이 이야기’는 새삼 이야기의 즐거움을 깨닫게 해 주었다. 현재 영화화가 되고 있다는데, 소설로 읽은 감동을 영화가 어떻게 보여줄지 기대가 된다. 물론 실망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내게는 너무도 훌륭한 파이와 리처드 파커가 눈에 잡힐 듯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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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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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준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비극적 주인공과 같은 처지에 처할 수 있다는 ‘공포’와 부당하게 불행을 당하는 주인공에게 느끼는 ‘연민’이 바로 감정의 정화에 기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정은 ‘쾌감’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본다면, 나는 ‘비극’에 참으로 잘 동화되는 사람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면서, 나는 꺽꺽대는 소리가 나는 입을 틀어막아야만 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부은 눈이 가라앉기도 전에, 나는 아주 맛있게 밥을 먹었다. 울어서 소모한 기력을 회복해야만 했다. 몸 어딘가가 간지러운 듯한 감정은 바로 죄책감. 하지만 광주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들 때문에 내가 밥을 굶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리고 나는 곧 ‘평온한 일상’ 속으로 돌아왔다. ‘이런 일은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아프지 않다. 나는 아직 죽지 않는다. 나는 전쟁터[혹은 그 곳!]에 있지 않다’는 만족감(150)을 가지고.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은 불편한 책이다. 불편할뿐만 아니라 고통스럽고, 화가 나고 민망하다. 그가 제시하는 사진들과 그 사진을 둘러싼 이야기들은 우리를 죄인으로 여기게 할 정도이다. 이들이 부당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폭격으로 무너진 집들,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의 울음, 사지가 절단된 병사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은 아이의 사진을 보며 감정 이입을 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 감정은, 한 편의 연극이나 영화를 관람한 후의 여운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비극의 목격자로서 그러한 사진이나 영상을 ‘감상’하는 것이다. 좀 더 솔직해지자. 우리는 운 좋게, ‘아직 비극이 일어나지 않은 장소’에서 태어났으며, 그래서 좀 더 우월한 입장에서 그들의 고통을 ‘관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곧 감정 이입에서 벗어나, ‘사소하지만 나 자신에게 중요한 정신적 고통’에 몰두한다. 직장에서 나를 괴롭히는 상사를 미워하고, 애인과의 불화에 마음 상하고, 버스에서 당한 사소한 불쾌감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 사소함이 가치없다고 매도하려는 것은 아니다. 타인이 죄없이 폭력에 고통받고 있음을 알지만, 그들의 삶이 우리의 일상 속에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그들의 고통에 대해 입을 열 자격이 없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무리 공감하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해도, 그들이 실제로 겪은 일에 대해 상상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라고 해서 아이의 두통을 직접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명명백백한 인간의 ‘한계’는 우리의 무관심에 일종의 면죄부를 준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방조하는 ‘죄인’이지만, 아무에게도 ‘죄가 없는’ 것이다. 개개인은 지구의 저쪽에서 일어난 전쟁에 아무런 책임도 없다. 그들의 고통에 일말의 개입도 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그들의 고통에서 자유로울 ‘권리’가 있는가?

