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두둔하는 악마에 대한 불온한 이야기
정영문 지음 / 세계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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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문 소설의 지독하게 자폐적인 감성이 맘에 든다. 어떤 작품은 읽다가 졸음이 온다. 잠 안 올 때 읽기엔 제격이다. 하지만 불면의 밤에 카프카를 읽듯이, 이 몽환적인 작품 세계는 나를 늘 기이한 기대 속에 빠져들게 한다. 무엇보다도 절대로 대중적이지 않은 어투, 동어반복적 서술들, 의미 없고 기운 없고 회의적이고 황당하고, 답답한 진술들, 하지만 그 안에 숨어 있는 강한 광기가 나를 사로잡는다. 물론 내가 이런 소설을 쓰고 싶은 건 아니다. 좋은 소설을 읽을 땐 작가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 경우엔 좀 다르다. ‘즐김’과 ‘창작’의 영역은 다를 수도 있으므로.

‘괴저’. 이 작품은 정말 카프카적이다. 어느 날 일어났더니 벌레가 되어 있었다, 가 아니라 어느 날 일어났더니 그의 몸에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라는 거다. 괴저[壞疽]는 혈액 공급이 되지 않거나 세균 때문에 비교적 큰 덩어리의 조직이 죽는 현상이라고 한다. 그는 죽어간다. 거기에는 이유가 없다. 그냥 몸에서 ‘푸른 가루가 떨어지면서’ 부패해가는 것이다. 가난한 농가에서 닭을 키우는 그의 부모는, 그의 병이 그들의 노후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까 걱정한다. 죽어가는 그의 눈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의 ‘본질’이 보이는 듯 한다. 그의 집에는 발육이 덜 된 것 같은 작은 네 마리의 닭이 있다. 그 닭은 모이를 자주 주는 데도, 성장이 더디다. 마치 ‘일종의 무서운 태만이 닭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12)’. 길거리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개나리를 보면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라.

개나리는 저게 좋은 모양이지,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 봄이니까, 봄이 되면 개나리는 하는 수 없이 꽃을 피우게 되지. 말하자면, 습관적인 것이지, 그는 생각했다. 그게 개나리가 하는 짓이니까, 그러고 싶지 않더라도 어쩔 수가 없지. 개나리로서도 하는 수 없겠지. 그의 생각은 곧잘 그렇게 부정적인 것으로 기울었는데, 특별히 그에게 악의가 충만해서는 아니었다. 단지 그는 부정적으로 사고하는 데 익숙해 있었다.(14)

그의 ‘괴저’를 발견한 아버지의 반응 역시 그로테스크하지만,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때 갑자기, 그 어색함을 깨며, 아버지가, 마치 네 얼굴에 곰팡이가 핀 것 같구나, 하고 말했다. 자신의 말에, 그의 아버지는 웃음을, 약간의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물론 그것은 적절한 웃음은 아니었다. 또한 그의 이야기는 웃을 만한 성질의 것도 아니었으며, 그렇게 웃는 것이 아버지로서의 도리도 아니었다.(..)그것은 어쩐지 허름한 웃음이었다. 어머니 또한 웃었는데, 그녀는 아버지가 웃을 때면 늘 따라 웃곤 했다. 그녀는 남편과 오랜 세월을 함께 하는 동안, 자신의 감정에 따르지 않고서도, 남편의 감정에 따르는 습관을 훌륭하게 익혔던 것이다. 그들의 웃음은 그들의 비참하고 볼품없는 삶을 위로하고,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닌, 차라리, 솔직한 감정을 감추고, 그 보품없는 삶을 위장하고, 그것을 끝없이 이어지게 하는 얄팍하고 뻔뻔스런 막이었으며, 서로를 질기게 이어주는 거북한 끈과도 같은 것이었다.(19)

죽어가는 그의 의식.

그가 예상한 것은 눈이 멀거나, 귀가 먹거나, 다리를 못쓰게 되거나, 후각을 상실하게 되거나 하는 것이었다. 그의 병은 그의 모든 예상을 깬 것이었다. 하지만 크게 염려되거나 하지는 않았다.(24)

작가의 다른 작품에는 ‘후각 상실’도 있다. 모든 감각을 하나씩 마비시키는 소설이라도 쓸 참인가?

부모는 그의 심상치 않는 병 때문에 비용에 대한 부담을 무릅쓰고, 의사를 찾아간다. 역겨운 요소란 대부분 갖추고 있던 그 의사는, 그의 병을 관찰하면서도 ‘시종 미소를 잃지 않았는데, 그것은 타인의 불행을 감내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미소였다’. 의사는 부모를 따로 불러, 그가 죽게 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그를 ‘자신의 필요에 따라 연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대가로 거액을 제시했다’. 그리고 입원한 이후, 그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몰라볼 정도로 악화되어 갔다. 거의 비약적인 발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동안 상태가 호전된 듯도 보였지만, 그것은 더 나빠지기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병의 경과가 그의 예상보다 훨씬 극적인데 어느 정도 흥분이 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는 갑작스럽게 그 증상이 나타난, 그를 정복해버린 그 병이 그의 몸 속에서, 그리고 어쩌면 그가 의식치 못한 그의 의지 속에서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되어온 것처럼 여겨졌다. 그는 그의 몸 위에 쓰여지고 있는 그 재앙이 조짐이 싫지 않았다.(31)’ 그리고 그의 몸에서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것은, 뭐라고 말하기 힘든, 이 세상의 어떤 냄새와도 같지 않은 냄새였다. 하지만 그의 부패해가고 있는 몸은 그에게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그의 몸에서는 감미로운 썩은 사과 향기가 났다. 그것은 어떤 방향제의 냄새와도 비슷했다.(31)’ 그리고 죽음이 가까워진 그는, 퇴원을 해서, 마당에 있는 닭을 도살한다.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재앙은, 바로 교회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부모가 변변치 않은 믿음을 지니고 다니고 있던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 제발 이 사람들을 나가게 해 달라는 그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어주지 않았다.

