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미국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조지 레이코프 지음, 유나영 옮김 / 삼인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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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저자 레이코프는 버클리에서 인지과학 입문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첫 과제를 내줍니다. 그 과제는 바로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를 듣고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는 것' 입니다. 과연 성공한 학생이 있었을까요? 그는 지금까지 단 한명의 학생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언어는 그 언어 자체뿐만 아니라 언어와 관련된 종합적인 프레임을 가져옵니다. 프레임을 부정하기 위해선 프레임을 떠올려야 하기 때문에, 부정해야 한다는 원래 취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경쟁자의 프레임을 공격하는 것은 경쟁자의 메시지를 더욱 강화해 줄 뿐이라는 교훈은 그의 프레임 이론이 왜 2004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이 승리했는지를 효과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프레임은 어떤 이미지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종류의 지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코끼리는 긴 코와 귀, 큰 덩치, 아프리카, 서커스 쇼, 화나면 무섭다 등과 같은 여러가지 정보에 의해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런 언어의 숨겨진 은유들은 잘 사용하면 그 언어 자체 외에 자기가 원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화당의 조지W부시가 사용했던 세금구제(Tax relief), 부모동의서(permission slip), 깨끗한 하늘 계획(The Clear Skies Initiative), 부분출산(Partial-birth), 죽음의 세금(death tax) 등과 같은 단어들은 곧바로 프레임을 형성하고 논쟁을 지배하게 됩니다. 이러한 단어는 보수적인 폭스뉴스 뿐만 아니라, CNN, NBC를 포함한 모든 방송사, 심지어 반대파인 민주당 상원의원마저 세금구제와 같은 말을 쓰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프레임을 취합함으로서 그 안에 내재된 은유적이고 본질적인 생각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설령 깨끗한 하늘 계획이 사실은 대기오염도를 높이는 정책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일찍이 리처드 닉슨은 그 진리를 뼈아픈 방식으로 깨달았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고 그가 한창 사임 압력을 받던 당시의 일입니다. 이때 그는 TV에 나와 연설을 했는데 여기서 닉슨은 전국에다 대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그 순간 모두가 그를 사기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답니다. - p.24

미국의 정치의 핵심으로 레이코프는 이상화된 가족구조의 두가지 모델을 제시하는데, 엄격한 아버지와 자상한 부모 모델입니다. 엄격한 아버지 모델은, 세상이 앞으로 위험하고 살기 힘들고, 아이들은 본성이 나쁘기 때문에 선하게 다듬어져야 한다고 가정합니다. 엄격한 아버지는 가족을 지원하고 방어하는 도덕적 권위자로서, 신체적 훈육을 통해 내면적 규율을 달성하고 도덕성과 생활력을 증진합니다. 잘 훈육된 자녀는 자기 힘으로 삶을 꾸리기 때문에 의존적인 자녀들에게는 더욱 엄격한 훈육과 바깥 세상에서 단련될 수 있도록 어떠한 지원도 단호히 끊어야 합니다. 이런 관념을 국가에 투사하면, 사회복지 프로그램은 사람들을 버릇없게 만들기 때문에 악한 것이며 제거되어야 하고, 강력한 국방으로 국가를 보호하고, 기업활동을 지원하고 형벌을 통해 질서를 수호합니다. 얼마나 부를 쌓느냐가 선한 시민의 척도가 되고, 세금은 선한 사람들에 대한 벌입니다. 그에 반해 자상한 부모 모델은 세상은 기본적으로 좋은 것으로 가정하고, 그렇게 만드는것이 책임임을 가정합니다. 아이들은 선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며 부모의 역할은 그것을 공동으로 북돋아 주는 것입니다. 이런 관념을 국가에 투사하면, 공감과 책임이 핵심 가족가치이기 때문에, 사회 안전망과 정부보호, 보통교육, 인프라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핵심이 됩니다.

현실의 사람은 이런 엄격한 아버지 모델과, 자상한 부모 모델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모델에 어느정도 능동적이냐에 따라 사람의 이념이 형성되는데, 이런 언어의 프레임을 활용하면 특정 모델에 힘을 실어줄 수 있습니다. 공화당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선 이런 엄격한 아버지 모델이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는것을 터득했고, 테러에 대한 전쟁 프레임 등을 포함한 각종 수사는 자연스럽게 엄격한 아버지 프레임을 작동시켜 대중들에게 정치를 보수적인 관점에서 받아들이게 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그에 반해 민주당은 그러한 프레임 쟁탈전을 포함한 선거전략에서 실패합니다. 미국 보수주의자들은 30~40년 일찍 출발했고, 20억달러가 넘게 두뇌 집단에 투자했습니다. 우익 두뇌 집단은 막대한 포괄적 보조금과 기부금을 받고 있으며, 이 자금은 최신식 건물과 인적 자원을 육성하는데 사용됩니다. 그에 반해 진보적 재단은 사람들을 될수 있는 한 많이 돕는것이 원래 가치이기 때문에 인재 개발이나 인프라 건설에 쓸 돈이 남아있질 않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공론의 선택, 미디어의 영향력적인 면에서 우익 두뇌 집단의 우위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TV에 출연하는 지식인 중 80퍼센트가 보수주의 두뇌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는데, 연구에 쏟아부은 돈과 미디어에 노출된 시간은 비례함을 보여줍니다. 2002년 우익이 연구비로 지출한 돈은 좌파의 4배인데, 미디어에 노출된 시간 또한 4배였습니다. 투자한 만큼 효과를 거둔 것입니다.

