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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묘지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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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알고 있는 것, 그것이 과연 진짜인가?

에코는 이런 물음에서 소설을 시작한다. 문득 최근에 읽은 다른 소설, 우부메의 여름에서 교고구토의 장광설이 떠올리며 겹쳐졌다. 우리가 가진 상식이란, 지극히 편협하다. 우리는 무언가가 진짜라는 걸 어떻게 인식하는가? 내가 겪지 못했던 것을, 우리는 교육 혹은 독서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역사는 승자의 역사이며 패러다임은 늘 바뀌었다. 지식을 편찬하는 권력을 가진 자들은 얼마든지 역사를 왜곡할 수 있다. 그 왜곡은 언제 어디서든,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다. 에코의 말마따나, ‘시모니니는 우리 곁에 있다’.


에코는 이 소설에서 유럽의 역사를 종횡무진으로 드나들며 픽션과 역사의 경계를 허문다. 거기다 이전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해박한 종교(비교나 밀교까지 포함해서), 문화적 지식을 자랑하며 혀를 내두르게 한다. 특히 주인공 시모니니를 제외한 모든 인물이 실제로 존재했던(즉 기록에 남아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 이 소설의 흥미를 돋운다. 에코는 실로 보르헤스적인 수법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진짜 사료(책이나 잡지, 떠도는 이야기, 전설, 신화 등)를 가상 인물이 이용하는 사실적 환상주의, 실존 인물과 가상 인물이 함께 겪는 사건과 가짜 대화, 그들의 얽힘으로 벌어지는 새로운 사건, 실존하는 인물에 대한 가상 서술, 실제 사건에 대한 다른 언급 등등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그 경계 허뭄이야말로 이 소설의 주제이다. 우리가 픽션이라 부르는 것과 역사는 정말 얼마나 다른가? 어쩌면 ‘역사’는 만들어졌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언가가 발화되었을 때,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더구나 인간은 기본적으로 믿기를 좋아하는 종족이다. 사기꾼 탁실의 입을 통해 에코는 말한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믿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게 인간의 주된 특성이죠. 하기야 교회가 거의 2천년동안을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너나 할 것없이 그런 맹신의 경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511)


믿는 것, 그것은 어쩌면 생존을 위한 도구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자는, 살아남는 데 오히려 불리하다. 모든 것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자는, 결정을 내리기 못한다. 사실 우리가 내리는 결정은 대부분 감정적이다. 뇌의 감정을 담당하는 부분이 다친 환자들은,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그들은 너무 많은 가능성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확신과 믿음이 있어야 선택을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지 못하는 인간은 도태될 뿐이다. 이 믿음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기본적으로 종교적인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에게는 인과관계가 필요하다. 삶이 우연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우연이나 운명에 순응하는 척 하지만, 뚜렷한 이유를 찾으려 애쓴다. 그 과정에서 종종 희생양이 필요하다. 우리는 고통받도록 태어난 것이 아니라, 누군가로 인해 고통받은 것이다. 그 편이 자신의 무능과 운명을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매력적이다. 세계를 지배하는 자들에 대한 숱한 음모론은 이를 뒷받침한다. 


적이란 결국 민중의 벗입니다. 자기가 가난하고 불행한 것은 자기 잘못이 아니라 어디가 다른 데에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느끼려면 언제나 증오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증오는 그야말로 원초적인 열정입니다. 사랑이란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나오는 감정이죠. 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죠. 누군가를 평생토록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건 이룰 수 없는 희망입니다. 그래서 간통이며 모친 살해며 친구를 배신하는 일 따위가 생겨나는 겁니다. 반면 누군가를 평생토록 미워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자가 우리곁에서 계속 증오심을 부추기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증오는 심장을 뜨겁게 하죠.(600)