우리는 타인의 고통이 상업적으로 소비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마치 전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실시간으로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호도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소비하는 고통의 이미지들은 이미 ‘검열’을 거친 것들이다. 그리고 권력자들이 공개를 원치 않는 이미지들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그리고 허용된 폭력적 이미지들조차 지루하게 반복됨으로써 ‘특권적 위치’를 잃고 지루해진다. 사진이나 TV, 인터넷 등의 미디어는 실제와 허구를 구분하는 능력을 약화시킨다. 사진은 어떤 잔혹한 순간을 우리의 현실 속으로 불러오지만, 때때로 우리는 그것이 사실인지 조작된 허구인지 알 수 없다. 실제로 많은 사진이나 TV 프로그램이 연출된 것이다. 특정한 시점으로 특정한 장소를 촬영한 상황이, 얼마나 ‘진실’에 근접할 수 있을까? 전쟁은 끔찍하다.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전쟁의 끔찍함은, 권력을 가진 자가 제시한 것이다. 아군이 당한 고통은, 그것이 오로지 적군에 의해 저질러졌을 때에만 공개된다. 또한 적에 의해 사상된 아군들의, 끔찍하게 일그러졌을 얼굴은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다. 일종의 ‘품위차리기’라고 손택은 말한다. 그러나 타인들, 혹은 적들에게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타인들의 일그러진 얼굴은 적나라하게 제시된다. 사건의 배경이 우리가 살고 있는 안전한 ‘이 곳’과 멀수록, 이국적일수록, 우리는 보다 선명하고 완전한 고통의 얼굴을 본다. 미개하고 가난한 곳에서 우리는 손상당한 육체와 굶주린 표정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그 고통은 ‘저 곳’의 것이므로, 우리는 경악하면서도 안도하는(?) 것이다. 엠 에인이 찍은 캄보디아 툴슬렝 감옥의 어린애와 여성들을 보자. ‘그들은 영원히 죽음을 응시하고 있으며, 영원히 살해당하기 일보 직전이며, 영원히 학대를 받고 있다.’(96) 이들은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몰각된 채, 다만 학대받는 ‘집합체’로 존재할 뿐이다. 그들을 ‘바라볼 수 있는’ 우월한 자격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와 같은 정치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지는 않는다. 우리가 호들갑스럽게 주장하는 ‘인권’은 지구의 저편에 살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런 이미지를 접하지 말아야 하는가? 정보가 범람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는 불가능하다. 더구나 이런 영상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폭력이 어떻게 자행되고 있는지를 알 수도 없다. 손택은 ‘남아 있는 이미지가 별로 없는 잔악 행위들은 푸대접을 받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미지가 없는 폭력은 역사 속에 흔적도 남기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진은, 끔찍한 이중성을 띄고 있다. 사지가 절단된 육체를 찍은 사진은 우리에게 현실의 엄혹함을 깨닫게 해 주지만, 동시에 쾌락적이며 음란하게 타인의 고통을 소비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준다. 무역센터 빌딩에 비행기가 돌진하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외친다.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이! 이렇게 대단한 볼거리라니!’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타인이라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다시, ‘비극’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온다. 타인의 고통에 흘린 눈물이 부끄러운 것은, 이미 일어난 비극이나 현재 일어나는 비극, 혹은 앞으로 일어날 비극에 내가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하리라는 무력감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무력감에서 시작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 ‘왜 어쩔 수 없는 것인지’를 따지는 사람들이 많을 때, 비로소 역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손택은 ‘문학은 자유이다’라는 글에서, ‘독서와 내면의 가치가 도전을 받고 있는 이 시대’에서, 문학이 해야 할 역할에 대해 분명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작가는 ‘인간이 어떤 사악함을 저지를 수 있는지 이해하고 살펴보며 연상해 보려고 노력하는 존재, 그렇지만 뭔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냉소적이 되거나 천박해지거나 타락하지는 않는 존재(207)’이다. 그리고 작가의 이러한 노력은, 단 한 명의 독자에게라도 ‘다른 사람의 문제에 공감하고 눈물 흘릴 줄 알고,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줄 수 있다. 최소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감응’하고, 그에 대해 ‘발언하고 대응’할 수 있는 학습 능력을 가지고 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학습 능력은, 지금 당장 무엇을 할 수 없더라도 소중한 것이다. 만약 내가 눈물 흘리기만 하고, 진심으로 분노하거나 더 이상 발언하지 않는다면, 나는 부끄러워 해야만 한다. ‘타인에 비해 덜 고통스러운 나의 현실’에 대해 ‘위로’받고 끝나서는 안 된다.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이기에 고통받았지만, ‘일어나지 않았기에 안도’해서는 안 된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나는 타인의 고통이 부당한 것임을 ‘발언’하고, 개인으로서 그 고통에 개입할 수 없는 한계에 대해 ‘고백’하고, 더 이상 이러한 고통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함을 ‘선동’해야 한다. 그것이 ‘화려한 휴가’를 보며 눈물 흘렸지만, 곧 밥을 먹을 수 있었던 자신을 옹호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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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들녘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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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도 장소도 알 수 없는 한 평화로운 마을. ‘나’는 이 곳의 재판을 맡고 있는 치안판사다. 군대가 주둔해 있는 이 마을은 언제나 ‘야만인’들을 경계하고 있다. 사실 야만인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내리기 어렵다. 그들은 ‘타자’이며, ‘우리’와 문화가 다르며, 원시적이며 폭력적이라는 속설만 존재할 뿐이다. 실제로 우리가 접하는 야만인들은 어부이거나 유목민이며, 어떤 정교한 기계나 폭력적인 도구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나는 이 곳을 삼십 년이 넘게 다스리고 있지만, 어떤 유혈 사태도 생긴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다소 달콤한 매너리즘에 잠겨 있기도 하다. 오히려 나는 야만인들을 가엾은 존재로 여기고 있다. 그들은 가난하고 무지하고 순박하다. 오히려 나는 야만인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을 더 염려한다. 속이는 자는 오히려 야만인이 아니라 주민들이다. 야만인들은 자신들의 소중한 생산품을 소량의 럼주와 바꿔버릴 정도로 경제 관념도 없다. 나는 야만인들이 술을 마시는 것을 싫어한다. 주민들의 편견처럼, 야만인들이 더럽고 무질서하게 변해버리는 상황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독한 술의 노예가 된 거지들과 부랑자들이 도시 주변에 정착하는 걸 원치 않는다. 나는 이 사람들이 상점 주인의 속임수에 넘어가 그들의 물건을 시시한 장신구와 교환하거나 술에 취해 시궁창에 드러눕고, 결국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게으르고 부도덕하며 어리석다는 주민들의 편견을 굳히는 걸 보기가 괴로웠다. 문명이라는 게 야만인들이 가진 미덕들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종속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면, 나는 문명에 반대하는 입장이다.(67)

