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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생활자의 수기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2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동현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2월
평점 :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하옵소서.
욥기, 42장, 2~4절
『지하생활자의 수기』1)의 원제가 『고백』이었다는 점2)은 의미심장하다. 작품의 형식은 ‘수기’이고, 작품의 내용은 ‘고백’이다. 수기란 기본적으로 ‘자신에 대한 자신의 말’이다. 수기에 쓰인 모든 내용은 자신의 이름과 인격을 걸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수기가 ‘진실하다’는 것을 미리 가정하고 이 형식을 받아들여야 한다.수기의 내용이 거짓이라면 그것은 수기로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문학적 수기’이다. 즉 형식이 수기이지만, 장르 자체가 수기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수기는 지하생활자라는 가상의 화자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이 가상의 화자는 수기라는 형식을 완전히 곡해하고 있을 뿐더러, 그가 쓰고 있는 수기의 내용조차도 근본적으로 진실하지 못하다는 역설을 지니고 있다. ‘수기이지만 동시에 수기가 아닌’ 이 기묘한 작품을 읽기 위해서는 먼저 고백이 갖는 성격과 수기의 형식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선적으로 수기는 타자를 가정한 글이다. 일단 자기 자신조차도 자신의 말을 듣는 타자로 존재한다. 따라서 이 작품은 자신을 타자화하여 자신에게 하는 고백임은 물론이고, 타자를 자신화하여 그 고백을 역으로 공격하는 괴상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타자와 지하생활자가 예상하는 타자는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 그러나 지하생활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당신은 내가 이 모든 것을 출판하고 그리고 게다가, 당신에게 이것을 읽으라고 줄 거라 생각할 정도로 정말 속고 있는 건가?…왜 나는 마치 독자들을 호칭하는 것처럼 당신을 부르고 있는 것인가? 내가 하려고 하는 그런 종류의 고백들은 출판되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읽으라고 주어지지도 않았다.(70쪽)” 지하생활자가 스스로 ‘독자를 가정하고 있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한 거짓이다. 더 나아가 지하생활자는 자신의 거짓이 독자(라 예상할 수 있는 목소리)에 의해 반박되리라는 것도 명민하게 알고 있으며, 그 부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기라는 형식 자체를 파괴하고 있음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지하생활자의 고백은 먼저 루소의 『고백록』에 대한 패러디이다. 그런데 이 패러디는, 패러디하는 대상의 성격을 내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먼저 루소식의 ‘고백’이 가능한 것인가, 라는 근본적인 문제 제기로부터 시작하자. 하이네는 자신의 저서 『독일에 관하여』에서, “진실하고자 하는 모든염원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인간도 자신에 관해서 진실을 말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루소의 고백은 “자신의 진정한 죄과를 감추려는 목적이나 허영심 때문에 하는 거짓 고백”(71쪽)인 셈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조차 완전하게 솔직해질 수 없는 인간이 청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고백할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여기에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과를 털어놓음으로써 용서를 받고, 이해를 구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죄악이라는 행위 자체가 고백함으로써 용서받을 수 있음은 물론이고, 고백하고 있는 자신을 ‘아름답고 숭고한 존재’로 만들어준다는 위선까지 존재한다. 지하생활자는 “완벽하게 단순한 허영심 때문에 인간이 때때로 모든 죄를 자기 탓으로 돌린다는 것을 이해하며, 그리고 그것이 어떤 종류의 허영심이 될 것인지도 잘 상상해볼 수 있다”(72쪽)고 지적한다. 그러나 ‘지하생활자의 고백’은 루소와는 반대되는 허영심―즉 추악하고 비열한 존재임을 주장하는 허영심으로 나타난다. 악의를 가지고 하는 고백은 상대로 하여금 용서는커녕 자신을 증오하도록 만드는 것이며, 그 증오에 지하생활자의 ‘쾌감’이 존재한다.