투명한 빛 속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먼지들 또한 시련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그를 고문하는 기도를 올렸고, 찬송가를 세 곡씩이나 부른 뒤에도 나가지 않았다.(..)그는 자신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것은 미소라기 보다는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그는 자신의 병에, 그리고 자신의 죽음에 그의 운명의, 그리고 동시에 운명에 대한 그 자신의 비웃음을 싣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그를 에워싼 사람들은 그의 미소를 그의 편안한 죽음의, 그리고 은총의 증거로 생각했다.(..)그의 매장이 끝난 후에도 무덤가에는 한동안 찬송가가, 마치 어떤, 쉽게 물러가지 않는 악취처럼 울려퍼졌다. 하지만 죽은 그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39)

소설에 나오는 서사란 대개 간단하다. 한 노인이 그에게 동거를 제안해서 ‘혼자 있는 것이 아니면서 아무와도 살지 않는 듯’ 살기도 하고, 이웃 중의 하나가 그를 초대하여 맛없는 음식을 대접하거나, 동네 아이가 그와 낚시를 간 후 혼자 자살하는 이야기 정도다. 화자는 보통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정보’가 없다. ‘내가 어디에서 왔으며, 그 전에는 무엇을 했는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 점과 관련해서 남들보다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게 틀림없고, 알고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한 나로써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게 별로 없었다(78)’는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는 진지하지도 않으며, 어떤 의미를 두지도 않는다. 따라서 타인이 그에게 베푸는 친절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다. 동거를 제안한 노인에 대하여, ‘그의 속셈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의 모습에 반했을 리는 없다. 또한 말동무가 필요해서라는 것은 이유가 될 수 없었는데, 그건 내가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게조차, 좋은 얘기 상대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서술한다. 기묘한 동거나, 의미 없는 초대, 무료한 낚시 등이 반복되면서, 지루한 생의 한 지점이 적나라하게 보여진다.

또한 그의 소설에는 여러 가지 동물이 나오는데, 오리나 닭, 염소 등이다. 그들 동물은 오히려 그보다 더 인간적인 삶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화자보다 고집이 세고 ‘자신의 말조차도 듣지 않는 것 같은’ 염소나, 성장하기를 거부하는 닭, 그를 깔보고 그의 무료한 일상을 방해하는 거위 등이 그렇다. 동물들과 그의 관계는 우스꽝스럽다. 인간보다 인간적인 동물에 대한 묘사가 작위적이지 않은 것은, 생의 의지를 잃은 무위의 인간에게는 당연해 보인다.

‘어두운 화면 위에 떠오른 느슨한 말들’은 작품은 말 그대로, 작가의 단상들을 모은 것이다.

그는 자신의 글의 주인공에게 도덕에 반하는 것이 아닌, 도덕과는 무관한 역할을 맡기고 싶어한다.(48)

그는 자신이 아무런 꾸밈 없이 표현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은 적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한다.(50)

그는 악을, 하나의 숭고한 소명처럼 행할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51)

그는 자신의 욕망이 크기나 강도나 아닌, 농도, 아니 그보다도 점도로만 측정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껍질의 상처로 흘러나오는, 고무나무의 수액과도 같은.(53)

그의 피로의 대부분은 그의 무리한 무위의 생활에서 오는 것이다. 그는 그의 무위에서 작위를 느낀다.(55)

그는 그의 글쓰기가 수명의 단축을 대가로 치러지는 의식의 한 형태라는 사실을 똑똑히 인지하고 있다.(58)

뭔가에 대한 재능의 부족이 다행인 경우가 있다. 가령, 대중적인 글을 쓸 수 있는 재능의 결핍에 대해 그는 감사한다.(61)

그는 그의 구원자를 자처하는 희망보다는 그의 배반자 행세를 하는 절망과 손을 잡는 편이 마음이 편하다.(61)

그는 조국을 떠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를 망명자로 생각하고, 그렇게 처신하고 있다.(65)

그의 삶은 외양에 있어서는 그지없이 평화로웠지만, 언제나 위기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는 한 가지 위기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보다 더 큰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는 한 가지 위기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보다 더 큰 위기에 처해왔다. 또다른 궁지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면서 이전의 궁지로부터 벗어나는 식이었다.(66)

