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대통령의 길 룰라
리차드 본 지음, 박원복 옮김 / 글로연 / 2012년 6월
평점 :
이 책은 2002년부터 2010년까지 브라질 대통령직을 지낸 룰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룰라의 개인적인 삶과 도전 뿐만 아니라 브라질 정치사에 대한 포괄적인 부분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브라질 근현대사에 대한 큰 틀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군부독재와 민주화운동, 노동쟁의, 4번의 대선 도전 끝에 처음으로 좌파진영에서 대통령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과, 대통령직에서 물러난지 2년이 되는 지금에는 그 업적을 평가함으로써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루이스 이나시우 다 시우바, 가족들에게 룰라로 불리던 루이스는 어머니 혼자 아이들을 키우는 집안에서 7번째 자식으로 태어납니다. 룰라의 가족은 매우 가난했고, 가족의 벌이로는 옷과 소금을 겨우 살 정도였습니다. 룰라의 가족은 돈을 벌기 위해 산업핵심지역에 정착했고 공장노동자와 가정부로 일하게 됩니다. 이 당시 브라질의 민주주의는 구시대의 산물이였는데, 농업중심국가에서 근대자본주의가 태동하던 시기였고 경제적 민족주의가 도입됩니다. 사회적 변화 속에서 당시 바르가스 정부는 군부의 압력을 받았고, 1954년에는 결국 가난한 자들의 어버이라고 불렸던 당시 대통령이였던 제뚤리우 바르가스가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이후 1964년엔 미국 정부의 은밀한 지원을 받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3일간 진행된 이 쿠데타는 거의 피를 흘리지 않은 무혈쿠데타였으며, 20여년간 군부가 브라질을 지배하게 됩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10대였던 룰라는 구두닦이, 나사 생산공장, 선반공과 같은 일을 했으며 야간 선반공으로 일하던 중 왼손 새끼손가락을 잃게 됩니다.
군사정권은 반인플레이션 긴축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근로자들의 소득을 쥐어짜는 것이었습니다. 룰라는 이때 금속노동자들의 파업에 참가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룰라는 전형적인 젊은 근로자였습니다. 축구를 광적으로 좋아했으며 정치나 노조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에 반해 룰라의 형 프레이 쉬꾸는 노동투쟁에 점차 적극 가담했고 훗날 룰라를 노조계로 끌어들이게 됩니다. 룰라는 군부의 옹호자들이 이른바 경제기적이라고 불렀던 것의 어두운 이면을 살고 있었습니다. 작업환경이 열악한 공장들, 추락한 삶의 질 그리고 근로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던 사람들이 감시를 당하고 체포되어 자신의 권리마저 잃던 환경 속에서 점차 노조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룰라는 23살에 결혼했는데, 2년뒤인 1971년 임신중이던 아내가 의료 서비스의 부적절함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은 룰라에게 노조에서의 사회지원 업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주었으며, 수백만에 달하는 가난한 브라질 국민에 대한 의료서비스가 정말 부적절하고 수준 이하라는 걸 알게 됩니다. 아내의 죽음을 계기로 룰라는 노조활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룰라는 점차 노조를 이끌어갔고, 룰라의 노조는 임금 인상과 근로조건을 향상시키고 조용한 삶을 추구하는데 모든 노력을 경주했으며, 그 과정에서 노조원들을 비폭력적으로 인도했습니다. 룰라가 노조위원장으로 취임했을 당시 최저임금은 최소 생필품 구입비용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으며, 최고 부유층은 GDP의 67%를 차지함으로서 매우 불평등한 사회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브라질의 최저임금은 1년에 한번씩 제뚤리우 바르가스 재단이 조사, 발표하던 인플레이션에 기초하여 조정되었는데 재단이 인플레이션을 22.5%라고 측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정권이 12.6%라고 조작, 발표했던 것이 브라질 최대 일간지 중 하나인 폴랴 지상파울루에 폭로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 결과 3년 넘게 진행된 정부의 수치 조작으로 근로자들이 받지 못한 누적임금이 34.1%에 달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룰라는 파업투쟁을 결정했고 성공적인 파업투쟁 끝에 룰라는 금속노조원뿐만 아니라 일약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하게 됩니다. 1970년대 룰라를 포함하여 더욱 진보적인 노조지도자들이 확실하게 노동자를 위한 정당, 노동자당(PT)의 창당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것은 많은 논쟁거리를 낳았습니다. 브라질공산당을 비롯, 노동자계급에 기반한 정당이 이미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노동자당의 창당의 동기는 분명했는데, 의심할 여지없이 당시의 어떤 정당도 진정으로 노동자계층을 대변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정당들은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이 잠식되는것을 반대하거나 문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룰라는 노동자당을 이끌게 되었고, 대통령 직선제라는 새로운 이슈를 제시합니다. 노동자당은 주요 정당으로서는 처음으로 대통령 직선제라는 문제에 전력투구하였고, 이 논의는 브라질민주운동당과 민주노동당 그리고 노동자당을 하나로 묶어주었습니다.
