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굽는 타자기 -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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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에 나는 코난 도일의 홈즈 시리즈를 즐겨 읽었다. 사건이 터진다. 의뢰자가 홈즈를 찾는다. 홈즈는 여러 가지 고난에 부딪히지만 결국은 사건을 해결한다. 늘상 이런 구조로 이루어져 마치 디즈니 만화의 해피엔딩을 예상하는 것처럼 결말을 예상하면서도 홈즈의 이야기 속으로 끊임없이 빠져들어갔다. 어느날 코난 도일에 대한 글을 읽었는데, 홈즈 시리즈는 먹고 살기 힘들어서 태어난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책 속의 인물들이 끔찍한 사건 때문에 고통을 받고, 목숨이 위급해지고, 음모를 꾸미고, 오래된 복수를 하고는 동안 작가는 '먹고 살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범죄들을 만들어 내야만 했다.

결국 코난 도일은 유명한 작가가 되었지만, 생계가 너무도 어려워서 탄생했다는 그 계기만큼은 내게 의미심장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작가의 생계는 얼마나 유지되기 어려운 것이었나. 물론 문학이 최고의 학문으로 대접을 받고, 동시에 대중이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엔터테인이었던 시절은 조금 다르긴 하겠다. 또한 치사한 대접을 받았겠지만, 궁중 시인 제도라는 것이 존재하던 시절만큼은 글쟁이=가난이라는 수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리라. 물론 얼치기 글쟁이들(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일단 왈가왈부하지 말고), 시대가 문학을 외면할수록 더욱 더 문학으로 돈을 벌겠다는 환상을 품는 황당한 사람들은 일단 이런 수식에서 열외로 하는 것이 좋겠다.

폴 오스터의 빵굽는 타자기는 가난한 글쟁이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글의 첫머리에서부터 그는 선언한다.

'내 꿈은 처음부터 오직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열예닐곱 살 때 이미 그것을 알았고, 글만 써서 먹고 살 수 있으리라는 허황된 생각에 빠진 적도 없었다. 의사나 정치인이 되는 것은 하나의 진로 결정이지만, 작가가 되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선택하는 것이기보다는 선택되는 것이다. 글쓰는 것말고는 어떤 일도 자기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평생 동안 멀고도 험한 길을 걸어갈 각오를 해야한다. 신들의 호의를 얻지 못하면(거기에만 매달려살아가는 자들에게 재앙이 있을진저), 글만 써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

비바람을 막아 줄 방 한칸 없이 떠돌다가 굶어 죽지 않으려면, 일찌감치 작가가 되기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이해했고 각오도 되어있었으니까, 불만은 없었다. ....... 작가들은 대부분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 생계에 필요한 돈은 본업에서 벌고, 남는 시간을 최대한 쪼개어 글을 쓴다. 이른 아침이나 밤늦게, 주말이나 휴가 때. 윌리엄 칼러스 윌리엄스와 루이 페르디낭 셀린은 의사였다. 윌리스 스티븐스는 보험회사에 다녔다. T.S. 엘리어트는 한때 은행원이었고, 나중에는 출판업에 종사했다.'

그의 선언은 적나라하기 때문에 오히려 아무런 감흥을 일으키지 않는다. 


소설의 시작에서부터 그는 가난한 글쟁이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글쓰기는 돈이 되지 않는다. 글만 써서 살 수는 없다. 다른 직업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잡문이라도 미친 듯이 써야 한다. 돈으로 바꿀 수 있다면 번역이든, 기사든, 에세이든, 닥치는 대로 써야지 푼돈이라도 얻을 수 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만 한다면 조금이라도 돈으로 바꾸어야 한다. 간혹 운이 좋아서 무슨무슨 예술기금(?)을 받을 수도 있지만 어차피 금방 탕진한다. 글쟁이 기질을 가진 인간들은 뻔하다. 그런데 생활력은 없는 주제에 웃기지도 않는 반골 기질 때문에 타협하는 글은 못쓴다. 일례로 포르노 따위를 써서 좀 큰 돈을 버느니 서푼짜리 서평을 기고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 돈을 주기야 하지만 고깝게 구는 문화예술 후원자(?)에게는 쩔쩔매고 싶지 않다. 가끔 글쓰기에 지쳐서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그조차 오래 할 수 없다. 당연히 하루 종일 투자해야 하는 일 따위는 적성이 맞지 않아 못한다! 그래도 정말로 목숨이 경각에 달하면 여기저기에 또 미친 듯이 이력서를 넣어본다…… 그러다가 또 살만하면 일은 집어치우고 글을 쓴다. 그리고 그 글을 이력서를 넣듯이 여기저기에다 찔러본다. 어쩌다 작품이 편집자의 눈에 들어 판권이 팔린다고 해도, 그 돈 또한 푼돈에 불과하다……

"돈을 벌기 위해 책을 쓴다는 건 그런 것이다. 헐값에 팔아 치운다는 건 그런 것이다."
단돈 900달러에 판권을 넘기고 나서 작가가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다.


이 책은 글쟁이 이력을 가진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최대치에 가까운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장 소설다운 소설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소설가의 영적 고뇌(?), 소재의 빈곤, 글쓰기의 고통 같이 소설가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거의 볼 수 없다. 그런 것을 따지기에는 생활이 너무 절박하다. 나는 살기 위해서 글을 쓴다. 글쓰기 자체의 고통을 느낄 여유가 어디 있는가. 위에 열거한 대로 순수한(?) 글쟁이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기막힌 소설 아닌가.


하여튼 그의 이력이야말로 정말 기상천외하다. 여기서 문화적 차이를 어느 정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부모님의 이혼에 대해 나이브한 태도를 취하고[부모의 불화라는 소재 하나만으로도 장편소설을 너끈히 써낼 수 있는 국내 소설풍토(?)에 비해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무 살도 되지 않는 나이에 혈혈단신으로 외국으로 떠나서 이것저것을 경험하고, 유조선을 타고 뱃사람(?)이 되거나 할렘 문화에 편입되고, 예술을 다룬 책이 아니라 책 자체가 예술인 책을 파는 일을 하고, 함께 글을 쓰기로 한 부인과 멕시코에 가는 등---한 글쟁이가 이토록 다양한 이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의 능청스러움은 글쓰기를 예술로 비유하지 않는다. 때로는 햄버거 가게에서 햄버거를 굽는 것이 차라리 더 생산적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비생산적인(?) 일을 줄기차게도 해댄다. 왜일까?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다른 일들도 널려 있다. 그런데 유독 글쓰기에 목을 매다는 이유는 무엇일까. 글을 쓰기 위해 나는 직업을 가질 테야, 라는 식의 선언 따위도 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살 뿐이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라고 묻지조차 않는 글쟁이라니! 그 솔직담백한 고백들과 우스꽝스러운 사건들, 수많은 직업을 전전하면서 겪고 느낀 일들은 모처럼 만의 독서에 통쾌함을 안겨다주었다. 소설을 읽으며 킥킥대고 웃어본 것이 얼마나 오랜만이던지.

