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 정치와 죽음의 관계를 밝힌 정신의학자의 충격적 보고서
제임스 길리건 지음, 이희재 옮김 / 교양인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은 자신과 타인을 모두 죽일 수 있는 동물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언제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일까요? 저자는 1900년도부터 2007년도까지의 살인율과 자살률 통계를 연구하며 나름의 답을 제시합니다. 토머스 조이너가 쓴 '자살에 대한 오해와 편견'에서는 자살의 가장 큰 원인으로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된다는 의식과 아무데도 소속되지 않는다는 심리라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러한 해석은 이 책에서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습니다. 자살률과 살인율에 영향을 끼치는 사회적 문화, 현상, 사건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큰 영향을 미칩니다.

무엇이 폭력을 만드냐는 질문에 저자는 수치심과 죄의식을 그 원인으로 지목합니다. 물론 수치심은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수치심 때문에 고통스러울 때 자기 안에 있는 수치심을 남에게 떠넘겨서 수치심에서 벗어나려고 살인을 저지르거나 남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습니다. 죄의식이라는 감정은 자살을 유도하는데, 토머스 조이너의 해석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된다는 의식의 심리적 기능은 수치심의 반대 기능인데, 수치심을 자극하는 타인에 대한 공격성을 저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기능은 때로 너무나 강력해 남에게 터뜨리지 못하면 자기 자신에게라도 터뜨려야 할 정도로 강력합니다. 이런 수치심과 죄의식의 정도는 개인적인 것이라고 이해하기 쉽지만, 수치심과 죄의식은 도덕의 감정이고 동시에 정치적, 사회적 감정이기도 합니다. 이념과 종교, 정치적 선택은 수치심과 죄의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념과 종교, 정치는 사회를 구성하고 사회, 경제적인 스트레스로 인한 수치심과 죄의식은 사람들의 성격과 동기가 판이하게 다를지라도 비슷하게 영향을 미칩니다.

사회적 현상이 자살률과 실업율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많은 연구가 있어 왔습니다. 1900년부터 1970년까지의 시기를 다룬 폴 홀링거의 연구에 따르면 연령을 보정했을 때 미국의 자살률과 살인율은 상호 연관성이 있을 뿐 아니라 실업률과도 상호 연관성이 있었습니다. 줄리어스 윌슨은 빈민가의 실업과 폭력 범죄라는 이중 전염병을 분석한 연구에서 무직과 폭력 범죄의 직접적 관계를 언급합니다. 칭치 시에와 메러디스 푸는 소득 불평등과 폭력 범죄의 관계를 분석한 연구에서 미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살인과 맺는 연관성이 상당히 높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리처드 윌킨슨은 자신의 연구와 다른 연구자들이 생산한 문헌을 메타분석하여 폭력의 발생과 다양한 정도와 유형의 경제적 불평등과 생활고 사이에 의미심장한 연관성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개리 라프리와 크리스 드라스의 연구는 1957년부터 1990년까지 미국에 대한 시계열 분석을 통해서 경제 불평등이 커지면 살인율이 높아짐을 발견합니다. 파블로 파즌질베르, 대니얼 레더먼, 노먼 로아이자는 세계은행의 지원을 받아 불평등과 폭력 범죄의 관계를 조사한 연구에서 세계 39개국에서 소득 불평등과 국내총생산이라는 관련 경제 변수와 살인율의 관계를 분석한 결과, 살인율은 소득 불평등에 정비례하고 국내총생산에 반비례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심각한 폭력 범죄에 관여하는 남자의 비율에서 흑인과 백인의 차이를 비교하면 11세 때만 하더라도 거의 같은데 청소년 시기의 후반으로 가면 흑백 비율이 3대 2가 되고 이십대 후반에는 거의 4대 1로 격차가 벌어진다. 하지만 직장이 있는 흑인 남자와 백인 남자를 비교했을 때 21세까지는 두 집단이 보이는 폭력 양상에서 의미심장한 차이가 없었다. 결국 폭력 행동의 인종별 차이를 만들어내는 주된 원인은 실업이다. - p.66