삶에 대한 이토록 담담한 냉소, 의식을 밑바닥까지 들여다보는 끈질긴 서술, 삶을 하나의 점에 끄트러매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시선, 그것이 나를 즐겁게 한다. 현실이 환상처럼 느껴지고 환상이 오히려 현실다운 서술들은 읽는 것만으로 재미가 있다. 하나의 세계에 천착하여 끊임없이 펜끝을(아니면 손가락끝을) 벼리는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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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1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소화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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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는 마흔 살에 여자와 동반자살했다. 동반자살을 시도했다가 혼자 살아남은 전력도 있다. 그때의 경험은 ‘광대의 꽃’에 그러져 있다. 그는 죽음을 결심하고 이 소설들을 썼다고 한다. 일종의 유서인 셈이다. 죽음을 의식하는 스물 일곱의 청년. 돈을 많이 벌어 권위를 가지게 된 집안의 여러 아들 중의 하나. 형들과 동생과 비교되는 삶 속에서, 자신만의 삶을 찾아 고심했던 자전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의 의식세계는 죽음을 당면한 인간의 실존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죽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관성의 일상 속에서, 그 무서운 의식을 멀리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의 이야기들은 기묘하다. 살아있지만 이미 죽어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말투다. 유년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하지만, 전혀 즐겁지 않다는 투다. 누군가는 이 소설에서 ‘청춘’을 언급했지만, 소설을 쓴 작가의 나이만 청춘이었을 뿐, 세상 다 산 노인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다. 결국 청춘이란, 죽음을 망각하고,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열정적으로 사는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죽음 앞에 선 한 인간, 고귀하고 귀족적이고자 하지만 늘 스스로 열등 의식에 사로잡히는 늙은 인간의 인생기에 가깝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로마네스크’이다. 세 인물의 이야기가 모자이크처럼 짜여 있다. 선술 다로의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태어날 때부터 ‘하품’을 한 이 아이는 모든 것을 시시해했다. 어머니의 젖을 먹는 것도 귀찮아하고, 아이들다운 놀이에도 흥미없어 했다. 그리고 세 살이 된 어느 날, 혼자서 4킬로미터가 넘는 곳까지 걸어갔고, 돌아와서는 ‘백성의 아궁이는 풍성하도다’라는 예언(?)을 했다. 그리고 그 예언은 풍년이 옴으로써 적중했다. 그러나 이 아이는 결국 게으름뱅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 해 홍수가 나서, 열 살인 다로가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으로 가서 영주에게 선처를 구했다. 운 좋게도 다로는 목숨을 잃기는커녕 포상까지 받았다. 그러다 어느 날 다로는 ‘선술’이 적혀 있는 책을 발견했다. 쥐도 되어 보고 독수리도 되어보다가 미남자가 되는 방법을 익혔다. 사랑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책은 ‘너무 오래 되었던’ 것이다. ‘얼굴 빛이 얼빠진 듯이 희고 볼 아래가 불룩이 살이 쪄 통통했다. 눈은 가늘고 콧수염이 길게 나 있었다’(마치 일본 그림에서 본 듯한 인상이다). 

다음은 싸움 지로베에다. 지로베에는 어느 날 기필코 싸움 잘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수련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 수련을 써먹을 대상이 없었다. 지로베에가 너무 대단해보였기 때문에 아무도 도전하지 않았다. 그러다 지로베에는 술을 먹다가 싸움에 강한 것을 말하다가 실수로(?) 신부를 죽이게 되어 감옥에 갇히게 된다는 이야기다.

마지막은 거짓말 사부로. 사부로는 학자이자 지독한 구두쇠인 아버지 때문에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웃집 애견을 죽이고, 친구를 죽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거짓말은 들키지 않았다. 살인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사부로의 거짓말은 점점 불어났다. 학교에 간 사부로는 ‘부모님께 돈 많이 보내주게 하는’ 편지를 써서 유명해진다. 그리고 곧이어 소설을 쓰게 된다. 사부로의 거짓말은 ‘신의 경지에 도달해 있어 자신이 이렇다고 속일 때는 모두 진실의 황금으로 변해 있었다’. 사부로의 아버지는 유서에 ‘나는 거짓말쟁이다. 중국 종교에서 마음이 멀어졌지만 사람들에게는 계속 그것이 옳다고 강요했다.’라고 썼다. 

주먹만한 돌멩이가 느릿느릿 기어가는 걸 보았다. 돌이 기어가고 있군. 그저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 돌멩이는 그의 앞을 걸어가는 지저분한 아이가 실에 매달아 끌고 있는 것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아이에게 속임을 당한 것이 쓸쓸한 것은 아니다.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을 태연히 받아들인 자신의 자포자기가 쓸쓸했다.(12)

소설을 시시하다고는 생각지 않아. 내겐 그저 분명하지 않을 뿐야. 단 한 줄의 진실을 말하려고 백 페이지의 분위기를 조성하거든.(13)

형은, 자살을 제 흥에 겨운 짓이라고 꺼렸다. 그렇지만 나는 자살을 처세술처럼 타산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으므로, 형의 이 말을 뜻밖이라고 느꼈다.(13)

그런 꽃 이름 아니? 손을 갖다대자마자 부서지면서 더러운 즙을 튀겨 순식간에 손가락을 썩게 만드는 그런 꽃 이름을 알았으면.(..)이런 나무 이름 알아? 이 잎사귀는 질 때까지 푸르지. 뒤쪽만이 바삭바삭 말라 벌레 먹은 잎사귀여도 그걸 감쪽같이 감추고는 질 때까지 푸른 척 하는 거야. 그런 나무 이름도 알았으면.(19)

죽는 게 가장 좋은 거야. 아냐, 나만이 아냐. 적어도 사회의 진보에 마이너스 역할을 하는 녀석들은 전부 죽어버리면 되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너 말해 봐. 마이너스가 되는 녀석이든 뭐든 사람은 모두 죽어서는 안 된다는 과학적인 뭔가 이유라도 있기나 한가 말야.(20)

받침돌에는 이렇게 새겨줘. 여기에 남자가 있다. 나서 죽었다. 일생을 쓰다 버린 원고를 찢는 데 썼다.(23)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는 절망의 시를 짓고, 패배의 생활을 하고 있을 때는 삶의 기쁨을 기록한다.(30)