또한 민주당의 선거실패요인으로는 관점의 실패가 있었는데 그것은 계몽주의의 신화로부터 비롯됩니다. 계몽주의의 두가지 신화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합리적인 존재이므로, 우리가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려 주기만 하면 그들은 옳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는 가정과 "자기 이익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따라서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기 이익에 기초하여 사고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합리주의적 관점이 민주당의 주요 방식이였는데, 2000년 대선에서 고어가 부시의 감세안이 상위 부자들에게만 혜택을 준다는 사실을 되풀이해 강조해도 여전히 가난한 보수주의자들은 민주당에게서 등을 돌렸습니다. 그것은 이익에 따라서 투표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투표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자기 이익에 전혀 관심이 없는것은 아니지만, 최우선적으로는 가치관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2003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있었던 노동조합의 태도에서도 알 수 있는데, 당시 주지사였던 그레이 데이비스는 노동자들에게 훨씬 유리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많은 돈을 들여 홍보했고, 실제로 조합원들에게 누구의 입장이 더 유리한지를 물었을때 조합원들은 데이비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누구에게 투표할 것이냐는 질문에 조합원들은 슈워제네거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 대외 정책의 핵심적 은유는 국가를 사람처럼 보는 것이다. 이 은유는 이라크 국가를 사담 후세인이라는 한 인간으로 개념화하는 말을 통해 하루에도 수백 번씩 사용된다. 우리가 듣는 바에 따르면 이 전쟁은 이라크 민중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이 한 사람을 대상으로 시작된다. 일반 미국 시민들은 "사담은 독재자야. 그를 막아야 해." 같은 말을 하면서 이 은유를 사용한다. 이 은유는 물론 첫 이틀동안 투하되는 폭탄 3000발이 그 한 사람에게만 쏟아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은폐한다. 그것들은 이 은유 뒤에 은폐되어 있는 수천 명을 죽일 테고, 그 사람들은 우리가 전쟁하는 대상이 아니다. - p.136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과학이고, 언어를 올바로 사용하는 것은 개념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쟁점을 올바른 프레임으로 구성하는 것, 시각을 반영하는 프레임을 짓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어가 결여된 것은 실제로는 개념이 결여된 것이며, 개념은 프레임이라는 형태로 떠오릅니다. 프레임이 있으면, 언어는 자동으로 따라옵니다. TV에서 보수주의자는 이미 프레임으로 개념이 정립된 세금구제 라는 단어를 두 마디 사용합니다. 그러면 프레임이 없는 진보주의자는 그에 반하는 생각을 한 단락짜리 길이로 논설을 해야 합니다. 프레임이 이미 확립되어 있기 때문에 그 프레임을 사용하는것은 대단히 쉬우며 프레임이 없으면 훨씬 많은 힘이 듭니다. 이런 현상을 인지과학에서는 저인지(hypocognition)이라고 하며, 한두 단어로 불러일으킬 수 있는 비교적 단순하고 고정된 프레임이 결여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저인지상태였기 때문에 민주당은 선거에서 패했다고 레이코프는 지적합니다.

사람들은 경제적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자신의 도덕적 정체성과 가치관에 투표한다는 것, 설령 사실에 기반한 통계 자료를 엄청나게 제시하여 논쟁에서 승리하고, 새로운 정책들을 내놓더라도 승리로 연결되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고 가치관을 확립해 정치적 논쟁의 프레임을 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프레임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기 때문에, 프레임은 우리의 목적, 계획, 방식, 결과를 결정하며 사회정책과 제도를 형성합니다. 이런 프레임을 재구성하는것이 바로 사회적 변화이며 선거결과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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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 지구를 뒤덮다 -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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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도시에 사는 사람의 수는 농촌에 사는 사람보다 많아졌습니다. 이런 도시의 거대화는 수많은 메트로폴리스를 낳았는데, 양쯔강 어귀의 지역은 최대 2700만명을, 인도의 봄베이는 3300만명을 수용할 계획입니다.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상파울루 광역 메트로폴리스는 3700만명에 이르고, 멕시코시티는 5000만명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거대 도시화의 급성장은 전지구적 정치위기인 1970년대 후반의 전세계적 채무위기와 1980년대 IMF주도의 제3세계 경제 구조조정의 유산입니다. 이 뒤틀린 도시 붐은 대다수 전문가의 예상을 뒤엎는 것이였습니다. 도시의 불황이라는 부정적 피드백이 시골에서 도시로 향하는 이주의 속도를 늦추거나, 아예 방향을 뒤바꾸리라고 예측한 종래의 경제 모델과는 달리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런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밀려드는 농민들은 대다수 슬럼으로 가게 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슬럼의 형태는 국가마다 다른데, 미국은 주로 도넛형태(빈민은 도심과 교외 중앙에 밀집)를, 유럽은 접시형태(빈민은 외각의 고층주택)의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슬럼은 셋집, 공공주택, 합숙소, 스쿼터(부재중인 집을 무단점유하는 것)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중 인상적인 것은 거대한 묘지에서 사는 카이로의 사자들의 도시(City of the Dead)의 빈민들로, 유골함을 옷과 냄비를 수납하는 편리한 붙박이 선반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서울의 경우를 예로 들면, 전통적인 스쿼터 정착지에서 쫓겨난 사람들이나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이른바 '쪽방'으로 몰려듭니다. 서울의 쪽방은 5,000개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곳에서는 하룻밤 단위로 잠자리를 임대하고 화장실 1개를 15명이 공동으로 사용합니다.

이런 슬럼의 환경은 대단히 열악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개미굴 같은 빽빽한 슬럼에 몰아넣고 부자들이 정원과 공터를 마음껏 이용하는 것은 수많은 도시의 공통된 특징입니다. 슬럼은 수많은 자연재해와 비위생적인 환경, 공해 등에 시달립니다. 인도 뭄바이에서 숨을 쉬는 것은 하루에 담배 2갑 반을 피우는 것과 같을 정도로 환경이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환경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슬럼으로 몰려들었고, 지금도 몰려들고 있는 것은 생존의 길이 도시로 가는것, 슬럼으로 가는것 외엔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슬럼의 사람들은 슬럼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필사적입니다. 아시아타임스의 보도는 그 이유를 잘 설명해 주는데, 슬럼 주민들을 수도에서 이주시킨 결과, 이주 가구의 평균소득은 약 50퍼센트 감소했습니다. 도시에 있는 일터까지 통근하는 데 최소한 지금 버는 돈의 절반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슬럼 퇴거를 계획하는 대행업자들은 값싼 고층 아파트를 주민들을 위한 대안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슬럼 주민들은 슬럼에거 퇴거당해 이러한 아파트에 살게 되면 재생산 수단이 축소되고 생계형 생산의 가능성도 낮아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 이러한 아파트 위치로 인해서 일자리 확보는 더 어려워진다. 슬럼 주민들이 슬럼을 떠나지 않고 강제퇴거에 맞서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런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이들에게 슬럼이란, 환경은 낙후되어가지만 생산은 아직 가능한 곳이다. 그러나 도시계획자에게 슬럼이란, 그저 없애야 할 도시의 해악에 불과하다. - p.90

19세기 말에 들어서면서, 도시 주민들은 가난해졌는데 집세는 5배가 증가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1㎡당 집세가 가장 비싼 방은 슬럼에서 가장 열악한 곳이었습니다. 가장 열악한 방들은 절대적인 임대 비용이 가장 낮았기 때문에 수요가 가장 많았던 것입니다. 프랭크 스노든의 나폴리 빈민 연구서에 따르면 불행히도 가난한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슬럼 숙소에 대한 수요도 늘어났고, 이로 인해 전반적인 임대료 상승은 지불 능력이 가장 낮은 사람들에게 가장 가혹해졌습니다. 나이로비의 경우 판잣집은 가장 수익 높은 수택 형태인데, 슬럼 지주가 약 3평짜리 판자집을 160달러에 샀다면, 몇 달이면 투자금 전액을 뽑아낼 수 있습니다.