결국 우리의 폭력성향과 자살성향을 해석함에 있어서 개인적 성향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요소의 영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필립 짐바르도의 심리학 실험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주변 환경에 엄청난 영향을 받습니다. 그리고 환경은 정치적 선택에 영향을 받습니다. 정치적 선택은 사회를 구성하고, 그 사회의 자살률과 살인율을 구성합니다. 어떠한 사회가 더 높은 폭력을 보여주는지에 대해 통계는 실업, 상대적 빈곤 등이 그 원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근대사회에서 수많은 병을 물리친 가장 효과적인 의학적 업적은 의사, 병원, 약의 역할이 아니였습니다. 청결한 물의 공급과 하수 체계는 어떤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을 질병과 죽음에서 구해냈습니다. 사회의 구성원들이 덜 자살하고, 살인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러한 관점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살인한 사람을 처벌하고, 자살한 사람을 죄악시하는 것에 우리의 자원을 쓰는 것보다 그러한 결과를 줄이는 정치, 경제적 시스템을 만드는 것에 우리의 노력을 투자하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던 지하드 - 테러, 그 보이지 않는 경제
로레타 나폴레오니 지음, 이종인 옮김 / 시대의창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9.11 테러 이후 갑작스럽게 사람들에게 알려진 테러단체들이 어떻게 탄생했고,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저도 아직은 누군가가 저에게 테러리스트와 테러단체에 대해 연상해보라고 질문한다면, 두건을 쓰고 한손엔 RPG-7, 한손엔 AK-47을 든 아랍전사를 가장 먼저 연상합니다. 하지만 이 책은 실제 테러단체들은 양복을 입고, 재무재표를 작성하는 기업가에 더 가깝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모던 지하드들은 아랍인만이 아니라 프랑스인, 혹은 미국인이기도 합니다.

현대의 테러단체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부터 시작됩니다. 전쟁 이후 프랑스 정부는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에 정규군을 파견했는데, 프랑스 정규군은 인도차이나의 밀림에서 게릴라 전사들을 추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전통적 전술은 게릴라전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 방식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새로이 부대를 창설, 똑같은 전략을 사용하면서 싸웠습니다. 이 방식을 대폭동 작전이라고 부르는데, 정치적 싸움에서 새로운 개념인 대폭동 작전은 국가가 지원하는 테러리즘을 정당화시킵니다. 냉전이 시작되자 이 방식은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되어 비전통적 전쟁을 뒷받침하는 주요 이데올로기가 됩니다.

1998년 코소보 해방군KLA이 세르비아 경찰과 민간인을 공격한 직후에, 미국은 KLA를 테러 집단으로 비난했다. 영국도 이 비난에 가세했다. 그 후 1999년 3월에 미국과 영국의 외교 정책은 급격한 변화를 겪었는데 양국 정부는 입장을 바꿔 이번에는 코소보가 아니라 세르비아 사람들을 비난했다. 갑자기 KLA조직원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자유전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이런 새로운 지위는 단명했다. KLA가 미국의 동맹국인 마케도니아 정부를 괴롭히는 이슬람 반군 세력을 지원하자 미국 국무부는 다시 한번 KLA를 테러 조직으로 낙인찍었다.  

테러단체가 계속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테러는 이제 더 이상 초강대국과 그 동맹국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됩니다. 테러는 하나의 자율적인 사업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분쟁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전쟁을 지속시켜 주는 경제 능력을 꺾어놓는 것이기 때문에, 생존전략 또한 경제적인 성격을 가지게 됩니다. 무장단체들은 독자적인 수입원을 개발하자마자 그들 고유의 국가 체제를 위한 인프라를 개발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정치적 인정은 받지 못하고 돈만 있기 떄문에 국가의 껍데기만을 창조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자결권이라는 주권의 과정을 거쳐 경제와 그 인프라가 조성되면서 정치적 통합으로 나아가는 민족주의 모델이 만들어내는 일반적인 국가와는 다르지만 테러에 의한 전쟁 경제를 주축으로 하는 사실상의 국가입니다. 저자는 이러한 형태를 의사국가라 부르는데, 대표적인 예로 PLO를 들수 있습니다. 레바논에서 PLO는 경제적, 재정적 제국을 건설하고 강화함으로써 아랍 스폰서 국가들로부터 재정적으로 독립합니다.

피어슨의 분류에 따르면 의사국가에 결핍되어 있는 현대 국가의 특성은 합헌성과 주권성입니다. 합헌성은 일련의 법률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고 주권성은 단독 통치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렇게 볼 때 의사국가는 비민주적이고 대단히 권위주의적입니다. 폭력을 독점하고 전쟁 경제를 장악한 자가 의사국가의 규칙을 정하기 때문에 이런 독점구조를 물리칠 수 있는 자는 새로운 지도자로 올라서게 됩니다. 합헌성과 주권성이 없기 때문에 의사국가의 권력이라는 것은 본질상 불안정할 수밖에 없고 이런 상황에서 충성심을 확보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이므로 자연히 돈을 주고 충성심을 매수하게 됩니다.

재정 자립을 획득한 의사국가의 투쟁과 국가가 후원하는 대리전의 차이점은 의사국가는 그 스스로의 전략을 개발하고 그 목표를 설정하고 사회의 특정 부문에 지지를 호소합니다. 의사국가는 대중적인 지지 기반을 갖고 있으며 자금 동원 능력에 따라 성공 여부가 결정됩니다. 반면에 대리전의 경우 외국의 강대국이 어떤 정치 그룹, 민족주의자 그룹, 반동 그룹을 지원할 것인가를 결정하며 후진국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히면서까지 그 후진국에서 서구적 경제 이익을 확보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역 주민들에게 의사국가는 기존의 국가가 제공해주지 못한 일자리를 제공하고, 치안과 안정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 기반이 매우 탄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 자립을 이룩하고 폭넓은 민중 기반을 가지고 있는 무장단체, 가령 PLO나 IRA는 그들이 지배하는 지역의 주민들에게 덜 착취적이고 덜 약탈적입니다. 반면 외국의 후원을 받아서 운영되는 콘트라스나 국내외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AUC같은 집단은 그와는 반대로 아주 무자비하게 약탈과 학살을 자행합니다.

