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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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준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비극적 주인공과 같은 처지에 처할 수 있다는 ‘공포’와 부당하게 불행을 당하는 주인공에게 느끼는 ‘연민’이 바로 감정의 정화에 기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정은 ‘쾌감’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본다면, 나는 ‘비극’에 참으로 잘 동화되는 사람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면서, 나는 꺽꺽대는 소리가 나는 입을 틀어막아야만 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부은 눈이 가라앉기도 전에, 나는 아주 맛있게 밥을 먹었다. 울어서 소모한 기력을 회복해야만 했다. 몸 어딘가가 간지러운 듯한 감정은 바로 죄책감. 하지만 광주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들 때문에 내가 밥을 굶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리고 나는 곧 ‘평온한 일상’ 속으로 돌아왔다. ‘이런 일은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아프지 않다. 나는 아직 죽지 않는다. 나는 전쟁터[혹은 그 곳!]에 있지 않다’는 만족감(150)을 가지고.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은 불편한 책이다. 불편할뿐만 아니라 고통스럽고, 화가 나고 민망하다. 그가 제시하는 사진들과 그 사진을 둘러싼 이야기들은 우리를 죄인으로 여기게 할 정도이다. 이들이 부당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폭격으로 무너진 집들,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의 울음, 사지가 절단된 병사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은 아이의 사진을 보며 감정 이입을 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 감정은, 한 편의 연극이나 영화를 관람한 후의 여운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비극의 목격자로서 그러한 사진이나 영상을 ‘감상’하는 것이다. 좀 더 솔직해지자. 우리는 운 좋게, ‘아직 비극이 일어나지 않은 장소’에서 태어났으며, 그래서 좀 더 우월한 입장에서 그들의 고통을 ‘관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곧 감정 이입에서 벗어나, ‘사소하지만 나 자신에게 중요한 정신적 고통’에 몰두한다. 직장에서 나를 괴롭히는 상사를 미워하고, 애인과의 불화에 마음 상하고, 버스에서 당한 사소한 불쾌감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 사소함이 가치없다고 매도하려는 것은 아니다. 타인이 죄없이 폭력에 고통받고 있음을 알지만, 그들의 삶이 우리의 일상 속에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그들의 고통에 대해 입을 열 자격이 없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무리 공감하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해도, 그들이 실제로 겪은 일에 대해 상상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라고 해서 아이의 두통을 직접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명명백백한 인간의 ‘한계’는 우리의 무관심에 일종의 면죄부를 준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방조하는 ‘죄인’이지만, 아무에게도 ‘죄가 없는’ 것이다. 개개인은 지구의 저쪽에서 일어난 전쟁에 아무런 책임도 없다. 그들의 고통에 일말의 개입도 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그들의 고통에서 자유로울 ‘권리’가 있는가?