나는 잠자리에서 화재의 공포에 이유 없이 괴로워했다. 이 집이 타 버리면 하고 생각하니 도저히 잠들 수 없었다.(46)

나는 지고 있는 꽃잎이었다. 약간의 바람에도 파르르 떨었다. 타인으로부터 아무리 사소한 멸시를 받아도 죽을 듯이 괴로웠다. 나는 자신이 이제 곧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하였고 영웅으로서의 명예를 지켜 가량 어른이 얕보는 것조차 용서할 수 없었으므로 이 낙제라는 불명예도 그만큼 치명적이었던 것이다.(57)

완전히 멍하게 있어 본 경험이 그때까지의 나에게는 없었다. 뒤에서 누군가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나는 언제나 뭔가 태도를 꾸미고 있었다.(..) 나는 모든 일에 대해 만족할 수 없었으므로 늘 공허한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나에게는 열 겹 스무 겹의 가면이 착 달라붙어 있어서 어느 것이 얼마나 슬픈지 확인을 해볼 수가 없었다.(..)나는 어떤 쓸쓸한 배출구를 발견했다. 창작이었다. 여기에는 많은 동류가 있어서 모두들 나와 똑같이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떨림을 응시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67)

게다가 한번 상처입으면, 상대를 죽일까, 내가 죽을까, 꼭 거기까지 생각을 몰아간다. 그래서 논쟁을 싫어하는 것이다. 그들은 대충 얼버무리는 말을 많이 알고 있다. 아니라는 한 마디조차 열 종류 정도는 힘들지 않고 다양하게 사용해 보일 것이다. 논의를 시작할 때부터 이미 타협의 눈동자를 교환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웃으면서 악수하고는 속으로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이렇게 중얼거린다. 바보 녀석!(121)

언제부터 그런 습성이 배기 시작했을까. 웃지 않으면 손해본다. 웃어야 할 어떤 사소한 대상도 놓치지 마라. 아아, 이거야말로 탐욕스런 미식가의 덧없는 편린이 아닌가. 그런데 슬프게도 그들은 진정으로 웃을 수 없다. 배를 잡고 웃으면서도 자신의 자세를 신경쓴다. 그들은 또 남을 잘 웃긴다. 자신을 상처입히면서까지 남을 웃기고 싶어한다.(125)

그들의 논의는 서로의 사상을 교환하기보다는 그때그때의 분위기를 기분 좋게 마무리하기 위해 행해진다. 무엇 하나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렇긴 해도 한참 듣다보면 예기치 않은 수확을 거두는 수가 있다. 그들의 과장된 말 속에 때로 깜짝 놀랄 정도의 솔직한 느낌이 전해지기도 한다. 부주의하게 흘리는 말이야말로 진실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129)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불쌍한 건 여기 있는 요조가 아니라 요조와 똑같은 처지에 있던 때의 자신, 혹은 그런 처지에 대한 일반적인 추상이다. 어른은 그런 감정에 능숙하게 훈련되어 있어서 쉬 남을 동정한다. 그리고 감동 잘하는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다. 청년들도 역시 때로 그런 안이한 감정에 젖는 수가 있다. 어른은 그런 훈련을 우선 호의적으로 말해, 자기 생활과의 타협에서 얻는다고 하면 청년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배운 것일까. 이런 시시한 소설에서?(140)

노인의 긴 생애 가운데 거짓말이 아니었던 것은 태어난 것과 죽은 것, 두 가지였다. 죽기 직전까지 거짓말을 했다.(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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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 김상봉 철학이야기
김상봉 지음 / 한길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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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내가 어떤 부류의 예술을 좋아하는지 깨달았습니다. 그건 내가 아직도 어떤 사람을 이상형으로 생각하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것에 비하면 훨씬 명확합니다. 나는 특히 당신()의 소설을 좋아합니다. 특히 당신()의 소설에서 나는 보다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완성에 다가서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봅니다. 사실 좋은 예술품은 마음에 비슷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합니다. 매체가 다를 뿐, 위대한 정신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같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예술을 값싸게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가요. 저는 그런 예술이 없었다면 삶의 기쁨을 거의 느끼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다 나는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김상봉, 2003)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왜 특정한 작품들에 감동을 느끼는지, 그 이유를 어슴푸레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보통 그리스 비극이라는 말을 들으면 저는 상투적으로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비극적 운명을 타고났기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로 더 유명한 사람이지요. 그리고 호메로스의 서사시나 그리스 서정시, 그리스 비극은 그저 머나먼 옛 이야기로, 고리타분하고 뭔가 시대착오적일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합창이나 과장되고 극적인 어투에 도저히 적응을 할 수가 없었죠. 하지만 저자 덕분에 저는 그리스 비극에 대해 조금이나마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 비극이 어쩌면 예술의 본령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그리스 비극은 그리스가 정치, 문화, 군사적으로 찬란하게 발전했던 기원적 5세기 때 쓰여진 것이라는 사실부터 언급하고 싶습니다. 물론 그리스인들은 물질적인 크기를 예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편 호메로스의 정체에 대한 논란이 분분한 것은, 그의 작품들이 일종의 구전-즉 그리스인들의 공동창작에 가까웠기 때문일 거라 저자는 추측합니다. 아무튼 제가 놀란 것은, 그리스 비극은 고통스러운 시대의 산물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들은 어둠이 없는 빛, 죽음이 없는 삶은 없다는 통찰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풍요롭고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비극이 태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고통 자체에 탐닉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한계가 정신의 크기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 비극의 상상력은 <존재하는 어둠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빛을 상상하는 힘>이 아니라 <존재하는 빛 가운데서 존재하지 않는 어둠을 상상하는 힘>(81)에서 나옵니다. 사실 슬픔 속에서 기쁨을 떠올리는 것이, 기쁨 속에서 슬픔을 떠올리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런 <부자연스러운 상상력>이 그리스인들의 정신의 크기를 보여준다고 감탄합니다. 비극 작가들이 행복 가운데 고통을 상상한 것은, <인간 존재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상기할 때 삶이 참된 진지함을 획득하기 때문이며, 인간이 그 한계에 부딪힐 때 당할 수밖에 없는 고통을 통해서만 보이지 않는 정신의 크기를 그려보일 수 있기 때문>(83)입니다.