콜롬비아 무장그룹 AUC는 부유한 지주, 마약 카르텔 재벌, 콜롬비아의 군부 등이 만들어낸 조직으로 마약 밀매 민병대, 미국으로부터 훈련받은 군부대와 무장 그룹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콜롬비아 대통령 안드레스 파스트라나는 2001년 2월 "국민들은 점점 더 무참한 학살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학살은 대부분 AUC가 저지른 것입니다. 1월에만 130명 이상이 죽었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영향력이 굉장합니다. 부의 분배가 아주 불균형하게 이루어진 콜롬비아 같은 나라에서 정규군은 재벌들의 회사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좌익 무장 그룹들과 싸우고 있는데, 지난 10년동안 AUC는 1만 5천명의 노동조합원, 농부, 지역유지, 인권운동가, 토지개혁 활동가, 좌익 정치가와 그 동조자들을 살해합니다.

1950년대 미국과 서방 동맹국들은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대통령 체제를 점점 더 우려하게 되었다. 이러한 우려는 파푸아 뉴기니의 지위 문제를 놓고 수카르노가 네델란드를 향해 반反식민주의적 태도를 취하면서 더욱 증폭됐다. 이런 배경 아래에서 미국 행정부는 인도네시아 군에 군사 지원을 아끼지 않는 프로그램을 시행함으로써 이 지역에서의 서방의 영향력을 증대하려 했다. 군을 대체 정치력으로 추진한 프로그램은 1965년 결실을 맺었다. 수하르토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수카르노를 권좌에서 몰아냈던 것이다. 그 후 6개월간 100만명의 국민이 목숨을 잃었다. 1975년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를 침공했다. 미국과 호주는 이러한 침공을 못 본체 했다. 1979년 말 동티모르 전 인구의 약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 서방 세계 '인권의 옹호자'이자 장래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카터 대통령이 지원하는 폭격기와 반폭동 항공기가 수하르토의 동티모르 점령을 도왔다. 서방의 지도자들은 수하르토에게 칭찬을 퍼부으면서 우리가 원하던 친구라고 말했다. - pp.136~137 

현대에 이르러 테러단체는 국가와 다름없는 자본력과 인적 기반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테러단체들은 합법적, 불법적 방법을 동원해 세계적인 경제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고 상호 작용하고 있습니다. 테러의 신경제는 연간 1조 5천억달러로 추산되는 세계 경제의 5%를 넘는 수치로, 이 엄청난 자본과 석유는 테러단체와 세계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서방은 마약의 최대 소비자면서 무기의 최대 판매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경제적 연결을 끊는다면 어떤 규모의 여파가 찾아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런 새로운 경제적 질서는 테러단체에 대한 판단에 대한 이정표를 제시합니다. 저자는 전쟁은 최선의 대안이 될 수 없으며, 전쟁은 전쟁을 기반으로 하는 의사국가를 더욱 강화시킬 뿐이라고 말합니다. 테러단체와의 투쟁은 경제적인 투쟁이 될 것이며, 그 여파는 모든 사람들에게 굉장히 괴로울 것이라는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크리스마스 휴전, 큰 전쟁을 멈춘 작은 평화
미하엘 유르크스 지음, 김수은 옮김 / 예지(Wisdom)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다른사람의 신뢰를 얻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물보다 진하다는 피로 이루어진 관계에서도 돈문제 등으로 서로 신뢰를 잃기도 하고, 연인끼리 혹은 친구 사이에서도 신뢰는 쉽게 얻기 힘듭니다. 그러한 신뢰관계를 바로 어제만 해도 자신의 목숨을 노리던 사람과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기적이라고 불리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적은 1차 세계대전 도중 일어났습니다. 특정한 지역의 특별한 사람의 기적이 아닌 수많은 사람이 낳은 기적이였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유럽인들은 전쟁 직전에는 더불어 살았던 이웃들끼리 싸워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전쟁 직전엔 수십만명이 모여 평화시위를 벌였지만, 전쟁이 시작되자 흑백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애국주의자들과 언론에서는 전쟁을 찬양했고 고무했으며, 대중들은 점차 서로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게 됩니다. 이런 거대한 물결에 수많은 반전주의자들, 유명한 학자들 또한 휩쓸려 전쟁에 찬성합니다. 그 와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평화를 외친 유명한 학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뿐이였습니다. 젊은이들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열광적으로 전쟁에 참여합니다. 당시 시작된 여성해방의 흐름은 영국의 과격 여권론자들로 하여금 여성의 병역의무 도입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기도 하게 했습니다. 여권론자들은 거리에서 군복을 입지 않은 젊은 남자를 만나면 전선으로 떠나지 않은 남자는 겁쟁이라는 의미의 흰 깃털을 건네곤 했습니다.