어쨌든 간에, 폴 오스터는 결국 성공한 작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리고 이 소설 곳곳에서 보이는 것이지만, 그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기막히게 나타나서 그를 구원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구해주거나, 방 하나를 잡아주거나, 글쓸 거리를 제공해주는 사람을 연결해주거나, 희곡을 무대에 올려준다고 열의를 보이거나, 문예기금을 주어 한동안 그의 생을 유예시켜주는 행운(?)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입에 풀칠은 못해도 주머니에 담배는 넣고 다닐 수 있을 만큼의 글쓸 거리가 그에게는 있었다. 그러나 그런 지면조차 없이 살아가는 글쟁이 아닌 글쟁이들이 더 많은 게 현실인 것 같다. 말하자면, 잡문조차도 담배 한 개피와 바꿀 수 없는, 어떠한 글도 쉽사리 생산성을 가질 수 없는 시대인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작가처럼 사는 것에 허덕허덕하면서도 결국에는 바퀴벌레처럼 끝까지 살아남는 글쟁이는 너무도 드물다! 애초에 잡문 기고와 알바 인생 따위는 포기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잡고 남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서 쓸 수 밖에 없는 것이 더 일반적인 글쟁이의 삶이 아닌가.


내가 지나치게 회의적인 것일까. 폴 오스터가 가장 힘들었던 이삽십대는 아직까지는 문학의 죽음이라는 화두가 그다지 일반적이지 않았던 시대였다. 그런데 2000년대의 한국은 문학의 죽음이라는 화두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1%의 예외의 공간은 있다. 그리고 그 1%의 공간 속으로 뛰어들기 위해 오늘도 수많은 글쟁이들이 빵굽는 타자기를 꿈꾸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폴 오스터의 비극적이지만 희극적인 이 자전적 소설은, 내게 있어 지극히, 소설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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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그 후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3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서석연 옮김 / 범우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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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선하고 악한 것,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믿음은 이제 철저히 개인적인 영역에 머무는 시대가 찾아왔다. 물론 고래로 전해져오는 교훈들이 있으며 승복할 수 밖에 없는 성문법이 있지만, 실질적인 심판은 개인의 주관에 따르는 경우가 더 많다. 바야흐로 자신이 자기 자신의 심판자가 되는 시대인 것이다. 그러나 심판자로서의 자신은 가장 냉혹한 절대자가 될 수도 있다. 나쓰메 소세끼에 등장하는 '선생'이 바로 그러한 인물이다.

『마음』은 독특한 소설이다. 내용 전개가 다소 답답할 수도 있는데, 소설의 흐름이 느리고 결정적인 갈등이라 볼 수 있는 '선생의 과거'에 대해서는 고심하여 서술되다가 마지막 장에서야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을 아끼고 천천히 진행되는 서사는 오히려 독특한 인상을 주었다. 마치 밀란 쿤데라의 『느림』에서 받았던 인상과도 같았다. 너무 많은 사건들이 속수무책으로 일어나고 스피디하게 진행되는 현대의 서사장르와는 달리 차근차근하면서도 깊은 맛이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죄의식은 주관적인 감정이다. 같은 과거를 지니고서도 죄의식을 갖는 사람과 전혀 그 일에 거리낌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혹은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원죄로 여겨야 한다는 기독교의 사상 역시 개인의 주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살았던 등장인물인 '선생'은 마치 우리나라의 선비와도 비슷하게 느껴진다. 그는 의리와 인간다움을 매우 존중하는 인물로, 평생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죄의식은 다소 복잡하다. 그는 인간을 경멸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을 가장 경멸하고 있다.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일도 할 자격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와 단 둘이 도쿄의 작은 집에서 조용하게 살아간다. 친하게 지내는 친구도 없으며, 어떤 사교 활동도 하지 않는다. 그런 그의 삶에 하나의 친교가 시작된 것은, 우연히 피서지에서 만나 그를 '선생'이라 부르며 그의 집에 자주 찾아온 학생인 '나'로 비롯된 것이다. '나'가 선생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느끼게 된 계기는 사실상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게 자주 만나면서도, 나는 선생이 과거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세상사에 초월한 듯 하면서 동시에 어둡고 쓸쓸하게 보이는 선생은 정신적 지주도 돼줄 수 없으며, 더구나 즐거운 말벗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선생에 대한 존경과 관심을 잃지 않는다. 말수 적은 선생이 가끔씩 수수께끼처럼 내비치는 말들은 나로 하여금 선생의 과거에 대해 캐묻고 싶은 호기심을 갖게 한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선생은 그에 관련된 말은 할 수 없다고 잘라말한다.

"어쨌든 나를 너무 믿어서는 안됩니다. 곧 후회하게 될 테니까요. 그래서 자신이  기만당한 앙갚음으로 잔혹한 복수를 하게 될 겁니다. "
"그것은 무슨 뜻이죠 ?"
"전에는 그 사람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기억이 이번에는 그 사람 머리 위에 발을 올려놓으려는 결과를 낳는 겁니다. 나는 미래의 모욕을 받지 않기 위해 현재의 존경을 물리치고 싶습니다. 나는 지금보다 한층 쓸쓸한 미래의 나를 참는 대신 쓸쓸한 지금의 나를 참으려 합니다. 자유와 독립과 자기 자신에 충만된 현대에 태어난 우리들은 그 대가로 모두 이 쓸쓸함을 맛보아야 할 것입니다. "


선생은 나에게 아무리 선량하게 보이는 인간이라도 돈과 얽히면 악하게 변한다는 말과 인간을 믿지 않으며 더더구나 자기 자신도 믿을 수 없다고 충고한다. 그리고 자신을 존경하는 나에게, '미래의 모욕을 받지 않기 위해 현재의 존경을 물리치고 싶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그를 한층 더 쓸쓸하고 신비스러운 사람으로 보이게 한다. 그는 유서라 할 수 있는 긴 편지를 나에게 남기는데, 이 시기는 '나'의 아버지가 위독한 시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미루고 미뤄왔던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만나서 하고 싶었으나, 선생은 그 시기를 영원히 놓쳐버린다. 그리고 유서 속에서 선생은 소설의 진행처럼 차근차근하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한다.


선생이 인간을 경멸하게 된 제일 큰 이유는, 아버지가 죽은 후 유산을 제멋대로 소유해버린 숙부에 대한 증오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선생을 소심하고 쩨쩨한 인물이라고 매도할 수 없는 것은, 소설 전반에서 보이는 인간다움에 대한 경의 때문이다. 어떠한 사소한 배신도 인간 전체를 경멸할 수 있는 커다란 사건이 될 수도 있다. 더구나 외롭고 쓸쓸한 인간에게 있어, 그것은 자신을 지키는 무기가 될 수도 있는 셈이다. 선생은 인간을 믿지 않고 경멸하였지만, 동시에 사랑하고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강한 열망 또한 가지고 있었다. 딸과 함께 외롭게 살아가는 장군 미망인 집에 살게 되면서, 선생은 그 모녀에 대해 깊은 애정과 믿음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인 하숙집 따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의 거의 유일한 친구인 K는 매우 독립심 강하고 자긍심 높은 인간이었는데, 거의 전근대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선비정신, 혹은 무사정신이라고 과대해석해서 말할 수 있는 이러한 성정은 내겐 답답하면서도 동시에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가족에게 의절당한 친구를 위하는 마음에서 함께 하숙집에 살게 되면서 이들의 관계는 종국으로 치닫게 된다.

