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수증 안엔 대대적인 자기반성의 시간들이 밀봉되어 있다. 그러니까 ‘영수증 따위’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술먹은 다음날, 화장실 변기에 쏟아부은 끈적한 토사물처럼 영수증은 우리가 토해낸 일상을 투명하게 반영한다. 몇 개의 숫자, 몇 개의 단어로, 인생이 쓸데없이 길어지는 걸 비웃는/ 기이한 미니멀리즘의 세계.-11쪽
핵심적인 일을 제외한 잡다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는 사람이 존재하는 삶. 세금은 세무사가, 양육은 아내가, 고소사건은 자문변호사가 맡아 처리한다. 합리적이고 능률적이며 탁월하다! 하지만 그런 삶에도 공백은 남는다. 핸드폰의 단축번호가 번호를 암기하는 인간의 좌뇌를 갉아먹고, 자동차 내비게이션이 방향 감각을 퇴화시키는 것처럼 그는 업무 이외의 일에 점점 무뎌졌다. 그의 아내는 때때로 그를 저능아라고 놀렸다. 물론 그는 자신의 심각한 상태를 감지하지 못할 만큼 바빴다.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삶’보다 훨씬 더 처참하게 망가져버렸다. -52쪽
H가 말했었다. 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내가 사랑하는 건 자신이 아닌, 책이었다고 말이다. 넌 활자 속에서만 날 독점하려고 했잖아. 예의 편집자 같은 말투로 괴테나 도스토옙스키를 인용하면서 아니라고 부인하겠지. 하지만 네가 내 원고를 고칠 때마다, 상기된 얼굴로 내 삶에 박힌 못들을 전부 뜯어내려고 했단 걸 난 알아. 넌 그냥 형용사야. 독립된 명사가 될 수 없지. 당연히 동사도 될 수 없다. 넌 섹스나 키스도 책으로 배워야 하는 사람이니까. 살아서 뜨거운 피가 도는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애정이 있긴 한 거야? 사랑과 질투를 구별하는 건, 편집자로서 중요한 자질이야. 넌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질투하는 거야. 네가 쓰지 못한 내 책을 질투하는 거지. -171쪽
내가 얼마나 뜨거운 사람인지, 어디까지 뜨거워질 수 있는지 알았더라면, 내게 차갑단 말은, 더구나 너는 스스로 존재하는 명사가 아니라 누군가를 치장해주는 형용사일 뿐이란 말 따윈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 보여주지 못한 건 내 잘못이며 전부 보길 원치 않은 건 그의 잘못이므로 이것은 우리 모두의 실패일 것이다. -172쪽
늘 그럭저럭, 겨우겨우라고 말해왔지만 한번도 희망 비슷한 것을 포기한 적은 없었다. 잘될 거야, 괜찮아지겠지, 사실 꼭 괜찮지 않아도 상관없어, 라고 중얼거렸지만 거기엔 늘 비릿한 바람이 담겨 있었다. -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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