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 현암사 / 199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는 문단구분이 없는 소설이다. 한 문단이 하나의 소설인 셈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시야를 공격하는 그 단어들의 나열이 그다지 고통스럽거나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이야기 속으로 동화되는 작용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소설의 서사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의 머리 속에서 시간 개념이나 순서 없이 회상되는 기억을 엿보는 것과도 같다. 한편으로 그 무질서한 이야기들은 대단히 흥미롭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말해 주인공(혹은 작가)의 지극히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세계와 인간에 대한 기괴한 탐구이다. 이는 베른하르트 소설의 큰 특징이기도 하다. 줄바꾸기를 단 한 번도 하지 않는 이 고집스러운 소설은 요약이 불가능한 작가적 신념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베른하르트는 스스로를 일컬어 ‘이야기 파괴자’라고 부른다. 그것은 이 소설이 자서전이면서 동시에 소설이라는 애매한 위치에 서 있는 점에서도 증명된다. 한편으로 고정된 플롯 속에서 진행되는 서사란 그가 말하고자하는 주제에 정면으로 배치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작가는 고전적 서사를 파괴하고, 인물에 대한 두서없는 묘사를 하며, 난데없이 신랄하게 문명 비판을 하기도 하며, 어느 사이에 그 장황한 서술을 끝맺음한다. 또한 그의 어조는 굉장히 반복적이다. 그의 문장은 다음 문장을 확대시켜가면서 끊임없이 맞물려진다. 설명에 대한 설명, 부연 설명, 확대 설명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그들은 점점 더 많은 정신력을 (그들 머리의) 창밖으로 내던지는데, 이와 동시에 정신력은 그들의 머릿속에서 점점 더 많아지고 따라서 당연히 점점 더 위협적이 되며 결국 그들의 정신력을 (그들 머리로부터) 내던지는 속도가 정신력이 불어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기에 이른다. …… 모든 미친 철학자의 머리도 결국에는 정신력을 빠른 속도로 내던지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에 폭발한 것이다.(토마스 베른하르트 작, 윤선아 옮김,『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현암사, 1997) p. 34

인용한 부분에서 작가는 미친 철학자에 대한 서술을 하기 위해서 집요하게 반복하는 문장을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삶에 대한 서술이 끊임없는 반복과 확대의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베른하르트는 철저한 재앙의 사상가이기도 하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작가의 애정은 매우 역설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비트켄슈타인의 조카』와 『옛 거장들』에서 화자는 공통적으로 인간을 증오하고 자연을 증오하며 예술을 증오한다. 동시에 화자는 인간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며 예술을 미친 듯이 사랑한다. 그러한 이중적인 면모는 화자와 대상의 거리를 매우 밀접하게 만든다. 사랑하고 증오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그 대상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그 속성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탐구한 뒤라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른하르트의 이러한 이중적인 서술들은 ‘애증의 미학’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의 큰 이야기 줄기는 폐병을 앓아왔던 나와 정신병을 앓아왔던 파울―즉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의 우정이다. 이 우정은 기묘하고 정신병적인 것이지만, 파울이 죽을 때까지 계속 유지된다. 베른하르트의 자전적 수기 혹은 자서전 형식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는 병적이고 예술적인 인간형에 대한 탐구 또한 엿볼 수 있다.

파울 비트겐슈타인과 그의 삼촌이자 철학가인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그들의 가문이 낳은 돌연변이들이었다. 비트겐슈타인 가문은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정신과 예술의 영역에는 가치를 두지 않았다. 루드비히와 파울은 바로 그 정신과 예술의 세계를 사랑하는 광인들이었다. ‘파울은 삼촌 루드비히 만큼이나 철학적이었고 반대로 철학적인 루드비히는 조카 파울만큼이나 미치광이(위의 책, p.38)’였던 것이다. 그리고 루드비히는 철학으로 유명해졌고 파울은 광기로 유명해 졌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두 사람의 두뇌는 모두 너무나 비상하였지만 한 사람은 자신의 두뇌를 세상에 알렸고 다른 한 사람은 그러지 않았다. 나는 심지어 한 사람은 자기의 두뇌를 세상에 발표했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의 두뇌를 실천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같은 책, p.39)’ 광기를 어떻게 발현하느냐에 따라서 철학자와 미치광이의 구분이 생기는 것이다. 
 