지주들과 사설 개발업자들은 스쿼터들을 조종함으로써 토지의 일부를 부동산 시장에 끌어들일 수 있었습니다. 즉 이들은 당국으로부터 스쿼터를 위한 도시 인프라를 얻어냈고, 이를 통해 땅값을 올리는 동시에 수익 높은 주택건설의 길을 열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스쿼터를 쫓아내는 것이었습니다. 힘겹게 도시의 면적을 늘려놓고 쫓겨난 스쿼터는 늘어난 도시의 변경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슬럼은 홍수, 지진 등에도 취약하지만 가장 슬럼 주민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화재인데, 슬럼 화재는 단순한 사고가 아닐 때가 많습니다. 지주들이나 개발업자들은 사법처리 비용을 감당하거나 공식적인 철거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방화라는 간편한 방법을 선호합니다. 필리핀 지주들이 즐겨 사용하는 이른바 '뜨거운 철거' 방식은 들쥐나 고양이를 등유에 흠뻑 적신 후에 불을 붙여 말썽 많은 슬럼가에 풀어놓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길, "개는 너무 빨리 죽기 때문에 잘 쓰지 않는다."

이런 슬럼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것들이 또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국제 행사들입니다. 국빈 방문, 스포츠 행사, 미녀 선발 대회 등이 시작되면 당국이 주도하는 도시 대청소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세계가 자기네 나라의 슬럼을 보는 것을 싫어하고, 슬럼 주민들도 정부가 자기들을 '쓰레기' 내지 '그림자' 취급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닐라에서는 미스유니버스 선발대회, 포드 대통령 방문, IMF/세계은행 회의가 열리는 동안 16만명이 바깥으로 버려졌고, 도미니크 공화국의 호아킨 발라게르는 정치적 저항의 중심지를 없애기 위해 18만명이 살던 곳을 철거했습니다.

가난한 주택소유자, 스쿼터, 세입자에 대한 공권력의 폭력적 진압이 역사상 유례없는 규모로 이루어진 것은 단연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 남한의 수도권에서 무려 72만 명이 원래 살던 집에서 쫓겨났다. 한 가톨릭NGO는 남한이야말로 "강제퇴거가 가장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이루어지는 나라, 남아공보다 나을 것이 없는 나라" 라고 했을 정도다. - p.142

슬럼의 환경은 여러 부분에서 최악입니다. 현재 인도에서는 대략 7억명의 주민이 야외에서 용변을 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이로 인해 슬럼 주민들과 중간계층 주민들 사이에는 배변권을 둘러싼 긴장관계가 조성되는데, 실제로 1998년 델리 슬럼 주민 3명이 공공장소에서 똥을 누었다는 이유로 총을 맞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도시에 사는 가난한 여성은 위생설비를 제대로 이용할 수 없는 상태에서, 정숙이라는 엄격한 관습을 지켜야 한다는 딜레마로 인해 상시적인 공포 속에 살아갑니다. 인도의 슬럼 여성들은 똥을 누기 위해 매일 새벽 2~5시 사이에 용변을 봐야 하는데, 사람들이 보지 않는 시간은 그때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자들은 뱀들이 숨어있는 습지대나 들쥐 등의 설치류가 출몰하는 방치된 쓰레기장에서 볼일을 봅니다. 이로 인해 여성들은 성추행, 나아가 강간에 노출됩니다.

이런 슬럼의 현실에 대해 시카고와 보스턴의 경제학 교수들이 편안한 안락의자에서 생각해낸 위생위기의 해결책은 도시 배변을 전지구적 사업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워싱턴이 지원하는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공중화장실을 외채 상환을 위한 현금인출기로 만든 것이였습니다. 실제로 유료화장실은 제3세계 슬럼 전역에서 성장 산업으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가나에서 공중화장실의 유료화는 1981년 군사정부에 의해 도입되었고, 1990년대 민영화되면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가나에서는 한 가족이 하루 1번 화장실을 이용하는 요금은 기본급의 10퍼센트에 해당합니다. 다른 슬럼인 캄팔라에서도 공중화장실을 한번 쓰는데 드는 돈이 무려 100실링(1400원) 정도입니다.

도시가 슬럼화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도시가 가난하기 때문이 아니라 부유하기 때문이다. - 지타 베르마 

세계 곳곳에서 IMF와 세계은행은 가난한 나라에 평가절하, 민영화, 수입규제 철폐, 농산물 보조금 중단, 보건 및 교육의 원가 징수, 공공부문의 무자비한 축소라는 독약을 권했습니다. 윌리엄 태브가 세계경제 지배의 최근 역사를 기술하며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듯이, 외채는 제3세계 국가의 권력을 미국 등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이 지배하는 브레턴우즈 기관들로 옮겨놓는 획기적인 권력 이전의 촉진제가 되어왔습니다. 채무징수 기관들은 채무국의 경제발전을 돕는다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기관들 때문에 가난한 나라들은 부자 나라들이 19세기 후반이나 20세기 전반에 성장을 위해서 사용했던 방법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습니다. 경제학자 장하준이 사다리 걷어차기라는 책에서 지적한 것처럼, 역사적으로 OECD국가들은 농업 기반 경제로부터 고부가가치 상품 및 용역에 기반한 도시경제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보호무역 관세와 보조금을 활용했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제3세계 국가들에만 보호무역 관세와 보조금을 없애는 IMF와 세계은행의 구조조정프로젝트는 위선적입니다.

이런 IMF와 세계은행의 결정은 제3세계의 농촌의 파멸을 가져왔고, 이는 수많은 농민들의 슬럼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UN의 보고서의 결론이 말하고 있듯이, 도시는 성장과 번영의 중심이 된 것이 아니라, 미숙련, 무방비, 저임금의 비공식 서비스업 및 무역에 종사하는 잉여 인간의 처리장이 되었다는 것이 현재의 도시입니다. 이러한 비공식 부문의 발생은 시장 개방의 직접적 결과였고, 연구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슬럼은 도시 빈민들을 처리하는 쓰레기장이다. 도시경제가 굴러가기 위해서는 이들의 노동력이 필요하지만, 최대한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놓아야 한다."