고전적인 관계이기는 하지만, 선생은 K에 대해서 애정과 질투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K는 모든 면에서 선생보다 뛰어났고, 선생은 자신이 사랑하는 하숙집 딸이 그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달린다. K와 선생은 매우 친한 사이이면서도 마음 속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은 보통 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날 K가 하숙집 딸에 대한 사랑을 뜬금없이 선생에게 토로하고 만다. 승려의 아들로써, 정신적 가치와 인생의 독립에 큰 가치를 두고 있는 그에게는 연애조차 피해야 할 욕망의 일종이었다. 선생은 그러한 면을 이용하여 K를 우회적으로 비난한다. K가 선생과 토론하면서 주장하였던 말들이 이제는 K 자신을 공격하게 되는 근거가 되어버린 것이다. K는 선생이 하숙집 딸을 사랑하는지 몰랐고, 선생도 아무에게도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마음 속에서만 괴로워하다가 갑자기 공격과도 같은 이러한 고백을 듣고나서 그는 결국 미망인에게 딸과 결혼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친다. 그리고 K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말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다가 미망인에 의해 이 사실이 밝혀지고, K는 며칠 뒤 자살한다. K가 자살한 것을 처음 알게 된 선생이 제일 먼저 한 것은, K의 유서에 '자신이 한 짓'에 대한 언급이 있는지 확인한 일이었다. 만약 그러한 사실이 밝혀진 후 모녀에 의해 경멸당할 것을, 그는 친구 K가 죽은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사건 후 하숙집 딸과 결혼하지만, 선생은 자신의 인간성에 경멸하여 돌이킬 수 없는 삶을 살게 된다. 그는 병에 걸린 장모를 극진하게 간호하며, 아내에게 최선을 다하고, 한 달에 한 번, K의 묘에 가서 참배를 한다. 이러한 일들은 죄의식을 덜어보자는 꼼수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행동인 것이다. 그는 이러한 비극으로 인해 '아무 것도 해서는 안되는 자'라는 수식을 자신에게 붙인다. 가장 경멸해야 할 인간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은 시시각각 자살충동을 불러일으켰지만, 세상에 혼자 남게 될 아내 생각에 이를 실행에 옮기지도 못한다.

어찌 보면 지극히 단순하고 상투적이라고 치부해버릴 수 있는 이야기를 살아나게 하는 것은 바로 선생과 K를 포함한 등장 인물들의 특성 때문이다. 엄청나게 많은 치정 사건 이야기를 매일 뉴스나 서사 장르를 통해서 보고 듣는다. 대부분의 경우 진저리쳐지고, 지긋지긋하다. 그러나 하나의 배신으로 인해 살아 있되 죽어 있는 것과 다르지 않게 살던 선생의 최후는 비감을 느끼게 한다. 겉으로 그렇게 안정되고 평화롭게 보이던 삶의 내면에는 심장을 갉아먹는 죄의식이 있었다. 선생은 나에게 보내는 유서에서도, 이 일을 아내에게 알리지 말아달라고 말한다. 아내에게만큼은 이런 끔찍한 죄를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K의 죽음은 분명히 그 일 말고도 다른 일들이 중첩되어 있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선생에게 K의 죽음은, 그 자신의 죽음을 선고하는 일과도 다르지 않았다. 죽은 자가 말하지 못한 것은, 산 자의 마음 속에 크나큰 의문과 죄의식으로 남을 수 밖에 없다. 선생은 자신이 더 이상 무언가를 배우거나 일을 성취할 수도, 인간다운 기쁨을 느낄 수도 없는 인간으로 여겨왔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선고였다. 자살한 K나 선생, 선생의 아내나 막막하고 평범한 삶을 살게 될 '나'는 모두가 쓸쓸하고 고독한 인생을 감당해야만할 운명을 지니고 있다. 물론 모든 인간이 그와 같은 운명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일상성마저 박탈당한다면? 살아 있는 몇 십년의 고통이 죽음에 당도하는 순간의 고통보다 더 크다면? 삶이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건, 시지프스처럼 매일 다시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고통을 매일 겪어야 하는 것은, 영원한 죽음에 승복하는 것보다 더 고달픈 일인 것이다.

선생의 고백은, 그 자신 스스로가 경멸당해야 마땅하다고 믿는 것과는 달리 섬세하고 기묘한 감동을 준다. 사랑, 희망, 믿음과 같은 인간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이같은 가치의 배신이 곧 날카로운 칼이 되어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제 극히 드문 감상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적절히 죄의식을 눈가림하거나 탕감하고, 또 얼마든지 행동 양식을 비양심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 시대에는 선생의 자살이 낡고 지루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쉽게 경멸을 거두어들일 수 있다는 것은 진정으로 경멸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떤 죄의식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 나는 그 죄의식을 지킬 자신이 있는가. 대답은 쉽지 않다. 물론 종교적인 열렬함으로 죄의식을 숭배하는 무리들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청교도적인 죄의식 따위는 갖고 있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죽음은 내게 죄의식이라는 테마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 선생은 죽음으로 죄를 탕감한 것이 아니라 죄의식으로 고통받고 있었던 삶에 죽음이라는 선물을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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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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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흔 살이 되었다. 그는 ‘풋풋한 처녀와 함께하는 뜨거운 사랑의 밤을 나 자신에게 선사하고’ 싶었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 잘 안다. ‘외모는 멀리서도 금방 눈에 띄기 때문에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나는 못생겼고, 수줍음이 많고, 유행에 뒤떨어진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늘 그와는 정반대인 사람처럼 행동해 왔다. 오늘 아침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 그러니까 나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까지 그래왔다.’ 그래서 그는 이십 년 간 연락을 끊었던 포주인 로사 카바르카스에게 전화를 건다. ‘나쁜 짓이라면 그 어떤 남자 못지않게 환히 꿰고 있는 그녀’는, 처녀를 구해달라는 그의 부탁을 듣고 이틀의 시간을 달라고 한다. 이는 ‘대부분의 인간이 죽어 있을 나이에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첫걸음’인 것이다.

사십 년 동안 신문의 전신 편집자로 일한 그는, 보잘것 없는 연금을 받고 있으며, 반세기가 넘도록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써오고 있는 일요 칼럼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해간다. ‘아무런 공적도 영예도 없는 종족의 대장이며, 위대한 사랑에 얽힌 사건들 말고는 우리 종족의 생존자들에게 남겨줄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는 나이가 들었기에 쇠약해졌으며, 온갖 통증에 시달렸고, 기억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해서 얼굴들의 목록과 이름을 일치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섹스를 할 수 있는 나이의 한계’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는다. ‘노인들이 본질적이지 않은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는 사실은 생의 승리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을 잊는 경우는 극히 드문’ 것이다.

그는 한평생 창녀들과만 관계를 맺어 왔다. 즉 여자와 잠을 자고 돈을 주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직업적 창녀가 아닌 여자들에게도 논리적으로 설득을 하거나, 억지로라도 돈을 주곤 했다. 그리고 그는 이십 대부터 모든 상대의 나이와 이름, 장소, 사랑을 나누게 된 상황과 스타일을 기록했다. 오십 줄에 들어설 때까지 그가 관계한 여자는 총 514명이었다. 그는 나름대로의 원칙을 정해서 여자를 만났다. ‘순정한 여자란 세상에 없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았던 그이다. 결혼을 할 계기도 있었으나 결국 그는 도망쳐버렸다. 그러나 그는 14세 소녀를 보고 한 가지 경이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욕망에 쫓기거나 부끄러움에 방해받지 않고 잠든 여자의 몸을 응시하는 것이 그 무엇과도 비할 바 없는 쾌락’이라는 사실이었다. 아흔 살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는’ 그였다.

