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인을 기다리며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들녘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시대도 장소도 알 수 없는 한 평화로운 마을. ‘나’는 이 곳의 재판을 맡고 있는 치안판사다. 군대가 주둔해 있는 이 마을은 언제나 ‘야만인’들을 경계하고 있다. 사실 야만인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내리기 어렵다. 그들은 ‘타자’이며, ‘우리’와 문화가 다르며, 원시적이며 폭력적이라는 속설만 존재할 뿐이다. 실제로 우리가 접하는 야만인들은 어부이거나 유목민이며, 어떤 정교한 기계나 폭력적인 도구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나는 이 곳을 삼십 년이 넘게 다스리고 있지만, 어떤 유혈 사태도 생긴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다소 달콤한 매너리즘에 잠겨 있기도 하다. 오히려 나는 야만인들을 가엾은 존재로 여기고 있다. 그들은 가난하고 무지하고 순박하다. 오히려 나는 야만인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을 더 염려한다. 속이는 자는 오히려 야만인이 아니라 주민들이다. 야만인들은 자신들의 소중한 생산품을 소량의 럼주와 바꿔버릴 정도로 경제 관념도 없다. 나는 야만인들이 술을 마시는 것을 싫어한다. 주민들의 편견처럼, 야만인들이 더럽고 무질서하게 변해버리는 상황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독한 술의 노예가 된 거지들과 부랑자들이 도시 주변에 정착하는 걸 원치 않는다. 나는 이 사람들이 상점 주인의 속임수에 넘어가 그들의 물건을 시시한 장신구와 교환하거나 술에 취해 시궁창에 드러눕고, 결국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게으르고 부도덕하며 어리석다는 주민들의 편견을 굳히는 걸 보기가 괴로웠다. 문명이라는 게 야만인들이 가진 미덕들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종속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면, 나는 문명에 반대하는 입장이다.(67)

나에게는 소일거리가 있는데, 바로 유적을 파헤치는 일이다. 단순한 범죄를 저지른 마을 주민이나 병사들을 동원해 그는 유적을 판다. 거기에서 그는 알아볼 수 없는 문자가 적힌 조각들을 본다. 그는 알 수 없는 문자들을 나열해보고 조합해본다. 그는 이미 사라진 제국에 대해 상상한다.

어쩌면 나는 나처럼 치안판사직에 있었던 사람의 머리 위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사람은 결국 야만인과 대치하다가, 자신의 관할구역 내에서 결국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머리가 희끗희끗한 또 다른 제국관리였는지도 모른다.(29)

후에 그에게 닥치는 재앙을 생각하면 이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소설은 나와 죨 대령의 만남에서 시작한다. 죨 대령은 정부에서 파견한 인물인데, 야만인에 대한 감시와 경계를 강화하는 임무를 가지고 이 마을을 찾았다. 나는 죨 대령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조금이라도 수상한 야만인들을 보면 무조건 잡아들인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이유도 체포 원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오는 것을 보자 그들이 갈대 속에 숨으려고 했습니다. 말을 탄 사람들이 오자 숨으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지휘관께서 그들을 잡아들이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숨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33)’

그리고 죨 대령은 통역을 통해야 하는 야만인을 무도하게 심문한다. ‘고문 기술자’인 그에게는 확고한 원칙이 있다.

“특정한 말투가 있습니다. 사람이 진실을 얘기할 때는 특정한 말투를 사용하는 법입니다. 우리는 훈련과 경험을 통해서 그런 말투를 알고 있습니다.”
“진실을 얘기하는 말투라고요! 당신은 일상적인 대화에서 그런 말투를 가려낼 수 있나요? 당신은 내가 진실을 얘기하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나요?”(...)
“나는 진실을 찾기 위해 물리적인 힘을 행사해야 하는 상황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처음에는 거짓말을 합니다. 그리고 물리적인 힘이 가해지면 더 거짓말을 합니다. 거기에서 압력이 더 가해지면 변화가 생깁니다. 그러다가 물리적인 힘이 더 가해지면 그때서야 진실을 얘기합니다. 그것이 진실을 알아내는 방법입니다.”(13)