노동 과정에 편입되지 못한 산업 예비군이 영원한 잉여 대중으로 낙인찍혀 현재에도 미래에도 경제와 사회에 편입될 수 없는 쓸모없는 짐으로 여겨질 때, 사태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세계 자본주의의 진짜 위기는 바로 이런 변화다. - Breman, The Labouring Poor 

이런 슬럼의 현실은 우리의 미래이기도 합니다. 현재 한국의 도시인구 중 슬럼인구는 37퍼센트로, 슬럼인구수로 따지면 국가순위 12위에 해당합니다. 아직은 제3세계의 최악의 슬럼과 같은 형태는 아니지만, 그 징조는 이미 보이고 있습니다. 슬럼과 구분되는 부유층의 폐쇄형 주택이 타워팰리스와 같은 초고가형 아파트로 나타나고 있고, 서울 외곽의 공공임대주택 정책도 다른 도시에서 있었던 슬럼대책의 실패를 그대로 답습하는 길을 걷는 것처럼 보입니다. 비공식 경제를 나타내는 대리 지표인 도박, 다단계, 복권 등에서도 바다이야기 사건이나, 요새 대학생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퍼져간다는 다단계 문제, 로또로 상징되는 복권 등은 한국의 도시에서 슬럼이 점차 확산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슬럼에 가게 될 사람은, 현재의 빈곤층만은 아닙니다. 한국의 가난이란 책에서 지적하듯이, 열심히 일하던 중산층도 사회의 변화에 따라서 느닷없는 해고를 당하거나, 혹은 가족의 갑작스레 찾아오는 병, 각종 재난과 재해 등에 의해서도 언제든지 빈곤층이 되고 슬럼으로 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슬럼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슬럼이 확대되는 것에 대해 사회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함을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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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 판매학
레이 모이니헌.앨런 커셀스 지음, 홍혜걸 옮김 / 알마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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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을 팔기 위해선 어떤 방식이 효과적일까요? 약의 성능을 홍보하면 될까요? 이 책은 제약회사들이 약을 판매함에 있어서 프로파간다의 저자 에드워드 버네이스가 내세운 이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버네이스는 판매하고 싶은 제품을 직접 거론하지 않고 헐리우드 영화를 통해 여성들에게 담배를 사도록 유도했고, 가정 음악실이라는 유행을 주도해 피아노를 팔았고, 대중의 식습관 형성에 영향력이 큰 의사라는 집단을 이용해 베이컨을 팔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판매전략은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약을 팔기 위해선 먼저 질병을 팔면 됩니다. 질병이 없으면 만들고, 기존 질병의 정의를 더 넓히면 자동적으로 소비자가 생겨나게 됩니다.

세계 굴지의 다국적 제약 회사들의 마케팅 전략은 공격적으로 건강한 보통 사람들을 타겟으로 합니다. 일상 생활에서 나타날 수 있는 일시적 감정의 기복은 정신 질환의 하나로 둔갑하고, 누구나 경험하는 흔한 증상을 질병의 전조 증상으로 변형합니다. 질병의 경계가 최대한 넓게 정의되는 동안, 이와는 대조적으로 질병의 원인은 가능한 편협하게 묘사합니다. 질병은 다중적 원인으로 인해 생겨남에도 불구하고, 심장 질환은 오직 콜레스테롤 수치와 혈압에, 고관절 골절은 골밀도 수치에만 사람들이 집중하도록 유도합니다. 이런 판촉 전략들의 공통분모는 두려움을 마케팅하는 것입니다. 질병을 은연중에 강조하는것은 약 판매에 직접적인 효과를 가져옵니다. 특히나 이런 전략은 프로파간다의 에드워드 버네이스 시절보다 더 효과적인데, 제약회사가 과점기업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하나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을 위한 약을 만드는 것입니다. 리글리 사의 껌처럼 보통의 건강한 사람에게도 우리 회사의 약을 파는 것, 그것이 나의 오랜 꿈입니다. - 머크CEO 헨리 개스덴 

몇 년 전 미국 콜레스테롤 전문가들의 전문위원회가 치료를 요한다고 판단되는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었는데, 이로 인해 건강한 수백만 명을 환자로 분류할 수 있게 되었고, 개정 이후 하룻밤 새 약물 치료 대상자 수가 세 배나 늘었습니다. 하지만 전문위원회 의장을 포함해 새롭게 확장된 가이드라인 작성에 참여한 전문가 14명중 5명이 스타틴 계열 콜레스테롤 저하제 제조 회사와 재정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 합니다. 하지만 콜레스테롤은 미래에 그들이 심장 질환과 뇌졸중에 걸릴 기회를 증가시킬 수 있는 많은 위험 요소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홍보하지 않습니다. 만약 흡연자라면 아마도 가장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은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 것보다 담배를 끊는 것입니다.

포사맥스가 시판되기 일 년 전 무렵 골다공증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세계보건기구 소속 한 연구 단체에 의해 씌어졌습니다. 이 단체는 정상적인 골밀도를 30세 여성 평균치를 기준으로 정했으며, 이것은 자동적으로 30세보다 나이가 많은 대부분의 여성의 뼈를 비정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제약회사들은 이 넓게 정의된 골다공증을 세련된 홍보 기법을 총동원해 건강한 여성들에게 그들이 어느 순간에라도 뼈가 부러질 수 있는 위험에 처해 있다고 확신시키려 했으며, 그들의 생명이 매우 위험에 처해 있고, 골다공증이 지속적으로 퍼지고 있다고 강조해 지금 당장 골밀도검사를 받아보라고 홍보했습니다. 하지만 골밀도 검사의 가치가 매우 논쟁 거리가 되고 있고, 관련 약품들이 가끔 효과를 보이기는 하지만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한다는 사실은 도외시합니다. 심지어 이것을 질병이라 부를 수 있는지에도 의문의 여지가 있는데, 매우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골밀도가 낮아지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자연적이며 정상적인 과정입니다. 캐나다 연구 단체와 밴쿠버의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 출신 의사들이 골다공증에 관한 모든 과학적인 데이터를 분석한 바 있는데, 분석 결과 그들은 여성들 사이에 널리 퍼진 골밀도 검사의 필요성은 전형적인 대중의 공포심에 기반해 형성된 시장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흡연자, 비만인 사람 또는 앉아서 일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금연이나 체중 감량을 하지 않고, 또는 거의 운동을 하지 않고도 그들의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기 위해 약물 치료만 하면 된다는 암시를 준다. - p.42