신문사에서, 아흔 살 생일 축하파티를 치르고, 그는 나이 든 페르시아 고양이 한 마리를 선물받는다. ‘인간이 아닌 살아 있는 존재와 단둘이 집 안에 있다는 생각에 오싹’해질 정도로, 그는 동물을 좋아하지 않았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와 그는 즉물적인 관계를 맺었을 뿐이다. 그는 고독했다. ‘내 사랑이 될 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던 모든 사랑들로 목이 메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는 다시 소녀를 찾는다. 아흔 살이 되어서야, 그리고 가장 불가능하다고 느낄 때 그는 사랑을 시작하게 되었다. ‘기분 상태에 따라 그녀는 눈동자의 빛깔을 바꾸었’고, 수많은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했다. 그는 소녀의 이름을 ‘델가디나’라고 지었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적인 그 상황에서, 그는 ‘잿더미에서 다시 태어나고 있었고, 예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강렬함과 행복감’을 느꼈다. 그는 ‘그녀 덕택에 구십 평생 처음으로 타고난 성격을 알게’ 되었다. ‘질서정연한 정리벽은 근본적으로 무질서한 정신을 숨기기 위한 위장술이었고, 규칙적인 생활도 게으름에 대한 반작용이었으며, 야박한 심성을 숨기기 위해 인자한 척 하고, 그릇된 판단을 숨기기 위해 신중한 척하고, 쌓인 분노가 폭발할까봐 화해를 청하고, 타인의 시간에는 무관심하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시간을 엄수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새로운 마음으로 고전들을 읽었고, ‘세상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힘은 행복한 사랑이 아니라 버림받은 사랑’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일요칼럼에도 소녀를 위한 연애편지를 쓴다. 그러나 그는 일요칼럼에 대한 사람들의 폭발적인 관심에 당황해한다. ‘이제 너도 알겠지? 유명해진다는 건, 누군가와 잠을 자지 않아도, 잠에서 깨어나면 항상 침대 위에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저 뚱뚱한 여자의 시선을 느끼는 것과 같아.’

그러나 로자의 비밀의 집에 살인사건이 일어나자 그의 사랑에 위기가 찾아온다. 그에게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델가디나를 만나지 못하는 동안 그는 무너져 간다. 규칙적인 생활은 헝클어졌고, 그는 씻지도 않는다. 그는 기다림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그런 누군가를 가져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은 시적 방종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그날 오후, 그녀도 고양이도 없이 집에 돌아오면서,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은 가능한 일일 뿐만 아니라, 늙고 외로운 나 자신이 사랑 때문에 죽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와 정반대의 것도 사실임을 깨달았다. 즉 내 고통의 달콤함을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델가디나를 다시 만나게 된 그는, 로자가 그녀의 처녀성으로 거래를 했다고 짐작하고 맹렬한 질투를 내보인다. 다만 잠적해 있었을 뿐이란 로자의 말을 그는 듣지 않는다. 그는 방 안의 물건을 산산이 부수어버리고 그 곳에 가지 않는다. 그는 그에게 처음으로 섹스를 가르쳐주었던 창녀 카실다를 우연히 만났다. 그녀는 병든 몸으로 은퇴한 뒤, 중국인과 결혼했다. 그녀는 ‘최악의 남자라 할지라도 평생 내 곁에 있어주려 했다면, 영혼이라도 바쳤을 거예요. 다행히 적절한 때에 중국인 남편을 만났지요’라고 이야기한다. 그녀는 그에게 ‘사랑의 경이를 맛보지 못한 채로 죽을 생각은 말라’며 충고한다. 그는 점점 건강의 이상을 느끼며, 죽음이 가까이 와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는 소녀에게 자신의 남은 것을 남겨주겠다는 유언을 남긴다. 그리고 로자는 그에게 ‘그 불쌍한 아이는 당신을 미칠 정도로 사랑하고 있어요’라고 말해준다. 그는 ‘건강한 심장으로 백 살을 산 다음, 어느 날이건 행복한 고통 속에서 훌륭한 사랑을 느끼며 죽도록 선고받았다’는 말로 소설을 맺는다.

이것이 아흔 살 노인의 사랑 이야기라는 것이 경이롭다. 아흔 살이라니, 짐작도 되지 않는 나이다. 그러나 아흔 살의 노인에게도 정열과 열정이 있었으며, 삶의 경이를 깨닫는 순간의 순수한 기쁨이 있었으며, 진정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노작가의 연륜은 역시 빛을 발했다. 한 평생 창녀들과만 관계를 맺었다는 것, 열 네 살 처녀인 소녀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 등은 하나의 은유로 보인다. 어떤 인간과도 진심 어린 관계를 맺지 못하고 오로지 규칙적인 심장 박동대로 살았던 사람이, 사랑을 느끼게 되면서 삶의 시간은 달라진다. 그는 아흔 살부터 ‘비로소 살기 시작했다’지 않은가. 사랑은 삶을 변화시키고,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준다. 이러한 종류의 사랑은, 삶과 하나가 된 셈이다. 진정한 삶의 이야기는, 어느 종류의 것이든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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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생활자의 수기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2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동현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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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하옵소서.

욥기, 42장, 2~4절

『지하생활자의 수기』1)의 원제가 『고백』이었다는 점2)은 의미심장하다. 작품의 형식은 ‘수기’이고, 작품의 내용은 ‘고백’이다. 수기란 기본적으로 ‘자신에 대한 자신의 말’이다. 수기에 쓰인 모든 내용은 자신의 이름과 인격을 걸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수기가 ‘진실하다’는 것을 미리 가정하고 이 형식을 받아들여야 한다.수기의 내용이 거짓이라면 그것은 수기로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문학적 수기’이다. 즉 형식이 수기이지만, 장르 자체가 수기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수기는 지하생활자라는 가상의 화자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이 가상의 화자는 수기라는 형식을 완전히 곡해하고 있을 뿐더러, 그가 쓰고 있는 수기의 내용조차도 근본적으로 진실하지 못하다는 역설을 지니고 있다. ‘수기이지만 동시에 수기가 아닌’ 이 기묘한 작품을 읽기 위해서는 먼저 고백이 갖는 성격과 수기의 형식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선적으로 수기는 타자를 가정한 글이다. 일단 자기 자신조차도 자신의 말을 듣는 타자로 존재한다. 따라서 이 작품은 자신을 타자화하여 자신에게 하는 고백임은 물론이고, 타자를 자신화하여 그 고백을 역으로 공격하는 괴상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타자와 지하생활자가 예상하는 타자는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 그러나 지하생활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당신은 내가 이 모든 것을 출판하고 그리고 게다가, 당신에게 이것을 읽으라고 줄 거라 생각할 정도로 정말 속고 있는 건가?…왜 나는 마치 독자들을 호칭하는 것처럼 당신을 부르고 있는 것인가? 내가 하려고 하는 그런 종류의 고백들은 출판되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읽으라고 주어지지도 않았다.(70쪽)” 지하생활자가 스스로 ‘독자를 가정하고 있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한 거짓이다. 더 나아가 지하생활자는 자신의 거짓이 독자(라 예상할 수 있는 목소리)에 의해 반박되리라는 것도 명민하게 알고 있으며, 그 부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기라는 형식 자체를 파괴하고 있음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지하생활자의 고백은 먼저 루소의 『고백록』에 대한 패러디이다. 그런데 이 패러디는, 패러디하는 대상의 성격을 내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먼저 루소식의 ‘고백’이 가능한 것인가, 라는 근본적인 문제 제기로부터 시작하자. 하이네는 자신의 저서 『독일에 관하여』에서, “진실하고자 하는 모든염원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인간도 자신에 관해서 진실을 말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루소의 고백은 “자신의 진정한 죄과를 감추려는 목적이나 허영심 때문에 하는 거짓 고백”(71쪽)인 셈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조차 완전하게 솔직해질 수 없는 인간이 청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고백할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여기에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과를 털어놓음으로써 용서를 받고, 이해를 구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죄악이라는 행위 자체가 고백함으로써 용서받을 수 있음은 물론이고, 고백하고 있는 자신을 ‘아름답고 숭고한 존재’로 만들어준다는 위선까지 존재한다. 지하생활자는 “완벽하게 단순한 허영심 때문에 인간이 때때로 모든 죄를 자기 탓으로 돌린다는 것을 이해하며, 그리고 그것이 어떤 종류의 허영심이 될 것인지도 잘 상상해볼 수 있다”(72쪽)고 지적한다. 그러나 ‘지하생활자의 고백’은 루소와는 반대되는 허영심―즉 추악하고 비열한 존재임을 주장하는 허영심으로 나타난다. 악의를 가지고 하는 고백은 상대로 하여금 용서는커녕 자신을 증오하도록 만드는 것이며, 그 증오에 지하생활자의 ‘쾌감’이 존재한다.