노동자당은 초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점차 지지를 얻어가면서 큰 정당으로 성장해갑니다. 실질적인 성과를 거둠으로서 능력을 입증하기도 했는데, 노동자당이 당선된 도시에서는 민주주의의 실천과 무토지농민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해 주민참여 예산제를 실시했는데, 이 제도의 활성화로 50개의 학교가 세워졌고, 주택수가 늘었으며, 하수처리시스템 보급률도 46%에서 86%로 늘어나기도 합니다. 룰라는 군부종식 이후 언제나 강력한 대선후보 중 한명이였지만, 번번히 대선에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98년 페르난두 엥히끼 까르도주 대통령은 룰라와의 대선경선에서 승리해 재선에 성공했지만, 그의 열렬한 신자유주의 정책은 농촌지역에서의 알력을 증폭시키곤 했습니다. 까르도주는 국영기업의 민영화와 노동시장을 바꾸려는 의지 때문만이 아니라 헤알화의 견고함과 세입 이상의 지출을 제한한 조세법 때문에 국제적으로 큰 환영을 받았고, 선진국 기업가들에게는 가장 사랑스러운 인물이 되었습니다. 룰라는 시장의 힘이 보여주고 있는 비인간적인 면과 브라질의 경제적 자주권 상실 문제를 통렬히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까르도주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에서 발생한 심각한 경제적 빈부격차, IMF긴급구제금융 등의 문제를 낳았고, 이와 같은 상황에서 룰라를 중심으로 한 야권의 결집은 룰라의 선거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결국 룰라는 4번째의 대선 도전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고 2002년에 대통령이 됩니다.
왜 부자들을 돕는 것은 투자라고 하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은 비용이라고 말하는가?
좌파진영이였던 룰라가 당선되자 일각에서는 룰라가 경제를 망칠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룰라는 건전한 통화, 고금리, 무역흑자, 그리고 공공부채 부담의 점진적인 경감 등 보다 보수적인 입장을 약속했고 보수쪽 인사를 러닝메이트로 받아들임으로서 좌우의 화합을 유도했습니다. 룰라의 대선공약의 핵심은 기아제로 프로젝트였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최저소득 보장과 최저임금 인상과 연계되었으며, 브라질의 거대한 부의 불평등 문제를 상쇄하기 위해 고안된, 반 빈곤정책의 일부였습니다. 초기에 기아제로의 기본 개념은 가난한 가정에 250헤알까지의 쿠폰을 제공하면 이 가정이 지정된 가게에 가서 그것을 음식으로 바꾸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스템은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고, 그리하여 2004년 이 정책은 극빈가정에 소득을 보전해주는 전략인 보우사 파밀리아 제도로 교체되었습니다. 이 제도의 혜택을 받은 가구수가 빠르게 증가해 극빈생활을 하던 5000~6000만명의 브라질 사람들이 가난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2005년 시사주간지 베자에 실린 부패 비디오 폭로는 윤리적인 정당으로서의 노동자당 평판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비디오에는 노동자당과 연정을 구성하고 있는 정당 가운데 하나인 브라질노동당 중 한명이 국영기업들로부터 뇌물을 상납받고 있었는데, 이 부패 스캔들로 인해 노동자당의 총재 제누이누가 사임했고, 정무장관 경질, 당 사무총장과 회계담당자가 당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이 멩살렁이라 불리우는 브라질 정계의 관행은 여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였습니다. 하지만 룰라 대통령에 대한 의혹까지 번지지는 않았습니다. 룰라의 친인척 중 몇몇은 미천한 환경 속에서 일을 계속했는데, 그의 누이 찌아나는 위험한 빈민촌 지역에 위치한 학교에서 청소부로 일을 했습니다. 룰라는 자신의 친인척으로부터 가족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여러 위기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그를 신임했고, 결국 2006년 재선에 성공하게 됩니다.
2010년 그가 퇴임하던 해, 브라질의 신문에 파파라치가 찍은 룰라의 사진 한 장이 실렸다. 브라질 북동부의 살바도르라는 도시 인근에서 휴가를 보내던 그가 반바지에 런닝셔츠를 걸치고 슬리퍼를 신은 장면이었다. 그 사진에는 룰라의 부인부터 친구, 비서관들의 모습도 함께 나타났는데 룰라가 제일 앞장서서 머리에 맥주가 든 아이스박스를 이고 가는 모습이었다. 대통령이 맥주가 든 아이스박스를 머리에 이고 가는데 주변의 친구나 비서관들은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 자연스레 그의 뒤를 따르는 모습은 파파라치가 몰래 찍었을 뿐만 아니라 평소의 룰라 대통령 모습을 드러낸 것이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 p.419
퇴임한지 2년이 지난 지금, 과거 8년간의 룰라정부의 평가는 대체로 호의적입니다. 신자유주의에서 거의 필연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빈부격차를 많이 해소했고, 빈부격차를 해소함에 있어서 세금인상이나 국영기업의 민영화라는 조치 없이 성공적으로 해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회계층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GDP는 4600억달러에서 1조 8천억달러로 상승했고, 물가상승률은 12.5%에서 5.6%로 낮췄습니다. 공공기관의 투명성과 시민단체의 활동을 보장했고, 외교적인 부분에서도 개발도상국들의 이해관계를 잘 조율해 G8, WTO와 같은 세계 각 포럼과 회의에서 발언권을 강화했습니다. 그 결과 퇴임시 국민지지도가 87%인 상태에서 퇴임했으며, 퇴임 이후에도 룰라 개인에 대한 평가는 호의적입니다. 물론 룰라정부에 대한 비판도 존재합니다. 정치 및 선거개혁의 일환으로 추진한 선거 유세비용 지원에 대한 법률 개정이 상원에서 통과받지 못해 정치 및 선거개혁에 실패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해외로의 순방이 너무 많다는 평가도 있고, 중졸이라는 학력과 영어를 못하고 비문법적인 포르투갈어를 쓴다는 것도 일부에선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룰라가 정치생활을 하면서 보여줬던 장점과 결점은 아직도 평가중입니다. 그의 모습은 룰라라는 대통령의 길을 보며 우리가 원하는 지도자상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