죨 대령은 진실은 오로지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만 밝혀진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전 세계 고문자들의 공통된 사고방식이다. 인간은 고통 속에서 비로소 진실을 토해낸다는, 고통스러운 명제. 그러나 권력을 쥔 자에게 이는 진실이 되고, 권력을 등진 자에게 이는 죽음에 버금가는 고통스러운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죨 대령의 전횡을 처음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그저 한 세대에 한 번씩은 일어나기 마련인,‘야만인들에 대한 히스테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꿈들은 너무 편해서 생기는 것들이다. 내게 야만인들의 군대를 보여준다면야 나도 믿을 것이다.(18)’ 나는 야만인의 군대가 있다는 소문 따위에는 코웃음을 친다. 그러나 죨 대령에게는, ‘야만인의 군대’야말로 그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따라서 그는 사소한 잘못을 저지른 야만인들을 모조리 잡아들인다. 그리고 잔혹하게 고문한다. 그 과정에서, 가엾은 늙은이가 죽고 나머지 사람들은 심하게 다치거나 불구가 된다. 그 고문의 밤에, 나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들의 고통을 외면한다. 그러나 고문당한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한 나는, 죨 대령에게 항의한다. 그러나 그는 결국 죨 대령과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결국 ‘품위 있게’ 그를 보낸다. 결국 나 역시 제국의 일원이며, ‘아무리 비싼 대가를 치른다 하더라도 평화를 유지하는 게 어쩌면 좋은 것(27)’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자괴감에 휩싸인다.

나는 평생 교양 있는 행동을 신봉해 온 사람이다. 그렇지만 이번 경우에는, 그렇게 했다는 게 오히려 역겹게 느껴진다는 걸 부정하기 어렵다.(42)

그리고 나는 야만인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제국의 신념이 얼마나 투철한지 잘 알고 있다. ‘그들을 사막으로 이동시켜 그들로 하여금 마지막 힘을 다해 그들 모두가 들어가서 누울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구덩이를 파게 하고 거기에 그들 모두를 영원토록 묻어버리고 새로운 의도와 결심으로 가득 찬,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로 귀환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아주 적을 것(44)’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나는 한 야만인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고문당해 죽은 늙은이의 딸이다. 그녀 역시 눈이 반쯤 멀었고, 다리를 절고 있다. 그것은 고문의 흔적이다. 나는 그녀를 나의 숙소로 데려온다. 그리고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나이 많은 나는 그녀에게 성적인 쾌락을 추구하지 않는다. 성욕은 마을의 여관에서 해결한다. 그리고 나는 매일 그녀를 어루만지고 씻기다가 잠이 든다. 그 행동은 지속적이며, 나 자신도 그 행동의 의미를 알 수 없다. 그녀는 문명의 폭력에 상처 입은 존재이다. 나는 그녀의 ‘상처’에 매혹된다.

그녀를 어루만지는 행위를 하다가 도끼로 찍힌 것처럼 잠에 압도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녀의 몸 위에 엎어진 채 망각 속으로 빠져들다가 한두 시간 후에 어지럽고 혼란스럽고 목이 말라 잠에서 깬다. 꿈조차 꾸지 않는 이 상태가 나에게는 죽음, 혹은 시간밖에 존재하는 텅 빈, 황홀경 같다.(55)

그러나 종종 나는 그녀에 대해 생각하며 혼돈을 느낀다. 나는 그녀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는 깨닫는다. ‘그녀를 고문했던 사람들과 내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가 무시해도 좋을 만큼 미미하다는 것(50)’을. 그녀를 고문했던 사람들은 바로 폭력을 통해 그녀를 소유하려고 했다. 폭력은 쉽게 타인을 굴복시키는 수단이다. 그리고 또한 폭력을 통해 우리는 타인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폭력이야말로 인간의 껍질을 벗겨내고 속엣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마치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실을 고백하듯, 고문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타인’이며, 내 운명을 쥐고 있는 ‘신’이다. 그러므로 고문하는 그 순간, 고문자는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몸을 지지고 찢고 베어서 다른 사람의 은밀한 몸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던 착각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것인가! (...) 나는 그녀의 옷을 벗이고, 그녀의 몸을 씻겨주며, 그녀를 어루만지고, 그녀 곁에 눕는다. 하지만 똑같은 의미에서, 나는 그녀를 의자에 묶고 두들겨 팰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덜 친밀해지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그녀 곁에 누워 잠을 자든, 혹은 그녀를 시트에 싸서 눈 속에 묻어버리든, 매한가지인 것처럼 보인다.(76)

나는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녀를 곁에 두는 자신에 대해 변명한다. 나는 죨 대령과 다르다고. 그리고 나는 야만인에 대해 정당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그러나 그의 행동과 말들은 점점 ‘제국’의 심기를 거스르기 시작한다. 이는 그 스스로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병사의 시선을 통해 다음과 같은 생각을 추리해낸다.