이 작품의 큰 줄기는 ‘프로토콜’, 일명 ‘시온의정서’가 탄생하는 과정에 대한 허구적 재구성이다. 에코는 지극히 편협하고 비인간적인 반유대주의에 의해 ‘프로토콜’이 탄생하는 과정을 시모니 시모니니라는 망측한 주인공을 통해 흥미진진하게 서술한다. 주인공의 이름 자체가 유대인을 증오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성 시모니노’는 유대인에게 납치되어 토막난 아기 순교자이기 때문이다. 이 이름을 지은 것은 철저한 반유대주의자인 그의 할아버지이며, 실존 인물이다. 이름에 각인된 증오, 누군가가 주입한 증오가 그를 평생에 걸친 유대인 혐오자로 만든 셈일지도 모른다. 이 뿌리깊은 증오는 그로 하여금 어떤 문서를 위조하더라도 유대인의 은밀한 음모가 숨어 있다는 단서를 심게 했다. 그 철저한 증오는, 사랑보다 증오가 더 위대하고 깊은 감정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시모니니라는 이 인물은 사이코패스라는 말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 위인이다. 그러므로 증오가 인간의 본성이라는 식의 결론을 이끌 필요는 없다. 시모니니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유럽에서 일어난 프라하의 묘지 논쟁에서, 시모니니의 논리를 수긍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주장에 대해 에코가 ‘변태적’이라며 일갈한 것도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시모니니는 쾌감과 증오를 위해 존재하는 인간이다. 그가 사랑하는 건 미식과 그를 지불하기 위한 돈뿐이다. 여자와 권력도 그에겐 추구 대상이 아니다. ‘나는 증오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그의 선언에서부터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든 마다하지 않는다. 시모니니에게 여러 수사를 붙여보자. 이탈리아, 프랑스, 프로이센, 러시아의 첩보원이자 이중간첩, 문서위조꾼, 협잡꾼, 거짓말쟁이, 살인자, 사기꾼, 공갈협박꾼. 무엇이 더 필요한가? 기막히게 머리가 좋고 위조 재주가 뛰어난 그는 친구든 은인이든 가리지 않고 처단한다. 방해자를 자신의 계획에 도구로 쓰고, 버린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운다. 서로 적대적인 양쪽 모두에게서 이익을 보기도 한다. 프리메이슨을 고발하는 사람과, 그 고발을 통해 자신들의 신앙을 증명하려는 사람. 프리메이슨과 유대인을 동시에 공격하는 것도 쏠쏠한 돈벌이가 되었다. 더구나 반유대주의는 ‘공인된 광맥’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이고 열광적으로 조작에 끼어들었다. 어쩌면 ‘프로토콜’에서 주장하는 유대인의 음모는, 이런 자들의 음모라고 말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울지 모른다. 더구나 우리는 ‘프로토콜’이 한 미친 독재자에 의해 세계를 광기로 몰아넣은 요인 중 하나였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다면 에코는 소설로 또 하나의 음모론을 창출한 셈이다. 유대인의 음모를 밝히는 문서를 쓴 자의 음모를 밝힌 소설이라. 이 얼마나 보르헤스적이며 메타소설적인가! 


한편 시모니니가 밝힌 가짜 문서의 원칙도 매우 흥미로웠다. 이는 평소에 위서에 많은 연구를 쏟은 에코의 결과물이리라. ‘흑과 백, 선과 악이 분명해야 하며, 악당은 딱 하나만 있어야 하는 것’(182)이다. 또한 ‘이야기의 모든 요소가 아귀가 맞고 사실임직하게 보이면 오히려 거짓’(184)이라고 믿게 마련이다. 적절하게 거짓을 섞어야 한다. 또한 원본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도록 새로운 방식으로 구성해야 한다. 에코는 그런 유명한 증거로 동방 박사 이야기를 든다. 오로지 마태복음에서만 살짝 언급된 동방 박사 이야기는 비기독교인에게도 유명한 이야기다. 이름도 명수도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풍문이 많은 이들에 의해 덧붙여져 결국 설득력을 얻은 셈이다. 전승되는 상식의 유래 따위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또한 ‘어떤 위험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면, 천의 얼굴을 가진 위험을 찾으면 절대로 안 된다. 위험은 단 하나의 얼굴을 가져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의 관심이 흐트러진다. 한 불에 고기를 너무 많이 올려놓으면 안 되는 법’(387)이라는 원칙도 밝힌다. 시모니니는 이러한 원칙에 따라 자신의 숙적을 결국 세계를 지배하려는 간악한 무리들로 탁월하게 묘사해낸다.


한편 이 소설은 세 명의 화자를 등장시키는 독특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문체가 상이한(그러니까 폰트가 다른) 세 화자는 각각 시모니니, 달라 피콜라 신부, 전지적 화자이다. 기억을 잃은 시모니니가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일기를 써내려간다. 회상을 하는 시점에서 그는 자신과 피콜라 신부의 정체성을 의심한다. 앞부분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피콜라 신부는 그의 분신이다.(이건 목차만 봐도 짐작할 수 있으므로 스포일러라고 생각하는 분들에게는 양해를 구한다.) 그는 모종의 사건 때문에 기억을 잃었고, 기억은 두 명의 인격에게 흩어져 혼재한다. 이 분신 모티브는 소설을 읽는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그리고 이 두 명의 화자가 가리거나 미처 이야기하지 않은 부분을, 전지적 화자가 다시 정리해주는 형식을 취한다. 사건은 시모니니가 임의적으로 이용하던 인격으로 분화된 클라이맥스의 날을 향해 달려간다. 그토록 괴물 같은 시모니니에게도, 역린이 있었던 셈이다. 소설의 앞부분에 등장한 유대인 의사 프로이트의 발언은 퍽 유머러스하다. 프로이트가 ‘모든 것을 성으로 귀결시키는 정신분석학의 경향’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시모니니는 그런 프로이트의 내심을 의심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프로이트는 끔찍하게 충격적인 일을 겪은 사람은 너무 깊은 곳에 있어 최면을 걸어도 도달하지 않는 곳에 기억을 숨긴다고 말한다. 그 기억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대화 혹은 기록이 필요하다. 시모니니의 기록이 바로 그 역할을 대신하는 셈이다. 사건의 정체가 밝혀진 후에도, 시모니니의 엽기행각은 그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더욱 뻔뻔해지기까지 한다. 모든 것을 알면서도 자기 자신에게 태연할 수 있는 것 역시 사이코패스의 특성 중 하나이리라. 에코가 시모니니를 징벌하지 않은 건, 아마도 현실 세계에서 그런 진짜 악당들이 여전히 활개치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간접적으로 시모니니가 창조한 문서의 내용을 통해, 현실 정치를 풍자하고 있다는 점도 아이러니하다. 실제로 그 유명한 괴벨스를 포함해 언론을 대중 장악의 수단으로 이용한 경우는 수없이 많다. 이러한 점 때문에 에코가 이탈리아의 현실을 풍자하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해진다. 베를루스쿠니 전 총리도 언론 장악을 효과적으로 이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황금이 이 세상의 으뜸가는 원력이라면 버금가는 권력은 언론이오.(...)언론을 지배하면 우리는 명예와 미덕과 공정함에 대한 대중의 의견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고, 가족제도에 대한 공격에 나설 수 있을 것이오. 필요한 경우에는 사회의 주요의 주요 현안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축구해야 하고, 프롤레타리아를 통제해야 하고, 사회운동단체에 우리 선동가들을 침투시켜 우리가 원하는 때에 봉기를 일으킬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때로는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몰아 혁명의 대오를 짓게 해야 하오.(371)


