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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와 게의 전쟁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생은 너무 짧다. 매 순간 죽음으로 향해 가는 인간에게 시간은 영원한 화수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어떤 것으로 채우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삶은 일종의 예술 작품과 비슷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동, 생활, 잠을 위한 시간은 배제해야 한다. 그건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하니까. 그 다음에 남는 시간은 마치 빈 캔버스나 종이 같다. 창조, 혹은 향유로 채워질 공백. 세상에 즐길 거리는 너무 많다. 예술이 대중의 손에 넘어왔다는 건 곧 자본의 품에 안겼다는 뜻이다. 우리는 출신 성분과 상관없이, 적당한 대가를 치르면 어떤 예술이든 향유할 수 있다. 심지어 적당한 수신료만 지불하면, 무한대의 오락을 제공받을 수 있다. 인터넷에 접속하거나 TV를 켜는 것만으로도 공짜 오락거리는 넘쳐난다. 그러나 포탈사이트가 제공하고 TV 채널이 제공하는 오락은 수동적인 것이다. 우리는 남의 편집된 취향을, 그것도 일정한 분류도 없이 마구잡이로 취합한 취향을 접하는 셈이다. 너무 많은 정보는 너무 적은 정보와 마찬가지로 효용이 별로 없다. 일정한 방향이 없는 관람과 서핑은 무취향의 인간을 양산한다. 그러나 ‘선택하고 집중하는’ 예술 작품을 향유하는 건 적극적인 행동이다. 독서 역시 매우 능동적인 취미 생활이다.
그러나 출판사의 상찬은 갈수록 화려해지고, 책의 숫자는 늘어난다. 책도 상품이므로 끊임없이 생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정보가 많은 시대일수록 선별작업이 필요하다. 그걸 대신해주는 사람들이 일련의 자발적인 향유자들이다. 그들이 만든 커뮤니티에 있는 글들은 관심사를 다루므로 정교하고 세심한 경우가 많다.(엔하위키 미러가 그런 곳이라고 본다) 인터넷 서점도 일정 수준의 리뷰를 통해 정보를 선별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것에만 너무 의지해서도 안 된다. 결국, 타인의 취향이기 때문이다. 또한 실망한 작품에 대해 ‘굳이’ 리뷰를 남기려는 독자의 수는 찬양하는 독자보다 훨씬 적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리뷰가 개수도 결코 믿을 것이 못 된다. 유명세와 취향이 일치하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결국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직접 그 책을 찾아보는 발품을 파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시간을 절약하는 길이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정보나 애독자의 리뷰만 보고 구매한 뒤 한탄한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아니, 오히려 심하게 실망한 경우에는 책의 처분에 망설임이 없다. 문제는 이도 저도 아닌 경우다. 일정 수준은 구가하지만 내 취향이라고는 딱 말할 수 없는 작품. 작가의 노력은 인정하지만, 상찬의 수준을 이해할 수 없는 작품. 더구나 그 작품을 출판사에서 제공받아 리뷰를 해야 할 때의 난감함. 취향을 심하게 타는 편협한 독서가인 나에게는, 신간평가단이라는 일이 쉬운 게 아니었던 게다. 작가의 최신작이라고 해서 막연히 그 작가의 최고의 작품이라고 간주할 수도 없는 일이다. 누구나 커리어 하이가 있는 법이니까. 내가 보기엔 미미 여사의 ‘모방범’이 그랬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이 그랬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 이스마일 카다레의 ‘죽은 군대의 장군’,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는 오히려 데뷔작이 최고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물론 전적으로 나의 취향이다.
요시다 슈이치의 ‘원숭이와 게의 전쟁’이 내겐 난감한 소설이다. 일단 출판사 소개를 읽고 내가 추천한 책이기도 해서 더욱 그랬다. 출판사에서는 ‘정의가 무시당하는 이 뒤틀린 세상을 향한 보통 사람들의 통쾌한 복수극이 시작된다’는 문장으로 소설을 소개했다. 교활한 원숭이를 게들이 골탕먹이는 설화에서 따왔다는 제목도 충분히 그러한 소설의 내용을 뒷받침해주는 제목이었다. 그러나 복수극에 제대로 완성되려면, 복수의 내용과 주체, 대상이 확실해야 하는 법이다. 그 전제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통쾌한 복수는 할 수가 없는 셈이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원숭이’와 ‘게’의 위치부터가 모호하다. 남을 괴롭히는 자가 원숭이인가? 아니면 사회적 강자가 원숭이인가? 사회적 약자가 게인가? 그렇다면 남을 괴롭히는 사회적 약자나, 선량한 강자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먼저 원숭이와 게를 대변하는 사람의 설정 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게 이 소설의 치명적 약점이다.
