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책을 고르는 가장 큰 기준은 [재미]이다. 이건 책이건 영화건 일이건 예외는 없는 것으로 일단 재미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하고싶지 않아진다. 물론 재미라는 것에 개인차가 엄언히 존재하는 것이므로 내가 재밌다고 하는 책이 간혹은 재미가 없을수도 있고 남이 재밌다고 해서 산 책에 하품만 하다 읽기를 포기한 적도 여러번 있었다. 하지만 이 책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는 적어도 누구에게나 재밌다는 평을 얻어낼 듯 하다. 누구나 수긍할 만한 재미를 충분하게 갖춘 이 책은 단숨에 읽어 치울 수 있으며 무엇보다 읽는 내내 키득거리게 만든다.(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읽으면 시선 집중의 위험이 있다.)요즘 골치아픈 일이 두 가지가 동시에 발생하는 바람에 내 머리는 한동안 스파게티를 한 접시 쏟아놓은 것 처럼 복잡했었다. 이럴때는 평소의 재미와는 달리 보편적인 재미와 할랑함을 찾는것이 최고라는 생각에 이 책을 골랐고 그 선택은 탁월했다. 독일작가들의 책을 고전 빼고는 그다지 많이 보지 않았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독일인의 유머 감각도 꾀 쓸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 이어서 '내가 전부터 말했었잖아'라는 책을 보고 있는데 우연의 일치로 그 책 역시 독일 작가가 쓴 책이며 세상은과 크게 다르지 않은 유머를 보여주고 있다.책의 주인공은 호어스트 에버스(작가의 이름과 같다.) 직업은 없으며 게으름이 하늘을 찌르는 작자이다. 호어스트는 귀찮은 것은 딱 질색이지만 그래도 생각하기를 멈추지는 않는다. 즉 머리 속으로는 이것도 해야하고 저것도 해야한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지만 막상 실천에 옮기려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귀찮게 느껴져 포기하고 마는 인간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게으름을 인정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택도없는 이유들을 끌어다 붙여서 자신을 합리화 시킨다.)호어스트가 살고 있는 세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비슷하다. 하지만 호어스트가 사는 방법은 우리가 사는 방법과는 전혀 비슷하지 않다. 뭐든 해야 직성이 풀리고 신문물이 나오자 마자 재빨리 습득하여 잘난척을 해야하는 현대인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다. 그는 느긋하며 낙천적이고 게으른 동시에 유머러스 한 인간이다. 만약 주변에 저런 인간이 있다면 열의 아홉은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속이 터져서 죽겠지만 호어스트는 실제로 우리 옆에 있지 않다. 다만 책 안에 존재함으로 우리를 키득거리게 해 줄 뿐이다.책은 월요일 부터 일요일까지 몇개의 에피소드로 진행이 된다. 하지만 책의 제목에서 느껴지듯 호어스트가 금요일을 기다린다거나 특별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백수이며 게으른 인간이므로 어차피 요일따위와는 상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월요일도 화요일같은 인생. 화요일도 금요일 같고 토요일도 수요일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허나 굳이 그런 제목을 붙인 이유는 아마 요일별로 다른 일을 하며 다른 인생을 사는 많은 사람들을 배려해서가 아닌가 싶다. 월요일에서 일요일까지의 에피소드 다음에는 마지막으로 묻는 사람이 없어도 나는 답한다 라는 제목이 보인다. 그것은 책 속에서 설명이 약간 부족했던 호어스트를 알게 되는 귀중한 시간을 제공한다.아까도 언급했지만 이 책은 지하철이나 기타 공공장소에서 읽기에는 바람직 하지 않다. 끊임없는 실소로 인해 사람들의 이목을 끌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반드시 집구석에서 아무도 없을때 혼자 보기 바란다. 그래야 호어스트처럼 살지 못하는 불쌍한 우리들이 웃는거라도 눈치 안보고 맘껏 웃을 수 있다.주변에 혹시 복잡한 문제가 있어서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선물 해 보기 바란다. 