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트 진화론 - 인류 역사에서 찾아낸 가장 스마트한 다이어트
남세희 지음 / 민음인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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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몸은 우리 시대의 가장 핫한 이슈임이 틀림없다. 성형에서 다이어트, 건강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설과 이론들이 난립하고 있으니 말이다. 졸업 선물로 성형 수술을 해달라고 조르는 학생, 면접을 잘 보기 위해 얼굴을 디자인하는 취업재수생, 온국민의 입방아에 올라도 살만 빠지면 그만인 다이어트 프로그램 출현자들, 아름다워지기만 하면 동굴에라도 들어갈 사람들이 즐비하다. 한편으로 나이가 들면 또다른 걱정거리가 생겨난다. 피로와 스트레스, 음주와 비만 등으로 숱한 질병에 시달린다. 이제 삼십 대에 노화의 산물인 병을 앓고 있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그만큼 우리 시대는 급격하게 아름다워졌다가(?) 다시 신속하게 늙고 있다. 여기에 드는 비용과 노력을 생각하면, 아찔할 지경이다. 
  
건강 카테고리에 있는 책들을 살펴보면, 그야말로 중구난방이다. 한쪽에서는 오래 살기 위한 양생법을 설파하고, 한쪽에서는 뼈다리가 되는 법을 가르친다. 악서와 양서할 것 없이, 모두 내가 옳다고 외친다. 내 말만 들으면, 당신이 원하는 몸을 가질 수 있다고 설파한다. 그나마 왜 옳은지를 차근차근 설명해주면 양반이다. 그저 무조건 따라야 한다. 사람들은 물건을 살 때는 요모조모 다 따져보면서도, 권위자의 의견은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권위자의 존재 자체가 증거다. 박사님의 말씀이니 당연히 옳겠지. 선진국의 이론인데, 어련하겠어. 연예인 몸매를 만드는 비법이 여기 있구나. 트레이너처럼 나도 근육맨으로 다시 태어나겠다! 한편 어떤 이들은 인생스토리가 있는 사람들의 말에 솔깃한다. 몸에서 사람 하나를 덜어낸 사람의 말이라면 무조건 신빙성 있다고 믿는다. 나도 어느 유명 다이어트 카페의 비포 & 애프터 사진을 보고, 운영자가 쓴 책을 산 경험도 있었다.(그리고 역시 내가 아는 상식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끝났다) 그러나 우리는 지극히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몸은 개별적이라는 것을. 우리의 생김새처럼 타고난 몸과 성정, 건강 상태, 심지어 생활 환경까지 다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그런 가변적인 요소들을 싹 지우고, 성공 스토리에만 목맨다. 결과만 생각한다. 마치 수학 공식처럼, 적절한 X값을 넣으면 그만이라고 믿는다. 차근차근 따져보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전도사들의 말씀을 믿는 것이, 내 몸에 대해 차근차근 탐구하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다. 사실 그것이 내 몸을 살리는 길이 아니라 서서히 죽이는 길인지도 모르는데.

다이어트에 목매달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는 대한민국 여자는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다이어트 책들을 몇 권 읽고, 책에서 답을 구하는 것은 포기했다. 몇 가지 동작들과 상식은 이미 아는 것들이었다. 나는 이미 이십대 초반에 웬만한 ‘다이어트 상식’을 섭렵했다. 운동을 하고 식생활을 조정해야 한다. 가급적 많이 움직여야 한다. 유산소운동을 하지 않으면 살이 빠지지 않는다. 근육 운동을 병행해서 살이 안 찌는 체질로 바꿔어야 한다. 칼로리를 따져가며 먹어야 한다.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 다이어트는 평생 하는 거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실천을 못한다는 데 있다. 새로운 다이어트법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따라해보지만, 한 달도 안 되어서 포기했다. 다이어트 일기는 쓰다가 그만두기 일쑤였고, 매일 운동을 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다가 아예 포기한다. 운동을 하지 않기 위해 나는 늘 창의적으로 변명을 지어냈다. 거기다 충실한 다이어터의 삶은 너무나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칼로리를 찾아보며 경악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나중에는 칼로리 계산을 하지 않게 된다. 운동은 재미가 없어서 못한다. 실제로 유산소 운동을 하루에 두 시간씩 해서 살을 뺀 경험도 있지만,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지속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포자기하다가, 어느덧 다이어트도, 건강 챙기기에도 다 실패했다는 사실을 쓰라리게 깨달았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걸까?

