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밤새워 읽지 않으면 안 될 책을 만난 건 너무 오랜만이다. 벅차오르는 감정으로 인해 감상을 적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을 책을 만난 것 역시. 하염없이 높아진 내 눈에 차는 책은 별로 없었다. 또한 그저 그런 소설들을 읽으면서 차라리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서적이 훨씬 재미있다고 투덜거리곤 했다. 소설을 읽지 않는다는 친구의 이야기도 종종 떠올랐다. “소설을 왜 읽어, 시간 낭비야. 얻는 게 없잖아.” 그러나 그건 그가 진심으로 사랑할 책을 만나기가 어렵기 때문에 한 발언일 뿐, 소설 자체를 매도할 건 아니다. 한 권의 위대한 책은, 장르에 상관없이 영혼을 뒤흔든다. 하지만 불후의 명작이면 뭐하나. 가슴에 꽂히지 않으면, 그건 박제된 유물에 지나지 않는데.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그런 감격의 순간은 점점 멀어진다. 주위에는 한없이 가벼워 바스락거리는 비닐봉지 같은 유희가 떠돌아다닌다. 인터넷에만 접속하면, 수많은 TV프로그램만 다운받으면, 그 순간 절박한 생의 욕구는 사라진다. 어디에서나 쉽게 얻을 수 있는 즐거움. 싸구려라고 욕하지만 욕하는 그 순간, 진정성이란 무게에서 벗어나서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나. 스무 살 무렵부터 얼마나 그런 값싸고 순간적인 유희에 나를 맡겨 왔는지. 그 모든 건, 깊이를 동경하면서도 그 깊이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하는 내가 선택한 결과였다.

<자기 앞의 생>은, 그런 내게 화두와 같이 다가왔다. 어쩌면 밤을 새우고 난 ‘감상적인’ 감상일지 모르겠지만, 서른 넘은 사람을 울컥하게 하는 건, 쉬운 게 아니다.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이런 순간, 이런 기쁨이라는 깨달음이 너무도 고맙다. <생각의 탄생>에서는 창조적 능력의 하나로 감정이입을 꼽았다. 나는 생생한 주인공의 실체를 느끼게 한 작가의 능력에 감복한다. 예순 살의 나이에 그는 얼마나 아름다운 영혼을 창조했는가. 영원히 열 네 살에 머물러 있는 모모가 이미 어른이 된 나를 부끄럽게 한다.

늙은 유태인 창녀가 맡아 기르는 아이 중의 한 명인 모모. 삶의 밑바닥에서 천진하면서도 닳아빠진 감성 모두를 지니고 있는 그 아이를, 조숙하다는 한 마디 말로 표현하기엔 모자라다. 그 아이 주변에는 죽어가는 노인, 광대, 여장남자인 창녀, 마약을 하는 아이, 불법체류자 혼혈인 등 밑바닥 인생이라고 할만한 사람들이 우글댄다. 그러나 그들, 그리고 모모는 결코 운명을 저주하거나 삶을 애써 긍정하지 않는다. 삶은 그냥 주어진 것이며, 나름껏 당당하게 살아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누군가를 미워할 수도 있고, 운 좋은 미래를 꿈꿀 수도 있다. 꿈꾸는 것이 뭐가 잘못인가.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름다웠던, 행복했던 과거는 그들에게 고통만 안겨 주지 않는다. 결국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자조하고 냉소하는 것이 더욱 초라해 보일 뿐이다. 충격적인 출생의 비밀과 그 비밀을 알게 된 순간의 비극도, 모모를 쓰러뜨리지 못한다. 하밀 할아버지 말처럼, “이 세상에 너를 증명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으니까. 도대체 누가 누구의 삶에 불행하다, 행복하다는 딱지를 붙일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해 진정으로 살아가고 있는지가 문제다. 그런 면에서 모모는, 아낌없이, 남김없이, 후회 없는 삶을 산다. 모모의 삶은 그때그때의 최선의 판단에 따른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을 지킬 때도, 세상의 룰 따위는 상관없다. 인도적인 체 하지만 사실은 가장 비인도적인 사람들의 관습에 좌우될 필요가 없다. 모모는 자신만의 도덕 속에서 살아왔고, 티끌만큼의 뉘우침도 없을 테니까.