한편으로 그 구분은 파울과 베른하르트(이후의 글에서 화자를 베른하르트라고 지속적으로 칭하는 것은, 이 소설이 자전적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에게도 적용된다. 파울과 작자의 차이는, ‘파울이 광기에 완전히 지배당한 반면에 나는 파울의 광기만큼이나 지독한 나의 광기에 단 한 번도 완전히 지배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른바 그의 광기와 하나가 된 반면 나는 평생 나의 광기를 이용하고 지배했다.(같은 책, p.32)’ 이는 베른하르트가 작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반면, 파울은 단지 환자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킨다. 통제되지 않은 광기는 아무리 천재적인 영감을 내포하고 있다고 해도, 결국 정신병원의 침대 위에서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광기를 종이 위에 올려놓은 철학자와 작가는, 광기를 생산적으로 사용한 셈이다. 그러므로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과 베른하르트에게 광기는 한편으로 창조적인 영감의 보고인 것이다. 철학자와 작가는 자신의 광기마저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철저히 이용할 수 있는 존재이다.

반면 비상한 두뇌와 광기를 그대로 실천한 파울의 삶은 고단하고 고통스러웠다. 그는 자기의 광기를 다스릴 수 없었고, 자기의 광기에 지배당하는 것에 속수무책이었다. 파울은 종종 그의 광기에 대한 세상의 몰이해에 부딪혔으나, 해명은 불가능했다. ‘뻔뻔스러운 철학자’는 세기적으로 남은 반면, ‘뻔뻔스러운 미치광이’는 다만 초라하고 쓸쓸한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베른하르트에 의해서 씌어지지 않았다면, 우리에게는 파울의 정신적이고 광적인 삶에 주의를 기울일 이유조차 없는 것이다.

베른하르트가 파울을 처음 만난 것은, 교향곡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였다. 베른하르트 자신도 음악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교향곡에 대한 파울의 광적인 열정은 섬뜩할 정도라고 표현했다. 또 파울의 식견은,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달랐다. 왜냐하면 그는 예를 들어 그가 들은 음악, 찾아간 연주회 그리고 공부한 거장들과 교향악단들을 거의 쉴새 없이 비교할 수 있었고 이 비교를 언제든 다시 검증(같은 책, p.26)’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한 폭넓은 식견은 마치 ‘기억의 천재 푸네스(보르헤스의 단편 제목.)’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푸네스가 너무 뛰어난 기억력으로 인해 정보의 중요도를 판단하지 못한 것과 달리, 파울은 기억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그것을 언제든지 재생할 수 있었다는 점이 다르다. 오페라에 대한 파울의 광적인 정열은 빈에서 공연된 오페라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할 정도에 이른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오페라는 그보다 더 철저하고 더 지독한 실패는 있을 수 없을 만큼 결딴(같은 책, p.41)’이 나고 말았으니 말이다.

또한 파울은 어떤 분야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베른하르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서슬되고 있다. 베른하르트가 파울에게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해도 얘기할 수 있고, 그 주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같은 책, p.51)’는 찬사를 바칠 정도로 말이다. 또한 베른하르트가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분야에 대해서도 파울은 종종 높은 식견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자주 내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해 주었다. 나는 자주 내가 아니라 그가 철학자이며, 내가 아니라 그가 수학자이고, 내가 아니라 그가 전문가라고 생각했다(같은 책, p.79)’는 부분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베른하르트에게 있어서 파울과의 우정이 어떤 깊이를 지닌 것이었는지를 파악하게 한다. 파울과의 우정 속에서 베른하르트는 영감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파울이라는 존재를 전면에 내세운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이 그 단적인 결과이다.

한편 두 사람은 통찰력이라는 측면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파울은 구걸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러나 파울은 그 가난을 만든 구조와 가난한 사람들이 그러한 동정을 받기 위해 비열한 수를 쓸 수 있다는 사실에는 모른 척 했다. 그는 오로지 표면적인 가난의 모습만을 보았을 뿐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파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고 베른하르트는 말한다. 그러나 베른하르트는 이와 반대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단 한 번도 ‘피상적인 부분’만 보는 것으로는 만족해하지 않았다. 이는 독특한 인간애를 발휘하는 파울과, 작가적인 통찰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는 베른하르트의 모습을 대비시킨다.