이런 상황은 제약회사 뿐 아니라 의사들에게도 이점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의사들은 고혈압이라는 질병을 다루는 것에 상당한 이해관계가 있습니다. 의사들에게 고혈압 진단은 한 사람을 자신의 평생 환자로 만들 수 있습니다. 환자의 팔뚝에 혈압계를 감고 혈압을 측정하는 것은 의사들에게 매우 괜찮은 작업입니다. 그것은 짧은 시간에 손쉽게 해치울 수 있으면서도 상당히 괜찮은 보수를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혈압 측정 등 간단한 진찰에만 100 달러 내외를 지불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종종 혈압 측정 방법 또한 큰 논란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아이러니 중 하나는 의사라는 존재 자체가 환자의 혈압을 높이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와 마주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신경이 과민해지고 이 때문에 혈압이 상승되기도 하기 때문인데, 이 현상은 의사들 사이에서는 너무도 잘 알려져 심지어 이에 대해 흰 가운 고혈압이라는 용어까지 생겨났을 정도입니다.

이런 현상은 대중에게 있어서 금전적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는, 4만명 이상이 연구에 참여했던 ALLHAT라고 불리운 연구였습니다. 이 역사적 연구는 가장 오래된 것과 가장 싼 것, 가장 최신에 나온 것과 가장 비싼 것을 포함한 4가지 서로 다른 종류의 약을 비교했습니다. 이 약들은 심장병을 감소시키는 데 얼마나 효과적인가, 또 얼마나 안전한가 그리고 가격에 비해 얼마나 효과를 발휘하는가라는 항목으로 비교되었습니다. 최종 결과는 제약 회사 입장에선 매우 나쁜 소식이었으나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상당히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가장 오래되고 싼 약들, 즉 낮은 용량의 이뇨제 계열 고혈압 치료제가 심장마비와 뇌졸중을 줄이는 데 새로 나온 약만큼 효과를 발휘할 뿐 아니라 심부전증을 예방한다는 측면에선 오히려 신약을 근소하게 앞선다는 것이 밝혀진 것입니다. 비용적 측면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가장 오래된 약이 명백히 이겼습니다. 이 약들은 매우 싸서 거의 공짜나 다름없었고, 최신 고혈압 치료제 노바스크보다 200배 이상 저렴했습니다. 이 연구가 발표되었을 당시 새로 나온 약이 월등히 많이 처방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발견을 당장 그대로 임상에 적용할 경우 전 세계 사람들은 고혈압 치료비로 수십억 달러를 절약할 수도 있었지만, 이러한 연구로부터 나온 결과는 더 새롭고, 더 비싼 약으로 처방을 내리는 의사들의 처방 행태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훌륭한 과학적 결과나 증거보다도 판매 사원에서부터 텔레비전 약 광고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제약 회사의 판촉망이 의사들에게 더 많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이런 제약회사의 판촉이 가능하게 된 이유중 하나는 미국식품의약국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1992년 이래로 제약 회사는 그들의 신약을 심사받기 위해 일정 비용을 미국식품의약국에 지불해야 합니다. 그 답례로 그들은 더욱 신속하게 검토를 받고 미국식품의약국과 보다 긴밀한 의사소통이 가능해졌습니다. 연방정부가 갈수록 증대되는 미국식품의약국의 예산을 더 이상 지원할 수 없기 때문이었는데, 그 결과 미국식품의약국이 약을 검토하는데 소비되는 예산의 절반 이상을 제약 회사가 제공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미국식품의약국 직원에 대한 두가지 자체 조사는 직원이 신약을 승인하라는 압력을 받는다고 느끼고 있으며, 간부들이 제약 회사 로비에 너무 깊숙히 관여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직원들은 과학적 근거와 공공의 건강보다 제약 회사 등 스폰서의 만족을 우선해야 한다는 압력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저자는 현재 제약 회사의 영향력에서 독립적인 질병의 정보 소스를 찾는것이 매우 힘들며, 제약회사에 의해 후원된 마케팅이 공공의 건강에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평범한 시민들을 위해 편견 없고 이해하기 쉬운 정보를 제공해야 할 때이며,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다양한 분야 사람들이 질병과 장애를 정의하고, 그것들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여러 처방의 효능과 부작용에 대한 정보를 만드는 데 참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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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보험 절대로 들지 마라
김종명 지음 / 이아소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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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TV를 보다보면 지겨울정도로 자주 보이는 광고들이 있습니다. 바로 민간의료보험 광고들인데, 이 광고들은 독특하게도 광고 마지막에서 아주 빠른 속도로 갱신이 어쩌고 하는 약관을 말해주고 사라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런 민간의료보험 시장은 이미 커질대로 커져 국민건강보험의 수입을 넘어서는 33조원의 시장이 되었습니다. 현재 국민건강보험은 전체적으로 60퍼센트를 보장해 주고, 입원의 경우 55퍼센트를 보장합니다. 그러다보니 중병에라도 걸리면 집안이 거덜납니다. 그래서 현재 많은 사람들이 민간의료보험을 이용합니다. 2010년 기준으로 국민의 56퍼센트가 암보험에 가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보험료가 적당한건지, 제대로 도움이 되는지 지적하기가 힘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자는 질문합니다. 과연 민간의료보험의 선택은 합리적인가? 저자는 단호히 아니라고 말합니다. 민간보험에 드는 경우는 나머지 40퍼센트를 보장받기 위해서인데, 이를 위해 국민건강보험료의 2배에 달하는 비용을 지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민간 의료보험에 과잉지출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해 이익을 볼수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경제적 활동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민간의료보험의 약관을 해석하며 전체적으로 볼 경우 절대적으로 손해라고 지적합니다. 민간의료보험의 순수보장형 상품의 경우 지급률이 40퍼센트가 안되고, 만기환급형의 경우 낸 보험료를 되돌려주기 때문에 더 나은 상품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30년후에 물가상승률을 고려하지 않고 그대로 돌려준다는 것을 감안하면 마찬가지로 손해입니다. 10년 주기의 갱신형 상품의 경우 시작은 아주 싸기 때문에 쉽게 접할 수 있지만 갈수록 갱신금액은 어마어마합니다. 갱신비율은 암발생률에 비례해서 올라가기 때문에, 20~30대에 월 만원이였던 갱신보험은 60~70대에 이르러 월 30만원으로 상승합니다. 3~5년 주기로 갱신되는 실손의료보험의 갱신폭은 더 뛰어납니다. 금융감독원의 실손 보험료 인상률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40세 남성이 월 8200원일 경우, 82세엔 월 90만원에 육박합니다. 물론 암에 걸릴 경우엔 소정의 이익을 봅니다. 보험료를 2500만원정도 낼 경우 4000만원의 보험금을 지급받습니다. 이 1500만원을 획득할 수 있는 행운의 사람들은 암에 걸릴 확률40~50대를 기준으로 해서 1000명중 19명에서 24명입니다.