저 책에 너무 감동받아 호어스트처럼 살려고 드는 이들이 있을수도 있다는 부작용에만 걸려들지 않는다면 그는 웃음을 되 찾는 정도의 행운만 가질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퍽 센스있고, 안목있으며, 이국적인 유머를 이해할 수 있는 코스모폴리탄적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리뷰를 쓰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그것 만으로 리뷰를 쓰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리뷰를 쓰기 전에 다른 책들을 좀 뒤적거렸고 예전에 읽은 책의 리뷰를 한편 쓰고 나서야 더이상 미적거리다간 읽은 내용을 잊어버리겠다 싶어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이 책은 나에게 있어 특별한 책이다. 앞 부분에 주인공이 실직자가 되어서 고생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나도 그렇게까지는 아니지만 엇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비참하다거나 처량하단 느낌은 들지 않고 단지 시간이 어서 지나주기를 바랬다. 머리를 숙이고 있으면 언젠가는 그 위로 세월이 지나가고 다시 일자리를 찾아 내가 나를 충분하게 먹여살리는 때가 올꺼라고 말이다. 그래서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서 주인공이 비서로 일하게 되는 에핑이라는 노인의 삶에 무게를 두고 옮긴이도 역시 거기에 중점을 두지만 나는 앞 부분에 중점을 둘 수 밖에 없었다. 다시 겪으라면 그러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인생에서 그 부분을 도려내고 싶지는 않다. 그때의 경험은 나에게 중요했고 지금의 나를 이루는 많은 부분이 그때의 결심으로 이뤄진 것이니까 말이다.주인공인 포그가 고난의 세월(실직과 기아)을 이겨내고 에핑이라는 노인의 비서로 일하게 되고 그의 죽음과 동시에 바버라는 남자를 알게되는 과정까지 흥미롭기는 했지만 나는 책의 처음에 나왔던 주인공의 고난의 세월만 마음에 들었다. 그 이후로는 마치 다른 책 처럼 느껴질 만큼 생소했다. 잭과 콩나무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신데렐라 얘기를 하는 것 처럼 말이다.책의 내용은 포그라는 남자의 인생 얘기이다. 어려서 얘기도 조금 나오지만 어머니와 외삼촌을 잃은 대학시절 부터 에핑이라는 하반신 불구 환자의 비서를 거쳐서(에핑은 죽게된다.) 바버라는 남자를 만나고 그 역시 죽자 포그는 다시 처음부터 돌아가서 자기 인생을 시작하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여기에 가장 주가되는 내용은 핏줄이다. 그러나 그 많은 내용들을 처내버리고 본다면 요즘 드라마들 처럼 이 책은 너무나 많은 우연들에 의존한다. 알고보니 아버지고 알고보니 할아버지고 결국 핏줄은 그들이 서로 어떤곳에서 어떤 형태로 살고 있더라도 만나더라는 식의...하지만 폴 오스터는 뛰어난 솜씨로 그 가당찮은 우연들을 필연으로 만들어 버리고 심지어는 읽는 사람이 그런 괴상한 우연들을 눈치조차 채지 못하도록 한다.(물론 거기에는 이 책이 몹시 두껍다는 것도 한 몫 함을 부인할수는 없지만)마치 전혀 다른 세 개의 이야기를 읽는 것 처럼. 나는 책 속에서 포그를 만나고 에핑을 만나고 마지막으로 바버를 만났다. 그 중간중간 포그의 어머니, 외삼촌 그리고 그의 친구와 애인인 키티 우 도 나오지만 이 책은 남자3대로 이루어져 있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그 아들의 아들. 얘기는 아들에서 할아버지로 출발해서 아버지를 만나고 다시 아들로 귀환한다. 나는 그 끝에서 만난 아들이 그다지 희망적이지도 절망적이지도 않은 부분이 마음에 든다. 만약 그 모든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다시 비참해지거나 혹은 마음을 다잡고 유일한 사랑인 키티 우와 함께 희망찬 출발을 시도했다면 소설 전체가 너무 작위적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책의 제목이 달의 궁전인 것은 주인공인 포그가 제일 처음 살게 되는 아파트 창문 너머로 보이는 레스토랑의 네온사인이다. 나도 포그와 같은 시절을 보낼때 내 집 창문 너머 보이던 병원 네온사인을 기억한다. 단지 야간진료. 이렇게만 적혀 있었지만 이상하게 그 긴 시간 지켜보는 동안 정 비슷한게 들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작가가 달의 궁전을 책의 제목으로 정한것이 정말로 와 닿았다.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렇게 오래 보게 되는 무언가는 그 글자가 달의 궁전이건 야간진료이건 그 글자의 실제적인 의미 같은건 중요하지 않다. 저녁7시만 되던 네온사인의 불이 들어오던 야간진료는 내게 있어 포그의 달의 궁전과 마찬가지 였다.