우리는 타인의 고통이 상업적으로 소비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마치 전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실시간으로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호도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소비하는 고통의 이미지들은 이미 ‘검열’을 거친 것들이다. 그리고 권력자들이 공개를 원치 않는 이미지들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그리고 허용된 폭력적 이미지들조차 지루하게 반복됨으로써 ‘특권적 위치’를 잃고 지루해진다. 사진이나 TV, 인터넷 등의 미디어는 실제와 허구를 구분하는 능력을 약화시킨다. 사진은 어떤 잔혹한 순간을 우리의 현실 속으로 불러오지만, 때때로 우리는 그것이 사실인지 조작된 허구인지 알 수 없다. 실제로 많은 사진이나 TV 프로그램이 연출된 것이다. 특정한 시점으로 특정한 장소를 촬영한 상황이, 얼마나 ‘진실’에 근접할 수 있을까? 전쟁은 끔찍하다.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전쟁의 끔찍함은, 권력을 가진 자가 제시한 것이다. 아군이 당한 고통은, 그것이 오로지 적군에 의해 저질러졌을 때에만 공개된다. 또한 적에 의해 사상된 아군들의, 끔찍하게 일그러졌을 얼굴은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다. 일종의 ‘품위차리기’라고 손택은 말한다. 그러나 타인들, 혹은 적들에게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타인들의 일그러진 얼굴은 적나라하게 제시된다. 사건의 배경이 우리가 살고 있는 안전한 ‘이 곳’과 멀수록, 이국적일수록, 우리는 보다 선명하고 완전한 고통의 얼굴을 본다. 미개하고 가난한 곳에서 우리는 손상당한 육체와 굶주린 표정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그 고통은 ‘저 곳’의 것이므로, 우리는 경악하면서도 안도하는(?) 것이다. 엠 에인이 찍은 캄보디아 툴슬렝 감옥의 어린애와 여성들을 보자. ‘그들은 영원히 죽음을 응시하고 있으며, 영원히 살해당하기 일보 직전이며, 영원히 학대를 받고 있다.’(96) 이들은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몰각된 채, 다만 학대받는 ‘집합체’로 존재할 뿐이다. 그들을 ‘바라볼 수 있는’ 우월한 자격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와 같은 정치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지는 않는다. 우리가 호들갑스럽게 주장하는 ‘인권’은 지구의 저편에 살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런 이미지를 접하지 말아야 하는가? 정보가 범람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는 불가능하다. 더구나 이런 영상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폭력이 어떻게 자행되고 있는지를 알 수도 없다. 손택은 ‘남아 있는 이미지가 별로 없는 잔악 행위들은 푸대접을 받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미지가 없는 폭력은 역사 속에 흔적도 남기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진은, 끔찍한 이중성을 띄고 있다. 사지가 절단된 육체를 찍은 사진은 우리에게 현실의 엄혹함을 깨닫게 해 주지만, 동시에 쾌락적이며 음란하게 타인의 고통을 소비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준다. 무역센터 빌딩에 비행기가 돌진하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외친다.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이! 이렇게 대단한 볼거리라니!’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타인이라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다시, ‘비극’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온다. 타인의 고통에 흘린 눈물이 부끄러운 것은, 이미 일어난 비극이나 현재 일어나는 비극, 혹은 앞으로 일어날 비극에 내가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하리라는 무력감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무력감에서 시작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 ‘왜 어쩔 수 없는 것인지’를 따지는 사람들이 많을 때, 비로소 역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손택은 ‘문학은 자유이다’라는 글에서, ‘독서와 내면의 가치가 도전을 받고 있는 이 시대’에서, 문학이 해야 할 역할에 대해 분명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작가는 ‘인간이 어떤 사악함을 저지를 수 있는지 이해하고 살펴보며 연상해 보려고 노력하는 존재, 그렇지만 뭔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냉소적이 되거나 천박해지거나 타락하지는 않는 존재(207)’이다. 그리고 작가의 이러한 노력은, 단 한 명의 독자에게라도 ‘다른 사람의 문제에 공감하고 눈물 흘릴 줄 알고,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줄 수 있다. 최소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감응’하고, 그에 대해 ‘발언하고 대응’할 수 있는 학습 능력을 가지고 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학습 능력은, 지금 당장 무엇을 할 수 없더라도 소중한 것이다. 만약 내가 눈물 흘리기만 하고, 진심으로 분노하거나 더 이상 발언하지 않는다면, 나는 부끄러워 해야만 한다. ‘타인에 비해 덜 고통스러운 나의 현실’에 대해 ‘위로’받고 끝나서는 안 된다.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이기에 고통받았지만, ‘일어나지 않았기에 안도’해서는 안 된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나는 타인의 고통이 부당한 것임을 ‘발언’하고, 개인으로서 그 고통에 개입할 수 없는 한계에 대해 ‘고백’하고, 더 이상 이러한 고통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함을 ‘선동’해야 한다. 그것이 ‘화려한 휴가’를 보며 눈물 흘렸지만, 곧 밥을 먹을 수 있었던 자신을 옹호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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