나에게는 소일거리가 있는데, 바로 유적을 파헤치는 일이다. 단순한 범죄를 저지른 마을 주민이나 병사들을 동원해 그는 유적을 판다. 거기에서 그는 알아볼 수 없는 문자가 적힌 조각들을 본다. 그는 알 수 없는 문자들을 나열해보고 조합해본다. 그는 이미 사라진 제국에 대해 상상한다.

어쩌면 나는 나처럼 치안판사직에 있었던 사람의 머리 위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사람은 결국 야만인과 대치하다가, 자신의 관할구역 내에서 결국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머리가 희끗희끗한 또 다른 제국관리였는지도 모른다.(29)

후에 그에게 닥치는 재앙을 생각하면 이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소설은 나와 죨 대령의 만남에서 시작한다. 죨 대령은 정부에서 파견한 인물인데, 야만인에 대한 감시와 경계를 강화하는 임무를 가지고 이 마을을 찾았다. 나는 죨 대령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조금이라도 수상한 야만인들을 보면 무조건 잡아들인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이유도 체포 원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오는 것을 보자 그들이 갈대 속에 숨으려고 했습니다. 말을 탄 사람들이 오자 숨으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지휘관께서 그들을 잡아들이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숨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33)’

그리고 죨 대령은 통역을 통해야 하는 야만인을 무도하게 심문한다. ‘고문 기술자’인 그에게는 확고한 원칙이 있다.

“특정한 말투가 있습니다. 사람이 진실을 얘기할 때는 특정한 말투를 사용하는 법입니다. 우리는 훈련과 경험을 통해서 그런 말투를 알고 있습니다.”
“진실을 얘기하는 말투라고요! 당신은 일상적인 대화에서 그런 말투를 가려낼 수 있나요? 당신은 내가 진실을 얘기하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나요?”(...)
“나는 진실을 찾기 위해 물리적인 힘을 행사해야 하는 상황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처음에는 거짓말을 합니다. 그리고 물리적인 힘이 가해지면 더 거짓말을 합니다. 거기에서 압력이 더 가해지면 변화가 생깁니다. 그러다가 물리적인 힘이 더 가해지면 그때서야 진실을 얘기합니다. 그것이 진실을 알아내는 방법입니다.”(13)


죨 대령은 진실은 오로지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만 밝혀진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전 세계 고문자들의 공통된 사고방식이다. 인간은 고통 속에서 비로소 진실을 토해낸다는, 고통스러운 명제. 그러나 권력을 쥔 자에게 이는 진실이 되고, 권력을 등진 자에게 이는 죽음에 버금가는 고통스러운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죨 대령의 전횡을 처음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그저 한 세대에 한 번씩은 일어나기 마련인,‘야만인들에 대한 히스테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꿈들은 너무 편해서 생기는 것들이다. 내게 야만인들의 군대를 보여준다면야 나도 믿을 것이다.(18)’ 나는 야만인의 군대가 있다는 소문 따위에는 코웃음을 친다. 그러나 죨 대령에게는, ‘야만인의 군대’야말로 그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따라서 그는 사소한 잘못을 저지른 야만인들을 모조리 잡아들인다. 그리고 잔혹하게 고문한다. 그 과정에서, 가엾은 늙은이가 죽고 나머지 사람들은 심하게 다치거나 불구가 된다. 그 고문의 밤에, 나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들의 고통을 외면한다. 그러나 고문당한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한 나는, 죨 대령에게 항의한다. 그러나 그는 결국 죨 대령과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결국 ‘품위 있게’ 그를 보낸다. 결국 나 역시 제국의 일원이며, ‘아무리 비싼 대가를 치른다 하더라도 평화를 유지하는 게 어쩌면 좋은 것(27)’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자괴감에 휩싸인다.

