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일이 짜 맞춘듯 맞아 떨어질때가 있다고.
뭐 살면서 저런 생각을 할 만큼 일이 술술 잘 풀리는 건 아니지만
가뭄에 콩나듯, 빨래하려고 뒤진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만원짜리가 나오듯
그렇게 한번씩 나에게 오곤 한다.
나는 심한 불면증 환자이다.
가만 놔두면 3일이고 4일이고 잠을 못 잔다.
왜 못자냐고 묻는다면
그야말로 할 말이 없다.
왜냐, 나도 모르겠으니까.
그래서 나는 정신과 상담을 받고 수면제를 먹는다.
수면제를 먹는게 좋지 않다는건 알지만
내 담당의도 그렇고 의사인 친구 말을 들어도 그렇고
사람이 3일 이상 잠을 못 자면 돌연사 확률이 50% 이상 높아지므로
약에 내성이 생기건, 약이 좋건 나쁘건 무조건 먹어야 한단다.
그런데 한번씩은
이 약을 먹어도 잠이 오지 않거나, 자 봤자 2~3시간 밖에 못 잘 때가 있다.
그렇게 자고 나면 자도 잔것 같지도 않고 너무나 괴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다.
음... 하려던 얘긴 이게 아닌데... 암튼.
그 주치의와 나는 꽤 친하다.
개인 병원이 아닌 큰 병원이라 그런지 심각한 환자들이 많은데
나는 비교적 가벼운 환자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나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일방적으로 상담을 한다기 보다는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 주치의는 내 일에 관심이 많다.
이번에 출장을 갔을때 출판사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나에게 연애얘기를 쓰되 심리학과 접목을 시켜보자는 제안을 했다.
심리학? 내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얼마전 엎어진 기획 (내게 맞지 않는 기획이었지만 일 욕심에 한다고 물어놓고는 결국 도저히 자신이 없어서 엎어버렸다.) 을 생각하니 그래 어떻게든 해 온 연애 쪽 일이니까 해 보자 싶었다.
기획자는 현재 소설 편집중이라 정확한 밑그림을 그린 상태는 아니지만
나와 작업을 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얼마 후
수면제를 처방받으러 의사에게 갔다. 가서 그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의사가 정말 신기해하면서
자신에게도 책 제의가 들어왔는데 연애 쪽이라 자신없어하고 있던 중이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는 아.. 그러세요. 하고 나왔지만
돌아오는 길 내내 생각했다.
주치의와 내가 같이 이 일을 내 쪽으로 접촉이 들어온 출판사랑 하면 어떨까 하고.
그래서 기획자에게 전화했더니 너무 좋다고 했다.
주치의가 운영하는 블로그 주소를 알려줬더니 글도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또 다시 주치의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한마디로 매우 기뻐했다.
서로 '제가 영광이지요' 라는 말을 하면서
조만간 만나서 환자와 의사의 관계가 아닌 일 얘기를 하기로 했다.
아직 구체적인 기안이 나온것도 아니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것도 아니지만
어쩐지 이건 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간 엎어진 기획들을 볼 때
제안이 들어왔을때의 첫 느낌이라는게 분명히 있는것 같다.
그때 약간 고개를 갸웃 하게 되면서 그래도 일 욕심에 한다고 하면 결국 잘 안되고
듣자마자 이 일을 하면 너무 좋겠다 싶으면 일이 진행되고 결과물이 나왔다.
너무 거창한 계획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해마다 한 권의 책은 꼭 내고 싶다.
책을 낸 이후 여태까지는 그래왔는데 (그래봐야 꼴난 2권이지만)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면
정말이지 착하고 바르게 살겠다.
나는 나를 잘 안다.
나는 그렇게 특출한 능력을 가진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하는 일을 오래 꿈 꿔 왔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하고 싶어하는 마음 만큼
은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있다고 생각한다.
능력까지 따라주면 더 좋겠지만
안되면 노력이라도 해서라도 잘 해 내고 싶다.
내가 출판사를 찾아다니며 책을 내달라고 말 하지 않아도 어디선가 접촉이 오는 것.
아무리 기획이 좋고 훌륭한 제안이라 하더라도 내가 진심으로 그 글을 쓸 수 없다고 판단되면 욕심
부리지 말고 내려 놓을 것.
나와 일한 기획자는 다시 나와 일 하고 싶도록 성실할 것.
이것만은 내가 꼭 지키고 싶은 것들이다.
이것만 잘 지켜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 좋은 기분.
그대로 유지하면서 마감이나 해야겠다.
하루 2개 마감.
좀 쥐약이긴 하지만 어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