‘다이어트 진화론’은 매뉴얼만 가득한 일반적인 다이어트 책과는 달랐다. 성공 사례를 잡다하게 쏟아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실패 사례’에 주목했다. 의지력이 있어도 실패하고, 온갖 정보를 자세하게 알아도 실패하고, 환경 때문에 실패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는 과거로 돌아가보자고 한다. 저자가 되돌아보자고 하는 건, 신석기도 아니고 구석기다! 우리의 환경은 계속 변화했지만, 유전자 조건은 변화하지 않았다고 추정하기 때문이다. 인류는 구석기인의 몸으로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구석기인보다 오래 살지만, 더 약하고 건강하지 못하다. 구석기인들의 목표가 ‘생존’이었다면, 우리의 목표는 ‘건강과 아름다움’인 셈이다. 우리가 몸을 가지고 하는 실험들은, 과잉이 지배하는 시대가 낳은 또 하나의 촌극이다. 그래서 저자는 다이어트에 관한 일반적인 상식을 무자비하게 깨트린다.
 
1. 적게 먹고 많이 움직여라?
다이어트에 관한 잠언 중 으뜸인 이 말에 저자는 의문을 품는다. 먼저 적게 먹는다는 건, 생존기계였던 우리 몸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방식이다. 우리 몸은 에너지를 저장하는 습성이 있다. 우리가 살이 찌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의도적으로 칼로리를 줄인다? 우리 몸은 비상 사태에 들어간다. 되도록 많은 에너지를 몸이 흡수하도록 긴축 과정에 들어가는 거다. 기초대사량이 줄어드는 것이 단적인 증거다. 그래서 적은 에너지로도 활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적게 먹기만 하는 것은, 결국 우리 몸을 유달리 살찌는 몸으로 만들 뿐이다. 그리고 활동량을 늘리는 것. 저자는 걷거나 그저 움직이는 것만으로는 변화가 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활동과 노동과 다른, ‘운동’만이 우리 몸을 강하게 만든다! 그러니 영양소가 풍부한 음식을 먹고, 짧고 굵게 운동하는 것이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말이다. 

2. 가급적 저칼로리인 음식을 먹어라?
칼로리 챕터를 읽으면서 모두들 놀랐을 것이다. 공식처럼 모두가 외우고 다니는 칼로리가 정말 아무 의미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칼로리는 방구석에서 만들어낸, 실험 기계에서 나온 수치일 뿐이다! 음식 칼로리는 물론 운동 칼로리도 마찬가지다. 이런 공식을 당연하게 믿고 살아왔던 시간이 의문스럽다. 모두가 자연스럽게, 칼로리가 몇이래, 하며 수근거렸던 그 많은 음식들에게 미안하다. 너희들의 칼로리가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바로 영양성분비였던 것. 저자는 계산하지 말고 먹으라고 말한다. 스트레스받지 말고, ‘배가 부를 때까지’ 먹으라고. 이게 무슨 하늘이 두쪽날 말인가! 폭식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적이 아니었던가. 

저자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다. 과연 순수 단백질과 야채, 과일 등을 쉬지 않고 먹을 수 있느냐고. 누구나 평소에는 밥을 적게 먹더라도, 중국집에서 탕수육과 자장면 등을 폭식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무한정 먹을 수 있는 건 사실상 ‘녹말’ 뿐이다. 같은 탄수화물이더라도, 야채와 과일은 절대로 그만큼 먹을 수가 없다. 일단 배가 부르다. 디저트로 과일을 먹는 건, 디저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기는 또 어떤가. 나도 스스로 고기를 좋아하고 잘 먹는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많이 먹지 못했다. 돼지갈비와 밥과 된장찌개를 섞었으면 모를까. 과연 내가 많이 먹을 수 있었던 건 고기였을까, 아니면 밥이었을까? 우리의 주적은, 기름기가 자글거리는 고기가 아니라 무한정 뱃속으로 들어가는 밥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건, 고기반찬이 아니라 밥이었다. 