평화주의는 나를 지배하는 본능적인 감정이다. 어떤 식의 이론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증오와 잔혹성에 반대하는 마음 깊은 곳의 저항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대중은 선전에 중독되지 않는 한 결코 전쟁을 열망할 수 없다. - 아인슈타인 

전쟁이 시작되고 어떤 편도 결정적인 땅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부전선에선 지하에 참호를 파고 끝없는 참호전이 시작됩니다. 참호에서의 삶은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축축함과 추위, 이와 쥐에 맞서 싸워야 했고 적의 공격, 부실한 보급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광기어린 선동에 휩싸인 젊은이들은 전쟁터에 와서야 전쟁의 실상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그들은 열광적인 전투 대신 생존을 위한 투쟁을 시작합니다. 전쟁 초기의 몇달 동안 서부전선 전체 참호들에서는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일종의 합의가 통용됩니다. 볼일을 보러 갈 때는 공격하지 않았고, 식사할 때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막대기에 고정해서 엄호 위에 높이 세운 표지판으로 각자 식사시간을 알리면 대략 1시간 정도는 사격을 중지했습니다. 독일군, 프랑스군 혹은 영국군의 많은 매복저격병들은 교대시나 정찰시에 우연히 서로를 만나면 사적인 휴전을 결정하곤 했습니다. 전쟁이 5개월 정도 진행된 후로는 서로 쏘지 않기 위해서 차라리 상대편을 못 본 척하기도 합니다. 이런 인간적인 몇몇 요구들은 보잘것없는 병사들의 묵인 속에서 존중되고 실현되었습니다. 그들이 침묵했던 이유는 무엇보다 사령부에 있는 최고위 사령관들보다는 반대편의 비슷한 계급의 병사들과 더 많은 공통점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체는 쌓여갔고, 병사들은 절실히 평화를 원했습니다.

1914년 크리스마스 이브날, 독일군 진지에서 노래소리가 들려옵니다. 어떤 지역에선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들려왔고, 어떤 지역에선 '아데스테 피델레스'가 들려 왔습니다. 독일군의 노래에 프랑스군, 영국군, 벨기에군의 병사들은 긍정적으로 화답했고 그들은 대표자들끼리 만나 크리스마스에 휴전할 것을 합의합니다. 공식적인 친교행위는 반역죄로 간주되어 처벌될거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병사들은 크리스마스만이라도 평화를 원했고 현장 장교들은 그런 행위를 묵인해줍니다. 그들은 서로 참호 밖으로 나와 그동안 방치되어 있던 시체들의 장례식을 합동으로 치뤘고, 서로의 보급품을 교환했고, 가족사진을 보여주고, 서로의 이발을 해 줍니다. 같이 사진을 찍고 축구경기를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국가에 대한 배신 행위였지만 실상 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에 대한 배신 행위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현실이 미쳤기 때문에, 크리스마스에 영국군, 프랑스군, 독일군, 벨기에군 병사들은 광기의 대안을 찾았고, 그것은 자연스럽고 건전한, 공포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들은 평화를 이뤄냈고 그럼으로써 일시적으로나마 스스로를 치유했습니다.

촛불이 반짝거리는 곳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완벽한 영어로 '애니 로리(Annie Laurie)'를 불렀다. 아직 믿을 수 없어하는 적에게 보내는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한소절 한소절 넘어갈수록 의혹은 사라지고 유혹은 커져갔다. 크리스마스 이브는 마술적인 순간이었다. 영국군 이병 퀸튼은 이 장면을 15년 후 플뢰르베 전투에 관한 보고에서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기록했다. "전쟁과 민족적 증오에 대한 모든 생각이 갑자기 사라졌다. 우리는 그때 아이들처럼 행복했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지나간 뒤 병사들은 그 이전보다 노골적으로 반발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다시 서로에게 총을 쏘기 싫어했고 이 잠깐의 휴식을 더 즐기고자 했습니다. 본국에서 화려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즐기던 최고위 사령관들은 이런 보고를 받고 강력한 대응을 요구했으며 현장 장교들은 즉결처형을 거론하며 협박합니다. 그런 대응에 주저하고 우물거리며 병사들은 결국 단념합니다. 모순을 저항으로 바꾸는 방법을 그들은 아직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병사들은 불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병사들은 다른 식의 전략을 생각해냈고, 전쟁이 다시 시작되자 그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그들은 상대편을 향해 총을 쏘기는 했지만 정확히 겨냥하지 않았는데,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따르지 않는 것은 단순하고도 매력적인 해결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전쟁은 멈춰지지 않았습니다. 교황의 전쟁중단 호소는 현장까지 전해지지 않았고, 언론은 지속적으로 상대방을 악으로 묘사하는 홍보물을 배포했습니다.