실비 보험의 보험료를 올리는 다른 요인이 있다. 바로 가입자의 도덕적 해이 때문이다. 실비 보험에 가입한 경우, 의료 혜택을 보지 못하면 손해라는 생각이 들기 쉽다. 그러다보니 언젠가는 한번 크게 타먹으리라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병원에서 진료하다 보면 가벼운 질환이라 외래에서 충분히 치료가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입원을 해서 종합건강검진에 준하는 검사를 받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나중에 꼭 진단서와 입원확인서를 떼어달라고 한다. 우리나라처럼 환자가 원하면 언제든지 입원이 가능한 현실에서 실비보험은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는 역할을 한다. 의사로서 이런 환자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값비싼 민간 의료보험에 가입한 데 대한 혜택을 받고자 하는 경제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덕적 해이임에는 틀림없다. 지금의 의료시스템에서 민간 의료보험은 환자의 도덕적 해이를 유발하는 핵심 요인이다. - p.59

저자는 국민 암 발병률을 기준으로 계산했지만, 실제론 더 보장받기 힘듭니다. 민간 보험사는 보험가입자에 대한 위험을 평가하고, 계약을 승인할지 거절할지를 결정하는 언더라이팅underwriting을 하기 때문입니다. 인기 액션배우 성룡이 TV에서 말한 것처럼, 위험도가 높은 경우 보험사에 가입조차 할 수 없습니다. 거기다 보험회사들은 암보험금 지급을 최소화하기 위해 여러 안전 장치를 두고 있습니다. 이러다보니 암이 의심되더라도 보험금을 타기 위해서는 암이 더 진행할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암 진단 여부를 둘러싸고 의사는 암이라고 하는데, 보험회사는 암이 아니라고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보험회사와 갈등하는 사례가 많기도 합니다. 이런 여러 역경을 이겨내고 보험금을 받는 지급률은 30에서 40퍼센트에 불과합니다. 암보험으로 만원을 내면, 가입자는 3~4천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 지급률은 심지어 카지노의 슬롯머신보다도 낮은 확률입니다. 카지노 슬롯머신이 경우 전체 배당금이 최소 75퍼센트가 되도록 법적으로 규제하고 있습니다.

이런 민간보험률의 증가는 미국의 상황과 유사해지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미국은 2009년에 GDP의 17.4퍼센트를 의료비에 쏟아부었습니다. 이는 국가의 경제 규모를 감안해도 미국은 한국보다 2.5배를 많이 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 국민은 1인당 151만원을 의료비로 썼고 미국인은 1인당 876만원을 썼습니다. 그 엄청난 돈을 씀에도 불구하고 미국인의 평균 수명은 OECD국가중 24위로 하위권이고, 미국의 의료체계는 많은 비판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미국이 가진 매우 독특한 의료체계 때문입니다. 미국의 경우 공적 의료보장제도로 65세 이상의 메디케어와 저소득층의 메디케이드가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 민간 의료보험에 가입합니다. 그 시스템의 사이에 있는 4500만명은 공적 의료보험에 해당되지 못하고 민간의료보험비가 너무 비싸 포기한 무보험자들입니다. 이런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했음에도 불구하고 2007년 미국에서 개인 파산의 이유중 62퍼센트는 의료비 때문이였습니다. 의료비 파산자의 60퍼센트는 민간 의료보험에, 10퍼센트는 메디케어, 5.4퍼센트는 메디케이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민간 의료보험의 사회적 보험기능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민간의료보험엔 영리병원이 뒤따라오는데, 이 영리병원 또한 매우 비효율적입니다. 영리병원의 경우 비영리병원, 공공병원에 비해 입원비용과 행정비용이 매우 비쌉니다. 입원비용의 경우 공공병원에 비해 영리병원이 1600달러 이상 더 들어갑니다. 영리병원의 행정 비용이 높은 이유 중 하나는 경영진에 대한 엄청난 보수 때문입니다. 미국 최대 영리병원 기업인 콜롬비아HCA의 최고경영자가 부정행위 소송으로 해임됐을 때 퇴직금으로 3억1천만달러를 받았습니다. 또한 영리병원은 돈벌이를 위해 질병의 중증도를 조작하여 더 높은 진료비를 청구하는 사례가 빈번했습니다. 콜롬비아HCA는 2003년 부당 청구가 적발되어 연방정부에 17억달러를 배상했고, 두번째로 큰 영리병원 테넷은 2004년 2천만달러를 배상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고가의 서비스에 반해 의료서비스의 질은 매우 부족합니다. 미국에서 의료서비스의 질이 우수한 병원을 매년 발표하는데 20위권 안에 영리병원은 단 한 개도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불량품을 비싸게 파는 셈인데, 영리병원은 왜 성업중이냐 하면 파는 상품이 의료서비스이기 때문입니다. 의료서비스는 의사나 간호사 등 면허가 있는 사람만 행할 수 있기 때문에 공급자가 한정되어 있어 의료서비스 영역에서는 시장경제의 경쟁원리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습니다.