3. 유산소 운동을 하고, 덤벨을 많이 들어 근육을 키워라?
저자가 유산소 운동을 하지 말라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유산소 운동이 살빼는 데 최고라고 말하는 숱한 전문가들에게도 일침을 가한다. 유산소 운동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배경과 퍼지게 된 계기까지 설명하면서 말이다. 유산소 운동은, 산소를 필요로 하는 운동이라기보다 ‘저강도 운동’이라 부르는 편이 옳다. 적게, 오랫동안 에너지를 태우는 운동이니까 말이다. 유산소 운동을 꾸준히 하면, 당연히 효과가 있다. 그러나 관절 손상이나 노화, 비효율성이라는 측면을 생각하면 말이 달라진다. 걷는 것보다 뛰는 것이, 그냥 뛰는 것보다 전력질주하는 것이 낫다. 그것이 우리 몸을 덜 다치게 하면서 운동하는 방법이다. 나 역시 매일 런닝머신을 두 시간 넘게 하면서, 무릎이나 발목이 아파도 꿋꿋이 참았던 기억이 난다. 참, 독했던 시절의 얘기다. 

저자는 특히 런닝머신을 절대 이용하지 말라고 말한다. 움직임을 모사할 뿐인 이 기계들은, 말하자면 편하게 운동하는 척하면서 운동을 제대로 못하게 만드는 주범이다. 실제로 달릴 때 사용하는 근육을 다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스텝퍼나 실내사이클도 실제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머니에게 사다드린 사이클도 지금은 그저 빨래걸이일 뿐이다. 안 그래도 나에게도 사이클이 있다. TV를 보면서 천천히 운동하려고, 안 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고 산 것이다. 빨래걸이로도 쓰지 못해 지금은 그저 베란다에 처박혀 있다. 1KG짜리 분홍색 아령은, 그저 재활훈련에나 쓰이는 물건이다. 아무리 많은 횟수로 들어봤자, 근육은 안 생긴다. 자신이 가진 힘의 최대치에 아슬아슬하게 닿는 운동만이, 근육을 키워준다. 고통 없이는 근육이 크지 않는다. 

그러나 안타까운 점은, 저자가 말하는 기능성 운동을 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헬스클럽’이라고 하는 곳은, 온갖 운동기계로 고독하게 운동해야 하는 곳이다. 3개월 일시불로 끊어놓고 1개월도 채 못가는 그 곳 말이다. 못가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지루함이다. 헬스클럽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고독과 지겨움이 밀려든다. 저 기계를 언제 다 돌지? 상체운동, 하체운동을 나눠서 기계를 타도 마찬가지다. 사실 나는 기계 없이 하는 스트레칭도 잘 안 하는 사람이다. 돈이 아까워서 가게 되리라는 생각도 말짱 헛것이었다. 내게는, 재미있는 운동이 필요하다. 나의 한계를 실험하고, 더 높은 고지로 올라갈 수 있는 운동. 바로 남자들이 하는 운동, 케틀벨과 바벨을 이용한 기능성 운동이다. 다행히 우리 집 근처에 이런 운동을 할 수 있는 곳이 있지만, 많지 않다는 것이 안타깝다. 더 많은 사람들이 헬스클럽을 찾지 않게 된다면, 조금씩 이런 곳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 

그 외에도, 저자는 농경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일 수도 있다는 점, 이데올로기로서가 아니라 건강식으로서의 채식의 문제점을 경고한다는 점 등에서도 상식을 깨는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어떤 다이어트책도, 문화인류학이나 사회학으로 다이어트에 접근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이어트에 대해 부정적인 사회학 책을 쓰기가 더 쉽다. 다이어트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올바른 다이어트가 필요하다고 말해주는 인문학책이 필요했다. 이 책은 나의 그런 목마름을 채워주었다.