그는 나를, 수년 동안 이렇게 침체된 곳에서 게으른 토착민들의 방식에 맞춰 살다 보니 구태의연한 생각에 젖어 있고, 제국의 안보를 임시적이고 불안정한 평화와 맞바꾸려 하는 위태로운 생각을 하는 한심한 민간인 관리 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87)
나는 조심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나는 하품을 하며 그의 질문을 피하고 이 자리를 끝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미끼를 덥썬 문다.(87)
“특히 그 경멸이라는 것이 식사 예절이 다르고 눈꺼풀의 형태가 다르다는 것말고는 구체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라면, 당신은 그것의 뿌리를 어떻게 뽑을 수 있겠소?”(88)

나는 지극히 상식적인 차원에서, 야만인을 옹호한다. 그러나 나는 조금씩 ‘제국의 적’이 되어갈 뿐이다. 나는 병사들과 안내인을 데리고, 그녀를 야만인들에게 데려가는 위험한 여행을 한다. 겨울에 출발한 그 여행은, 고통스럽고 지루하다. 그리고 그녀를 보낸 후, 돌아오는 길은 참혹하도록 잔인하다. 그리고 나는 자신을 원망할 병사들의 심리 역시 파악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야만인들에게 가는 사절의 일부가 아니라 한 여자, 그것도 뒤에 남겨진 야만인 죄수이자 치안판사의 하찮은 매춘부에 불과한 여자를 호위하고 호송하는 일을 했다는 걸 알게 됐을 것이다.(126)’

마을로 돌아온 그는 체포된다. 나의 행적은 낱낱이 까발려지고, 병사들에 의해 고발된다. 30년 동안의 그의 지배가 허위와 부정으로 얼룩져 있다. 나는 야만인과 내통하여 제국의 정보를 판 스파이이며, 야만인 여자와 정을 통하는 부도덕자다. 심지어 유적을 발굴하던 취미 생활 역시 야만인들과의 의사 소통을 위한 창구로 오인된다. 범죄자로 낙인 찍힌 그 순간, 나는 ‘오히려 나는 내 자신과 정보부 사이에 존재하던 허위적인 우정에 종지부가 찍힌다는 생각에 어렴풋한 희열까지 느낀다.(131) 나는 기분이 좋은 이유를 안다. 제국 수화자들과의 연합은 이제 끝났다. 나는 반대편에 서게 됐다. 유대감이 깨졌다. 나는 자유인이다. 하지만 얼마나 위험한 기쁨인가!(133)’

나는 이제 야만인과 다를 바 없는,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힌다. 그 상황에는 아무런 품위도 찾아볼 수 없다. 야만인을 짓밟은 고문관들이 이제 그를 짓밟는다. 나는 짐승처럼 살아간다. 그러나 나는 애써 변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상황 속에서 나는 문명인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 깨달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오히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어리석고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모욕적인 죽음을 당하는 것’이다.

아무도 나를 구타하지 않고, 아무도 나를 굶기지 않으며, 아무도 나에게 침을 뱉지 않는다. 내가 당하는 고통들이 그렇게 사소한 것들인데, 내가 어떻게 박해받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런 것들은 사소한 것들이기 때문에 훨씬 수치스럽다. 나는 처음에 수용되어 감방문이 닫히고 자물쇠가 채워질 때, 웃었다. 일상적인 삶의 고독에서 감방의 고독으로 옮겨가는 것은 큰 고통이 아닌 것 같았다. 생각과 기억들을 갖고 들어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자유라는 게 얼마나 원시적인 것인지 이해하기 시작한다.(145)
내게 남은 자유는 먹거나 배고플 자유, 침묵을 지키거나 혼자 지껄일 자유, 혹은 문을 두드리고 비명을 지를 자유이리라. 지금의 나는 불행한, 피와 뼈와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146)


어느날 나는, 감옥을 탈출해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에 간다. 거기에서 그는 ‘철사줄이 손바닥과 뺨에 꿰어져 있는’ 야만인들을 본다. 그들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 채찍질을 당하고 있다. 나는 그 광장에서, 유일하게 그들을 옹호하는 사람이 된다. 나는 소리치며, 이 무자비한 폭력이 중지되길 외친다. 그리고 나는 곧 무자비한 발길질과 채찍질에 쓰러진다. 나는 구타당하고, 또 다시 갇힌다.

이 고난에는 나를 기품 있게 만드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나를 고문한 사람들은 고통의 정도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오직, 하나의 육체 속에서 하나의 육체로만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내게 보여주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온전하고 정상적인 상태에 있을 때만 정의에 대한 생각을 즐기다가, 머리가 붙잡히고 파이프가 목구멍 속으로 쑤셔넣어지고, 그 속으로 소금물이 부어져 기침을 하고, 구역질을 하고 도리깨질을 하는 상황이 되면, 언제 그랬느냐 싶게 정의에 관한 생각들을 깡그리 잊어버리는 그 육체 말이다.(196)
그는 내 영혼을 상대하고 있다. 그는 매일매일, 육체를 접어 옆으로 치워놓고 내 영혼을 빛에 노출시킨다. 어쩌면 그는 이런 일에 종사하면서 많은 영혼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을 다루는 일을 해 오긴 했지만, 심장을 다루는 외과의사에게 아무 표시가 남지 않듯, 영혼을 다루는 그에게도 아무런 표시가 남아 있지 않은 듯하다.(201)


나는 그들이 가하는 고문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 생각을 숨기지 않는다. 마침내 죨 대령에게 나는 묻는다.