먼저 미나토의 가족에게 사기를 친 에노모토 요스케가 원숭이인가? 그렇다면 그에 대한 복수는, 미나토가 이룬 셈이 된다. 그를 차로 쳐서 죽였지만 살인이 아니라 사고로 처리되었고, 처벌도 형이 대신 받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일정 수준의 사회적 인망과 부를 얻었고, 소노 요코라는 유능한 비서까지 데리고 있다. 그가 약자인 것인가? 이런 식으로 시작부터 어긋난다. ‘정리된 플롯도 없이 '무모하게' 시작되었지만,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작가 특유의 섬세한 디테일을 뿜어내는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실은 정리된 플롯이 없기에 한 초점으로 모이지 않고 순발력으로만 이야기가 이끌리는 셈이다. 그렇다면 국회의원 도쿠다가 원숭이인가? 그가 지방에서 계속 당선되며 아랫사람에게 뇌물수술죄를 뒤집어 씌운 게 잘못이라면, 미나토의 결정도 비슷한 도덕적 혐의를 지게 된다. 미나토의 사고는 엄연한 ‘살인’이다. 살인에는 꼭 엄벌이 따라야 한다는 현실 세계의 도덕률을 적용하려는 게 아니다. 등장인물에게 감정이입하려면, 그가 꼭 그래야 할 결정적인 이유와 그가 견뎌야 할 업이 있는 법이다. 그런데 미나토는 중간에 준페이에게 협박당하고 유코에게 끌려다니는 것 이외에는 어떤 인간적인 결단이나 고뇌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의 정의는, 독자에게 공감을 얻지 못하는 우발적인 범죄일 뿐이다.
이런 식이라면 기본적인 원숭이 VS 게 구도조차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중간에 요스케의 차에 ‘일본 정계를 흔들게 할 정도의 비밀문서’ 같은 게 있었다고 언급되어 있기에, 당연히 그 문서와 관련해서 진짜 ‘원숭이’가 등장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문서는 그냥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고 만다. 이 문서에 대해 물고 늘어지는 것이 진짜 작가의 역량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제대로 구성해놓지 않고, 그걸 준페이의 당선으로 적당히 타협하려고 든다니, 플롯이 엉성해질 수밖에 없다.
등장인물 중에서 그나마 개성이 느껴지는 건 소노 요코와 ‘란’의 마담인 미키다. 그들은 남성들을 압도하며 자신들의 역할에 충실한다. 물론 소노 요코의 정의 역시 그저 ‘자신의 입맛대로 설정된 정의’다. 그녀는 자신의 고용인인 미나토의 범죄에 대해 별다른 자각이 없다. 그저 그건 입막음해야 할 일일 뿐이다. 오히려 그녀에게는 언젠가 유명 정치인을 키워낸다는 점쟁이의 예언만이 중요하다. 그래서 마침 그 기회가 다가왔을 때, 그걸 붙잡는다. 중요한 건 기회가 왔기 때문이지, 그녀가 매력적인 인물을 만난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준페이는 술집에서 일하는 바텐더이고, 사는 걸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인물로 보인다. 그는 미나토의 사고를 목격하고 진범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호스티스 도모키와 함께 미나토를 협박하자고 제안한다. 도모키 역시 루저로서, 인생에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아내 미쓰키가 무작정 도쿄로 상경했을 때도 그저 부담스러워할 뿐이다. 미쓰키를 도와주고 아이를 돌봐준 건 란의 마담인 미키지, 아버지인 그가 아니다. 물론 ‘루저’ 캐릭터가 꼭 소설에서 무얼 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매력적인 어떤 면은 보여줘야 한다. 이들은 상황이 만들어놓은 대로 그저 따라다니는 허수아비다. 요코가 시키는 대로 지역 공천에 나가는 준페이, 우연히 유명해져서 졸지에 아내의 매니저 역할을 한 도모키에게서 열정을 찾기 어려웠다. 결국 소설의 어떤 인물에게도 별로 공감하지 못했기에, 준페이가 당선되는 순간의 카타르시스도 느끼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보통 사람들의 통쾌한 복수극’이라는 카피에 걸맞지 않은, 그저 우연이 빚어낸 성공으로 보였을 따름이다.
다음 신간평가단 도서를 추천할 때는 좀 더 세심하게 책을 살펴야겠다. 엉성한 플롯이나 순간적인 착상보다, 보다 꿰맞춰진 제대로 된 이야기를 읽고 싶다. 그래서 이 책의 출판사에게는 미안하지만, 요시다 슈이치의 새 책에 기대를 한 미지의 독자에게, 솔직하게 고백할 수밖에 없다. 원래 당신이 그의 애독자라면 모를까, 연재 소설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안타까운 소설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