식품산업이 거대해지면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음식의 종류가 점점 제한되고 있다. 목초지에서 자란 소보다 마블링이 예쁜 소가 더 비싼 값으로 팔려나가는 현실 또한 우리의 몸에 기름이 끼게 방치하고 있다. 우리가 더욱 현명해지지 않으면, 거대한 식품 산업의 먹잇감이 되기 쉽다. 좋은 음식이란, 가급적 덜 가공한 음식이다. 저자는 그것을 ‘깨끗한 섭생’이라고 말한다. 갓 따온 채소가 가장 맛있다는 것, 우리 땅에서 난 음식이 몸에 잘 맞는다는 이야기는 모두 알고 있다. 다만 우리의 삶에서 거리가 멀 뿐이다. 우리에겐 마트가 더 친숙하지, 지역농산물을 공급받는 다른 방법은 알지 못한다. 식재료에 대해 꼼꼼하게 따지는 소비자가 더 많아질수록 건강도 더 나아질 것이다. ‘적게 먹는 것’에만 신경쓰지 말고,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를 신경써야 한다. 이미 우리는 오래 살게 되었으니,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이들에게, ‘다이어트 진화론’은 스스로 깨우치라고 조언한다. 

끝으로 한 마디 덧붙인다. 
나에게 이렇게 대한 다이어트 책은 네가 처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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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 진화론 - 인류 역사에서 찾아낸 가장 스마트한 다이어트
남세희 지음 / 민음인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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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기대하는 책입니다. : ) 부디 빠른 시일내로 도착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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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베르트 무질, 특성 없는 남자1, 2

그러니까 독일문학 교양 수업이었을 게다. 로베르트 무질의 '세 여인'을 읽은 것은. 수업 시간에 읽었던 책들은 충실한 리뷰와 뚜렷한 각인으로 남는다. 환상적이면서 독특한 작가의 세계에 빠져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 소설은 일단 목차만으로도 관심이 간다. 현재형이나 명사, 완결되지 않은 문장으로 끝나는 목차들은 마치 순간적인 영감에 의해 착안된 미술 작품을 연상케한다. 물론 작가는 치밀한 의도 하에 이 소설을 집필했을 테지만. 사유소설이라는 일종의 장르를 개척한 작품이라는 말에도 매우 흥미가 동한다.


2. 이기호, 김 박사는 누구인가?

재기발랄함이 이 작가의 큰 미덕이다. 더불어 풍성한 입맛을 경험할 수 있다. 이 소설집도 그러한 전작들의 위상에 힘입어 충분히 기대할 만하다.


3. 루키아노스의 진실한 이야기

문학의 원형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신화, 설화, 민담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누군가 이야기를 만들어내면 또 누군가가 변형하고, 들려주면서 끊임없이 내려왔으리라. 그래서 옛이야기꾼들에게 유독 관심이 간다. 태초의 이야기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왕과 왕국이 있고, 알려지지 않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충만했던 그 시대의 이야기꾼들은, 참으로 행복했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자꾸 신작보다 고전에 눈이 가는 게다. 옛이야기꾼의 환상적인 이야기들은 어떨까 매우 궁금해졌다.