또한 그리스 비극은 <당함의 비극, 노예의 비극>이 아니며, <자유인의 비극, 행함의 비극>이라고 합니다. 즉 그리스 비극은 제도나 관습에 얽매인 수동적 당함이 아니라, 능동적인 행위에 의한 비극입니다. 예컨대 오이디푸스는 신탁을 듣고 운명을 따르지 않으려고 집을 나가는데, 오히려 이 행동이 비극적 결말을 초래하게 됩니다. 정의롭다고 믿은 능동적 행위가 파멸적 운명으로 그를 이끈 것이지요. <의도와 결과의 불일치-하마르티아>를 낳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인의 힘이나 노력으로 제거할 수 있는 고통을 게으름, 비겁함 때문에 겪고 있는 상황은 그리스 비극과 거리가 멉니다. 심지어 사회적 약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주체적 의지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인물이 어떤 숭고한 행위에 의해 겪게 되는 일이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숭고한 행위란 <완전히 실현된 행위, 모든 정성을 다 바쳐 최선을 다해 자기를 전개하여 극한에 도달한 행위>(48)입니다. 합리적 정신을 통해 왜냐고 물을 수 있는 것은 자유인의 몫입니다. <자유인은 삶의 주인, 모든 일에 대해 스스로 결정하고 결과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고, 언제나 왜라고 묻고 합당한 이유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라고 저자는 정의합니다. 자유인은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의 근거를 찾으며 삶을 총체적인 문맥에서 이해하려 노력한 뒤, 법칙에 따르려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피할 수 없는 장애-즉 고통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 비극에서 말하는 슬픔이나 고통은 무엇일까요? 저자는 우리의 슬픔을 이기심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보통 우리의 슬픔은 <채워지지 않은 욕망의 그림자, 사사로운 욕망, 과도한 욕심이 드리우는 그림자>(51)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욕망을 이루지 못할 때 느끼는 사사로운 슬픔이 무조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욕망이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 욕망이 멈추어야 하는 지점이 어디인지 사유하지 않으면 쉽게 타락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우리가 믿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 학습되고 주입된 것입니다. 저자는 우리가 <외적 강제와 편견 고정관념, 유행의 노예이면서 스스로를 자유롭게 주체적으로 믿는 모습>(232)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극복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욕망 역시 어쩌면 우리가 욕망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진짜 슬픔은 보편적으로 추체험할 수 있는 슬픔입니다. 타인의 안에 조용히 흐르는 슬픔을 관조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슬픔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고통이란 무엇인가요? 고통의 체험은 누구에게나 절실하면서 독자적입니다. 더구나 인간 존재 자체가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죽을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고통을 당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능동적 행위와 노력이 아무 쓸모없는 순간이 있다는 것, 그리하여 삶은 표면에 드러난 능동적 행위들의 이면에 어찌할 수 없는 수동적 당함의 구조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는 것>(88)이 고통을 유발합니다. 한편 그 고통은 우리가 속한 사회 혹은 제도의 불합리에서 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심각한 고통은 차라리 망각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유리한 일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기억을 도려내고 싶고, 없던 일로 돌려버리고 싶습니다. 안 그러면 죽을 만큼 괴롭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고통을 반추하는 것이 고통스러워 반성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고통에 영원히 사로잡힌다>(97)고 말합니다. 고통에 대한 반성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거기에서 헤어나올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우리가 죽는다는 그 사실은 태고 이래로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운명 앞에서 나 자신의 주관적 태도를 고상하게>(146)하려 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 죽음보다 큰 정신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겁니다. <어차피 죽어야 할 인간으로서,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고귀하게 사느냐 그리고 또한 그에 걸맞게 얼마나 용감하게 죽느냐를 통해 한 사람의 존재 가치를 평가하려 했던 것>(148)이지요. 그래서 그리스인은 영생이나 내세 따위를 바라지 않고, 다만 영광스럽게 죽기를 바랍니다. <자기의 탁월함을 실현하고, 공동체 속에서 자기의 의무를 다하고자>(151)하는 것입니다. 이는 칸트도 되풀이하는 말입니다. 칸트는 <인간이 존재하는 까닭은 그냥 생존이나 행복한 삶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인간만이 이룰 수 있는 보다 고귀한 가치, 즉 선을 실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150)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고귀한 가치, 숭고한 삶이란 개별적인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기 어려워보입니다. 우리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영웅도 아니고, 죽지 않는 신도 아니며, 정치적으로 자유로웠던 그리스의 시민도 아닙니다. 우리의 상황은 2,500년전보다 훨씬 나쁘죠. 하지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그리스 비극 같은 예술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나는 당신들의 소설에서 그러한 면모를 찾으려 애쓰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무지한 존재들입니다. 자연에 대해서도 우리가 알 수 있을 정도만 아는데, 그나마 그런 과학 지식도 습득하기 쉬운 게 아닙니다. 더 심각한 것은, 과학이 우리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못한다는 겁니다. <자연적인 필연성-아낭케>는 납득할 수 있어도, <도덕적 정당성-디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왜 이토록 큰 고통스러운 일들이 벌어지는지, 왜 고통을 준 자는 그만큼 되돌려 받지 않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무지합니다. <현실은 불순하고 사악하며 정당화될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316)고 저자는 말합니다. 자연재해는 가난한 나라들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나라들 간에 크고 작은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한 국가 내에서도 온갖 부당한 이유로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물론 자연재해야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으니 논외로 한다고 해도, 인간이 만들어놓은 제도는 왜 이토록 불합리한 것일까요? 왜 인간의 문명은 의로운 방향으로 진화하지 않는 걸까요? 더구나 이젠 제도나 체제라는 것 자체가 너무나 거대해서 한 개인은 그 앞에서 심한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도덕적 정당성을 논하기에는, 각각의 처지가 너무 절박하다고 우리는 변명합니다. 모두에게 사정이 있고, 모두가 힘듭니다. 결과적으로 외부로부터 와서 내가 겪고 있는 이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이웃의 고통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이 있다면, 도대체 어떤 근거로 그가 자애롭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를 읽었지만, 여전히 의문스럽습니다. 신이 인간을 너무 사랑해서 자유의지를 주었다고 합니다. 모든 인간이 도덕적 정당성에 의해서만 움직인다면 그건 자동인형일 테니까요. 하지만 이런 추상적인 이야기는, 애초에 자유의지를 펼칠 기회도 없이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누군가 장애인으로 태어나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비참하게 살다 죽었다면, 거기에 무슨 자유의지가 있으며, 신의 사랑이 존재한다는 겁니까? 무자비한 전쟁에서 학살당한 사람들, 의로운 일을 하려다 몰살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현재 진행중인 이 세상에, 신의 사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저자는 이에 대해 냉소적으로 말합니다. <하늘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에 대한 열광은 땅 위에서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냉담한 무관심의 이면이며, 순수한 아름다움에 대한 탐닉은 현실의 추악함을 잊어버리기 위한 마약인 것입니다. 특히 아름다움은 직접적 쾌감을 동반하기 때문에 현실의 비참함을 잊기 위한 탁월한 마취제>(174)라고 말입니다. 종교나 예술이 현실을 외면하기 위한 도구로 쓰일 때, 그것은 추악해집니다. 심지어 저자는 직접 서정주를 거론하며 <기생의 시인>이라 일갈합니다. 권력의 종 노릇을 하는 아름다움, 노예를 자처하는 아름다움은 <장식품이며, 거세된 아름다움이고, 골방에 갇혀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는 겁니다. 불의한 현실을 고치지 못하기에 다만 망각할 뿐인 예술에 대해 저자는 냉혹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적 자율성이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술지상주의는 참으로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칸트도 미적 판단과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미와 선이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미와 선은 주관적 인식의 산물이기에, 그들 사이의 관계의 성격을 밝히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오직 예술이 삶 전체를 규정하는 원리가 될 때, 다시 말해 그것이 현실 전체를 인도하는 원리가 될 때에만 예술은 진정으로 자율적>(177)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는 바로 <예술이 삶의 자투리 시간의 여흥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본질적으로 규정하고 형성하기 위해 존재했던 시대>(178)였다는 겁니다. 참된 아름다움은 보편적인 진리, 즉 총체성을 보여줍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개별자들이 자기의 고유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자기를 통해 서로를 보존하고 아름다운 전체를 이룰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완전성>(182)이라는 것이죠. 저자는 단순히 자연의 모방이라고 여겨지는 미메시스 역시, <상상력의 힘을 통해 아름다운 표상 속에서 존재의 온전함을 반복하고 따라체험하는 운동>(186)이라 해석합니다. 즉 미메시스는 미적 자율성을 이루기 위한 한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방의 본질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그를 통한 자기 반성에 있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우리의 운명도 결국 <자기 자신에게 은폐되어 있는 삶의 타자적 이면>(192)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내재적 타자성>을 관조하는 것은, 자기 표현일 뿐만 아니라 자기 실현을 이룰 수 있는 일이 됩니다.