결국 프라하의 묘지라는 이 길고 장황한, 복잡하고 매력적인 소설에서 에코가 던지는 메시지는 이런 게 아닐까. 깨어 있으라, 의심하라, 당신이 알고 있는 그 모든 것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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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세 번째로 추천 페이퍼를 써보니, 어떤 책이 선정되는지 감이 잡히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전에 선정된 책들을 주욱 거슬러 올라가며 찾아봤습니다. 역시나 '신간평가단'이라는 말에 걸맞은 소설들이 많이 선정되었더군요. 그리고 몇 가지 선정 기준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습니다.


되도록이면 '최근작'이 선택되더군요. 그러다보니, 생존한 작가의 최신작이 발탁될 확률이 높고요. 즉 최근에 발간되었더라도 재판되었거나 세계문학전집으로 발간된 작품은 좀처럼 선정되지 않더군요. 기획시리즈 일환으로 출간되는 작품도 좀처럼 선정되지 않더군요. 생각해보면, 출판사 입장에서도 이미 잘 알려진 거장의 작품에 굳이 리뷰가 필요할 것 같진 않아요. 영화로 나왔던 유명소설도 마찬가지고요. 말 그대로 '신작', 갓 써서 따끈따끈한 신작 위주로 추천해야 선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이 원칙이 절대적이란 얘기는 아닙니다. 그리고 옛 작품 중에서도 굉장히 낯선, 처음 번역되는 작품도 있을 수 있고요. 그래서 이번 추천작에도 신작 위주이지만, 그런 작품도 끼어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목할 만한 신간'만을 보면 아무래도 제외되는 작품 수가 너무 많더군요. 그래서 리스트를 100개씩 보게 하여 전체 출간된 소설을 보니 훨씬 많은 작품이 레이다망에 걸렸습니다. 라이트노벨이나 만화, 특정장르소설을 제외하면 모두 해당되니까요. 그래서 이번부터는 좀 더 촘촘하게 더듬어 책을 선정해보았습니다.


1. 포르투나

사실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에 언뜻 손이 가지는 않습니다. 정말 훌륭한 작품은, 여러 번 읽고 싶은 작품이라고 개인적으로 여기는데요. 범인과 트릭을 알게 되면 흥미가 반감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물론 추리소설 중에도 재독하고 싶은 훌륭한 책들도 많습니다. 미미 여사의 모밤범이나 루스 랜들의 활자잔혹극이 저에게는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심지어 활자잔혹극은 범죄의 내막을 모두 말해주고 이야기를 시작하는데도 끝까지 긴장감을 유발하는 기막힌 솜씨를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장르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작품을 쓰느냐가 중요한 거겠죠.


포르투나의 작품소개를 읽으면서 여러 장르가 섞여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빈치와 마키아벨리의 대결이라는 점도 흥미진진하지만, 이렇게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은 역사도 함께 탐구한다는 점에서도 흥미진진하지요. 에코의 장미의 이름처럼 중세의 지적인 추리모험극을 기대합니다.


2. 1조 달러

자, 이번에는 '경제 스릴러'입니다. 어느 가난한 피자가게 배달부가 1조 달러를 얻는 소공녀 같은 행운을 얻게 됩니다. 아마도 그는 그 행운으로 어떤 모험을 감행하려는 것 같습니다. 돈의 원천을 탐구하는 그 과정이 색다른 스릴러가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특히 1995년에서 1998년을 배경으로 한 실물경제의 이야기들이 IMF를 겪어낸 우리의 현실과 닿아있을지도 모르고요. 더 최근의 세계공황, 리만브라더스 사태 같은 것과 연관시켰으면 더 흥미로웠을 거란 생각이 들긴 합니다. 아무튼 역사적 사실과 경제적 지식, 소설적 재미까지 더해진다면 금상첨화일 거란 생각이 듭니다. 읽어본 분들의 평이 없어 다소 걱정되기는 하지만요. 




3. 화형법정

이 소설은 재판되었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추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야기 자체가 너무 흥미롭더군요. 존 딕슨 카의 다른 명작 추리소설들을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는 터라 저자에 대한 신뢰도 있고요. 사랑하는 아내가 이미 300년 전에 화형당한 어느 범죄자와 똑같이 생겼다는 사실에서 소설은 출발합니다.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면서 진행하는 이야기가 끝까지 눈을 뗄 수 없었다는 평과 함께 흥미를 돋웁니다. 과연 아내는 누구일까요? 기상천외하다는 결말은 무엇일까요? 