“이 질문이 염치없는 것이라고 생각되면, 날 용서하게. 당신은 사람들을 그렇게 다룬 다음,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 있는가? 그게 가능한 일인가? 이건 사형집행인들과 그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내가 늘 물어보고 싶었던 걸세.(...)내 생각에는, 그런 사람들은 손부터 씻고 싶어할 것 같거든. 하지만 손을 씻는 일도 보통의 방법으로는 안 될 것 같아. 성직자가 끼어들어야 할 정도의 일이거든. 일종의 정화의식이 필요하다는 말일세.(...)난 자네가 살고 있는 세상을 이해하고 싶네. 나는 자네가 날마다 어떻게 숨을 쉬고 먹고 사는지 상상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네. 그게 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네! 나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곤 하네. 만일 내가 저 사람이라면, 내 손이 너무 더럽게 느껴져, 나를 질식시킬……”(215)

나의 말을 들은 죨 대령은 나를 정신병자 취급을 한다. 아니, 그들은 희미하게 자극하는 ‘양심의 소리’에 참을 수 없이 분개하는 것이다. 늘 품위를 지키던 죨 대령이 흥분한 것은, 내가 그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야만인을 옹호하는 문명인이란, 이미 제국의 적이며, 다만 처리해야 할 죄수일 뿐이다. 제국은 이미 야만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만인이야말로 제국의 힘이며, 제국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이다. 야만인이 죄가 없다면, 야만인이 순수하다면, 제국은 사라져야 마땅할 ‘악’이 아닌가.

제국은 역사의 시간을 만들어냈다. 제국은 부드럽게 반복되는 순환적인 계절의 시간이 아니라, 흥망성쇠와 시작과 끝, 그리고 파국이라는 들쭉날쭉한 시간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제국은 역사 속에 존재하고, 역사에 대해 음모를 꾸미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제국의 속마음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있을 뿐이다. 그 생각은 어떻게 하면 끝장이 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어떻게 하면 그 시대를 연장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밤이 되면 그것은 재앙에 대한 상상을 먹고 산다. 도시가 약탈당하고, 사람들이 강간당하고, 죽은 사람의 뼈가 산처럼 쌓이고, 수많은 땅이 황폐해질지도 모른다는 상상 말이다.(229)

이 소설의 서술이 고통스러운 것은, 야만인이나 완전한 제국의 수하가 아닌, 그 중간에 서 있는 ‘나’의 목소리로 써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엄밀히 말해, 제국을 수호하는 관리자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그는 폭력을 쓰지 않는 평화로운 관리를 원했을 뿐이다. ‘나’는 야만인보다 우위에 서 있는 자신의 입장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았고, 그들의 고통에 대해 외친 순간에도 그들과 자신을 동격에 두지는 않았다. 야만인은 ‘나’에게 여전한 ‘타인’이다. ‘나’가 고통받고 핍박받는 것은, 마치 예수처럼, ‘그들의 죄’를 짊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구타당하면서도, 구타한다. ‘나’는 야만인을 긍정하면서도, 부정한다. 이는 문명인인 ‘나’의 어쩔 수 없는 거죽이다. 마치 살처럼 단단히 달라붙은 이 관념은, ‘나’를 규정하는 것이다.

‘타자’의 고통이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감각이다. 만일 처절하게 타인의 고통을 감지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의 전쟁과 폭력은 사라졌을 것이다. 누군가가 폭탄을 맞고 산산조각이 나도, 한 도시가 통째로 없어져도, 내가 안전하다면 폭력은 없다. 이는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진실이다. 우리는 상상을 통해 고통을 겪고, 곧 고통 없는 일상 속에서 이를 잊는다. 더 나아가 이미 타자로 규정된 이방인들의 고통은, 손가락의 거스러미만도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은 이방인의 몫이다. 이 소설은 야만인을 이해하고자 하지만 결국 문명인에 지나지 못한, 한 지식인의 고뇌를 파헤치고 있다. 죄책감은 우리에게 잠시나마 타인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준다. 그러나 고통의 거리를 줄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교육받은 문명인은, 제국에 대항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한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도 언제든지 야만인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외에는,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마음쓸 이유가 없다는 것이, 서글픈 현실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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