모든 선전포고는 일종의 국민축제가 되어야 해. 투우경기에서처럼 입장권과 음악이 있는 축제 말이야. 경기장에는 수영복을 입고 몽둥이를 든 양국의 장관과 장군들이 선수로 등장하지. 거기서 서로 싸워서 남은 사람의 국가가 승리하는 거야. 여기서 엉뚱한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고 나은 방법이잖아. - '서부전선 이상 없다' 中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던 전쟁터 속에서 병사들은 '우린 쏘지 않겠다, 너희도 쏘지 마라' 와 같은 인식을 공유했고 음악의 힘을 통해서, 크리스마스라는 공통된 종교적 힘을 통해서 잠깐이나마 평화의 모습을 구현합니다. 그런 평화에의 갈망은 일시적으로나마 권위에의 복종도 이겨냅니다. 하지만 그후 지속된 전쟁속에서 그러한 용기는 더이상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현재까지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저 '우린 쏘지 않겠다, 너희도 쏘지 마라'라고 말하면 될 것을, 음악 한 소절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크리스마스 휴전 Dear 그림책
존 패트릭 루이스 지음, 서애경 옮김, 게리 켈리 그림 / 사계절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다른사람의 신뢰를 얻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물보다 진하다는 피로 이루어진 관계에서도 돈문제 등으로 서로 신뢰를 잃기도 하고, 연인끼리 혹은 친구 사이에서도 신뢰는 쉽게 얻기 힘듭니다. 그러한 신뢰관계를 바로 어제만 해도 자신의 목숨을 노리던 사람과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기적이라고 불리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적은 1차 세계대전 도중 일어났습니다. 특정한 지역의 특별한 사람의 기적이 아닌 수많은 사람이 낳은 기적이였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유럽인들은 전쟁 직전에는 더불어 살았던 이웃들끼리 싸워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전쟁 직전엔 수십만명이 모여 평화시위를 벌였지만, 전쟁이 시작되자 흑백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애국주의자들과 언론에서는 전쟁을 찬양했고 고무했으며, 대중들은 점차 서로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게 됩니다. 이런 거대한 물결에 수많은 반전주의자들, 유명한 학자들 또한 휩쓸려 전쟁에 찬성합니다. 그 와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평화를 외친 유명한 학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뿐이였습니다. 젊은이들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열광적으로 전쟁에 참여합니다. 당시 시작된 여성해방의 흐름은 영국의 과격 여권론자들로 하여금 여성의 병역의무 도입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기도 하게 했습니다. 여권론자들은 거리에서 군복을 입지 않은 젊은 남자를 만나면 전선으로 떠나지 않은 남자는 겁쟁이라는 의미의 흰 깃털을 건네곤 했습니다.

평화주의는 나를 지배하는 본능적인 감정이다. 어떤 식의 이론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증오와 잔혹성에 반대하는 마음 깊은 곳의 저항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대중은 선전에 중독되지 않는 한 결코 전쟁을 열망할 수 없다. - 아인슈타인 

전쟁이 시작되고 어떤 편도 결정적인 땅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부전선에선 지하에 참호를 파고 끝없는 참호전이 시작됩니다. 참호에서의 삶은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축축함과 추위, 이와 쥐에 맞서 싸워야 했고 적의 공격, 부실한 보급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광기어린 선동에 휩싸인 젊은이들은 전쟁터에 와서야 전쟁의 실상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그들은 열광적인 전투 대신 생존을 위한 투쟁을 시작합니다. 전쟁 초기의 몇달 동안 서부전선 전체 참호들에서는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일종의 합의가 통용됩니다. 볼일을 보러 갈 때는 공격하지 않았고, 식사할 때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막대기에 고정해서 엄호 위에 높이 세운 표지판으로 각자 식사시간을 알리면 대략 1시간 정도는 사격을 중지했습니다. 독일군, 프랑스군 혹은 영국군의 많은 매복저격병들은 교대시나 정찰시에 우연히 서로를 만나면 사적인 휴전을 결정하곤 했습니다. 전쟁이 5개월 정도 진행된 후로는 서로 쏘지 않기 위해서 차라리 상대편을 못 본 척하기도 합니다. 이런 인간적인 몇몇 요구들은 보잘것없는 병사들의 묵인 속에서 존중되고 실현되었습니다. 그들이 침묵했던 이유는 무엇보다 사령부에 있는 최고위 사령관들보다는 반대편의 비슷한 계급의 병사들과 더 많은 공통점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체는 쌓여갔고, 병사들은 절실히 평화를 원했습니다.