비공개적으로 수기를 쓰고 있다는 패러디적 주장은 계속된다.“하이네는 청충 앞에서 고백을 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나는 반면, 나 자신만을 위하여 쓰고 있다. 그리고 내가 만일 독자들을 대하듯이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것이고, 그 이유는 그렇게 쓰는 것이 나에게는 더 쉽기 때문이라고 단호하게 나는 주장한다. 그것은 형식이다. 단순히 형식일 뿐이다. 왜냐하면 나는 결코 독자를 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72쪽). 이에 반하는 또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다시 지하생활자는 변명한다. “종이는 보다 고백을 엄숙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거기엔 뭔가 당당한 것이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더 잘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73쪽) 지하생활자의 이러한 집요한 주장이야말로 루소가 공개적으로 한 고백의 다른 극단에 서 있다. 즉 루소의 고백이 용서받음을 전제하고 있기에 위선적이라면, 지하생활자의 고백은 용서라는 말 자체를 거부하기 때문에 위악적이다. 그리고 타자를 가정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타자를 통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나는 고독하지 않다’라는 말 자체가 발화되는 순간, 이미 ‘고독하지 않기 위해’ 타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역설을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한 지하생활자의 죄는,“주위의 모든 사람들보다 영리하다”(21쪽)는 것이다. 이 고독하고 지적이며 냉소적인 인간은, 다른 사람들이 인생에서 “절반도 실행할 염두도 못 낸 것을 극단까지 밀고나갔”(221쪽)으며, 결론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더 살아 있다는 결론”(221쪽)을 내리게 된다. 자신은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모든 인간보다 근본적으로 우월하며 더 살아 있다고 느끼는 점이야말로 지하생활자의 고백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허영심이다. 그리고 이 허영심을 죄로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악령』에 등장하는 스따브로긴의 ‘악을 행할 수 있는 위대함’과 같은 맥락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특히 스따브로긴의 고백은 정교회 교리에 전적으로 대립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다음에서 살펴보자. 고백이 “죄인과 신과의 대화로서 성사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모든 죄는 신과 공동체를 거스르는 행위이지만 고백의 유일하고 궁극적인주관자는 신이며, 둘째, 고백자는 자신의 죄에 대한 ‘해명’을 진술해야 하며, 셋째, 진심으로 참회해야 하며, 넷째, 용서와 구원을 목표로 해야한다. 이 네 가지 조건 중 어느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는다면 성스러운 행위로서의 고백은 성립되지 않는다.”3) 그러나 스따브로긴의 고백은 “청자로서 신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선택”4)한 것이다. 또한 스따브로긴은 해명을 거부하며, 참회와 구원, 용서에 대한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 악의에 가득 찬 이 고백을 통해 청자는 재판의 성립 자체를 거부하는 죄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 고백의 목적이 “증오하고 증오받는 것”5)임을 알 수 있다. 죄에 대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용서받음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이 고백은, 루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백이라는 형식 자체가 성립되지 않으며, 참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반기독교적이며, 지하생활자의 고백처럼 위악적인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지하생활자의 고백은 전적으로 반기독교적인가. 또 지하생활자의 고백을 기독교와 연관지어 생각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것은 반형식적인 수기에 이은 또 다른 난관이다. 왜냐하면 『지하생활자의 수기』 어디에도 신을 청자로 규정하거나, 또는 규정하지 않는 태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만을 위해’ 쓴다는 주장이 거짓임은 살펴보았지만, 그 태도 자체가 신을 부정한다고 치부할 수는 없다. 오히려 지하생활자가 줄곧 부정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타자’가 더욱 더 논의의 전면에 부각된다. 이 타자란 누구인가. 지하생활자에게 있어 타자는 논쟁과 공격의 대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대화의 대상이다. 즉 타자가 없다면 지하생활자도 결코 ‘말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하생활자의 모든 말은 타인을 향해 있으며, 타인의 반응을 예상하고 기대하며 시종일관 절박하고 열정적인 어조로 발화된다. 따라서 이 소설에는 “독백적 말은 하나도 없다” 6). 문제는 이와 같은 대화가 끊임없는 악순환을 통해 부정적으로 심화된다는 점이다. 타자의 입장에 서서 가능한 모든 질문을 제기하고, 그 질문에 대해 반박하고 끊임없이 자기 변명하는 화자의 태도는 결국 절망적인 대화의 형태를 띌 수 밖에 없다. “상대의 응답을 예상해낸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위해 최후의 말을 반드시 간직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7). 이 최후의 말, 혹은 타자에 대한 최후의 승리를 위해 지하생활자는 엄격하게 타자와 자신을 분리시키려 하지만, 타인에 대해 결코 무관심해질 수 없다. 왜나하면 지하생활자의 이런 분열적인 태도 자체가 그가 타인의 의견이나 평가에 신경을 쓰며, 타인의 인정과 이해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부정하려던 타자에 의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이 역설로 인해 타자와의 대화는 무한해진다. 지하생활자는 결코 타자에 의해 굴복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절망적인 타자―소통할 수 없고, 이해받을 수 없는 타자란 무엇을 상징하는가. 『지하생활자의 수기』 에 등장하는 타자들을 예로 들어보자. 1부에 나오는 장교에 대하여 지하생활자는 “진정한, 좀 더 정당한 언쟁을, 좀 더 품위 있는, 말하자면 문학적인 언쟁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88쪽)이라고 말한다. 나아가그는 그 장교와의 소통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만일 그 장교가 아름답고 숭고한 것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이해했더라면, 그는 확실히 나에게 팔을 벌리고 달려와서는 친구가 되자고 했을 것이다. 얼마나 위대한 일이었을까!…나는 나의 진보 성향으로, 그리고 사상으로 그를 고상하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92쪽) 그러나 타자에 대한 이러한 공상과는 다르게 현실에서 그는 장교와 막다른 길에서 마주쳤을 때, 언제나 먼저 비키는 역할만을 할 뿐이다. 그러한 타자에 대해 지하생활자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소통 수단은 악의적인 복수를, 그러나 타자에게 조금도영향을 미칠 수 없는 무의미한 복수를 행하는 것이다. 