나는 평생 교양 있는 행동을 신봉해 온 사람이다. 그렇지만 이번 경우에는, 그렇게 했다는 게 오히려 역겹게 느껴진다는 걸 부정하기 어렵다.(42)

그리고 나는 야만인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제국의 신념이 얼마나 투철한지 잘 알고 있다. ‘그들을 사막으로 이동시켜 그들로 하여금 마지막 힘을 다해 그들 모두가 들어가서 누울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구덩이를 파게 하고 거기에 그들 모두를 영원토록 묻어버리고 새로운 의도와 결심으로 가득 찬,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로 귀환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아주 적을 것(44)’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나는 한 야만인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고문당해 죽은 늙은이의 딸이다. 그녀 역시 눈이 반쯤 멀었고, 다리를 절고 있다. 그것은 고문의 흔적이다. 나는 그녀를 나의 숙소로 데려온다. 그리고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나이 많은 나는 그녀에게 성적인 쾌락을 추구하지 않는다. 성욕은 마을의 여관에서 해결한다. 그리고 나는 매일 그녀를 어루만지고 씻기다가 잠이 든다. 그 행동은 지속적이며, 나 자신도 그 행동의 의미를 알 수 없다. 그녀는 문명의 폭력에 상처 입은 존재이다. 나는 그녀의 ‘상처’에 매혹된다.

그녀를 어루만지는 행위를 하다가 도끼로 찍힌 것처럼 잠에 압도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녀의 몸 위에 엎어진 채 망각 속으로 빠져들다가 한두 시간 후에 어지럽고 혼란스럽고 목이 말라 잠에서 깬다. 꿈조차 꾸지 않는 이 상태가 나에게는 죽음, 혹은 시간밖에 존재하는 텅 빈, 황홀경 같다.(55)

그러나 종종 나는 그녀에 대해 생각하며 혼돈을 느낀다. 나는 그녀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는 깨닫는다. ‘그녀를 고문했던 사람들과 내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가 무시해도 좋을 만큼 미미하다는 것(50)’을. 그녀를 고문했던 사람들은 바로 폭력을 통해 그녀를 소유하려고 했다. 폭력은 쉽게 타인을 굴복시키는 수단이다. 그리고 또한 폭력을 통해 우리는 타인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폭력이야말로 인간의 껍질을 벗겨내고 속엣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마치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실을 고백하듯, 고문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타인’이며, 내 운명을 쥐고 있는 ‘신’이다. 그러므로 고문하는 그 순간, 고문자는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몸을 지지고 찢고 베어서 다른 사람의 은밀한 몸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던 착각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것인가! (...) 나는 그녀의 옷을 벗이고, 그녀의 몸을 씻겨주며, 그녀를 어루만지고, 그녀 곁에 눕는다. 하지만 똑같은 의미에서, 나는 그녀를 의자에 묶고 두들겨 팰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덜 친밀해지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그녀 곁에 누워 잠을 자든, 혹은 그녀를 시트에 싸서 눈 속에 묻어버리든, 매한가지인 것처럼 보인다.(76)

나는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녀를 곁에 두는 자신에 대해 변명한다. 나는 죨 대령과 다르다고. 그리고 나는 야만인에 대해 정당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그러나 그의 행동과 말들은 점점 ‘제국’의 심기를 거스르기 시작한다. 이는 그 스스로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병사의 시선을 통해 다음과 같은 생각을 추리해낸다.