비공개적으로 수기를 쓰고 있다는 패러디적 주장은 계속된다.“하이네는 청충 앞에서 고백을 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나는 반면, 나 자신만을 위하여 쓰고 있다. 그리고 내가 만일 독자들을 대하듯이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것이고, 그 이유는 그렇게 쓰는 것이 나에게는 더 쉽기 때문이라고 단호하게 나는 주장한다. 그것은 형식이다. 단순히 형식일 뿐이다. 왜냐하면 나는 결코 독자를 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72쪽). 이에 반하는 또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다시 지하생활자는 변명한다. “종이는 보다 고백을 엄숙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거기엔 뭔가 당당한 것이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더 잘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73쪽) 지하생활자의 이러한 집요한 주장이야말로 루소가 공개적으로 한 고백의 다른 극단에 서 있다. 즉 루소의 고백이 용서받음을 전제하고 있기에 위선적이라면, 지하생활자의 고백은 용서라는 말 자체를 거부하기 때문에 위악적이다. 그리고 타자를 가정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타자를 통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나는 고독하지 않다’라는 말 자체가 발화되는 순간, 이미 ‘고독하지 않기 위해’ 타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역설을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한 지하생활자의 죄는,“주위의 모든 사람들보다 영리하다”(21쪽)는 것이다. 이 고독하고 지적이며 냉소적인 인간은, 다른 사람들이 인생에서 “절반도 실행할 염두도 못 낸 것을 극단까지 밀고나갔”(221쪽)으며, 결론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더 살아 있다는 결론”(221쪽)을 내리게 된다. 자신은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모든 인간보다 근본적으로 우월하며 더 살아 있다고 느끼는 점이야말로 지하생활자의 고백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허영심이다. 그리고 이 허영심을 죄로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악령』에 등장하는 스따브로긴의 ‘악을 행할 수 있는 위대함’과 같은 맥락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특히 스따브로긴의 고백은 정교회 교리에 전적으로 대립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다음에서 살펴보자. 고백이 “죄인과 신과의 대화로서 성사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모든 죄는 신과 공동체를 거스르는 행위이지만 고백의 유일하고 궁극적인주관자는 신이며, 둘째, 고백자는 자신의 죄에 대한 ‘해명’을 진술해야 하며, 셋째, 진심으로 참회해야 하며, 넷째, 용서와 구원을 목표로 해야한다. 이 네 가지 조건 중 어느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는다면 성스러운 행위로서의 고백은 성립되지 않는다.”3) 그러나 스따브로긴의 고백은 “청자로서 신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선택”4)한 것이다. 또한 스따브로긴은 해명을 거부하며, 참회와 구원, 용서에 대한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 악의에 가득 찬 이 고백을 통해 청자는 재판의 성립 자체를 거부하는 죄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 고백의 목적이 “증오하고 증오받는 것”5)임을 알 수 있다. 죄에 대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용서받음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이 고백은, 루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백이라는 형식 자체가 성립되지 않으며, 참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반기독교적이며, 지하생활자의 고백처럼 위악적인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지하생활자의 고백은 전적으로 반기독교적인가. 또 지하생활자의 고백을 기독교와 연관지어 생각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것은 반형식적인 수기에 이은 또 다른 난관이다. 왜냐하면 『지하생활자의 수기』 어디에도 신을 청자로 규정하거나, 또는 규정하지 않는 태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만을 위해’ 쓴다는 주장이 거짓임은 살펴보았지만, 그 태도 자체가 신을 부정한다고 치부할 수는 없다. 오히려 지하생활자가 줄곧 부정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타자’가 더욱 더 논의의 전면에 부각된다. 이 타자란 누구인가. 지하생활자에게 있어 타자는 논쟁과 공격의 대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대화의 대상이다. 즉 타자가 없다면 지하생활자도 결코 ‘말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하생활자의 모든 말은 타인을 향해 있으며, 타인의 반응을 예상하고 기대하며 시종일관 절박하고 열정적인 어조로 발화된다. 따라서 이 소설에는 “독백적 말은 하나도 없다” 6). 문제는 이와 같은 대화가 끊임없는 악순환을 통해 부정적으로 심화된다는 점이다. 타자의 입장에 서서 가능한 모든 질문을 제기하고, 그 질문에 대해 반박하고 끊임없이 자기 변명하는 화자의 태도는 결국 절망적인 대화의 형태를 띌 수 밖에 없다. “상대의 응답을 예상해낸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위해 최후의 말을 반드시 간직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7). 이 최후의 말, 혹은 타자에 대한 최후의 승리를 위해 지하생활자는 엄격하게 타자와 자신을 분리시키려 하지만, 타인에 대해 결코 무관심해질 수 없다. 왜나하면 지하생활자의 이런 분열적인 태도 자체가 그가 타인의 의견이나 평가에 신경을 쓰며, 타인의 인정과 이해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부정하려던 타자에 의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이 역설로 인해 타자와의 대화는 무한해진다. 지하생활자는 결코 타자에 의해 굴복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절망적인 타자―소통할 수 없고, 이해받을 수 없는 타자란 무엇을 상징하는가. 『지하생활자의 수기』 에 등장하는 타자들을 예로 들어보자. 1부에 나오는 장교에 대하여 지하생활자는 “진정한, 좀 더 정당한 언쟁을, 좀 더 품위 있는, 말하자면 문학적인 언쟁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88쪽)이라고 말한다. 나아가그는 그 장교와의 소통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만일 그 장교가 아름답고 숭고한 것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이해했더라면, 그는 확실히 나에게 팔을 벌리고 달려와서는 친구가 되자고 했을 것이다. 얼마나 위대한 일이었을까!…나는 나의 진보 성향으로, 그리고 사상으로 그를 고상하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92쪽) 그러나 타자에 대한 이러한 공상과는 다르게 현실에서 그는 장교와 막다른 길에서 마주쳤을 때, 언제나 먼저 비키는 역할만을 할 뿐이다. 그러한 타자에 대해 지하생활자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소통 수단은 악의적인 복수를, 그러나 타자에게 조금도영향을 미칠 수 없는 무의미한 복수를 행하는 것이다.