흔히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자를 비겁하다고 말 한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그 반대로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이다. 나에게 불이익을 가져다 주고 해악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자에게 강하게 나가기란 힘들다. 학교 다닐때는 선생님들이 그랬고 직장에서는 직장 상사가 그렇다. 그들이 틀린것을 발견해도 지적하지 못하고 나에게 부당한걸 요구해도 무기력하게 들어 줘야만 하는것. 이것과 상반되게 우린 약자 앞에서 강해지긴 무척 쉽다. 더구나 내가 속한 집단 모두가 그를 약자로 보고 따돌린다면 선뜻 그의 편에 서는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지나가는 거지에게 적선을 배풀수는 있지만 내가 지속적으로 봐야하는 혹은 함께 있는 약자에게 잘해주기란 강자한테 강하게 구는 것 만큼이나 힘든 일이다.강자와 약자에 관해 이렇게 주절주절 떠든 이유는 이 책이 바로 그런 설정을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강자와 약자 그리고 집단. 이 세 단어로 소설은 이루어진다. 물론 표면적인 내용은 세상사람들이 어느날 전념병처럼 모두 눈이 멀고 단 한명의 여자만이 눈이 보이는(그러나 그녀는 눈먼 남편을 위해 자신도 눈이 먼것처럼 행동한다.)상황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소설은 매우 허구적이다. 현실에서 사람들이 마치 전념병처럼 한꺼번에 눈이 멀기란 매우 가능성이 희박한 얘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눈 먼 사람들이 개인에서 집단을 이루고 살아 남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것을 보면 이 사회와 너무도 닮아 있음에 놀라울 뿐이다. 도저히 소설로 밖에는 볼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인간관계랄지 인간과 집단사이의 관계등은 놀랍도록 사실적이다.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눈만 먼 것이 아니다. 그들은 눈이 먼다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인해서, 그동안 휴머니티인척 할 수 있었던 평온함이 사라지자 가장 근원적인 본성을 찾아 간다. 약육강식의 세계.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그들은 눈이 먼 것과 동시에 인간이 인간에게 인간이여야 한다는 사실도 함께 잃어버린다.인간이 동물적 본성을 드러낼 일은 거의 없다. 적어도 세상이 지금처럼 비교적 멀쩡하게 돌아간다면 말이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위기가 닥치고 그것이 살아남아야 하는 문제와 직결되면 인간은 절대로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것 처럼 살 수는 없다. 책에서 보면 집단 강간 장면이 등장하는데 무척 끔찍했지만 사실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모두 눈이 멀어 버렸다면 그래서 강한 무리들이 약한 무리들을 약탈하는 상황이라면 그들은 성 같은건 얼마든지 지배할 수 있다. 목숨마저 앗을 수 있는 상황에서 그건 약자의 빵을 빼앗는 정도의 무게밖에 지니지 못한다.이 책을 보는 내내 무서웠다. 내가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지금처럼 돈을 벌어 먹을것을 사고 집이 있어서 따뜻하게 잠 잘 수 있는 상황에서나 가능한것 아닐까. 만약 나도 저런 상황에 처해서 강자가 된다면 과연 내가 늘 떠들고 다니는것 처럼 약자한테 약할 수 있을까. 솔직하게 말 하자면 자신이 없다. 