1914년 크리스마스 이브날, 독일군 진지에서 노래소리가 들려옵니다. 어떤 지역에선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들려왔고, 어떤 지역에선 '아데스테 피델레스'가 들려 왔습니다. 독일군의 노래에 프랑스군, 영국군, 벨기에군의 병사들은 긍정적으로 화답했고 그들은 대표자들끼리 만나 크리스마스에 휴전할 것을 합의합니다. 공식적인 친교행위는 반역죄로 간주되어 처벌될거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병사들은 크리스마스만이라도 평화를 원했고 현장 장교들은 그런 행위를 묵인해줍니다. 그들은 서로 참호 밖으로 나와 그동안 방치되어 있던 시체들의 장례식을 합동으로 치뤘고, 서로의 보급품을 교환했고, 가족사진을 보여주고, 서로의 이발을 해 줍니다. 같이 사진을 찍고 축구경기를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국가에 대한 배신 행위였지만 실상 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에 대한 배신 행위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현실이 미쳤기 때문에, 크리스마스에 영국군, 프랑스군, 독일군, 벨기에군 병사들은 광기의 대안을 찾았고, 그것은 자연스럽고 건전한, 공포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들은 평화를 이뤄냈고 그럼으로써 일시적으로나마 스스로를 치유했습니다.

촛불이 반짝거리는 곳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완벽한 영어로 '애니 로리(Annie Laurie)'를 불렀다. 아직 믿을 수 없어하는 적에게 보내는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한소절 한소절 넘어갈수록 의혹은 사라지고 유혹은 커져갔다. 크리스마스 이브는 마술적인 순간이었다. 영국군 이병 퀸튼은 이 장면을 15년 후 플뢰르베 전투에 관한 보고에서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기록했다. "전쟁과 민족적 증오에 대한 모든 생각이 갑자기 사라졌다. 우리는 그때 아이들처럼 행복했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지나간 뒤 병사들은 그 이전보다 노골적으로 반발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다시 서로에게 총을 쏘기 싫어했고 이 잠깐의 휴식을 더 즐기고자 했습니다. 본국에서 화려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즐기던 최고위 사령관들은 이런 보고를 받고 강력한 대응을 요구했으며 현장 장교들은 즉결처형을 거론하며 협박합니다. 그런 대응에 주저하고 우물거리며 병사들은 결국 단념합니다. 모순을 저항으로 바꾸는 방법을 그들은 아직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병사들은 불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병사들은 다른 식의 전략을 생각해냈고, 전쟁이 다시 시작되자 그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그들은 상대편을 향해 총을 쏘기는 했지만 정확히 겨냥하지 않았는데,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따르지 않는 것은 단순하고도 매력적인 해결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전쟁은 멈춰지지 않았습니다. 교황의 전쟁중단 호소는 현장까지 전해지지 않았고, 언론은 지속적으로 상대방을 악으로 묘사하는 홍보물을 배포했습니다.

모든 선전포고는 일종의 국민축제가 되어야 해. 투우경기에서처럼 입장권과 음악이 있는 축제 말이야. 경기장에는 수영복을 입고 몽둥이를 든 양국의 장관과 장군들이 선수로 등장하지. 거기서 서로 싸워서 남은 사람의 국가가 승리하는 거야. 여기서 엉뚱한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고 나은 방법이잖아. - '서부전선 이상 없다' 中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던 전쟁터 속에서 병사들은 '우린 쏘지 않겠다, 너희도 쏘지 마라' 와 같은 인식을 공유했고 음악의 힘을 통해서, 크리스마스라는 공통된 종교적 힘을 통해서 잠깐이나마 평화의 모습을 구현합니다. 그런 평화에의 갈망은 일시적으로나마 권위에의 복종도 이겨냅니다. 하지만 그후 지속된 전쟁속에서 그러한 용기는 더이상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현재까지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저 '우린 쏘지 않겠다, 너희도 쏘지 마라'라고 말하면 될 것을, 음악 한 소절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통령의 길 룰라
리차드 본 지음, 박원복 옮김 / 글로연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2002년부터 2010년까지 브라질 대통령직을 지낸 룰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룰라의 개인적인 삶과 도전 뿐만 아니라 브라질 정치사에 대한 포괄적인 부분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브라질 근현대사에 대한 큰 틀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군부독재와 민주화운동, 노동쟁의, 4번의 대선 도전 끝에 처음으로 좌파진영에서 대통령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과, 대통령직에서 물러난지 2년이 되는 지금에는 그 업적을 평가함으로써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루이스 이나시우 다 시우바, 가족들에게 룰라로 불리던 루이스는 어머니 혼자 아이들을 키우는 집안에서 7번째 자식으로 태어납니다. 룰라의 가족은 매우 가난했고, 가족의 벌이로는 옷과 소금을 겨우 살 정도였습니다. 룰라의 가족은 돈을 벌기 위해 산업핵심지역에 정착했고 공장노동자와 가정부로 일하게 됩니다. 이 당시 브라질의 민주주의는 구시대의 산물이였는데, 농업중심국가에서 근대자본주의가 태동하던 시기였고 경제적 민족주의가 도입됩니다. 사회적 변화 속에서 당시 바르가스 정부는 군부의 압력을 받았고, 1954년에는 결국 가난한 자들의 어버이라고 불렸던 당시 대통령이였던 제뚤리우 바르가스가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이후 1964년엔 미국 정부의 은밀한 지원을 받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3일간 진행된 이 쿠데타는 거의 피를 흘리지 않은 무혈쿠데타였으며, 20여년간 군부가 브라질을 지배하게 됩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10대였던 룰라는 구두닦이, 나사 생산공장, 선반공과 같은 일을 했으며 야간 선반공으로 일하던 중 왼손 새끼손가락을 잃게 됩니다.