4. 눈의 아이

미미 여사가 또 작품을 발표했군요. 히가시노 게이고처럼 상당히 다작을 하는 터라 저도 그렇게 많은 작품을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모방범과 낙원, 이유, 화차, 괴이, 기이한 이야기 등을 통해 작가가 가진 능수능란한 재능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단편집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작품 수가 적은 걸 보니 아주 짧은 작품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역자후기에서 '미미여사의 현대물 깔대기'라는 제목에서 빵 터졌습니다.


미미 여사는 작품에서 그저 트릭뿐만 아니라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애정하는 작가입니다. 초현실적인 면을 작품 속에서 적절히 활용하는 점도 미미 여사의 장기지요. 이번 단편집이 그래서 기대됩니다.


5. 밀수꾼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에스파냐의 작가더군요. 작품 내용을 보니 바다에서의 모험을 환상적인 사건과 함께 결합한 듯합니다. 바다 위에서의 삶은 너무 위험하기에 오히려 매혹적으로 보입니다. 파이이야기에서 한 소년이 호랑이 한 마리와 외로운 삶을 견뎠다면, 이 소설에서는 황금양털을 찾아나선 원정대 같은 모험을 한다고 합니다. 특히 그리스신화의 재해석을 담고 있다는 부분에 눈길이 갑니다. 에스파냐의 이 낯선 작가가 어떤 낭만적이고 아이러니한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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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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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엔 유독 환상적인 이야기에 마음이 끌린다. 혹시 나도 ‘소공녀’가 아닐까, 하고 꿈꿔보지 않은 아이가 있을까. 어딘가 나의 진짜 부모가 나를 위해 기적 같은 미래를 준비해두었을 것이라는 상상. 그 상상은 마치 장래 희망이 연계도 없이 여러 개로 바뀔 때처럼 매력적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아마도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우리는 현실에 대해 배운다. 우리가 속한 우주는, 그저 세계 속에 이름도 없는 작은 모래성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는 더는 존재 자체만으로 환영받던 아기가 아니다. 웃고 걷고 말하는 것으로는 어른들의 찬사를 받을 수 없다. 우리는 뭔가를, 더 많은 것을 해내야 한다. 결정적인 깨달음은, 소공녀가 되는 건 아주 소수의 사람들일 뿐이라는 거다. 그래서 기적 이야기에 더는 전처럼 열광하지 않게 된다. 불가능하거나 환상적인 기적보다는 차라리 로또 같은 현실적인 기적을 꿈꾸는 ‘속물’이 된다. 항상 위를 동경하면서, 나란히 걷는 사람들을 질시하며, 자기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투명 인간 취급하는 우리, 속물들. 그러나 어쩌면 위를 향한 동경은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소공녀를 꿈꾸듯이, 기적을 꿈꾼 건 자연스러웠으니까. 그러나 어떤 인간도 온전히 극악하거나 극선하지는 않다. 우리 모두는 경계를 산다. 어쩌면 진짜 기적이라는 건, 그 경계에서 일어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사실 좋아하는 스타일의 소설은 아니다. 히가시고 게이고가 이런 소설을 썼다는 사실에도 놀랐다. 그의 소설을 관통하는 사상이 ‘휴머니즘’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사실 ‘미소 시리즈’의 냉소가 더 좋았다. 휴머니즘은 그저 착한 사람들을 그리는 것으로만은 성립하지 않는다. 사실 선함을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많은 사람들은 ‘악한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 선하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 우리가 악하지 않은 건 악한 일을 할 만한 절묘한 상황에 처하지 않았거나, 악을 행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자살을 하는 것보다 남을 죽이는 것에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어떤 영화의 대사도 떠오른다. 우리는 무위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의를 정당화한다. 그건 우리가 이 세상을 바꿀 결정권을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며, 우리 대신 누군가가 공적 의무를 대신해도 이 사회가 충분히 유지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본적으로 믿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충분히 위로와 공감이 된다고 해도, 누군가는 다른 이로부터 구원을 받는다고 해도, 여전히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고 느낀다. 물론 이건 적선의 딜레마와도 같다. 걸인에게 당장 몇 푼을 적선해서 그가 술을 사먹는 꼴을 보더라도, 내가 그를 도울 사회적 위치에 오를 가능성이 없다면, 차라리 그게 더 인간적인 게 아닐까. 답은 여러 개 있을 수 있다. 물론 누군가에게 아주 작은 도움이라도 주었다면, 그 의미를 깎아내릴 수는 없다. 대가를 바라지 않은 자발적인 도움, 심지어 그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도 아닌 선행을 비아냥거리지는 못한다. 누군가가 내민 손을 잡은 경험은 우리에게도 한번쯤은 있으니. 어쩌면 그것이 소공녀의 기적이 아니라 우리 삶의 진짜 기적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 소설은 그런 ‘작은 도움’이 만들어내는 기적을 퍼즐처럼 끼워맞추고 있다. 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너무 가깝지 않나 싶다가도, 소도시의 작은 잡화점에서의 일이니 크게 개연성이 떨어지지는 않아 보인다. 나미야 잡화점은 이미 33년 전에 문을 닫은 곳이다. 주인인 나미야 유지가 별세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상심에 젖어 있다가, 우연히 장난스런 질문을 받는 상담을 하면서 새로운 삶에 눈뜬다. 처음에는 아이들의 농담 같은 질문에 재치 있는 답을 써서 가게의 벽에 붙이는 것에서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어떤 질문도 무시하지 않고, 답을 주었다.