4.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무척 읽고 싶은 책이다. 현대작가론 시간에 '배수아론'을 발표했던 적이 있다. 배수아의 초기작들은 확실히 트렌디하고 소녀적이었다. 그녀는 당시 어떤 작가와도 다르게 키치적이었다. 분석하려드는 이들을 오히려 헷갈리게 만들고 깔깔거리는 마성의(?) 작가와도 같은 매력이 있었다. 그런데 배수아는 독일 유학을 계기로 완전히 작풍을 바꾼다. 자기 세계를 허물고 새로 짓는 작가의 모습은 놀랍고도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그 세계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문장은 시처럼 촘촘해지고, 사유는 깊어졌다. 예전처럼 술술 읽히지 않지만, 오히려 더 읽는 맛이 살아난다. 예전에 '소설은 한 번 쓰고 절대 퇴고하지 않는다'라고 그녀가 말한 적이 있다. 과연 지금도 그럴까? 만약 그렇다면 한 문장 한 문장은 각고의 노력 끝에 나오는 것이리라. 배수아의 소설은, 쿤데라처럼 사유와 서사를 조합한 사유소설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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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아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눈의 아이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욱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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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모방범’에서 시작했다. 그 책은 여전히 내게 최초이며 최고의 작품이다. ‘이유’, ‘낙원’, ‘화차’ 등의 장편과 단편소설집을 몇 권 읽었는데, ‘모방범’만은 못하다는 기분이었다. 작가로서는 자기 소설들에 모두 애증이 있겠지만, 독자로서는 그저 더 완성도 높은 작품을 생산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름 하나만으로 책을 고르는 작가가 될 뻔했으나, 다작과 들쑥날쑥한 완성도가 전작주의를 가로막았다. 오랜만의 현대물이라고 해서 기대했으나, 예상에는 다소 못 미쳐서 아쉬웠다.

미야베 미유키의 현대물은 딱히 추리물이 아니어도 대개 범죄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그 범죄는 인간의 심리와 사회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고립된 현대인의 기형적인 심리를 들여다보는 작가의 솜씨는 늘 경탄의 대상이었다. 작가는 범죄를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범인의 심리를 추적한다. 특히 주변 인물들이 엮여 이루어지는 그림은, 우리가 타인과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존재임을 확인시켜 준다. 

첫 번째 작품인 ‘눈의 아이’는 범작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꽤나 인상적이었다. 범죄자는 영원히 혼자다. 그는 자신이 범한 죄의 무게를 평생 짊어지고 산다. 더는 범죄 이전의 자신이 될 수 없다. 때로는 남들이 다 보는 것을 못 보기도 하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홀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심리는 다른 소설 ‘돌베개’에서도 변주되어 나타난다. 

‘눈의 아이’는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어린 시절에 친구가 살해되는 일을 겪은 동창들이 한 데 모인다. 모두 알고 있지만 그 사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형체가 생기는 것이다. 한편 타인의 불행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것도 폭로된다. 사건 자체에는 은밀한 흥미를 느끼면서도, 당사자나 유족에게는 죄책감을 느낀다. 관계가 먼 사람에게 일어난 범죄일수록 ‘극적’인 양상을 띤다. 극은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가까운 이에게 일어난 일은 바라볼 수 없다. 함께 겪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피해자와 가해자의 거리가 가장 가깝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유령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쩌면 둘은 한 몸이다. ‘돌베개’는 가해자에게 사로잡힌 범죄자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핵심적인 아이디어 하나를 위해 너무 빙 돌아가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테마는 비슷하다. 나그네에게 친절을 베푸는 척 숙식을 제공하다 돌베개 위에서 잠든 그를 살해하고 금품을 빼앗는 부부가 있다. 그걸 막으려고 딸은 스스로 돌베개 위에 눕는다. 부부는 딸을 살해함으로써 대가를 치른다. 그 부부에게는 딸의 죽음 그 자체가 유령처럼 따라다닐 것이다. 그들이 죽는 그 순간까지. 이런 사고방식은 인과응보적인 결말로 다가온다. 이전 소설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어떻게 보면 작가는 대단히 계몽적이다. 어떠한 완전범죄도 결국 밝혀지고, 범죄자는 응당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고방식. 물론 대부분의 범죄소설에서 독자는 진실이 밝혀지고 범인이 처벌되길 바란다.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아는 범죄는 모두 실패한 범죄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죄자를 끝까지 추적하는 탐정을 응원한다. 범인이 잡히는 순간, 카타르시스까지 느낀다. 