군사정권은 반인플레이션 긴축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근로자들의 소득을 쥐어짜는 것이었습니다. 룰라는 이때 금속노동자들의 파업에 참가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룰라는 전형적인 젊은 근로자였습니다. 축구를 광적으로 좋아했으며 정치나 노조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에 반해 룰라의 형 프레이 쉬꾸는 노동투쟁에 점차 적극 가담했고 훗날 룰라를 노조계로 끌어들이게 됩니다. 룰라는 군부의 옹호자들이 이른바 경제기적이라고 불렀던 것의 어두운 이면을 살고 있었습니다. 작업환경이 열악한 공장들, 추락한 삶의 질 그리고 근로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던 사람들이 감시를 당하고 체포되어 자신의 권리마저 잃던 환경 속에서 점차 노조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룰라는 23살에 결혼했는데, 2년뒤인 1971년 임신중이던 아내가 의료 서비스의 부적절함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은 룰라에게 노조에서의 사회지원 업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주었으며, 수백만에 달하는 가난한 브라질 국민에 대한 의료서비스가 정말 부적절하고 수준 이하라는 걸 알게 됩니다. 아내의 죽음을 계기로 룰라는 노조활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룰라는 점차 노조를 이끌어갔고, 룰라의 노조는 임금 인상과 근로조건을 향상시키고 조용한 삶을 추구하는데 모든 노력을 경주했으며, 그 과정에서 노조원들을 비폭력적으로 인도했습니다. 룰라가 노조위원장으로 취임했을 당시 최저임금은 최소 생필품 구입비용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으며, 최고 부유층은 GDP의 67%를 차지함으로서 매우 불평등한 사회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브라질의 최저임금은 1년에 한번씩 제뚤리우 바르가스 재단이 조사, 발표하던 인플레이션에 기초하여 조정되었는데 재단이 인플레이션을 22.5%라고 측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정권이 12.6%라고 조작, 발표했던 것이 브라질 최대 일간지 중 하나인 폴랴 지상파울루에 폭로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 결과 3년 넘게 진행된 정부의 수치 조작으로 근로자들이 받지 못한 누적임금이 34.1%에 달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룰라는 파업투쟁을 결정했고 성공적인 파업투쟁 끝에 룰라는 금속노조원뿐만 아니라 일약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하게 됩니다. 1970년대 룰라를 포함하여 더욱 진보적인 노조지도자들이 확실하게 노동자를 위한 정당, 노동자당(PT)의 창당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것은 많은 논쟁거리를 낳았습니다. 브라질공산당을 비롯, 노동자계급에 기반한 정당이 이미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노동자당의 창당의 동기는 분명했는데, 의심할 여지없이 당시의 어떤 정당도 진정으로 노동자계층을 대변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정당들은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이 잠식되는것을 반대하거나 문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룰라는 노동자당을 이끌게 되었고, 대통령 직선제라는 새로운 이슈를 제시합니다. 노동자당은 주요 정당으로서는 처음으로 대통령 직선제라는 문제에 전력투구하였고, 이 논의는 브라질민주운동당과 민주노동당 그리고 노동자당을 하나로 묶어주었습니다.

노동자당은 초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점차 지지를 얻어가면서 큰 정당으로 성장해갑니다. 실질적인 성과를 거둠으로서 능력을 입증하기도 했는데, 노동자당이 당선된 도시에서는 민주주의의 실천과 무토지농민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해 주민참여 예산제를 실시했는데, 이 제도의 활성화로 50개의 학교가 세워졌고, 주택수가 늘었으며, 하수처리시스템 보급률도 46%에서 86%로 늘어나기도 합니다. 룰라는 군부종식 이후 언제나 강력한 대선후보 중 한명이였지만, 번번히 대선에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98년 페르난두 엥히끼 까르도주 대통령은 룰라와의 대선경선에서 승리해 재선에 성공했지만, 그의 열렬한 신자유주의 정책은 농촌지역에서의 알력을 증폭시키곤 했습니다. 까르도주는 국영기업의 민영화와 노동시장을 바꾸려는 의지 때문만이 아니라 헤알화의 견고함과 세입 이상의 지출을 제한한 조세법 때문에 국제적으로 큰 환영을 받았고, 선진국 기업가들에게는 가장 사랑스러운 인물이 되었습니다. 룰라는 시장의 힘이 보여주고 있는 비인간적인 면과 브라질의 경제적 자주권 상실 문제를 통렬히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까르도주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에서 발생한 심각한 경제적 빈부격차, IMF긴급구제금융 등의 문제를 낳았고, 이와 같은 상황에서 룰라를 중심으로 한 야권의 결집은 룰라의 선거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결국 룰라는 4번째의 대선 도전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고 2002년에 대통령이 됩니다.