2부에 등장하는 지하생활자의 친구들은 장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소통의 불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오기로 친구들의 모임에 참가한 지하생활자는 그들이 자신을 무시하자 이렇게 생각한다. “이 돌대가리들은 자신들이 나를 식사에 초대함으로써 내게 경의를 표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내가, 내가 그들에게 경의를 표한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도 못하고 있다!”(132쪽)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으나 그들은 지하생활자를 완전히 잊고 자기들끼리 즐겁고 명랑할뿐이었다. 결국 지하생활자는 자신이 직접 악의에 찬 연설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친구들에게 단지 분노와 경멸만을 일으키게 되는 말 속에서 지하생활자는 무력하게 주장한다. “나는 진실, 성실, 그리고 정직을 사랑한다.”(134쪽) 이와 같은 우스꽝스러운 주장으로 분위기는 엉망이 되었으나, 지하생활자는 곧 그들과의 화해를 갈망한다. “그 순간에, 얼마나, 얼마나, 그들과 화해하고 싶었던가!”(137쪽) 지하생활자는“일부러 장화 뒤꿈치를 세게 바닥에 부딪쳐 쿵쿵 소리를 내며 걸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헛수고였다. 그들은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138쪽) 심지어 그의 사과에도 친구는 정색하면서 말한다. “네가  나를 모욕했다고? 나는 네가 알아줬으면 한다. 존경하는 선생,너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모욕할 수 없다는 것을!”(141쪽) 지하생활자는 타인과 대화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세계에 참여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당하고 있다. 한 사회에서 이토록 지독하게 소외된 사람은 결국 지하 세계로 빠져들어 타인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공상을 하며, 보이지 않는 타자를 상정하여 악의어린 논쟁을 시도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지하생활자의 타자에 대한 부정은 ‘타자에게 거부당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한편으로 지하생활자의 고백은 욥의 항변을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 다시 기독교와 연관지을 수 있다. 신에 대한 욥의 믿음이 다만 축복에 의한 것이라는 악마의 주장에 의해 욥은 시험당한다. 욥은 의로운 자가 고난을 당하고 세상에 부조리와 악이 존재하는이유에 의해 신에게 직접적으로 대화를 요청한다. 그러나 신을 상대로 한 욥의 항변은 우선적으로 친구들에 의해 부정된다. 즉 절대적이고 무한한 존재인 신의 의지를 대변하는 자들에 의해(신이 아니라) 욥은 죄인으로 낙인찍힌다. 친구들은 신의 공의를 인정하기 때문에 욥의 범죄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욥은 신의 주권 하에서는 악인뿐만 아니라 의인 역시 고난을 당할 수 있으며, 자신의 결백에 대해서는 신만이 알고있다고 주장한다. 욥과 친구들의 대립은, 지하생활자와 합리주의자의 대립을 연상시킨다. 욥은 신에게 ‘항변하는 자’이고, 지하생활자는 세계를 이루는 근본적인 자연법칙에 대해 ‘거부하는 자’이다. 물론 욥과 지하생활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욥은 결국 신의 절대적인 법정에서 자신이‘원고’조차 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감히 의문을 품은 점에 대해 회개하지만, 지하생활자는 존재를 의탁할 만한 그 어떤 타자도 만날 수 없었다. 아니, 그러한 타자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지하생활자의 모든 말의 체계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지하의 세계에서는어떠한 구원도 있을 수 없으며, 어떠한 구원자도 만나서는 안 된다.

욥의 친구들과 합리주의자들을 같은 논의의 맥락에 놓은 것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절대적 법칙에 의거하여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구별해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심지어 루소는 “개인의 양심은 인간을 신과 비슷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선악에 대한 틀림없는 심판관”8)이라고까지 선언한다. 욥의 친구들은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해 회의를 갖지 않으며 그것에 절대적인 성격을 부여한다는점에서 합리주의자들과 맥을 같이 한다. 즉 신의 공의가 있다는 것과는 다른 맥락에서, 신의 법칙을 자신의 체계로 만든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합리적 이기주의자들은 자신의 이익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고, 자신의 이상의 공공의 이상임을 천명하고 있다. 신의 뜻에 대해 욥의 친구들이 곡해한것처럼, 합리주의자들은 인간과 자연법칙을 곡해하고 있다. 인간의 복잡하고 심층적인 성향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 그들은 ‘단순하고 젖먹이 같은논리’로 인간의 이익과 행복에 대해 재단하려 든다. 마찬가지로 욥의 친구들은 인간의 단순한 지혜와 어리석음으로는 신의 뜻을 파악조차 하기어렵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자연법칙에 대한 지하생활자의 태도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2X2=4라는자연법칙에 대한 지하생활자의 증오는 합리주의자들에 대한 증오와 겹쳐 있다. 사실상 2X2=4라는 것이 신의 뜻에 따른 유일한 법칙인지 아닌지에 대해 인간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욥을 포함하여 그의 친구들이 신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연법칙, 혹은 신의 법칙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인간에 의해 세계는 합리적으로 설명된다. 그러므로 자연법칙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자연법칙에 대한인간의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지하생활자는 “단지 자연의 법칙들만 발견하면 되고, 그렇게 되면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없으며, 삶은 훨씬 쉬워질 것이”(47쪽)라고 믿는 합리주의자들을 맹렬하게 공격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 2X2=4는 하나의 위안이며,그들을 정당화해주는 구실이며, 행동의 필연적인 법칙이며 귀결인 것이다. “결국 2X2=4는 삶이 아니라 죽음의 시작인 셈이다.”(62쪽)2X2=4로 한정되는 유클리드 기하학은 인간이 합리적으로 인식하는 세계이며, 욥의 친구들이 공의롭다고 믿는 세계이다. 그러나 지하생활자는2X2=4로 대표되는 유클리드 기하학만이 아니라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가능함을 우회적으로 주장한다. 2X2가 5가 될 수 있는 세계는 무한한 세계이며,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신이 유한자 그리스도로 세상에 나타난 것 역시 비유클리드 기하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 “2X2보다 비교할 수 없을정도로 고귀한 것이 의식이다.”(64쪽) 즉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인간성과 개성을 보존해주는 자유 의지이며, 인간의 복잡성과 다면성이야말로오히려 진정한 자연법칙에 걸맞은 것이다.