이런 장난 편지를 보낸 사람들도 근본적으로 똑같아. 마음 한구석에 구멍이 휑하니 뚫렸고, 거기서 중요한 뭔가가 쏟아져 나온 거야. 그런 편지를 보낸 사람들도 반드시 답장을 받으러 찾아와. 인간의 마음 속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어떤 것이든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돼.(159)

그렇게 인간은 모두 외롭고, 답을 모르고, 누군가가 자신을 이끌어주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다. 할아버지는, 사람들이 사실은 모두 ‘정답’을 알고 있으며, 자기가 정한 답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마음을 의탁하는 것 자체가 그들의 마음을 단단하게 해주는 비료인 것이다. 그래서 ‘마음의 소리’들은 늘 절박하고, 내밀하고, 거칠다. 익명 게시판 같은 데를 구경해보거나 글을 남겨본 사람은 누구나 알 것이다. 우리의 내면은 아주 약한 살갗으로 되어 외부의 약한 자극에도 금방 피가 맺히고 멍이 든다는 것을. 우리는 그걸 숨기기 위해 가면 위에 또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는 것을. 
 
‘폴 레논’이란 피상담자에게 내밀한 상담을 받은 후부터, 나미야 할아버지는 편지함과 우유상자를 이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상담자 역할을 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그러나 잡화점의 적자는 쌓이고, 어느날 문득 할아버지는 의문에 휩싸인다. 편지가 끊긴 피상담자들의 현실이 궁금했던 것이다. 내가 과연 제대로 상담을 해준 걸까? 내가 한 상담 때문에 오히려 누군가는 피해를 보지 않았을까? 한편으로 할아버지는 암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다. 여기서 기적적인 일이 벌어진다. 나미야 잡화점의 시공간이 뒤틀리면서, ‘미래에서 편지를 받는 일’이다. 여기서부터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한 편의 판타지가 된다. 할아버지는 기괴한 유언을 남긴다. 바로 33년 뒤에, 자신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해달라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런 영감을 어디에서 얻은 것일까? 미래의 어느날, 아들도 아니고 손자가 인터넷 블로그에 올린 글은 다음과 같았다.

“오전 0시부터 새벽까지 나미야 잡화점의 상담 창구가 부활합니다. 예전에 나미야 잡화점에서 상담 편지를 받으셨던 분들에게 부탁드립니다. 그 편지는 당신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아들이 그 약속을 확실히 지키겠다고 다짐한 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의 편지함에는, 미래로부터 도달한 편지들이 수없이 도착해 있었다. 장난스러운 질문에 대한 답부터 진지한 편지에 대한 답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공부하지 않고도 시험에 백점 맞는 법을 물은 아이에게 '당신에 대한 시험'을 치라는 조언을 했다. 당신에 관한 문제니까 당신이 쓴 답이 정답이니까. 아이는 자라서 선생이 되어, 아이들과 친해지는 데 그 조언을 활용했다. 또한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낸 피상담자의 딸이 뭉클한 사연을 전해주기도 했다. 나를 버린 세상이 사실은 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걸 확인하고, 삶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의 이야기였다. 할아버지의 상담은, 옳았던 걸까. 상담은 사실 누구에게나 옳거나 그르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건 결국 하나의 선택뿐이기 때문이다. 두 개의 인생을 살아보지 않았기에, 두 가지를 동시에 선택할 수 없기에,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힘껏 책임을 질 뿐이다. 따라서 할아버지는 무죄다. ‘폴 레논’의 먼 미래의 답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할아버지는 운명과 우연의 힘을 좌우할 수 없다. 그저 그들의 무거운 삶을 함께, 잠시라도 들어줬을 뿐이다. 마치 세상을 짊어진 아틀라스 같은 피상담자 각자의 삶을.

할아버지는 일 년 동안 ‘죽은 듯한 잠’에 빠져든다. 그 일 년 동안 나미아 잡화점은 일종의 타임슬립이 가능한 초공간이 된다. 33년 후에, 그 집에 도착한 세 도둑 쇼타, 아쓰야, 고헤이가 할아버지가 미처 답을 하지 못한 질문들에 대해 답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시간 여행에 대해 논리적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아예 이야기 자체가 성립하지 못한다. 할아버지는 누군가, 어딘가에서 자기가 쓰지 못하는 답장을 써주기를 바랐던 것일까. 할아버지가 생명을 다한 9월 13일이 바로 인터넷에 글을 올린 날이며, 마지막 상담을 해준 날인 것이다. 