한편 그리스 비극은 세 단계에 걸쳐서 탄생합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는 시간이 배제되어 있기에, 사건들은 박제된 채 흐르지 않습니다. 서사시에는 완벽한 인간성을 갖춘(심지어 불완전성까지 포함한) 이상적인 인간이 존재합니다. 이는 마치 공동체적 의지로 구현된 인간처럼 보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그리스인의 집단지성이 창조해낸 존재들인 거지요. 한편 서정시 단계로 넘어가면서 주체가 부각되기 시작합니다. 고통의 탐구나 슬픔의 해석이라는 면에서는 서사시와 유사하지만, 주체의 자기반성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달라집니다. 인간은 이제 시간 속에서 고통을 겪습니다. ‘주체는 홀로 있음 속에서 탄생합니다. 하지만 <자기에 대해 말하면서 도리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삶과 세계에 대해 말해야>(222) 보편적 주체성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개별적 주체와 보편적 주체를 의식하는 시민이 함께 하는 그리스 비극이 탄생합니다. 주체와 시민이 함께 할 수 있는 곳이 광장이었고, 그리스 비극은 공연예술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극은 처음부터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소통을 목표로 하는 예술>(237)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 비극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합창은 시민의 정신적 합일, 대화는 개별적 주체성을 드러냅니다. <참된 의미의 시민적 주체성과 공공적 이성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주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전체를 사유할 수 있는 균형이 요구>(243)됩니다. 저자는 <오늘날 보편성을 획일성과 동일시하고 그것을 비판하는 것은 시대의 유행이 되었다.>(245)고 말합니다. 하지만 보편성은 파시즘적인 획일성과 달리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다시, 고통의 문제로 되돌아옵니다. 우리는 개별적으로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서로 고통받고 슬픔 속에 있는 존재라는 걸 깨달을 때, 우리는 자기의 좁은 방으로부터 벗어나 타인의 슬픔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렇게 타인의 슬픔에 참여함으로써만 우리는 타인과 진정으로 만날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261) 저자는 만남을 중요한 키워드로 강조합니다. 비극은 타인의 고통을 통해 연민을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플라톤은 자기 연민만을 불러일으키는 극은 쓸모없다고 여겼기에, 비극 시인들을 추방해야 한다고까지 말합니다.