다시 타자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욥에게 있어 신은 절대성과 무한성을 상징하는 궁극적인 타자이다. 그러나 지하생활자의 궁극적인 타자는 정의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하생활자가 무한한 대화를 시도하는 ‘보이지 않는 타자’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자연법칙이나 합리주의 따위로는 설명할 수 없는, 2X2가 4로만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무한하며 궁극적인 존재자이다.그런데 지하생활자는 최초로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을 향한 사랑을 보여준 리자에 대해 모순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토록 이해와 소통을 갈구했으면서도 막상 리자가 자신을 파악하고 있다고 느끼자 지하생활자는 증오와 분노에 휩싸인다. 리자는 『죄와 벌』의 소냐를 연상시킨다. 순수한 믿음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상징하는 창녀 리자는 소냐처럼 한 관념론자를 신의 길로 인도할 수 없었다. 지하생활자는 리자에게 ‘책에서 배운 대로’구원을 실행하려 했으나, 오히려 리자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 사실에 대해 절망한다. 지하생활자에게 있어 타자란, 굴복하거나 굴복당하는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보이는 타자’를 이해하거나 사랑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지하생활자는 결국 ‘보이지 않는 타자’를 향해 악의어린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

지하생활자의 딜레마는 이 작품에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부정확한 형식이 딜레마에 빠지게 되자 그형식 속에 담긴 부정확한 진실마저도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9). 인간의 본성에 대해 간파하고 자유의지의 중요성에 대해 주장하고 있는 지하생활자가 지하에서 나올 수 없는 것은, 그가 자신의 덫에 걸려 움직이려 하지 않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덫은 그가 비난하고 증오하는 합리주의이며, 지성인 셈이다. 지하생활자는 책에 있는 대로 행하는 방식밖에 모른다. 그는 실제의 삶에 대해서는 무지하며, 소통을 갈구하면서도 소통의 방식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며, 체화되지 못한 경험을 피상적으로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불합리성과 부조리함은 다만 2X2=5에 머물고 있다. 합리주의자도, 온전히 비합리주의자도 될수 없는 지하생활자의 딜레마는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환기시킨다. 즉 2X2=4만이 아니고 2X2=5에 머물지도 않는 인식의 차원이다. 이를테면 이 논의는, 『지하생활자의 수기』 이후의 다른 작품들에서 줄곧 다뤄지고 있는 테마들을 통해 역으로 이 작품을 분석해보는 것이기도 하다.그것은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간과 사랑에 대한 테마가 결코 기독교와 분리될 수 없다는 생각에 의거한다. 지하생활자는 의식을 실제와 결합시키지 못했는데, 이는 그에게 인식론적 힘(Cognitive Power)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인식론적 힘은 알고자 하는 욕망이며, 그힘을 바탕으로 사랑할 수 있는 동력이 생긴다. ‘보이지 않는 타자’에 대한 대화 요청은 결국 반박을 위한 반박,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만 그치기 때문에 지하생활자를 소통할 수 없는 극단적인 절망으로 밀어넣는다. 실제로 도스또예프스끼는 작품이 발표된 지 10년 후, 이렇게 말한 바 있다.“이것은 너무 우울하다. 그것은 이미 극복된 견해이다”(로버트 루이스 잭슨, 「인간소외와 반항의 상징」, 235쪽). 그러나 도스또예프스끼는지하생활자의 음울한 세계관이 오히려 세계를 지배하는 합리주의적 이성보다 더 신적인 것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그리스도와 믿음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한 마지막 부분이 검열관에 의해 삭제되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한계로 남는다. 이처럼 불완전하고 부조리함으로 가득 차 있는 지하생활자의 모습을 통해 기독교적 구원의 가능성을 언급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모험에 가까울 수도 있다.그러나 광신과 무신이 종이 한 장 차이인 것처럼, 인간에 대한 극단적인 절망과 소통에 대한 뒤틀린 욕망이 역으로 인식론적 사랑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즉 지하생활자 앞에는 선택의 길이 놓여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저주하는 극단적 니힐리스트가 되느냐, 아니면 부정의 에너지를 극복하여 지하실을 탈출한 후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신자가 되느냐, 하는 두 갈래의 길일 것이다. 왜냐하면 지하생활자의 모든 물음들은 궁극적인 타자를 통해서만 대답될 수 있으며, 그의 고통과 절망 역시 인식론적 사랑을 통하지 않으면 극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지하실이야말로 인간의 비합리와부조리를 극복하고 신의 필요성을 요청하는 최후의 공간일지 모른다. 지하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하생활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철저한 부정을통해 진정한 긍정의 길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궁극적으로 신을 향해 갈 수 있는 방법일지 모른다. 욥이 신을 향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면 신의 뜻도 알 수 없었으며, 구원과 축복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존재 자체로 인해 신 안에 의탁하지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1) 작품의인용 부분은 『지하로부터의 수기』, 열린책들(2000)판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지하로부터의 수기』보다는 『지하생활자의 수기』라고 제목을 말하는편이 훨씬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에 가깝다고 느꼈기 때문에, 제목만을 바꿔 인용하였다.)

(2)M.바흐친, 『도스또예프스끼 시학』,정음사(1988), 331쪽. 도스또예프스키는 《브레먀》지에 이 작품의 원제목을 고백이라고 예고하였다.

(3) 석영중, 「도스또예프스끼의악령에 나타난 케노시스와 신화」(2002), 《슬라브학보》 제 17권 2호, 한국슬라브학회. 다만 용어 통일을 위해 ‘하느님’을신으로 바꾸어 인용하였다.

(4) 석영중, 위의 논문

(5) 석영중, 같은 논문

(6) M.바흐친, 위의 책,333쪽

(7) M.바흐친, 같은 책, 333쪽

(8) 조지 스타이너, 『톨스토이냐 도스토예프스키냐』, 김석희 역, 심지(1983),260쪽

(9) 조지 스타이너, 위의 책. 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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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mn 2019-01-01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훌륭한 서평 감사드립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어떤 신관을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시대적 공간벅 배경을 보면 신학적 해석이 상당히 적절한 것으로 보입니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아마존 유역의 엘 이딜리오라는 마을이 이 소설의 배경이다. 사람들은 수크레 호가 실어오는 물건들과 욕쟁이 치과 의사를 기다렸다. 이 마을에는 원주민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히바로 족은 술이나 한잔 얻어먹을까 하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부류였고, 수아르 족은 비밀스런 아마존 유역에 대해 정통한 사람들이었다. 이 마을의 평화가 깨진 것은 양키의 시체 하나가 발견된 일 때문이었다. 곧 이어 읍장이 사건을 조사하러 나왔다. 유일한 공무원인 뚱보 읍장은 ‘독단적인 전횡을 일삼으며 납득할 수 없는 명목들을 내세워 툭하면 세금을 거둬들였다’. 전임 읍장은 ‘밀림에서는 누구에게나 살아가는 방식이 있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는 게 최선책이라고 믿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노다지꾼과의 싸움 끝에 그는 살해되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뚱보 읍장의 지배 하에 놓여 있는 사람들은 언젠가 그가 늘 때리면서 살고 있는 인디오 여자에게 살해당하기를 바랄 정도였다.

뚱보는 시체를 보자마자 그 시체를 거두어 온 수아르 족에게 누명을 씌운다.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야만인’이기 때문이라는 거다. 그러자 이 소설의 주인공인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이 나타난다. 그는 양키를 죽인 것이 거대한 살쾡이임을 논리정연하게 밝힌다. 값나가는 물건들은 그대로 있었고, 배낭에서 발견된 것은 바로 작은 살쾡이 가죽이었다. 양키가 새끼들을 죽이자, 슬픔과 고통을 이기지 못한 암살쾡이가 복수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 살육이 계속될 것임을 알리는 것이라고 노인은 말했다. 할 말이 없어진 읍장이 가 버리자, 치과 의사는 노인에게 책을 건네준다. 그것은 ‘연인들이 사랑으로 인해 고통을 겪지만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사랑 이야기다. 노인은 우연한 기회에 책을 읽을 줄 안다는 사실을 알았다. 노인의 책 읽는 방식은 경건하기까지 했다. 그는 ‘한 음절 한 음절을 음식 맛보듯 음미한 뒤에 그것들을 모아서 자연스런 목소리로 읽었다’. 그는 ‘도대체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깨달을 때까지, 마침내 그 구절의 필요성이 스스로 존중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연애 소설을 읽는 것이 노인의 유일한 생의 즐거움이었다.