이런 미국임에도 불구하고, 65세 이상을 대상으로 하는 보험회사 관리는 미국이 한국보다 낫습니다. 미국은 메디케어 보충보험법으로 엄격한 규제를 하고 있는데, 민간 의료보험회사는 가입을 원하는 사람의 보험가입을 거부할 수 없고 기존에 앓았던 병이 있다고 해서 보험금지급을 거부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건강상태에 따라 보험료를 차별하지 못하게 하고 있고 보험의 지급률을 최소지급률에 의해 최소 75퍼센트가 되도록 엄격히 규제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런 상황을 바탕으로 대다수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사적 지출을 줄이고 공적 지출을 늘리는 것이 무조건 유리하다고 말합니다. 2011년 금융통계월보 기준으로 보험회사의 사업비규모는 25퍼센트 내외이지만, 국민건강보험의 사업비는 3퍼센트에 불과합니다. 같은 돈을 낸다면 운용비가 적게 드는 국민건강보험이 더 많은 돈을 돌려주기 때문에 국민건강에 더 유리합니다. 물론 현재의 국민건강보험도 여러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제대로 소득적용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일례로 우리나라 최고 부자인 이건희 회장은 건강보험료를 얼마나 내고 있는 가 하면, 2008년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의 비리를 폭로하기 전에는 월10억원의 월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경우 2008년 기준 직장가입자의 실 보험료는 2.54퍼센트이므로 2540만원을 내야 하지만 건강보험료 상한제로 인해 이건희회장은 167만원만을 부담하면 됩니다. 2010년 복귀 이후로 언론 보도를 보면 월급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경우 월 건강보험료는 8120원입니다. 하지만 이건희회장의 소득은 2011년 주식배당으로 1330억원을 벌었습니다. 주식배당 소득은 건강보험료 부과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1330억원을 벌어도 월 8천원만 내면 됩니다. 그 외에도 일부 연예인들이 논란이 되었던 위장취업 등 제도상의 허점이 존재합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대다수 국민들이 국민건강보험이 이익이라고 해도 민간의료보험이 이익인 사람들도 존재합니다. 민간 의료보험이 이익인 경우는 보험 지급률 50퍼센트로 가정했을 경우 월소득 1500만원, 즉 연봉 1억8000만원 이상의 경우입니다.

국민건강보험 보장률이 커질 경우 사람들이 의료진료비가 싸기 때문에 불필요한 의료 이용이 늘어날 것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것은 일면적으로는 맞습니다. 하지만 도덕적 해이로 인해 불필요한 의료 이용이 늘지는 않습니다. 가격이 싸다고 해서 의료서비스를 불필요하게 이용하지는 않습니다. 예를들어 맹장수술이 공짜라고 해서 아프지도 않은데 맹장수술을 받지는 않습니다. 병원에 갈지 말지를 결정하는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몸에 이상이 있는지 없는지이지 가격이 싸고 비싼데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실증적으로 증명한 논문중에 RAND연구가 있는데, 의료서비스의 가격의 변화에 따라 의료 이용 양상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분석한 실험연구입니다. 이 연구는 본인부담액이 0퍼센트에서 95퍼센트로 증가하더라도 의료 이용 양상이 아주 완만하게 감소한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소득계층에 따라 의료 이용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연구했는데, 고소득층보다는 저소득층에서 가격이 증가함에 따라 의료 이용 감소가 두드러졌습니다. 또한 가격이 낮아졌을때도 저소득층보단 고소득층에서 사용빈도가 더 높았습니다.

저자는 한국의 의료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선, 지금보다 더 공적인 부분을 키워야 하며, 궁극적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질병들을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100%전액 무료라면 그에 따른 도덕적 해이가 뒤따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전체 건강보험 보장률 80퍼센트, 입원진료비 보장률 90퍼센트, 연간 병원비 상한액 100만원이 적절하다고 말합니다. 그와 동시에 현재 존재하는 제도의 헛점에 대한 개선도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국민건강보험을 키우려면 지금보다 더 예산이 필요하고, 더 많은 국민건강보험료를 내야 합니다. 혹 그 돈을 어디서 만드냐고 반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이미 민간의료보험에 그 이상의 비용을 대고 있습니다. 국민건강보험의 보장률이 더 올라간다면, 그에 비례해서 민간의료보험에 드는 돈이 줄어들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돈으로 국민건강을 위해 더 효율적인 운영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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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퍼컷 - 신성 불가침의 한국 스포츠에 날리는 한 방
정희준 지음 / 미지북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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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관중이 한 해에 600만을 돌파하고, 세계적인 스포츠 선수들이 배출되는 나라. 세계적으로 봐도 부끄럽지 않은 스포츠 공화국. 저자는 그런 한국 스포츠계의 실상을 바라보며 한국 스포츠의 미래는 그리 밝지만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스포츠에 열광하지만 '내가 하고 내가 즐기는 스포츠'에 열광하는 게 아니라 '미디어가 보여주는 스포츠', '외국을 무찌르고 세계를 정복하는 스포츠'에만 열광합니다. 민족주의적이고, 엘리트적인 한국스포츠의 여러 실상을 들추며 저자는 말합니다. 이게 한국 스포츠라고.

한국 스포츠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바로 어릴때부터 스포츠에 올인하는 것을 꼽을 수 있습니다. 저도 이런 학생들을 많이 봤습니다.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고교야구계에서 이름만 말해도 알아주는 학교였습니다. 3년동안 학교를 다니며 교실에서 야구부원을 본 경우는 단 하루 뿐이였습니다. 이런 스포츠 풍토는 선수기량적인 면에서 이익일지 몰라도, 많은 문제점을 야기합니다. 2008년 발표된 국가인권위의 운동선수 인권 상황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중고교 학생 선수 78.8퍼센트가 다양한 유형의 폭력을 경험했고 63.8퍼센트는 성폭력을 당했다고 합니다. 초등학생을 50대이상 때리는 이 세계는 보통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저 또한 학교에서 가혹하리만큼 기합받는 야구부원을 자주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축구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 박지성 

이런 스포츠 환경은 남자선수들보다 여자선수들에게 더 가혹합니다. 여자선수들의 문제는 박명수 전 우리은행 여자농구감독의 성폭행 사건과 같은 일로 간혹 대중들에게 알려집니다. 박감독은 선수들에게 속옷을 빨게 하고 선수가 있는데서 바지를 함부로 갈아입는가 하면, 트레이너 만나러 간다는 구실로 선수들 방이 있는 위층으로 올라가 선수들이 알몸으로 있는데 불쑥 나타나고, 선수들에게 뽀뽀하자 그러고, 일대일 면담 한답시고 방문 닫아놓고 감독은 옷을 벗은 상태에서 침대에서 팔베개하고 같이 눕자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행태는 다른 성폭행들에 비하면 지극히 양호한 편입니다. 당시 피해자는 프로 선수였고, 여자 스포츠중 여자농구는 그나마 사회와 언론의 주목을 많이 받는 종목이기 때문입니다. 비인기 종목일수록, 후보 선수일수록 강한 성폭행의 위험에 노출됩니다. 인권위의 스포츠 인권 관련 간담회에서 나온 보고에 따르면 한 학교의 여자 선수를 모조리 건드리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갓 열 살이 넘은 여자아이들이 밤에 감독에게 끌려 나가지 않으려고 서로 손을 묶고 잤다거나, 모 여고에서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합숙이나 전지훈련때 감독님을 모실 한명을 정하기로 했는데, 먼저 나서는 이가 없자 결국 주장이 나섰다는 슬픈 보고도 있었습니다.