<우리는 넘어졌다고 어린애들처럼 다친 데를 움켜잡고 울고불고 하는 데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되네. 오히려 우리는 넘어져서 아픈 데를 가능한 빨리 치료하고 회복함으로써 의술에 의해 탄식의 노래를 그치게 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항상 영혼을 단련시키지 않으면 안 되네.>(285)

그렇기에 슬픔이 다만 감상적인 자기 연민에 지나지 않는다면 비극의 의미는 희미해집니다. 다만 안도하기 위해, 내가 아닌 남의 불행을 목격하기 위해 비극을 본다면, 그것은 얼마나 천박한 일이겠습니까? 루소가 말한 것처럼, 자신도 겪게 될지 모르는 타인의 불행만을 동정하는 값싼 감상주의는 한껏 울다가 금방 되돌아설 수 있게 만듭니다. 감상주의를 통해서는 어둠의 깊이를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카타르시스는, 단지 감정 정화일 뿐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동참함으로써 자기의 고통을 초월하고 극복하는 것>(293)이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같은 고통을 겪거나 목격하더라도, <공포는 이기적 정념이나 이타적 정념의 원천>(306)이 될 수 있습니다. 불행히도 우리 시대는 공포에 의한 이기적 정념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비극의 힘은 자기 자신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공포의 정념들을 자기중심적인 구심운동으로부터 해방시켜 그것을 타인의 고통, 더 나아가 우리 모두가 같이 겪을 수밖에 없는 보편적 고통에 대한 연민과 공감으로 이행하도록 하는 것>(306)이라 저자는 말합니다. 모두가 겪을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 비극성을 응시하고 성찰하는 것이, 우리를 보편적 주체로 끌어올리는 일인 것입니다. 심지어 <인간은 오로지 타인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정도만큼만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309)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에 저는 크게 감동했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동참하는 행위야말로 우리를 진정으로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 어떤 부유한 권력자(예컨대 이건희)도 고통으로부터 최종적으로 면제된 것은 아니니까요. 진짜 카타르시스는 <편협한 이기심과 고립된 개별성에서 벗어나 열린 광장에서 타인과 만나고 더 나아가 보편적인 주체성에 참여할 때 느끼는 기쁨>(310)으로 재정의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사로운 고통이나 번민을 가볍게 만들고, 정신을 넓혀줍니다. 타인과의 만남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확장하고, 진정으로 삶을 긍정하게 한다는 것이지요. <고통을 통해서만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명랑함이야말로 그리스 비극이 보여주는 정신의 크기요, 숭고>(314)입니다. 이는 삶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나 도취가 아니고, 초인의 무감동이나 신적 초월이 아닙니다. 만남이 이루어지는 광장을 꿈꾸는, 시민의 명랑함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 비극의 정신은, 지금 여기, 오늘의 현실에서도 충분히 유효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삶이 고통으로 가득차고 죽음이라는 비극을 향해 질주하고 있더라도, 숭고하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우선 타인의 고통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비극적 감수성이 절실합니다. 저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타인과 대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 대화는 화기애애한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 비극의 대화는 인물들의 적대적 논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적의 눈물을 존중하는 시대의 논쟁은, 결국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우리 역시 더 섬세하게 현실을 분석하고, 치열하게 쟁점을 논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고통이 만연한 시대에, 비극적 존재일 수밖에 없는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인간다운 삶이라고 믿습니다. 누군가는 부질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저는 여전히 문학이 비극적 감수성을 불러일으킬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 보다 인간다운 삶을 꿈꾸며 글을 쓰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 비극 시인들의 후예가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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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흠다워라. 
 
 고양이를 사랑하다보면, 고양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양이는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주는 것도, 이 보드랍고 따스한 털을 가진 생명체라는 것이, 놀랍도록 아름답고, 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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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옆의 소시오패스 - 사이코패스의 또 다른 이름
마사 스타우트 지음, 김윤창 옮김 / 산눈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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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 반사회적 성격장애 등의 용어는 학자에 따라서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소시오패스'는 '사회 규범에 순응하지 못하고, 기만적이고 간교하고, 충동적이며, 공격적이며, 자신을 포함한 사람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고, 무책임하며, 학대나 폭력을 쓰거나 범죄를 저지른 뒤에 가책을 느끼지 않으며, 기막힐 정도로 무정한' 특징을 보이는 사람들, 즉 '양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미국 사회에서 대략 4%의 사람이 소시오패스로 추정된다. 동양 문화권에서는 이보다 훨씬 적은데, 공동체를 중시하는 문화적 환경 덕이라고 한다. 하지만 끝을 모르고 펼쳐지는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오늘의 우리 사회는, 소시오패스라는 괴물을 만들어낼 만한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남을 속이거나 불법을 저지르는 일에 개의치 않는 사기꾼이 명망을 얻고, 양심에 따라 정직하게 사는 사람은 바보 취급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니까. 나 역시 살아오면서 양심이 결여된 듯한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설마 그런 행동을 하리라고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의외로 그렇게 어렵지 않다.