그는 나를, 수년 동안 이렇게 침체된 곳에서 게으른 토착민들의 방식에 맞춰 살다 보니 구태의연한 생각에 젖어 있고, 제국의 안보를 임시적이고 불안정한 평화와 맞바꾸려 하는 위태로운 생각을 하는 한심한 민간인 관리 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87)
나는 조심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나는 하품을 하며 그의 질문을 피하고 이 자리를 끝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미끼를 덥썬 문다.(87)
“특히 그 경멸이라는 것이 식사 예절이 다르고 눈꺼풀의 형태가 다르다는 것말고는 구체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라면, 당신은 그것의 뿌리를 어떻게 뽑을 수 있겠소?”(88)

나는 지극히 상식적인 차원에서, 야만인을 옹호한다. 그러나 나는 조금씩 ‘제국의 적’이 되어갈 뿐이다. 나는 병사들과 안내인을 데리고, 그녀를 야만인들에게 데려가는 위험한 여행을 한다. 겨울에 출발한 그 여행은, 고통스럽고 지루하다. 그리고 그녀를 보낸 후, 돌아오는 길은 참혹하도록 잔인하다. 그리고 나는 자신을 원망할 병사들의 심리 역시 파악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야만인들에게 가는 사절의 일부가 아니라 한 여자, 그것도 뒤에 남겨진 야만인 죄수이자 치안판사의 하찮은 매춘부에 불과한 여자를 호위하고 호송하는 일을 했다는 걸 알게 됐을 것이다.(126)’

마을로 돌아온 그는 체포된다. 나의 행적은 낱낱이 까발려지고, 병사들에 의해 고발된다. 30년 동안의 그의 지배가 허위와 부정으로 얼룩져 있다. 나는 야만인과 내통하여 제국의 정보를 판 스파이이며, 야만인 여자와 정을 통하는 부도덕자다. 심지어 유적을 발굴하던 취미 생활 역시 야만인들과의 의사 소통을 위한 창구로 오인된다. 범죄자로 낙인 찍힌 그 순간, 나는 ‘오히려 나는 내 자신과 정보부 사이에 존재하던 허위적인 우정에 종지부가 찍힌다는 생각에 어렴풋한 희열까지 느낀다.(131) 나는 기분이 좋은 이유를 안다. 제국 수화자들과의 연합은 이제 끝났다. 나는 반대편에 서게 됐다. 유대감이 깨졌다. 나는 자유인이다. 하지만 얼마나 위험한 기쁨인가!(133)’

나는 이제 야만인과 다를 바 없는,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힌다. 그 상황에는 아무런 품위도 찾아볼 수 없다. 야만인을 짓밟은 고문관들이 이제 그를 짓밟는다. 나는 짐승처럼 살아간다. 그러나 나는 애써 변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상황 속에서 나는 문명인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 깨달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오히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어리석고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모욕적인 죽음을 당하는 것’이다.

아무도 나를 구타하지 않고, 아무도 나를 굶기지 않으며, 아무도 나에게 침을 뱉지 않는다. 내가 당하는 고통들이 그렇게 사소한 것들인데, 내가 어떻게 박해받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런 것들은 사소한 것들이기 때문에 훨씬 수치스럽다. 나는 처음에 수용되어 감방문이 닫히고 자물쇠가 채워질 때, 웃었다. 일상적인 삶의 고독에서 감방의 고독으로 옮겨가는 것은 큰 고통이 아닌 것 같았다. 생각과 기억들을 갖고 들어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자유라는 게 얼마나 원시적인 것인지 이해하기 시작한다.(145)
내게 남은 자유는 먹거나 배고플 자유, 침묵을 지키거나 혼자 지껄일 자유, 혹은 문을 두드리고 비명을 지를 자유이리라. 지금의 나는 불행한, 피와 뼈와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146)


어느날 나는, 감옥을 탈출해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에 간다. 거기에서 그는 ‘철사줄이 손바닥과 뺨에 꿰어져 있는’ 야만인들을 본다. 그들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 채찍질을 당하고 있다. 나는 그 광장에서, 유일하게 그들을 옹호하는 사람이 된다. 나는 소리치며, 이 무자비한 폭력이 중지되길 외친다. 그리고 나는 곧 무자비한 발길질과 채찍질에 쓰러진다. 나는 구타당하고, 또 다시 갇힌다.