동시에 미치광이이자 삶의 철학자이기도 한 파울과 베른하르트는 이 시대를, 이 세계를 거부하는 인물들이었다. 두 사람은 어떤 사람에 대해서건, 어떤 사안에 대해서건, 지독한 독설을 퍼부어댈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독설들은 세계에 대한 지독한 저주이자 동시에 지대한 관심의 표명이기도 하다.

그는 남을 관찰하는 일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냉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늘 남의 잘못을 비난할 이유가 있었다. 일단 그의 눈에 들어온 사람치고 최소한 몇 분 동안 그에게 비난당하지 않는 법은 결코 없었다. 그들은 벌써 혐의를 뒤집어썼으며 범죄를 저질렀거나 아니면 최소한 어떤 범행을 저질렀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무엇이든 곧 우리의 혹평을 받았다. 우리는 몇 시간이라도 자허 호텔 카페 테라스에 죽치고 앉아 사람들을 헐뜯었다. 우리는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온 세상을 철저하게 헐뜯었다. (같은 책, p.83)

그들은 현대 사회를, 그리고 역사를 철저히 부인하는 대화를 종종 나누었다. 그들은 ‘과거도 미래도 없으며 원자학적인 우둔함의 제물이 된 현대 사회’를 경멸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문제삼듯이 예술과 예술가를, 정부를, 국회를, 전 민족을 문제삼았다. 하지만 그들은 ‘자연을 사랑했고 증오했으며 그와 똑같이 예술을 사랑하고 증오했다(같은 책, p.139).’ 이것은 지극히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발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미치광이와 정신착란증, 그리고 폐병 환자, 예술가와 작가의 숙명이기도 한 것이 아닐까. 광기는 어쩔 수 없이 통찰력을 동반한다. 그것은 병자 또한 마찬가지다. 병자는 건강한 자들의 위선을 관통할 수 있다. 세상은 건강한 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으며, 병자가 잠시 내어준 자리는 그들이 당당하게 차지하고야 만다. 병자와 미치광이는 아웃사이더이며, 세계에 단 하나의 발만 걸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건강한 자와 미치지 않은 자(일명 정상인)들과 끊임없이 부딪히는 삶에 한 발을 걸치고 있지만, 나머지 한 발은 광기와 죽음에 걸치고 있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는 병과 죽음에 관해서도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먼저 정신과 의사들에 대한 극렬한 증오를 표명하는 데에서 현대 의학의 맹점을 꼬집는다. 의사들은 ‘비인간적이고 살인적이며 치명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치료를 한다. 심지어 정신과 의사는 ‘가장 무능력한 의사이며 설사 학문적으로 뛰어나다 해도 강간 살인범에 더 가깝다(같은 책, p.15)’고 까지 비난할 정도다. 의사들은 ‘다른 모든 의사가 그러듯이 자신을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해 (환자를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매 순간 다른 학술 용어로 도피(같은 책, p.14)’했다. 의사들은 환자에 대한 무지와 무능력을 감추고, 치료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그들의 관료적인 치료와 환자를 대하는 무관심한 태도는 환자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의사들은 베른하르트가 직접 두 눈으로 죽어나가는 걸 본 환자들을 치료하듯이 그를 치료했고, 그들에게 한 말과 똑같은 말을 그에게 했으며, 그와 나눈 농담과 똑같은 농담을 그들과도 나누었다. 따라서 병자는 자신의 앞길도 이미 죽은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베른하르트는 파울이 십 년이 넘도록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한다. 친구의 죽음을 예감하고, 그가 죽음으로 다가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역시 그들 우정의 한 면모였다. 또한 죽음을 예감하는 사람은 매 순간 광기어린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는 매일이 영원히 소멸되는 모습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들은 내일이 존재할 수 없다는 가능성 또한 잊을 수 없다. 삶과 죽음에 대한 편집증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것은 삶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지독하게 증오하게 만든다.