쇼타, 고헤이, 아쓰야는 환광원이란 고아원 출신으로 좀도둑이다. 그들은 빈집을 털다 실패하고 몸을 숨기기 위해 나미야 잡화점을 찾았다. 거기에서 기묘한 일이 일어난다. 누군가 편지를 편지함에 넣었고, 그들이 토론 끝에 답장을 써서 우유상자에 넣자, 다시 답장이 신비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그들은 공간의 왜곡을 깨달았다. 그런데 좀도둑이며, 루저이며, 삶에 의미를 두지 못한 그들은 왜 상담을 해주는가. 가장 냉소적인 아쓰야는, 필요 이상으로 타인과 엮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경찰에게 걸릴 만한 짓을 왜 하느냐는 것이다. 이유는 그랬다. 

“누가 우리한테 그런 상담을 하겠어. 아마 평생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남을 위로하는 건 특별한 일이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남의 상담을 하겠다는 건 우스운 노릇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편지의 답장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아마도 무언가 가치있는 일을 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들은 나미야 할아버지와 같은 연륜이나 지혜, 삶의 깊이도 없다. 그들의 상담은 거칠고, 직선적이며, 비아냥거리며, 냉정하다. 하지만 그들은 33년 전의 인물들에게 조언을 하는 것이다. 어쩌면 할아버지보다 더 유리한 위치인지도 모른다. 달 토끼, 생선 가게 뮤지션, 길 잃은 강아지와 상담을 나누면서 그들은 미래의 지식을 통해 그들에게 용기를 준다. 특히 달 토끼의 이야기가 인상깊었다. 달토끼는 상담을 하면서도 진짜 자신의 마음은 드러내지 않았다. 즉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숨겼던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강하게 반응하는 삼인방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발견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 뒤에는, 정말 해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모든 환자처럼, 피상담자는 상담자를 속인다. 때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조차 진실하지 않다. 그것을 좀도둑 삼인방의 ‘거친 조언’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그 결과 달토끼는 자신의 결정에 만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소설은, 나미야 할아버지의 피상담자들과 삼인방의 피상담자들의 이야기를 병렬식으로 늘어놓는다. 그 이야기들은 ‘환광원’과 연결된다. 추리소설가인 작가는 휴머니즘을 이렇게 직조한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은 환광원 출신이다. 그러나 마지막 상담자인 ‘길 잃은 강아지’에 이르러서는, 이야기가 지나치게 ‘소공녀’스럽지 않나 싶었다. 미래의 지식을 이용해서 한 가난한 여자에게 돈을 벌게 해주는 이야기는, 손쉬운 발상이었다. 물론 부자가 된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될지 모른다. 그래도 그 이야기는 너무 작위적이었다. 타임슬립의 장치를 좀 더 교묘한 일과 연관시킬 수 없었을까. 사변소설은 아니지만, 미래와 과거 사이의 틈이라는 소재를 너무 쉽게 다룬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소원이 있다면, 히가시노 게이고가 좀 과작을 해서(베르나르 베르베르에게도 간절히 바라건대) 정말 공들인 추리소설을 내주었으면 좋겠다.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것이야말로, 모든 예술가가 바라는 ‘불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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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와 게의 전쟁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생은 너무 짧다. 매 순간 죽음으로 향해 가는 인간에게 시간은 영원한 화수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어떤 것으로 채우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삶은 일종의 예술 작품과 비슷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동, 생활, 잠을 위한 시간은 배제해야 한다. 그건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하니까. 그 다음에 남는 시간은 마치 빈 캔버스나 종이 같다. 창조, 혹은 향유로 채워질 공백. 세상에 즐길 거리는 너무 많다. 예술이 대중의 손에 넘어왔다는 건 곧 자본의 품에 안겼다는 뜻이다. 우리는 출신 성분과 상관없이, 적당한 대가를 치르면 어떤 예술이든 향유할 수 있다. 심지어 적당한 수신료만 지불하면, 무한대의 오락을 제공받을 수 있다. 인터넷에 접속하거나 TV를 켜는 것만으로도 공짜 오락거리는 넘쳐난다. 그러나 포탈사이트가 제공하고 TV 채널이 제공하는 오락은 수동적인 것이다. 우리는 남의 편집된 취향을, 그것도 일정한 분류도 없이 마구잡이로 취합한 취향을 접하는 셈이다. 너무 많은 정보는 너무 적은 정보와 마찬가지로 효용이 별로 없다. 일정한 방향이 없는 관람과 서핑은 무취향의 인간을 양산한다. 그러나 ‘선택하고 집중하는’ 예술 작품을 향유하는 건 적극적인 행동이다. 독서 역시 매우 능동적인 취미 생활이다.