이 고난에는 나를 기품 있게 만드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나를 고문한 사람들은 고통의 정도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오직, 하나의 육체 속에서 하나의 육체로만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내게 보여주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온전하고 정상적인 상태에 있을 때만 정의에 대한 생각을 즐기다가, 머리가 붙잡히고 파이프가 목구멍 속으로 쑤셔넣어지고, 그 속으로 소금물이 부어져 기침을 하고, 구역질을 하고 도리깨질을 하는 상황이 되면, 언제 그랬느냐 싶게 정의에 관한 생각들을 깡그리 잊어버리는 그 육체 말이다.(196)
그는 내 영혼을 상대하고 있다. 그는 매일매일, 육체를 접어 옆으로 치워놓고 내 영혼을 빛에 노출시킨다. 어쩌면 그는 이런 일에 종사하면서 많은 영혼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을 다루는 일을 해 오긴 했지만, 심장을 다루는 외과의사에게 아무 표시가 남지 않듯, 영혼을 다루는 그에게도 아무런 표시가 남아 있지 않은 듯하다.(201)


나는 그들이 가하는 고문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 생각을 숨기지 않는다. 마침내 죨 대령에게 나는 묻는다.

“이 질문이 염치없는 것이라고 생각되면, 날 용서하게. 당신은 사람들을 그렇게 다룬 다음,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 있는가? 그게 가능한 일인가? 이건 사형집행인들과 그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내가 늘 물어보고 싶었던 걸세.(...)내 생각에는, 그런 사람들은 손부터 씻고 싶어할 것 같거든. 하지만 손을 씻는 일도 보통의 방법으로는 안 될 것 같아. 성직자가 끼어들어야 할 정도의 일이거든. 일종의 정화의식이 필요하다는 말일세.(...)난 자네가 살고 있는 세상을 이해하고 싶네. 나는 자네가 날마다 어떻게 숨을 쉬고 먹고 사는지 상상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네. 그게 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네! 나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곤 하네. 만일 내가 저 사람이라면, 내 손이 너무 더럽게 느껴져, 나를 질식시킬……”(215)

나의 말을 들은 죨 대령은 나를 정신병자 취급을 한다. 아니, 그들은 희미하게 자극하는 ‘양심의 소리’에 참을 수 없이 분개하는 것이다. 늘 품위를 지키던 죨 대령이 흥분한 것은, 내가 그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야만인을 옹호하는 문명인이란, 이미 제국의 적이며, 다만 처리해야 할 죄수일 뿐이다. 제국은 이미 야만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만인이야말로 제국의 힘이며, 제국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이다. 야만인이 죄가 없다면, 야만인이 순수하다면, 제국은 사라져야 마땅할 ‘악’이 아닌가.

제국은 역사의 시간을 만들어냈다. 제국은 부드럽게 반복되는 순환적인 계절의 시간이 아니라, 흥망성쇠와 시작과 끝, 그리고 파국이라는 들쭉날쭉한 시간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제국은 역사 속에 존재하고, 역사에 대해 음모를 꾸미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제국의 속마음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있을 뿐이다. 그 생각은 어떻게 하면 끝장이 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어떻게 하면 그 시대를 연장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밤이 되면 그것은 재앙에 대한 상상을 먹고 산다. 도시가 약탈당하고, 사람들이 강간당하고, 죽은 사람의 뼈가 산처럼 쌓이고, 수많은 땅이 황폐해질지도 모른다는 상상 말이다.(229)

이 소설의 서술이 고통스러운 것은, 야만인이나 완전한 제국의 수하가 아닌, 그 중간에 서 있는 ‘나’의 목소리로 써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엄밀히 말해, 제국을 수호하는 관리자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그는 폭력을 쓰지 않는 평화로운 관리를 원했을 뿐이다. ‘나’는 야만인보다 우위에 서 있는 자신의 입장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았고, 그들의 고통에 대해 외친 순간에도 그들과 자신을 동격에 두지는 않았다. 야만인은 ‘나’에게 여전한 ‘타인’이다. ‘나’가 고통받고 핍박받는 것은, 마치 예수처럼, ‘그들의 죄’를 짊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구타당하면서도, 구타한다. ‘나’는 야만인을 긍정하면서도, 부정한다. 이는 문명인인 ‘나’의 어쩔 수 없는 거죽이다. 마치 살처럼 단단히 달라붙은 이 관념은, ‘나’를 규정하는 것이다.