2부에 등장하는 지하생활자의 친구들은 장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소통의 불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오기로 친구들의 모임에 참가한 지하생활자는 그들이 자신을 무시하자 이렇게 생각한다. “이 돌대가리들은 자신들이 나를 식사에 초대함으로써 내게 경의를 표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내가, 내가 그들에게 경의를 표한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도 못하고 있다!”(132쪽)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으나 그들은 지하생활자를 완전히 잊고 자기들끼리 즐겁고 명랑할뿐이었다. 결국 지하생활자는 자신이 직접 악의에 찬 연설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친구들에게 단지 분노와 경멸만을 일으키게 되는 말 속에서 지하생활자는 무력하게 주장한다. “나는 진실, 성실, 그리고 정직을 사랑한다.”(134쪽) 이와 같은 우스꽝스러운 주장으로 분위기는 엉망이 되었으나, 지하생활자는 곧 그들과의 화해를 갈망한다. “그 순간에, 얼마나, 얼마나, 그들과 화해하고 싶었던가!”(137쪽) 지하생활자는“일부러 장화 뒤꿈치를 세게 바닥에 부딪쳐 쿵쿵 소리를 내며 걸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헛수고였다. 그들은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138쪽) 심지어 그의 사과에도 친구는 정색하면서 말한다. “네가 나를 모욕했다고? 나는 네가 알아줬으면 한다. 존경하는 선생,너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모욕할 수 없다는 것을!”(141쪽) 지하생활자는 타인과 대화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세계에 참여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당하고 있다. 한 사회에서 이토록 지독하게 소외된 사람은 결국 지하 세계로 빠져들어 타인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공상을 하며, 보이지 않는 타자를 상정하여 악의어린 논쟁을 시도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지하생활자의 타자에 대한 부정은 ‘타자에게 거부당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한편으로 지하생활자의 고백은 욥의 항변을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 다시 기독교와 연관지을 수 있다. 신에 대한 욥의 믿음이 다만 축복에 의한 것이라는 악마의 주장에 의해 욥은 시험당한다. 욥은 의로운 자가 고난을 당하고 세상에 부조리와 악이 존재하는이유에 의해 신에게 직접적으로 대화를 요청한다. 그러나 신을 상대로 한 욥의 항변은 우선적으로 친구들에 의해 부정된다. 즉 절대적이고 무한한 존재인 신의 의지를 대변하는 자들에 의해(신이 아니라) 욥은 죄인으로 낙인찍힌다. 친구들은 신의 공의를 인정하기 때문에 욥의 범죄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욥은 신의 주권 하에서는 악인뿐만 아니라 의인 역시 고난을 당할 수 있으며, 자신의 결백에 대해서는 신만이 알고있다고 주장한다. 욥과 친구들의 대립은, 지하생활자와 합리주의자의 대립을 연상시킨다. 욥은 신에게 ‘항변하는 자’이고, 지하생활자는 세계를 이루는 근본적인 자연법칙에 대해 ‘거부하는 자’이다. 물론 욥과 지하생활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욥은 결국 신의 절대적인 법정에서 자신이‘원고’조차 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감히 의문을 품은 점에 대해 회개하지만, 지하생활자는 존재를 의탁할 만한 그 어떤 타자도 만날 수 없었다. 아니, 그러한 타자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지하생활자의 모든 말의 체계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지하의 세계에서는어떠한 구원도 있을 수 없으며, 어떠한 구원자도 만나서는 안 된다.