물론 언제나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이며 사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어느 정도 우울하듯 어느 정도는 비양심적이다. 그렇지만 온전히 양심이 없는 상태라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심지어 큰
'고통 속에서도 죄의식은 존재한다. 완전한 무죄의식은 상상을 불허'(29)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인간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 자신의 감정과 정상적인 동기로서는 애초에 왜 그러고 싶어 하는지를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는 어떤 이해할 수 없는 행동'(153)을 하는 사람들. 그들은 중립적인 낱말과 감정적인 낱말에 반응할 때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정상적인 사람이 '사탕'보다 '사랑'에 더 강렬하게 반응하는 것은 그것이 의미있는 말이라고 여기기 때문인데, 그들에게는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소시오패스들은 일반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감정적인 문제들을 대할 때, 마치 '수학 문제를 풀도록 요구받은 듯이 반응'
(198)한다.

소시오패스들이 꼭 범죄자인 것은 아니다. 실제 감옥 수감자 중에 소시오패스의 비율은 20%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들은 우리 주변에서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문제는 소시오패스를 환자나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더구나 소시오패스들은 자신을 바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가 사악하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세상살이 방식에서 아무런 잘못도 보지 못하며,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85) 도대체 사회에서는 소시오패스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누군가 소시오패스임을 알게 되었더라도,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것인가? 사실 현재의 연구로는 소시오패스를 '치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그들과 관계맺지 않고, 그들과의 게임에 빠져들지 않는 방법으로 자신을 지키는 수밖에 없다. 이누이트 족은 보다 강력하게 소시오패스를 배제한다. 이누이트 족은  '해야 할 일을 알면서도 하지 않는 사람들', '거짓말하고 속이고 물건을 훔치고 사냥하러 가지 않고 여자를 농락하는 사람들'(211)
을 '쿤랑에타'라고 하는데, 그들이 불치임을 알고 있다고 한다. 이누이트 족은 쿤랑에타라고 판단된 사람은 얼음 벼랑에서 떨어뜨린다.

양심과 감정이 없는 소시오패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권력을 쥐는 일-
'남을 이기는 일'-이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가장 완벽한 수단은 목숨을 빼앗는 것이기에, 그들의 일탈 행위 중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 살인을 하는 소시오패스의 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은 남을 이기는 순간의 짜릿함을 즐긴다. 심지어 남을 지배하는 순간에 분비될 '아드레날린'을 위해, 자신에게 소득이 없거나 피해가 가는 짓을 하기도 한다.  '영리하거나 능력 있는 사람들, 매력적이거나 인기 있거나 도덕적으로 존경할 만한 사람들을 거꾸러뜨리는 것'(18)도 그들의 놀이 중 하나다. 다만 '실존적 복수'
에 불과한 이런 장난에서 그들은 쾌감을 얻는다. 권력 놀이를 제외하고는 소시오패스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거의 없다. 그들의 삶은 지루하고, 내면은 텅 비어 있다. 충동적으로 시작해서 몰두한 무언가에도 금방 질리기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새로운 자극을 찾아 헤매게 된다.

한편 그들은 대단한 연기자이며, 매력적인 유혹자이기도 하다. 소시오패스의 특징 중 하나가 '불가해한 매력'이다. 그들의 자유분방함은 카리스마로 비춰지기도 하고,
'사회적, 신체적, 경제적, 법적 위험을 무릎쓰는 행위' 는 매혹적이다.  그래서 양심의 제약과 제도에 얽매여 있는 보통 사람(불행히도, '양심이 없는 자들은 타인에게 친절하며, 남의 말을 곧대로 믿는 사람을 즉각 알아볼 수 있다.'(145)은 그들의 유혹 앞에서 흔들린다. 그리고 그들은 감정적 유대를 이용해서 '복종이나 돈, 정보, 승리감, 일시적인 연인 관계'(146) 등을 얻는다. 관계는 그저 이기기 위한 게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들은 감정적 결여를 감추는 데 대단한 재능을 갖추고 있기에, '보통 사람'은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빈둥거리며 타인의 삶에 기생하는 소시오패스는 궁지에 몰렸을 때, 악어의 눈물을 흘린다.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우울하고 힘든 삶을 살고 있는지 말하며, '동정'을 구한다. '동정'은 그들의 행동을 자유롭게 해 주며, 누군가가 그들에게 '책임감'을 느끼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내를 때린 소시오패스 남편은 울며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말한다. '선한 사람들의 동정은 두려움보다도 더 편리한 백지 위임장'
(173)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여러 명의 소시오패스의 일화를 제시하여 그들이 결코 낯선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심지어 저자에게 상담받은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가 소시오패스임을 확인하기도 한다.  소시오패스에 대처하는 방법 역시 나름대로 제시되어 있는데,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필요한 대목이다. 악은 악한 이들보다 악에 대항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확산된다. 소시오패스라는 인간종에 대한 연구와 대처법에 대한 탐구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양심을 갖는 삶이 그렇지 않은 삶보다 훨씬 의미 있고 행복하다는 주장으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타인과의 유대감, 자아 성취감, 보다 인간다운 삶에 대한 추구야말로 우리를 진심으로 살아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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