노인은 아내와 함께 이 마을에 들어왔다. 개간하는 일에 지쳐 고통받고 있는 그들을 수아르 족 인디오들이 도와주었다. 밀림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알려준 것이다. 아내는 말라리아에 걸려 곧 죽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노인은 수아르 족과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 처음에 그는 밀림을 증오하여 밀림이 거대한 불길에 휩싸여 잿더미로 변하는 꿈까지 꾸었다. 그러나 ‘밀림의 세계에 눈을 뜬 그는 주인 없느 푸른 세계에 매료되어 마음속에 간직해오던 증오심을 잊었다’. 그러다 강한 독을 가진 큰 뱀에게 물리고 말았다. 주술사의 집요한 처방 덕에 겨우 그는 죽음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는 뱀 사건을 계기로 수아르 족처럼 생각하고 느끼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고, 그는 친구 누시뇨를 죽게 한 백인을 독화살 한 방으로 죽일 수 없었다. 그래서 총질을 하게 되었고, 그 계기로 그는 그들 사이를 영영 떠나게 되었다. ‘독화살로 끝장냈더라면 죽은 백인의 얼굴에 그 용기가 남아 누시뇨가 평온하게 눈을 감을 수 있겠지만, 총을 맞았기에 백인의 얼굴이 놀라움과 고통에 일그러져 저 세상으로 떠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암살쾡이에게 살해당한 사람이 자꾸 늘어났다. 결국 살쾡이를 잡기 위한 수색대가 꾸려졌다. 노인 역시 합류했다. 뚱보와 함께 하는 원정은 고역이었다. 밀림의 법칙따윈 귓등으로도 안 듣는 뚱보는 시종일관 불평을 하며 수색을 더디게 만들었다. 더구나 그는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 순한 동물인 꿀곰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급기야 뚱보는 노인에게 암살쾡이를 죽일 것을 부탁하고 자신들은 마을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노인은 암살쾡이와 인간에 대해 생각한다.

먼저 싸움을 건 쪽은 인간이었다. 금발의 양키는 짐승의 어린 새끼들을 쏴 죽였고, 어쩌면 수놈까지 쏴죽였는지도 몰랐다. 그러자 짐승은 복수에 나섰다. 하지만 암살쾡이의 복수는 본능이라고 보기에 지나치리만치 대담했다. 설사 그 분노가 극에 달했더라도 인간의 거처까지 접근한다는 것은 무모한 자살 행위였다.(..)

맞아. 그 짐승은 스스로 죽음을 찾아 나섰던 거야.

그랬다. 짐승이 원하는 것은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인간이 베푸는 선물이나 적선에 의한 죽음이 아닌, 인간과의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싸움을 벌인 뒤에 스스로 선택하는 그런 죽음이었다.(153)

그리고 노인은 죽어가는 수컷을 발견한다. 슬프고 지친 신음 소리를 내는 짐승에게 노인은 연민을 느낀다. ‘노인은 상처 입은 수컷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수컷은 눈꺼풀조차 들어올릴 힘도 없는지 인간의 손길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었다’. 노인은 ‘그 빌어먹을 양키 놈이 우리 모두의 삶을 망쳐놓았다’라고 말했다. 암살쾡이와 인간이 적대 관계인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삶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파괴한 ‘양키’로 대표되는 백인들과 적대 관계인 것이다. 그리고 암살쾡이와의 최후의 싸움에서 노인은, 승리한다. 그러나 죽은 짐승에 대한 묘사는 가슴아팠다. 인간의 승리가 아니라, 인간에 의한 인간의 패배였다.

‘노인은 짐승에게 다가갔다. 그는 두 발의 총탄이 짐승의 가슴을 열어 놓은 것을 보고 치를 떨었다. 생각보다 훨신 큰 몸집을 지닌 짐승의 자태는 굶어서 야위긴 했지만 너무나 아름다워 도저히 인간의 상상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존재처럼 보였다. 죽은 짐승의 털을 어루만지던 노인은 자신이 입은 상처의 고통을 잊은 채 명예롭지 못한 그 싸움에서 어느 쪽도 승리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부끄러움의 눈물을 흘렸다.’(179)

그리고 그는 ‘이따금 인간들의 야만성을 잊게 해주는, 세상의 아름다운 언어로 사랑을 얘기하는, 연애 소설이 있는 그의 오두막을 향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는 마지막 문장으로, 이 소설은 끝난다.

아마존이라는 공간이 리얼하지 않게 느껴진다는 것은 그런 환경에서 살아보지 못한 문명인의 환상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문명인이라는 게 대체 무엇인가. 이 소설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공간에 쳐들어와 파괴와 살육을 일삼는 노다지꾼, 양키들을 통해 현재 지상의 폭력을 야기하는 서구 세력을 은유하고 있다. 양키란 뭐, 너무 직설적인 표현이지만 말이다. 소설은 애초에 분명히 선악을 구분지어 놓는다. 읍장을 비롯한 양키, 노다지꾼들은 분명한 악이며,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수아르 족이나 연애 소설을 읽으며 평화로운 삶을 바라는 ‘수아르 족이 아니지만 수아르 족’인 노인은 선이다. 그리고 그 선은 분명한 태도로 작가의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단순함은 오히려 너무 아름다워 숨막힐 지경이었다. 읍장의 비논리적이고 폭력적인 태도에 대해 반박하는 노인의 모습은, 자연의 지혜 속에서 언제나 겸손한 인디언의 그것이었다. 땅을 개간하는 서구인들에게 ‘당신들은 어떻게 자기의 어머니를 해칠 수 있는가’라고 외치던 인디언의 음성.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자연을 각성하게 하는 외침이며, 무지하고 교만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질타하는 외침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과 함께 사는 수아르 족보다 읍장을 더 닮아 있으며, 양키들과 더 가까운 위치에 있다. 우리 역시 문명이라는 틀에 길들여져 자연을 경외하는 법을 잊었기 때문이다. 문명의 생활 속에서, 인간은 자신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외국작품을 읽는 묘미는 바로 이런 점이다. 낯선 지명과 낯선 인물들 속에서 어떤 보편적인 위대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놀라운 기쁨이다. 단순한 선악구도 속에 이토록 큰 울림을 전달하는 작가의 솜씨에 경탄한다. 제목으로 상상할 수 있었던 이야기와는 완전히 다르다. 노인이 연애 소설을 읽는 것은, 인디오도 아니지만 온전한 문명인도 아닌 그의 정체성을 대변해준다. 연애 소설이란 뭔가. ‘사랑하던 연인이 고통을 겪지만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는, 무수히 많다. 그리고 그 무수함은 언젠가부터 낡고 유치하고 쓸모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나 역시 연애 소설을 싫어한다. 현대의 많은 연애 소설은 너무나 패턴화되어 있기 때문에 지루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사랑이란, 건설의 명목으로 파괴를 일삼고, 평화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의 단 하나의 약점인지도 모른다. 진실한 사랑 이야기 앞에서 누구나 머뭇거리면서 자신의 사랑을 회상하며, 뭔가 홀린 듯한 아늑한 기분이 들기 마련이다. 사랑 이야기는 인간에게 잃어버린 양심을 되찾게 할 유일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물론 거기엔 조건이 붙어야 겠는데, ‘진정성’ 있는 사랑이다. 아마존 유역에 살면서 연애 소설을 읽는 노인을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진정성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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