욥의 친구들과 합리주의자들을 같은 논의의 맥락에 놓은 것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절대적 법칙에 의거하여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구별해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심지어 루소는 “개인의 양심은 인간을 신과 비슷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선악에 대한 틀림없는 심판관”8)이라고까지 선언한다. 욥의 친구들은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해 회의를 갖지 않으며 그것에 절대적인 성격을 부여한다는점에서 합리주의자들과 맥을 같이 한다. 즉 신의 공의가 있다는 것과는 다른 맥락에서, 신의 법칙을 자신의 체계로 만든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합리적 이기주의자들은 자신의 이익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고, 자신의 이상의 공공의 이상임을 천명하고 있다. 신의 뜻에 대해 욥의 친구들이 곡해한것처럼, 합리주의자들은 인간과 자연법칙을 곡해하고 있다. 인간의 복잡하고 심층적인 성향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 그들은 ‘단순하고 젖먹이 같은논리’로 인간의 이익과 행복에 대해 재단하려 든다. 마찬가지로 욥의 친구들은 인간의 단순한 지혜와 어리석음으로는 신의 뜻을 파악조차 하기어렵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자연법칙에 대한 지하생활자의 태도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2X2=4라는자연법칙에 대한 지하생활자의 증오는 합리주의자들에 대한 증오와 겹쳐 있다. 사실상 2X2=4라는 것이 신의 뜻에 따른 유일한 법칙인지 아닌지에 대해 인간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욥을 포함하여 그의 친구들이 신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연법칙, 혹은 신의 법칙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인간에 의해 세계는 합리적으로 설명된다. 그러므로 자연법칙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자연법칙에 대한인간의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지하생활자는 “단지 자연의 법칙들만 발견하면 되고, 그렇게 되면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없으며, 삶은 훨씬 쉬워질 것이”(47쪽)라고 믿는 합리주의자들을 맹렬하게 공격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 2X2=4는 하나의 위안이며,그들을 정당화해주는 구실이며, 행동의 필연적인 법칙이며 귀결인 것이다. “결국 2X2=4는 삶이 아니라 죽음의 시작인 셈이다.”(62쪽)2X2=4로 한정되는 유클리드 기하학은 인간이 합리적으로 인식하는 세계이며, 욥의 친구들이 공의롭다고 믿는 세계이다. 그러나 지하생활자는2X2=4로 대표되는 유클리드 기하학만이 아니라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가능함을 우회적으로 주장한다. 2X2가 5가 될 수 있는 세계는 무한한 세계이며,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신이 유한자 그리스도로 세상에 나타난 것 역시 비유클리드 기하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 “2X2보다 비교할 수 없을정도로 고귀한 것이 의식이다.”(64쪽) 즉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인간성과 개성을 보존해주는 자유 의지이며, 인간의 복잡성과 다면성이야말로오히려 진정한 자연법칙에 걸맞은 것이다.
다시 타자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욥에게 있어 신은 절대성과 무한성을 상징하는 궁극적인 타자이다. 그러나 지하생활자의 궁극적인 타자는 정의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하생활자가 무한한 대화를 시도하는 ‘보이지 않는 타자’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자연법칙이나 합리주의 따위로는 설명할 수 없는, 2X2가 4로만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무한하며 궁극적인 존재자이다.그런데 지하생활자는 최초로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을 향한 사랑을 보여준 리자에 대해 모순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토록 이해와 소통을 갈구했으면서도 막상 리자가 자신을 파악하고 있다고 느끼자 지하생활자는 증오와 분노에 휩싸인다. 리자는 『죄와 벌』의 소냐를 연상시킨다. 순수한 믿음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상징하는 창녀 리자는 소냐처럼 한 관념론자를 신의 길로 인도할 수 없었다. 지하생활자는 리자에게 ‘책에서 배운 대로’구원을 실행하려 했으나, 오히려 리자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 사실에 대해 절망한다. 지하생활자에게 있어 타자란, 굴복하거나 굴복당하는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보이는 타자’를 이해하거나 사랑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지하생활자는 결국 ‘보이지 않는 타자’를 향해 악의어린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