그러나 검거가 끝이 아니다. 남은 자들은 계속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고통받는다. 작가는 그런 주변 인물들을 포착하는 데에도 능하다. 범죄 이후, 소년A는 어떻게 되었는가? 어머니와 양부를 살해한 소년A는 청소년이기에 처벌을 받지 않으며, 교화시설에 머문 후 사회로 복귀한다. 이 이야기가 ‘성흔’이다. 때때로 사람들은 범죄자를 동정한다. 죄 자체를 두둔하지는 못해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환경을 이해하는 것이다. 학대받은 소년A도 마찬가지였다. 공권력의 도움을 얻지 못한 소년이 저지른 살인에 대해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고, 같은 처지에 있는 자들의 공감을 자아냈다. 급기야 ‘검은 메시아와 어린 양’이라는 사이트까지 등장했다. 소년A가 자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났고, 그의 말을 믿는 무리들이 생겼다. 그는 ‘희생되는 어린양’이라는 사이트를 만들어 추종자들과 독립했다. 멀쩡히 살아있는 소년A를 죽여, 신으로 승격시켜 숭배하기 시작하는 무리였다. ‘철퇴의 유다’는 아예 전국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를, 검은 메시아가 개입한 ‘조화’라고 주장했다. 우연을 필연으로 둔갑시키는 스토리는 실제의 소년A와 그의 친아버지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숭배자들에게 이 신흥종교는 신성한 놀이이자 자신을 정당화해주는 도구였다. 무고한 어머니를 살해한 소녀의 사건까지 조화로 떠받들여지자, 철퇴의 유다는 침묵했다. 결국 소년A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죽어야 하는 형벌에 처해진다. 

범죄자를 추종하여 갱생을 막는다는 이 기묘한 설정이 ‘성흔’을 여러 각도로 바라보게 해준다. 작가는 인터넷에 무분별하게 퍼지는 정보의 유해함을 보여주고 있다. 희생되는, 혹은 희생된다고 믿는 ‘양’들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타인을 이용한다. 정의를 구현한다는 믿음은 얼마나 헛된가. 도대체 누가 정의의 줄을 분명하게 그을 수 있단 말인가. ‘철퇴의 유다’는 그저 영웅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모든 종교도 따지자면, 위대한 영웅을 따르는 것이 아닌가. 범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주변인들의 이야기가 세밀했던 작품이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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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수꾼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밀수꾼들
발따사르 뽀르셀 지음, 조구호 옮김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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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이중적인 장소다. 태초의 엄청난 에너지를 간직한 바다는 태모신의 면모를 보이지만, 동시에 현기증나는 죽음의 공포와 닿아 있다. 거대한 파도 앞에서 인간은 속수무책이다. 그 어떤 과학도 바다의 섭리를 완전히 해독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바다는 인간을 진일보하게 해주었다. 인간은 거친 바다와의 싸움을 통해 세계를 넓혔다. 진보가 꼭 발전적인 것이 아니듯, 바다를 향한 인간의 욕망이 선한 것만도 아니다. 인간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기 위해 항해를 했다. 그러나 생존을 위한 항해는 정복을 위한 항해로 변주되기도 했다. 문명인은 야만인의 삶터를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문명인이라고 자부하는 그들끼리도 서로의 영역을 빼앗기 위해서 바다를 전쟁터로 삼기도 한다.

물론 여전히 바다는 생존을 위해서도 기능한다. 바다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여기, 한 무리의 밀수꾼이 있다. 시시각각으로 닥쳐오는 공포와 싸우며, 은밀한 일을 하는 스트레스를 감당하고, 경비대의 눈을 피해서 밀수를 해야 하는 사람들. 그들은 반쪽짜리 지폐의 나머지를 얻기 위해 묵묵히 바다와 사투한다. 밀수는 이미 그들 삶과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 언제든 발 뺄 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니다. 밀수는 삶의 다른 국면으로의 전환을 돕는 역할을 한다. 지브롤터 해협에서 지중해를 거쳐, 마요르카섬에 이르는 이 험난한 항해에 동참한 그들은, 이미 패배자이기 때문이다. 