저도 이쪽이 이렇게 심한 줄 몰랐었는데 성폭력 상담소에 있을때 전화가 왔는데..글쎄 초등학생을 임신을 시켜서..부모가 왔더라구요. - 인권위 여성임원 보고 中 

이런 사태가 시사고발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가끔 언론보도가 됨에도 불구하고 체육계는 변화하지 않습니다. 상당수 기자들은 스포츠계의 성폭력 문제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기사화하고 공론화하지 않습니다. 좋은 기사거리를 계속 얻기 위해서는 좋은관계가 필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이런 행위를 하는 경우 처벌이 빈약합니다. 성폭행 사건을 일으킨 박명수 전 우리은행 감독은 징역10월에 집행유예2년, 사회봉사명령 200시간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이는 1차 공판에서 검찰이 구형한 징역 1년6개월형보다 낮은 형량입니다. 법원은 술에 취한 상태였다는 점, 과거 10여 년간 국가대표 여자농구팀의 코치 또는 감독 등으로 농구계 발전을 위해 노력한 점, 합의금으로 5000만 원을 공탁한 점 등을 이유로 밝혔습니다.

자식들을 운동시키기 위해 집을 팔고, 자식은 얻어맞고, 딸은 감독에게 성적으로 당하기도 함에도 불구하고 감독에게 매달려야 하는 현실은 공부를 등한시하는 한국스포츠의 모습에서 비롯됩니다. 공부를 포기했기 때문에 다른 길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청소년기 뿐만 아니라 한국 스포츠 선수들의 전체적인 빈곤한 환경을 만들게 됩니다. 심지어 선수가 학업을 병행하는 길을 택할 경우 제재를 가하기도 합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앞두고 벌어졌던 장희진 사건이 그 대표적 예입니다. 당시 국가 수영대표로 선발된 14세 중학생 장희진은 태릉 선수촌에 입촌하지 않고 학교를 다니며 훈련을 참가하려 했는데 이를 괘씸하게 여긴 대한수영연맹은 그의 국가 대표 자격을 박탈했었습니다. 태릉의 모든 훈련에 참여할테니 기말고사때까지라도 학업을 하고 싶다는 장희진의 요청에 선수촌과 연맹은 제명이라는 보복카드를 내걸었습니다. 여론이 들고 일어나 다행히 올림픽에 출전하긴 했지만, 올림픽 이후 학업을 병행할 수 없는 한국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대에서 4년전액 장학금을 받고 경영학과 정치학을 전공하며 동시에 수영선수로서 한국신기록을 세웁니다.

태릉 선수촌은 어린 학생의 미래를 염두에 둘 만큼 포용력과 융통성을 가진 곳이 아니다. - 장희진 

학업을 병행하지 않는 대부분의 선수들은 선수생활을 마치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자선수들은 그나마 몇 안되는 감독, 코치 자리까지 모두 남자들에게 뺏긴 상황입니다. 이들이 선수 생활 은퇴 후 사회에 나가서 가질 수 있는 직업은 찾기 힘듭니다. 상당수 선수들에게 은퇴란 사실상 빈곤층으로의 추락을 의미합니다. 그러다보니 감독의 말에, 체육협회의 말에 복종합니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그야말로 한국스포츠의 비극을 절실히 보여줍니다. 34세의 나이에 은퇴하고 싶어도 먹고 살 방도가 없어 골병 들 때까지 선수로 사는 모습은 어렸을때부터 오직 운동만 하게 하는 환경의 최후를 보여줍니다. 아무리 운동을 독하게 하고 발버둥쳐도 선수로서 살아갈 수 있는 메달의 수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스포츠를 택한 한국인 다수의 빈곤화를 야기합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윔블던을 우승했을 때도, US오픈을 우승했을때도 아니다. UCLA를 졸업하던 날 할머니에게 졸업 가운을 입혀드렸던 순간이다. - 아서 애시 

세계적 대회가 열리면 한국 스포츠의 관심사는 오직 금메달에 집중됩니다. 선수단의 대회 성패도, 인간승리도, 하이라이트 방송도 모두 금메달의 것입니다. 은메달을 딴 외국선수보다 금메달을 딴 한국선수가 더 서럽게 우는 모습은 우리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수들 생존의 문제 뿐만 아니라 금메달은 우리사회의 지나친 집단주의를 상징합니다. 이제 여유를 가지고 스포츠 자체를 즐겨도 될 만한데도, 우리는 스포츠에 국가와 민족과 국력을 주입시키고 승패의 결과만을 따집니다. 이런 관행은 체육계에 다양한 폭력과 부조리를 방치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한국 스포츠계는 고립된 섬입니다. 지도자 또한 오직 성적으로만 평가받기에 어린 학생선수들마저 가둬놓고 훈련시키며, 폭력은 삶의 한 방식입니다. 한번 발을 내딛게 되면 부모들은 자식을 대학에라도 보내기 위해 성적에 연연하고 온갖 부조리에 침묵했습니다. 이런 스포츠의 현실이 알려지고 나서부터는 점점 더 운동부에 자식들을 보내지 않습니다. 결국 한국스포츠는 점점 더 소수만이 택하고, 더 폭력적으로 변할 것입니다. 이런 악순환을 어떻게 빠져나와야 하는가? 저자는 스포츠의 저변을 넓히는 것, 생활체육의 길을 제안합니다. 운동하는 아이들도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교육시키고 운동은 자신의 능력껏 즐기게 하는 것입니다. 운동에 재능이 있다면 공부를 해도 충분히 좋은 운동선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의사의 길을 간 미식축구선수인 마이런 롤을 비롯해 많은 사례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더 많은 아이들이 운동을 접하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해지는것은 곧 국력과도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어째서 유럽과 남미가 축구를 잘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하기 때문이라는 해답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소수의 아이들이 스포츠에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나라와 다수의 아이들이 즐겁게 스포츠를 접하는 나라. 우리의 미래는 단연코 후자로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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