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 포스터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나는 이 영화가 나랑 아주 궁합이 잘 맞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뭐라고 꼬집어서 설명할수는 없지만. 나는 이 포스터를 보자 내가 이 영화를 혼자 보겠다는것. 그리고 아주 좋아할 것이란걸 예감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하나도 틀리지 않고 들어맞았다. 어제. 나는 5시 40분. 혼자서 열명 남짓한 관객이 든 영화관에서 봤다. 그리고 보고 나서 하룻밤을 자고 출근한 오늘 아침까지 이 영화는 내 마음에 깊게 박혀 있다. 아마도 오래동안 박혀있을 것 같다.

원래 여자, 정혜는 좀 더 일찍 개봉했어야 했다. 작년 부산 국제영화제 출품작이니 그해 여름이나 가을. 늦어도 겨울에는 개봉할 수 있어야 했었다. 하지만 연기생활 10년이지만 영화는 이것이 처음인 김지수 홀로 끌고가는 영화는 개봉관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해외에서 인정을 받고 여러 영화제에 초대가 되자 비로서 올 3월에 개봉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자, 정혜는 오래 기다린 만큼 기쁨을 안겨준다. 설사 이 영화가 몇년이 더 지나 개봉을 하게 되었더라도 아마 그럴 것이다. 개봉관 잡기가 쉽지 않았던 만큼 이 영화의 흥행 여부는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그들이 어떤 이들인가. 장사가 되면 귀신같이 알고 다른영화 다 내리는 한이 있어도 개봉관수를 늘여 개봉한다.) 어제 나와 함께 본 관객은 그 큰 영화관에 10여명 남짓이었다. 그리고 유달리 혼자와서 보는 여자들이 많았다. 그 속에 나도 있었다.

여자, 정혜는 정혜라는 여자의 일상을 조용하게 따라간다. 말도 조용조용하게 하고 조금도 떠들썩할것 없는 일상을 살아가는 여자 정혜. 그녀는 그녀의 작은 아파트와 우체국을 오간다. 그리고 아주 가끔 죽은 엄마를 떠올리고, 기억하기 싫었던 일들과 담담하게 마주하기도 한다. 감독은 김지수를 잡으면서 절대 2m 이상 떨어져서 잡지 않았다고 한다. 삶에 착 밀착된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만큼 김지수는 화면 속에서 연기하는 배우라기 보다는 마치 관객 자신처럼 느껴진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감정 이입이 지나칠만큼 되어서는 종국에는 내가 정혜인지 정혜가 나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주인공 정혜라는 여자에게 내가 감정 이입이 쉬웠던건 단지 핸드 헬드 카메라가 그녀를 가까이 잡았기 때문은 아니다. 나는 여자 정혜처럼 혼자 살고 있고 그녀가 손목에 차고 있던 켈빈 클라인 시계는 나도 즐겨 차는 모델이었고 방보다는 거실에서 생활하는 모습, TV홈쇼핑을 멍하게 보는 것, 집과 회사를 시계추처럼 오가고 절대적으로 고요한 일상에서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이건 아마도 나뿐 아니라 혼사 사는 혹은 혼자 살아본 여자라면 누구나 충분하게 공감을 이끌어 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독신들이 다 영화 '싱글즈'처럼 유쾌한 일상의 연속은 아니다. 오히려 여자 정혜의 지루하리만큼 조용한 일상과 더욱 닮아 있다. 하루하루 전쟁터처럼 북적이고 날마다 극적인 사건들이 터지는 삶은 누구나 다 누릴 수 있는게 아니다.

물론 나는 여자 정혜와 다른점이 많다. 인터넷을 전혀 하지 않는 그녀에 비해 나는 컴퓨터를 끼고 살고 있고 별로 친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할 직장 동료들과 마치고 맥주 한잔 같은건 거의 하지 않는다. 거기다 내 일상은 정혜만큼 조용하고 가라앉아 있지는 않다. 나는 정혜보다 더 시끄럽고 씩씩하다. 구두를 사러 갔다가 기분이 조금 상한 정혜가 자신의 기분을 표현하는데 있어 너무도 조용한 어투로 많이 망설이면서 말하는 장면을 보면서 나라면 대판 소리를 질렀거나 아니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집에서도 말을 많이 한다. 하루종일 집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을때도 있지만. 그냥 혼잣말을 한다. '씻자' '먹자' '아이고 허리야' 등등의 아무도 듣지 않는 말들. 그저 나 스스로에게 한다. 그렇게 말을 하고 나면 정말로 그 일을 꼭 해야할 당위성을 부여받는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너무 고요하게 스르르 움직이면서 행동만 하기에는 혼자라는, 그래서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라는 것이 사람을 너무 게으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씻지 않아도 먹지 않아도 그만인 삶. 거기서 나는 벗어나고 싶었었다.