‘타자’의 고통이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감각이다. 만일 처절하게 타인의 고통을 감지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의 전쟁과 폭력은 사라졌을 것이다. 누군가가 폭탄을 맞고 산산조각이 나도, 한 도시가 통째로 없어져도, 내가 안전하다면 폭력은 없다. 이는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진실이다. 우리는 상상을 통해 고통을 겪고, 곧 고통 없는 일상 속에서 이를 잊는다. 더 나아가 이미 타자로 규정된 이방인들의 고통은, 손가락의 거스러미만도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은 이방인의 몫이다. 이 소설은 야만인을 이해하고자 하지만 결국 문명인에 지나지 못한, 한 지식인의 고뇌를 파헤치고 있다. 죄책감은 우리에게 잠시나마 타인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준다. 그러나 고통의 거리를 줄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교육받은 문명인은, 제국에 대항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한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도 언제든지 야만인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외에는,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마음쓸 이유가 없다는 것이, 서글픈 현실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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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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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밤새워 읽지 않으면 안 될 책을 만난 건 너무 오랜만이다. 벅차오르는 감정으로 인해 감상을 적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을 책을 만난 것 역시. 하염없이 높아진 내 눈에 차는 책은 별로 없었다. 또한 그저 그런 소설들을 읽으면서 차라리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서적이 훨씬 재미있다고 투덜거리곤 했다. 소설을 읽지 않는다는 친구의 이야기도 종종 떠올랐다. “소설을 왜 읽어, 시간 낭비야. 얻는 게 없잖아.” 그러나 그건 그가 진심으로 사랑할 책을 만나기가 어렵기 때문에 한 발언일 뿐, 소설 자체를 매도할 건 아니다. 한 권의 위대한 책은, 장르에 상관없이 영혼을 뒤흔든다. 하지만 불후의 명작이면 뭐하나. 가슴에 꽂히지 않으면, 그건 박제된 유물에 지나지 않는데.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그런 감격의 순간은 점점 멀어진다. 주위에는 한없이 가벼워 바스락거리는 비닐봉지 같은 유희가 떠돌아다닌다. 인터넷에만 접속하면, 수많은 TV프로그램만 다운받으면, 그 순간 절박한 생의 욕구는 사라진다. 어디에서나 쉽게 얻을 수 있는 즐거움. 싸구려라고 욕하지만 욕하는 그 순간, 진정성이란 무게에서 벗어나서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나. 스무 살 무렵부터 얼마나 그런 값싸고 순간적인 유희에 나를 맡겨 왔는지. 그 모든 건, 깊이를 동경하면서도 그 깊이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하는 내가 선택한 결과였다.

<자기 앞의 생>은, 그런 내게 화두와 같이 다가왔다. 어쩌면 밤을 새우고 난 ‘감상적인’ 감상일지 모르겠지만, 서른 넘은 사람을 울컥하게 하는 건, 쉬운 게 아니다.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이런 순간, 이런 기쁨이라는 깨달음이 너무도 고맙다. <생각의 탄생>에서는 창조적 능력의 하나로 감정이입을 꼽았다. 나는 생생한 주인공의 실체를 느끼게 한 작가의 능력에 감복한다. 예순 살의 나이에 그는 얼마나 아름다운 영혼을 창조했는가. 영원히 열 네 살에 머물러 있는 모모가 이미 어른이 된 나를 부끄럽게 한다.

늙은 유태인 창녀가 맡아 기르는 아이 중의 한 명인 모모. 삶의 밑바닥에서 천진하면서도 닳아빠진 감성 모두를 지니고 있는 그 아이를, 조숙하다는 한 마디 말로 표현하기엔 모자라다. 그 아이 주변에는 죽어가는 노인, 광대, 여장남자인 창녀, 마약을 하는 아이, 불법체류자 혼혈인 등 밑바닥 인생이라고 할만한 사람들이 우글댄다. 그러나 그들, 그리고 모모는 결코 운명을 저주하거나 삶을 애써 긍정하지 않는다. 삶은 그냥 주어진 것이며, 나름껏 당당하게 살아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누군가를 미워할 수도 있고, 운 좋은 미래를 꿈꿀 수도 있다. 꿈꾸는 것이 뭐가 잘못인가.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름다웠던, 행복했던 과거는 그들에게 고통만 안겨 주지 않는다. 결국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자조하고 냉소하는 것이 더욱 초라해 보일 뿐이다. 충격적인 출생의 비밀과 그 비밀을 알게 된 순간의 비극도, 모모를 쓰러뜨리지 못한다. 하밀 할아버지 말처럼, “이 세상에 너를 증명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으니까. 도대체 누가 누구의 삶에 불행하다, 행복하다는 딱지를 붙일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해 진정으로 살아가고 있는지가 문제다. 그런 면에서 모모는, 아낌없이, 남김없이, 후회 없는 삶을 산다. 모모의 삶은 그때그때의 최선의 판단에 따른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을 지킬 때도, 세상의 룰 따위는 상관없다. 인도적인 체 하지만 사실은 가장 비인도적인 사람들의 관습에 좌우될 필요가 없다. 모모는 자신만의 도덕 속에서 살아왔고, 티끌만큼의 뉘우침도 없을 테니까.