인간성에 관해 논했던 어떤 책들 보다도 나는 이 책이 인간의 내면에 관해 잘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인간 내면을 다룬 책을 많이 읽어보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세상은 언제나 아름다운 일들로만 가득 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권하고 싶은 책이다. (당신들의 아름다운 세상은 지금같은 상황이 계속 유지될때나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성석제의 소설은 재밌다. 천부적인 이야기꾼이라고 해도 과언이 없을 정도로 그의 소설은 입에서 짝짝 붙는다. 독자를 들었다 노았다 하는 솜씨도 여간내기가 아니다. 그래서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순정이 참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조금 삐딱하게 보기로 했다. 내가 책에서 추구하는 것이 오로지 재미이긴 하지만, 그래서 성석제의 소설은 재미만으로 볼때는 별 넷 내지는 별 다섯이 마땅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차라리 빈약한 스토리와 모자라는 재미의 책이었다면 나는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성석제의 책은 참으로 재미있었다. 그래서 옥의 티 마냥 더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그는 굳이 이 소설에서 여자라고는 달랑 두명 등장하는 그녀들의 삶을 그런식으로 표현하지 않았어도 그 글빨로 보아 얼마든지 재미있는 소설을 쓸 수 있었었다.순정에 등장하는 여자는 두 명이다. 하나는 주인공 이치도의 엄마 춘매여사고 하나는 이치도의 대부 왕학의 딸 김두련이다. 이치도의 엄마는 술집 작부이다. 이치도의 아버지는 그녀가 군부대 앞에서 몸을 팔때 그녀의 몸에 올라탔던 수많은 군인중 한명이다. 하지만 춘매는 땜장이에게 마치 이치도가 아들인양 행동하여 그와 함께 산다. 그녀는 지지리 복도 없어서 어리하나마 남편이라고 있던 땜장이를 먼저 저세상에 보내고 작은 술집에서 해장국밥 집을 하며 이치도를 키운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어머니상 처럼 이치도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건 아니다. 이치도가 아기일때는 니나도 장단을 치느라 젖을 제대로 못 먹였고 커서는 아예 무관심으로 밀고 나간다. 춘매는 중간중간 남자를 만나지만 그들은 마을에 잠깐 머물렀다 가는 뜨네기일뿐 춘매의 인생에 십원한장 보탬이 되지 않는 인간들이다. 나중에 이치도가 돈을 훔쳐 달아나는 피눈물에게 잡혀서 늙은 나이에 식모로 죽도록 고생하다가 결국 혼자 병원에서 죽어버린다.내가 분계하는 것은 춘매가 순정이 없는 작부여서도 아니고 이치도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극정성으로 키웠더라 따위의 스토리가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도 관심없던 아들 이치도로 인해 말년에 늙은 가정부가 되어 온갖 학대에 시달리다가 생을 마감한다는 것이다. 아들의 삶을 위해 춘매가 희생한 것 처럼 되어버렸다. 관심이 있건 없건 여자의 삶은 그를 스쳐간 남자들로 인해 막판까지 개판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그간 춘매의 성격으로 볼짝시면 피눈물 밑에 들어가 구박댕이 식모를 하느니 무슨 사단을 내어도 냈어야만 했다.다음으로 이치도가 연정 비슷한걸 품고 있는 김두련. 그녀는 촌구석이 싫다며 대도시로 나가서 공부를 한다. 시골이 싫어 방학이 되어도 한번도 내려오지 않은 그녀는 처음 예상과는 달리 힘든 상황에서 공부를 하게 된다. 그러다 어느날 아버지 왕학을 찾아 오게 되는데 거기서 왕학이 고자요 동성연애자임을 알게 된다. 그길로 충격을 받아 두련은 고급작부가 된다. 여태 어렵게 공부를 해 왔지만 아버지가 고자요 동성연애자라는 사실은 모든걸 포기하고 이남자의 품에서 저남자의 품으로 옮기고 것도 모자라 직업 여성이 된다. 그러나 춘매가 마지막에 보여줬던 이해할 수 없는 희생(피눈물의 식모로 전락하여 결과적으로는 이치도를 돕고 마지막에는 죽음으로써 이치도를 살리는)을 두련 역시 보여준다. 어릴때 언청이였던 그녀가 술집에서 몸팔아 번 돈으로 불쌍한 아이들을 돕는다는 것이다.