왜 부자들을 돕는 것은 투자라고 하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은 비용이라고 말하는가? 

좌파진영이였던 룰라가 당선되자 일각에서는 룰라가 경제를 망칠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룰라는 건전한 통화, 고금리, 무역흑자, 그리고 공공부채 부담의 점진적인 경감 등 보다 보수적인 입장을 약속했고 보수쪽 인사를 러닝메이트로 받아들임으로서 좌우의 화합을 유도했습니다. 룰라의 대선공약의 핵심은 기아제로 프로젝트였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최저소득 보장과 최저임금 인상과 연계되었으며, 브라질의 거대한 부의 불평등 문제를 상쇄하기 위해 고안된, 반 빈곤정책의 일부였습니다. 초기에 기아제로의 기본 개념은 가난한 가정에 250헤알까지의 쿠폰을 제공하면 이 가정이 지정된 가게에 가서 그것을 음식으로 바꾸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스템은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고, 그리하여 2004년 이 정책은 극빈가정에 소득을 보전해주는 전략인 보우사 파밀리아 제도로 교체되었습니다. 이 제도의 혜택을 받은 가구수가 빠르게 증가해 극빈생활을 하던 5000~6000만명의 브라질 사람들이 가난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2005년 시사주간지 베자에 실린 부패 비디오 폭로는 윤리적인 정당으로서의 노동자당 평판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비디오에는 노동자당과 연정을 구성하고 있는 정당 가운데 하나인 브라질노동당 중 한명이 국영기업들로부터 뇌물을 상납받고 있었는데, 이 부패 스캔들로 인해 노동자당의 총재 제누이누가 사임했고, 정무장관 경질, 당 사무총장과 회계담당자가 당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이 멩살렁이라 불리우는 브라질 정계의 관행은 여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였습니다. 하지만 룰라 대통령에 대한 의혹까지 번지지는 않았습니다. 룰라의 친인척 중 몇몇은 미천한 환경 속에서 일을 계속했는데, 그의 누이 찌아나는 위험한 빈민촌 지역에 위치한 학교에서 청소부로 일을 했습니다. 룰라는 자신의 친인척으로부터 가족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여러 위기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그를 신임했고, 결국 2006년 재선에 성공하게 됩니다.

2010년 그가 퇴임하던 해, 브라질의 신문에 파파라치가 찍은 룰라의 사진 한 장이 실렸다. 브라질 북동부의 살바도르라는 도시 인근에서 휴가를 보내던 그가 반바지에 런닝셔츠를 걸치고 슬리퍼를 신은 장면이었다. 그 사진에는 룰라의 부인부터 친구, 비서관들의 모습도 함께 나타났는데 룰라가 제일 앞장서서 머리에 맥주가 든 아이스박스를 이고 가는 모습이었다. 대통령이 맥주가 든 아이스박스를 머리에 이고 가는데 주변의 친구나 비서관들은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 자연스레 그의 뒤를 따르는 모습은 파파라치가 몰래 찍었을 뿐만 아니라 평소의 룰라 대통령 모습을 드러낸 것이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 p.419

퇴임한지 2년이 지난 지금, 과거 8년간의 룰라정부의 평가는 대체로 호의적입니다. 신자유주의에서 거의 필연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빈부격차를 많이 해소했고, 빈부격차를 해소함에 있어서 세금인상이나 국영기업의 민영화라는 조치 없이 성공적으로 해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회계층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GDP는 4600억달러에서 1조 8천억달러로 상승했고, 물가상승률은 12.5%에서 5.6%로 낮췄습니다. 공공기관의 투명성과 시민단체의 활동을 보장했고, 외교적인 부분에서도 개발도상국들의 이해관계를 잘 조율해 G8, WTO와 같은 세계 각 포럼과 회의에서 발언권을 강화했습니다. 그 결과 퇴임시 국민지지도가 87%인 상태에서 퇴임했으며, 퇴임 이후에도 룰라 개인에 대한 평가는 호의적입니다. 물론 룰라정부에 대한 비판도 존재합니다. 정치 및 선거개혁의 일환으로 추진한 선거 유세비용 지원에 대한 법률 개정이 상원에서 통과받지 못해 정치 및 선거개혁에 실패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해외로의 순방이 너무 많다는 평가도 있고, 중졸이라는 학력과 영어를 못하고 비문법적인 포르투갈어를 쓴다는 것도 일부에선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룰라가 정치생활을 하면서 보여줬던 장점과 결점은 아직도 평가중입니다. 그의 모습은 룰라라는 대통령의 길을 보며 우리가 원하는 지도자상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