모모는 자기를 키워준 로자 아줌마를 사랑한다. 하지만 로자 아줌마의 모든 결점들, 추한 면들에 눈감지 않는다. 그녀의 삶이나 성격을 미화하거나, 병 들어 죽어가는 그녀를 바라보는 자신의 감정을 치장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외롭고 고달팠던 그녀의 삶의 마지막을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모모인 것이다. 기꺼이 혈육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에 버림받고 가난과 병에 부대끼고 역사적 현실로 인해 불안에 떨어도, 그들에게는 사랑하는 이에게 아낌없이 내어줄 가슴이 남아 있다. 곱고 아름답게만 자라온 아이들은 마치 똥 같이 모모를 쳐다보지만, 모모의 그 똥 같은 삶에는 조금의 가식도 없다. 볼품없이 튀어나온 목젖을 빨간 스카프로 가리는 친절한 롤라 아줌마, 멀어가는 눈으로 모모에게 이 세상의 비밀을 하나씩 말해주는 하밀 할아버지, 진심으로 모모와 로자 아줌마를 걱정하는 늙은 의사 카츠 선생님은, 모모와 진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다. 가짜 웃음과 눈물이 판치는 이 세상에서, 자기 이익과 욕심이 최우선인 이 세련되고 차가운 세상에서, 그러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너와 좀 더 오래 있고 싶어서 나이를 속였다는 늙고 병든 로자 아줌마의 고백에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이렇게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있었나 되뇌였다. 나는 나의 가족과 친구에게 그런 사랑을 주고 받은 적이 있던가. 나는 내 이웃의 고통에 진정으로 눈물 흘린 적이 있던가.

어쩌면 모모는 아주 특수한 환경에서 특이한 감수성을 얻을 수밖에 없었던 아이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특별한 영혼은, 어느 장소에서도 보석처럼 빛났을 것 같다. 우리 대부분은 평범한 삶 속에서, 작은 이익에 기뻐하고, 작은 손해에 분노한다. 상처받았다고 슬퍼하고, 사랑받지 못함을 한탄한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삶에 절망하고, 자포자기하며, 결국은 한계 안에 안주한다. 하지만 밑바닥에서도 한없이 투명하게 자신의 삶을 바라볼 줄 아는 그런 용기는, 쉬이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모모와 같은 영혼은 드물고 소중하다. 삶에 칭얼대지 않고, 진정 자기답게 살아야 할 의욕을 주기 때문이다. 미뤄두었던 꿈을 실행시킬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어른이 될수록 잃어가는 건 창조력과 탄성이다. 생동하며 뛰어오르지 못하고, 매일의 편안한 삶에 안주하며,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스스로를 방치해두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다만 과거의 한 페이지로만 남겨두고, 정작 영원히 현존할 수밖에 없는 지금 이 순간은, 값싼 감정으로 메우고 있는 것이다. 자기 앞에 펼쳐진 그 날것의 생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모모처럼 매 순간을 자기답게 살아야만 한다. 어떠한 절망도, 고통도, 자기다운 사람의 영혼을 쓰러뜨릴 수 없다. 또한 그런 사람만이 타인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자기 앞의 생을 당당히 걸어나가는 것이다. 마지막 숨을 쉴 때, 아낌없이 사랑했고 아낌없이 살았노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 모모의 남은 생 역시 그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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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3-25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의님 안녕하세요. 들어왔다가 제일 처음 글을 눌러봤는데 모모가 나오는 에밀 아자르라서 반가워서 인사드려요. 사실은 Shining님 서재에서 댓글따라 들어와서 프라하의 묘지, 리뷰를 보려고 했던건데. 좋은 리뷰가 많아서 천천히 읽어볼게요. 반갑습니다!

그라디바 2013-03-26 17:06   좋아요 0 | URL
저도 반갑습니다 :) 책 많이 읽는 분들은 생활 속에서(?) 좀처럼 찾기 어려운데 알라딘에는 많아서 참 부러웠습니다. 앞으로 좋은 얘기 나눠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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