물론 순정에 등장하는 이치도를 비롯한 남자들도 모두 허접한 삶을 살기는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그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지 그들을 스쳐간 여자들 때문에 인생이 개판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순정의 유일한 두 여자 춘매와 두련은 자신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닌 환경 즉 남자로 인해 인생이 개판이 된다. 이걸 읽고 좋아라 할 여자는 없을 것 같다. 그녀들이 그녀들의 선택에 의해 삶이 그렇게 되었더라면 아무 상관 없겠지만 말이다. 아직도 소설속의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 내지는 남자의 방귀만으로도 인생이 들썩거리는 존재인가보다.
나는 성장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성장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주인공들이 별로 성장하는 꼴을 보지 못했으며(주인공도 성장을 하지 않는 마당에 읽는 내가 성장할리는 만무했다.) 성장 소설은 데미안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밀밭의 파수꾼이랄지 그외 다른 성장소설들을 간혹 읽는걸 보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말 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책 표지를 보면 아마 아무도 이게 성장 소설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나 역시 이 책을 처음 봤을때 무슨 추리소설인줄 알았다. 제목도 별로 성장소설틱하지 않고 말이다.책은 10대 소녀인 멜린다가 고등학교를 입학하여 졸업하기까지의 시간이 학기별로 나열되어 있다. 처음에 읽기 시작했을때는 멜린다가 그저 그런 10대 소녀라고 생각했었다. 그 나이에 맞게 가볍고 아무 생각없고 모든게 삐뚤게만 보이고 어른들은 무조건 경멸스러운 평범한 10대들 말이다.하지만 계속 읽어갈수록 이 아이 무언가 다르다는 생각을 했었다. 자신의 괴로움에 대해 징징거리지 않는 어른스러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거기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 하더라도 유머를 잃지 않았고 더군다나 자신을 불쌍한 상황으로 몰아넣지도 않았다. 책을 계속 일다가 보면 우리는 멜린다가 고등학교로 오기 전 까지는 친구들도 있었고 비교적 평범한 시절을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친구들과의 파티 이후로 모든 상황이 변한다. 친구들은 멜린다를 따돌리고 멜린다는 말을 잃어간다. 사실 상황만으로 본다면 멜린다는 심각한 일을 겪었고 그것으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이지만 그애는 절대로 그 상황 자체에 빠져 지내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신을 따돌리는 것에 대해 일일이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했다면 동정을 얻었겠지만 멜린다가 선택한것은 침묵이었다. 그애는 자기만의 세계에서 미술시간에 나무를 그리며 조금씩 스스로를 치료한다. 미술선생도 엄마도 아빠도 친구들도 그녀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 또래와 같아지기에는 이미 그녀가 겪은 일로 인해 너무 자라버린 후이고 엄마와 아빠는 여느 가정이 그렇듯 자기네 일 만으로도 머리통이 터질 지경이다. 이상하게 이 책을 보면서 아메리칸 뷰티에 나오는 도라 버치가 생각났다. 판타스틱 소녀 백서에서의 도라 버치 그리고 아메리칸 뷰티에서의 도라 버치가 짬뽕이 되어 읽는 내내 멜린다와 뒤섞였었다.성장소설을 굳이 찾아 읽지는 않는 내가 이 책에 별 넷을 주는 이유는 궁상을 떨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엄청난 일을 당했으니 나는 늘 심각하고도 불쌍해야만 해 같은 구석이 멜린다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좀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독자들은 충분하게 웃으며 유쾌하게 볼 수 있다. 다만 청소년 권장 도서라고 하기에는 우리 나라와 문화적 교육환경적 차이가 너무 커서 별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