지하생활자의 딜레마는 이 작품에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부정확한 형식이 딜레마에 빠지게 되자 그형식 속에 담긴 부정확한 진실마저도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9). 인간의 본성에 대해 간파하고 자유의지의 중요성에 대해 주장하고 있는 지하생활자가 지하에서 나올 수 없는 것은, 그가 자신의 덫에 걸려 움직이려 하지 않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덫은 그가 비난하고 증오하는 합리주의이며, 지성인 셈이다. 지하생활자는 책에 있는 대로 행하는 방식밖에 모른다. 그는 실제의 삶에 대해서는 무지하며, 소통을 갈구하면서도 소통의 방식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며, 체화되지 못한 경험을 피상적으로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불합리성과 부조리함은 다만 2X2=5에 머물고 있다. 합리주의자도, 온전히 비합리주의자도 될수 없는 지하생활자의 딜레마는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환기시킨다. 즉 2X2=4만이 아니고 2X2=5에 머물지도 않는 인식의 차원이다. 이를테면 이 논의는, 『지하생활자의 수기』 이후의 다른 작품들에서 줄곧 다뤄지고 있는 테마들을 통해 역으로 이 작품을 분석해보는 것이기도 하다.그것은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간과 사랑에 대한 테마가 결코 기독교와 분리될 수 없다는 생각에 의거한다. 지하생활자는 의식을 실제와 결합시키지 못했는데, 이는 그에게 인식론적 힘(Cognitive Power)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인식론적 힘은 알고자 하는 욕망이며, 그힘을 바탕으로 사랑할 수 있는 동력이 생긴다. ‘보이지 않는 타자’에 대한 대화 요청은 결국 반박을 위한 반박,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만 그치기 때문에 지하생활자를 소통할 수 없는 극단적인 절망으로 밀어넣는다. 실제로 도스또예프스끼는 작품이 발표된 지 10년 후, 이렇게 말한 바 있다.“이것은 너무 우울하다. 그것은 이미 극복된 견해이다”(로버트 루이스 잭슨, 「인간소외와 반항의 상징」, 235쪽). 그러나 도스또예프스끼는지하생활자의 음울한 세계관이 오히려 세계를 지배하는 합리주의적 이성보다 더 신적인 것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그리스도와 믿음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한 마지막 부분이 검열관에 의해 삭제되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한계로 남는다. 이처럼 불완전하고 부조리함으로 가득 차 있는 지하생활자의 모습을 통해 기독교적 구원의 가능성을 언급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모험에 가까울 수도 있다.그러나 광신과 무신이 종이 한 장 차이인 것처럼, 인간에 대한 극단적인 절망과 소통에 대한 뒤틀린 욕망이 역으로 인식론적 사랑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즉 지하생활자 앞에는 선택의 길이 놓여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저주하는 극단적 니힐리스트가 되느냐, 아니면 부정의 에너지를 극복하여 지하실을 탈출한 후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신자가 되느냐, 하는 두 갈래의 길일 것이다. 왜냐하면 지하생활자의 모든 물음들은 궁극적인 타자를 통해서만 대답될 수 있으며, 그의 고통과 절망 역시 인식론적 사랑을 통하지 않으면 극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지하실이야말로 인간의 비합리와부조리를 극복하고 신의 필요성을 요청하는 최후의 공간일지 모른다. 지하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하생활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철저한 부정을통해 진정한 긍정의 길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궁극적으로 신을 향해 갈 수 있는 방법일지 모른다. 욥이 신을 향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면 신의 뜻도 알 수 없었으며, 구원과 축복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존재 자체로 인해 신 안에 의탁하지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1) 작품의인용 부분은 『지하로부터의 수기』, 열린책들(2000)판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지하로부터의 수기』보다는 『지하생활자의 수기』라고 제목을 말하는편이 훨씬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에 가깝다고 느꼈기 때문에, 제목만을 바꿔 인용하였다.)
(2)M.바흐친, 『도스또예프스끼 시학』,정음사(1988), 331쪽. 도스또예프스키는 《브레먀》지에 이 작품의 원제목을 고백이라고 예고하였다.
(3) 석영중, 「도스또예프스끼의악령에 나타난 케노시스와 신화」(2002), 《슬라브학보》 제 17권 2호, 한국슬라브학회. 다만 용어 통일을 위해 ‘하느님’을신으로 바꾸어 인용하였다.
(4) 석영중, 위의 논문
(5) 석영중, 같은 논문
(6) M.바흐친, 위의 책,333쪽
(7) M.바흐친, 같은 책, 333쪽
(8) 조지 스타이너, 『톨스토이냐 도스토예프스키냐』, 김석희 역, 심지(1983),260쪽
(9) 조지 스타이너, 위의 책. 2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