어쩌면 이 영화는 몹시 지루할지도 모른다. 큰 사건 없이 계속 혼자 사는 정혜라는 여자의 일상만 디테일하게 따라가기 때문이다. 영화가 영화로써의 극적인 힘을 가지는 것은 오로지 정혜의 회상에서나 가능할뿐. 그녀의 현재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고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것만 같다. 하지만 조금만 더 애정을 가지고 살펴보면 그녀는 누군가를 돕기도 하고 (돕고 싶지만 오지랖이 넓게 느껴질까 망설이는 장면은 정말 공감이 갔다.) 위로하기도 하고 용서하기도 하고 스스로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어 치유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는 사랑도 하면서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저건 영화니까 가능하지 실제의 일상은 그렇지 않다라는 경험에서 나온 지적을 할 부분도 가끔 있기는 했지만. 나는 시나리오가 꽤나 잘 쓰여졌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혼자 오래 살아보지는 않았겠지만 한번쯤은 혼자 살았거나 아니면 혼자 산 여자를 관찰했을꺼란 느낌이 든다.

여자, 정혜는 어지간하면 혼자.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닐때 보길 바란다. 보고 나서 가슴에 조용하게 담고 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오거나 혹은 걸어서 돌아오거나 아무튼 혼자 돌아오는게 어울린다. 마치고 친구들과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노래방을 가는건 다른 영화를 보고 해도 충분하다. 이 영화 만큼은 그러지 않는게 훨씬 더 좋을거란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덧붙임) 나는 김지수라는 배우의 가능성을 가수 진주의 뮤직비디오 '가니' 에서 처음 발견했었다. 그 뮤직비디오는 비가오는날 차에 타고 있던 여자가, 남자가 차에서 내리자 마자 음악이 끝날때까지 우는 것이었는데 손으로 눈물을 닦는다던가 엎드리지 않고 정면을 향해 (그러나 카메라는 보지 않고)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비오는 차안이라는 설정도 괜찮았고 와이퍼가 천천히 움직이는 가운데 혼자 몇 분을 울어대는 김지수. 그때 나는 그녀가 그냥 TV 탈렌트구나 하는 생각에서 어쩌면 배우가 되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던것 같다. 여자, 정혜는 이소라의 신곡 '바람이 분다' 라는 곡의 뮤직비디오로도 쓰이고 있다고 한다. 기회가 닿으면 '가니' 와 '바람이 분다' 뮤직비디오를 한번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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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3-11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멋있을 것 같아요... 가니 좋았는데...

플라시보 2005-03-11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님도 기회가 닿으시면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마태우스 2005-03-11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도 잘 맞을 영화인 것 같네요. 플라시보님, 근데 5시 40분이면 퇴근 전????^^

무탄트 2005-03-11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지수란 탤런트(전 배우로서의 김지수는 아직 모르니까요 ^^)라고 하면 언제나 그녀의 눈물을 떠올리게 되요. 닭똥같은 눈물을 참 어여쁘게 흘리는구나 생각했었죠. 어쩜 그렇게도 잘 우는지... 플라시보님의 글을 읽고 나니, 그 영화가 정말 보고 싶네요. ^^

하루(春) 2005-03-11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 싶은 영화만 잔뜩 쌓여가네요. ^^; DVD 싸게 나오면 확 사버릴지도... 으음.
참, 영화에 '바람이 분다'가 깔리나요? 아~ 그건 아니겠군(멍청해라). 새로 나온 이소라 노래 중 '바람이 분다'가 제일 좋더군요. 하여튼 말이죠.

플라시보 2005-03-11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쉬잇^^ 님만 조용하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합니다. 우리 그냥 덮읍시다. 좋은게 좋은거잖아요. 으흐^^ (마태우스님도 한번 보세요. 남자가 보면 어떤 느낌일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여자인 저는 아주 괜찮게 봤습니다.)

무탄트님. 네 저도 가니 뮤직비디오 보면서 어쩜 저렇게 잘 울까 싶었어요. 이쁘려고 안찡그리는것도 아닌데 그게 참 밉지않은 얼굴이 되더라구요.

하루님. 그러게요. 저는 지금 레이랑 밀리언달러 베이비가 밀려 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콘스탄틴도 영화감상기를 안적었군요. 빨리 적어야 할텐데^^) 바람이 분다가 직접 깔리는건 아니구요. 이소라 뮤비가 영화 여자,정혜를 편집해서 넣은거더라구요. (저도 바람이 분다가 제일 좋아요^^) DVD 저도 사고싶어요. 적어도 제게 있어서는 소장가치가 있는 영화인것 같아요.

플레져 2005-03-11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니, 바람이 분다, 정말 좋아요...
영화도 기대하고 있어요. 숨막히게 좋을 것 같은 영화...
혼자 보고 싶단 생각했어요. 정말 그래야겠네요. 추천해요. 님의 리뷰와 님의 삶에...그리고 김지수에게...(추천 하나 갖고 요모조모 잘도 쓰죠? ㅎㅎ)

플라시보 2005-03-11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흐흐 같은 플씨 가문이라 그런지 취향이 많이 비슷한것 같아요. 님도 보시면 분명 좋아하실것 같습니다. 그리 오래 개봉관에 걸려있지 않을지 모르니 얼른 보세요 (관객수를 보니 걱정스럽더군요.) 아. 추천도 감사합니다. 꾸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