광기는 극단적인 삶을 부른다. 파울과 베른하르트는 치열하게 삶을 산 인물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그들의 모든 가능성을 넘어서까지, 모든 것을, 모든 가능성을 넘어서까지 이용했다. 그들은 그들 자신과 모든 것을 병적으로 돌보지 않았다. 파울의 삶은 자꾸만 되풀이하여 정신병원에서 끝나고 단절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주변 세계에 대해 극도로 반항하고 정신병원에, 혹은 폐병원에 실려 들어갔다. 그들은 세계 속에서 벗어나려고 정신병원과 폐병원으로 돌아와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그들의 광기는 보도블록에 정확하게 발을 내딛거나 끊임없이 수를 세는 일처럼 기하학적이고 대칭적이며 수학적인 것에 집착하는 편집증으로도 나타났다. 한편 베른하르트는 한 곳에 절대로 머무를 수 없는 불우한 향수병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일반적으로 인간 친화적이며 긍정적으로 묘사되곤 하는 자연의 본질을 꿰뚫어본다. 자연은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악질적이고 가차없는 냉혹성 또한 지니고 있는 것이다. 자연은 폐병 환자가 의사들의 요구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견뎌내야 하는 장소이다. 베른하르트는 자신은 인공적인 도시에서 비로소 숨을 쉴 수 있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그의 약한 폐는 도시에서 살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이동하는 자일 수밖에 없다. 그의 딜레마는 다시 시작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듯 나는 늘 내가 없는 곳에, 이제 막 도망쳐 나왔던 그 곳에 있으려 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내가 금방 떠나 온 곳과 달려가는 곳 사이, 자동차에 앉아 있을 때만 행복하다. 오직 자동차 안에서만 그리고 가는 길에서만 나는 행복하다. 나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불행하게 도착하는 사람이다. 내가 도착하는 곳이 어디든 상관없이 도착하면 나는 불행하다. 나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견뎌 내지 못하고 떠나 온 곳과 가는 곳 사이에 있을 때만 행복한 인간 중 하나이다. ……나는 가장 행복한 여행자이고 가장 행복한 움직이는 사람이며 가장 행복한 차 타는 사람이고 가장 행복한, 차를 타고 떠나는 사람이며 그 누구보다 불행한 도착하는 사람이다. (같은 책, p.119~120)

베른하르트에게 시골은 정신적인 고통을 주고, 도시는 육체적인 고통을 준다. 즉 그의 광기는 이 세상에 어느 곳에서라도 만족하게 살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이동하고 끊임없이 이동한다. 그 소모적인 여행의 도중에서만 그는 유일하게 만족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정신병적인 한 인간에게 자기 자신조차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존재인지 말해주고 있다. 그가 끊임없이 이동하는 것은, 그가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서, 현재에서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인 것이다.

한편으로 베른하르트의 작가적 양심은 자신의 영감과 실존을 위해 파울과의 우정을 이용하였다고까지 고백한다. 그는 죽어가는 친구로부터 ‘살아남는 데 필요한 힘의 대부분을 얻어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파울이 자신의 실존을 좀더 견디기 쉽게 해주기 위해, 적어도 그의 삶의 기간을 연장해주기라도 하기 위해 죽어야 했다고까지 생각했다. 파울이 죽은 다음에 작가는 단 한 번도 그의 무덤에 찾아가지 않았다고 소설을 끝맺고 있다. 그러한 고백은 그들 우정의 기괴함을 다시 한 번 증명해주기도 한다. 그들은 많은 일을 함께 했으며, 많은 대화를 나눴으며, 서로를 삶의 동반자로도 여겼으나, 동시에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그러하듯 서로에게 무용한 존재였다. 광기와 죽음은 철저히 자신의 영역이며, 아무리 가까운 친구나 근친이라도 대신해줄 수 없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는 파울과 베른하르트라는 이처럼 삶과 예술 속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두 기인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광기는 예술적 영감을 가져다주는 보고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삶을 파괴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기도 하다. 광기는 철학자와 작가를 탄생시킬 수도 있지만, 정신병원의 침대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미치광이를 탄생시키기도 한다. 예술가는 자신의 광기를 잘 통제해야 건강하고 정상적인 세계―광기를 철저히 통제하거나 광기를 무시하는 세계―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광기는 정신의 선물이자 육체의 저주이다. 또한 광기는 삶을 치열하고 극단적으로 살게 하는 원동력이다. 통찰력과 관통력, 창조력을 지닌 미치광이들은 우리 시대의 기형적 괴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한 광인인 파울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정상인과 광인으로 구분되어진 세상 속에서 그는 격리되어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구분에는 인간의 다양성과 창조성을 무시하는 체제적 요구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베른하르트는 소설과 수기라는 장르를 없애고, 이야기와 생각이라는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창조적인 실험을 한 셈이다. 파울이 광기를 삶 속에서 실천했다면, 작가 베른하르트는 종이 위에 실천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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