그러나 출판사의 상찬은 갈수록 화려해지고, 책의 숫자는 늘어난다. 책도 상품이므로 끊임없이 생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정보가 많은 시대일수록 선별작업이 필요하다. 그걸 대신해주는 사람들이 일련의 자발적인 향유자들이다. 그들이 만든 커뮤니티에 있는 글들은 관심사를 다루므로 정교하고 세심한 경우가 많다.(엔하위키 미러가 그런 곳이라고 본다) 인터넷 서점도 일정 수준의 리뷰를 통해 정보를 선별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것에만 너무 의지해서도 안 된다. 결국, 타인의 취향이기 때문이다. 또한 실망한 작품에 대해 ‘굳이’ 리뷰를 남기려는 독자의 수는 찬양하는 독자보다 훨씬 적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리뷰가 개수도 결코 믿을 것이 못 된다. 유명세와 취향이 일치하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결국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직접 그 책을 찾아보는 발품을 파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시간을 절약하는 길이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정보나 애독자의 리뷰만 보고 구매한 뒤 한탄한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아니, 오히려 심하게 실망한 경우에는 책의 처분에 망설임이 없다. 문제는 이도 저도 아닌 경우다. 일정 수준은 구가하지만 내 취향이라고는 딱 말할 수 없는 작품. 작가의 노력은 인정하지만, 상찬의 수준을 이해할 수 없는 작품. 더구나 그 작품을 출판사에서 제공받아 리뷰를 해야 할 때의 난감함. 취향을 심하게 타는 편협한 독서가인 나에게는, 신간평가단이라는 일이 쉬운 게 아니었던 게다. 작가의 최신작이라고 해서 막연히 그 작가의 최고의 작품이라고 간주할 수도 없는 일이다. 누구나 커리어 하이가 있는 법이니까. 내가 보기엔 미미 여사의 ‘모방범’이 그랬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이 그랬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 이스마일 카다레의 ‘죽은 군대의 장군’,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는 오히려 데뷔작이 최고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물론 전적으로 나의 취향이다.

요시다 슈이치의 ‘원숭이와 게의 전쟁’이 내겐 난감한 소설이다. 일단 출판사 소개를 읽고 내가 추천한 책이기도 해서 더욱 그랬다. 출판사에서는 ‘정의가 무시당하는 이 뒤틀린 세상을 향한 보통 사람들의 통쾌한 복수극이 시작된다’는 문장으로 소설을 소개했다. 교활한 원숭이를 게들이 골탕먹이는 설화에서 따왔다는 제목도 충분히 그러한 소설의 내용을 뒷받침해주는 제목이었다. 그러나 복수극에 제대로 완성되려면, 복수의 내용과 주체, 대상이 확실해야 하는 법이다. 그 전제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통쾌한 복수는 할 수가 없는 셈이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원숭이’와 ‘게’의 위치부터가 모호하다. 남을 괴롭히는 자가 원숭이인가? 아니면 사회적 강자가 원숭이인가? 사회적 약자가 게인가? 그렇다면 남을 괴롭히는 사회적 약자나, 선량한 강자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먼저 원숭이와 게를 대변하는 사람의 설정 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게 이 소설의 치명적 약점이다. 

먼저 미나토의 가족에게 사기를 친 에노모토 요스케가 원숭이인가? 그렇다면 그에 대한 복수는, 미나토가 이룬 셈이 된다. 그를 차로 쳐서 죽였지만 살인이 아니라 사고로 처리되었고, 처벌도 형이 대신 받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일정 수준의 사회적 인망과 부를 얻었고, 소노 요코라는 유능한 비서까지 데리고 있다. 그가 약자인 것인가? 이런 식으로 시작부터 어긋난다. ‘정리된 플롯도 없이 '무모하게' 시작되었지만,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작가 특유의 섬세한 디테일을 뿜어내는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실은 정리된 플롯이 없기에 한 초점으로 모이지 않고 순발력으로만 이야기가 이끌리는 셈이다. 그렇다면 국회의원 도쿠다가 원숭이인가? 그가 지방에서 계속 당선되며 아랫사람에게 뇌물수술죄를 뒤집어 씌운 게 잘못이라면, 미나토의 결정도 비슷한 도덕적 혐의를 지게 된다. 미나토의 사고는 엄연한 ‘살인’이다. 살인에는 꼭 엄벌이 따라야 한다는 현실 세계의 도덕률을 적용하려는 게 아니다. 등장인물에게 감정이입하려면, 그가 꼭 그래야 할 결정적인 이유와 그가 견뎌야 할 업이 있는 법이다. 그런데 미나토는 중간에 준페이에게 협박당하고 유코에게 끌려다니는 것 이외에는 어떤 인간적인 결단이나 고뇌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의 정의는, 독자에게 공감을 얻지 못하는 우발적인 범죄일 뿐이다. 

이런 식이라면 기본적인 원숭이 VS 게 구도조차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중간에 요스케의 차에 ‘일본 정계를 흔들게 할 정도의 비밀문서’ 같은 게 있었다고 언급되어 있기에, 당연히 그 문서와 관련해서 진짜 ‘원숭이’가 등장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문서는 그냥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고 만다. 이 문서에 대해 물고 늘어지는 것이 진짜 작가의 역량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제대로 구성해놓지 않고, 그걸 준페이의 당선으로 적당히 타협하려고 든다니, 플롯이 엉성해질 수밖에 없다. 