선장 레오나르 주베, 다른 선장 뿌익-사발, 선원 빼레 마르코, 갑판장 요렝 까브레, 2등 기관사 쁘루덴시, 조리사 뻬나 등에게 삶이란 매일 견뎌야 하는 형벌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대개 고통스럽게 살았던 아버지의 삶을 물려받았다. 그들의 아버지는 전쟁 중에 죽거나 불구가 되고, 남을 착취하고, 밀고하거나 밀고당하고, 배신하고 배신당하면서 산다. 그들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산다는 것은 매일 한 조각의 빵이라도 꼭 무슨 대가를 치르고서야 입에 가져갈 수 있다는 비참함이나 실의 같은 거였다'(95) ‘모든 것이 끝장나 완전히 파멸해버릴 것이라는 확신’(236)이 그들의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그러나 살아야 했다. 항해 중간에 그들은 ‘죽은 자들의 동굴’이라는 곳에 숨어서, 살기 위해 경비대가 철수하기를 기다린다. 죽은 자들은 산 자들을 위해 비켜주는 것이다. 그러나 배에 탄 사람들끼리의 갈등은 깊어지고, 가족과 관계를 회복할 방법은 요원하며, 삶은 여전히 막막할 뿐이다.

밀수선 보따폭 호의 선장 레오나르 주베라는 이미 17세에 스페인내전에 참여했다. 그는 몸을 파는 여자들의 나이가 점점 어려지는 걸 보았고, 대수롭지 않은 이유로 사살당하는 사람들을 목격했다. 그는 7년이나 군대에 있었으며, ‘사회에서 유용한 기술은 하나도 배운 것이 없’었다. 그는 잃어버린 세월을 되찾고 싶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그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아내와 만나 춤을 추었던 축제의 그 밤이다. 그러나 서툰 그는 아내와의 관계를 망쳐버렸다. 아내는 그를 떠났고, 그는 더욱 황폐해졌다. 밀수가 성공하면, 그는 아내를 다시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희박한 희망이었는데도, 그는 믿는다. 그렇기에 그는 밀수를 방해하는 모든 요소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심지어 그 요소가 자기 선원일지라도.

1등 기관사 비센 바랄이 그 방해자였다. 그는 몸의 이상을 느끼면서도 승선했다. 그가 보따복호에 오른 이유는, 간결하게 자식들 때문이었다. 그는 원인모를 복통과 고통으로 괴로워하면서도, 가족들을 염려한다. 죽음을 예감한 그는 유언을 남긴다.

 나를 바다에 묻지는 말게. 난 물에 빠지는 게 싫어. 육지로 데려가 가족들이 아는 곳에 묻어주게.(354)

비센 바랄의 병은 쁘루덴시와 레오나르의 갈등을 증폭한다. 쁘루덴시는 1등 기관사인 바랄을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고 우긴다. 그러나 레오나르는 항해를 멈출 생각이 없다. 그 와중에 뻬레 마르코는, 자신이 마시아나에게 배신당한 것처럼 밀수꾼들을 배신하고 도망간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밀수는 성공하고, 비센 바랄은 간신히 목숨을 건진다. 그러나 이야기는 끝이 아니다. 그들의 삶은 여전히 거친 바다 위를 항해 중이다. 

읽어내기가 만만하지는 않은 소설이었다. 낯선 지명과 이름들을 적어가며 기억해야 했다. 선과 악이 마구 뒤엉켜, 인물을 판단하기도 어려웠다. 작가는 어떤 사상을 제시하기보다, 약점을 지닌 인물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신난한 삶을 모자이크로 엮어낸 것 같다. 고통은 일단 견뎌내면 견딜 만한 것이 된다. 삶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선장이 내일은 더 좋은 날이 올 거라고, 이야기하는 것일 테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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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3-05-02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사이 그리고 미요르카...제가 여행다큐를 통해 여러번 본 익숙한 곳이라서 이 소설에 관심이 가는군요.해양소설을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고요.

그라디바 2013-05-02 23:02   좋아요 0 | URL
그러시다면 저보다 더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겠군요.: ) 저는 풍경이 잘 그려지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읽기에 녹록치는 않은 소설이었어요. 스페인 내전에 얽힌 인물들의 이야기가 세밀화처럼 섬세하게 그려져 있거든요. 항해는 그들 인생의 여정 중의 하나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