모모는 자기를 키워준 로자 아줌마를 사랑한다. 하지만 로자 아줌마의 모든 결점들, 추한 면들에 눈감지 않는다. 그녀의 삶이나 성격을 미화하거나, 병 들어 죽어가는 그녀를 바라보는 자신의 감정을 치장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외롭고 고달팠던 그녀의 삶의 마지막을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모모인 것이다. 기꺼이 혈육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에 버림받고 가난과 병에 부대끼고 역사적 현실로 인해 불안에 떨어도, 그들에게는 사랑하는 이에게 아낌없이 내어줄 가슴이 남아 있다. 곱고 아름답게만 자라온 아이들은 마치 똥 같이 모모를 쳐다보지만, 모모의 그 똥 같은 삶에는 조금의 가식도 없다. 볼품없이 튀어나온 목젖을 빨간 스카프로 가리는 친절한 롤라 아줌마, 멀어가는 눈으로 모모에게 이 세상의 비밀을 하나씩 말해주는 하밀 할아버지, 진심으로 모모와 로자 아줌마를 걱정하는 늙은 의사 카츠 선생님은, 모모와 진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다. 가짜 웃음과 눈물이 판치는 이 세상에서, 자기 이익과 욕심이 최우선인 이 세련되고 차가운 세상에서, 그러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너와 좀 더 오래 있고 싶어서 나이를 속였다는 늙고 병든 로자 아줌마의 고백에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이렇게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있었나 되뇌였다. 나는 나의 가족과 친구에게 그런 사랑을 주고 받은 적이 있던가. 나는 내 이웃의 고통에 진정으로 눈물 흘린 적이 있던가.

어쩌면 모모는 아주 특수한 환경에서 특이한 감수성을 얻을 수밖에 없었던 아이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특별한 영혼은, 어느 장소에서도 보석처럼 빛났을 것 같다. 우리 대부분은 평범한 삶 속에서, 작은 이익에 기뻐하고, 작은 손해에 분노한다. 상처받았다고 슬퍼하고, 사랑받지 못함을 한탄한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삶에 절망하고, 자포자기하며, 결국은 한계 안에 안주한다. 하지만 밑바닥에서도 한없이 투명하게 자신의 삶을 바라볼 줄 아는 그런 용기는, 쉬이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모모와 같은 영혼은 드물고 소중하다. 삶에 칭얼대지 않고, 진정 자기답게 살아야 할 의욕을 주기 때문이다. 미뤄두었던 꿈을 실행시킬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어른이 될수록 잃어가는 건 창조력과 탄성이다. 생동하며 뛰어오르지 못하고, 매일의 편안한 삶에 안주하며,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스스로를 방치해두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다만 과거의 한 페이지로만 남겨두고, 정작 영원히 현존할 수밖에 없는 지금 이 순간은, 값싼 감정으로 메우고 있는 것이다. 자기 앞에 펼쳐진 그 날것의 생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모모처럼 매 순간을 자기답게 살아야만 한다. 어떠한 절망도, 고통도, 자기다운 사람의 영혼을 쓰러뜨릴 수 없다. 또한 그런 사람만이 타인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자기 앞의 생을 당당히 걸어나가는 것이다. 마지막 숨을 쉴 때, 아낌없이 사랑했고 아낌없이 살았노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 모모의 남은 생 역시 그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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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3-25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의님 안녕하세요. 들어왔다가 제일 처음 글을 눌러봤는데 모모가 나오는 에밀 아자르라서 반가워서 인사드려요. 사실은 Shining님 서재에서 댓글따라 들어와서 프라하의 묘지, 리뷰를 보려고 했던건데. 좋은 리뷰가 많아서 천천히 읽어볼게요. 반갑습니다!

그라디바 2013-03-26 17:06   좋아요 0 | URL
저도 반갑습니다 :) 책 많이 읽는 분들은 생활 속에서(?) 좀처럼 찾기 어려운데 알라딘에는 많아서 참 부러웠습니다. 앞으로 좋은 얘기 나눠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