등장인물 중에서 그나마 개성이 느껴지는 건 소노 요코와 ‘란’의 마담인 미키다. 그들은 남성들을 압도하며 자신들의 역할에 충실한다. 물론 소노 요코의 정의 역시 그저 ‘자신의 입맛대로 설정된 정의’다. 그녀는 자신의 고용인인 미나토의 범죄에 대해 별다른 자각이 없다. 그저 그건 입막음해야 할 일일 뿐이다. 오히려 그녀에게는 언젠가 유명 정치인을 키워낸다는 점쟁이의 예언만이 중요하다. 그래서 마침 그 기회가 다가왔을 때, 그걸 붙잡는다. 중요한 건 기회가 왔기 때문이지, 그녀가 매력적인 인물을 만난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준페이는 술집에서 일하는 바텐더이고, 사는 걸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인물로 보인다. 그는 미나토의 사고를 목격하고 진범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호스티스 도모키와 함께 미나토를 협박하자고 제안한다. 도모키 역시 루저로서, 인생에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아내 미쓰키가 무작정 도쿄로 상경했을 때도 그저 부담스러워할 뿐이다. 미쓰키를 도와주고 아이를 돌봐준 건 란의 마담인 미키지, 아버지인 그가 아니다. 물론 ‘루저’ 캐릭터가 꼭 소설에서 무얼 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매력적인 어떤 면은 보여줘야 한다. 이들은 상황이 만들어놓은 대로 그저 따라다니는 허수아비다. 요코가 시키는 대로 지역 공천에 나가는 준페이, 우연히 유명해져서 졸지에 아내의 매니저 역할을 한 도모키에게서 열정을 찾기 어려웠다. 결국 소설의 어떤 인물에게도 별로 공감하지 못했기에, 준페이가 당선되는 순간의 카타르시스도 느끼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보통 사람들의 통쾌한 복수극’이라는 카피에 걸맞지 않은, 그저 우연이 빚어낸 성공으로 보였을 따름이다.

다음 신간평가단 도서를 추천할 때는 좀 더 세심하게 책을 살펴야겠다. 엉성한 플롯이나 순간적인 착상보다, 보다 꿰맞춰진 제대로 된 이야기를 읽고 싶다. 그래서 이 책의 출판사에게는 미안하지만, 요시다 슈이치의 새 책에 기대를 한 미지의 독자에게, 솔직하게 고백할 수밖에 없다. 원래 당신이 그의 애독자라면 모를까, 연재 소설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안타까운 소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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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삼매경에 빠져 있다보면 종종 현실 세계와의 괴리를 느낍니다. 해야 할 일을 문득 잊는 것도 그에 포함되지요. 신간리뷰단 추천 신간을 쓰는 걸 잊었다는 걸 오늘에서야 알았습니다. 무엇보다 꼭 읽고 싶었던 책이 포함되어 있는데도 말이죠. 바로 움베르트 에코의 프라하의 묘지!


1. 프라하의 묘지

이 책이야말로 이번에 꼭 선정되어야 할 작품이라고 감히 주장합니다. 에코의 저력이야 이미 널리 알려져 있지만, 특히 이탈리아의 현실이 우리나라와 퍽 닮아 있다는 점이 이 소설의 흥미를 더 끌어당깁니다. 기억을 잃어버린 남자, 거짓과 진실, 권력의 속임수 같은 주제들이 에코의 손에 의해 어떻게 탄생했을지 너무 궁금합니다. 무엇보다 지난 번 선택한 책에 대해 스스로 좋은 평점을 주지 못했기에 더욱 '검증된' 작가의 책으로 리뷰를 쓰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도 간절합니다.



2. 푸른 묘점


아아, 에코가 떨어진다면 그 다음에라도 읽고 싶은 책, 푸른 묘점입니다. 인간의 심리를 세밀하게 파고들며 동시에 추리적 기법을 쓰는 작가들의 냉철함을 존경합니다. 특히 이 소설에서는 작가로서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이 어떠한 부조리들을 낳는지를 예리한 시선으로 꿰뚫고 있다고 봅니다.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은 우리 모두의 공통적인 특징이니까요. 그런 면에서 푸른 묘점은 탐구하고 싶은 주제를 담은 소설입니다.







3. 끝까지 연기하라


셰익스피어가 말한 대로, 인생은 무대이고 인간은 연극배우입니다. 그로테스크한 문학작품에서는 인간은 운명이란 실이 조정하는 대로 움직이는 자동인형, 마리오네트입니다. 우연이 이끌어가는 엄청난 힘은 과연 운명일까요? 그리고 여러 사람이 함께 엮인 우연의 실은 꼬이고 또 꼬여서 결국 엉킨 채로 영원히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가 되는 게 아닐까요? 이 소설이 다층구조라는 것도 바로 그러한 점에서 흥미를 일으킵니다. 







4. 저주받은 책들의 상인


사실 요즘 밤을 밝히게 하는 소설들이 환상, 호러 소설입니다. 영국 고딕풍의 소설들은 읽는 재미가 여간 아닙니다. 어쩌면 이야기의 본질,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21세기가 되었어도 여전히 우리에게 세상은 낯설고, 괴기합니다. 우리가 하늘과 땅을 숭배하던 원시부족에서 얼마나 많이 변했을까요? 우리는 여전히 미신을 믿고, 자연을 두려워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의 줄거리는 환상소설에 빠져 있는 지금의 저에게 큰 호기심을 주었습니다. 저주받은 책은 어쩐지 보르헤스를 떠올리게도 하고요. 그 저주받은 책은 모래의 책 같은 책일까요? 아니면 또다른 심연을 보여줄까요? 기대되는 신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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