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지즈코 지음, 나일등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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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혐오는 사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북어와 여자는 삼일에 한 번씩 패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고위층 관료들의 여성비하 발언이 파문이 되거나 김여사, 보슬아치 등의 인터넷 용어가 사용되는 등 여성 혐오는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존재합니다. 인상적이게도 여자를 '좋아'한다는 호색한들, 바람둥이라 불리우는 남자들은 여자를 성적 도구로밖에 보지 않기 때문에 여성 혐오적이며, 여성들 스스로도 여성 혐오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여성 혐오가 개인의 차이라기보다는 사회 구조적인 부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저자 우에노 치즈코는 이브 세지윅의 이론을 시작으로 사회에 존재하는 여성 혐오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성 혐오는 남녀에게 있어서 비대칭적으로 작용합니다. 남성에게 있어서 여성 혐오는 여성 멸시를 뜻합니다. 세지윅은 호모소셜, 동성사회성의 관점으로 남성을 해석하는데, 남성이 사회에서 하나의 남성이 될 수 있는,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은 동성인 다른 남성의 '너는 남자답다'는 인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남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너는 여자같다'는 것입니다. 삽입 당하는 것, 소유 당하는 것, 성적 객체가 되는 것. 다른 말로 표현하면 여성화되는 것은 남자가 남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남자들의 세계에서 여성화될수 있다는 공포는 동성애 혐오, 호모포비아로 이어집니다. 자기 여자를 소유하는 것이 성적 주체가 되기 위한 조건인데, 성적 주체로서 남성 집단이 가진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해선 호모포비아는 필수불가결하며, 남자는 자신의 성적 주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이용하는 장치가 바로 여성을 성적 객체화하는 것입니다. 여성을 객체화할때 남성이 여성을 이해하는것은 에드워드 사이드가《오리엔탈리즘》에서 지적한 구조와 비슷합니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서양인의 망상이라 지적했는데, 이처럼 남성은 여성을 객체화할때 여성을 여성으로서 바라보지 않고, 남성들이 원하는 여성이 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서로를 남성으로 인정한 이들의 연대는, 남성이 되지 못한 이들과 여성을 배제하고 차별화함으로써 성립합니다.

폭력에 의한 지배도, 권력에 의한 지배도, 경제력에 의한 지배도 아닌 성에 의한 지배. 게다가 지배를 받는 쪽의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내는 지배. 즉 공포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쾌락에 의한 지배야말로 궁극적 지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포르노그래피의 정석에는 이러한 '쾌락에 의한 지배'가 들어가 있다. 그 이유는 포르노그래피가 포르노 소비자인 남성에게서 모든 사회적인 속성을 제거한 뒤 다시금 남성성을 회복시키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근은 쾌락의 원천으로 부동의 위치를 차지한다. - p.130 

이런 남성들이 가진 여성 혐오의 아킬레스건은 '어머니'의 존재입니다. 여성을 멸시함으로서 남성이 될 수 있었지만, 자신을 낳은 여성을 멸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이중적인 심리가 '마리아-창녀 콤플렉스'로 발현되며, 성녀와 창녀라는 성의 이중 기준으로 여성의 성을 구분짓습니다. 성의 이중 기준은 여성을 두 집단으로 분할시키는데, 남성에게 있어서 여성은 아내 혹은 어머니 아니면 매춘부, 결혼 상대 아니면 놀이 상대가 되는 것입니다. 남성이 정한 사회적인 성의 이중 구조로 인해 아내는 생식용 여성으로 구분되어 쾌락을 빼앗긴 채 생식의 영역으로 소외되고 쾌락용 여성은 생식에서 소외됩니다. 성의 이중 기준은 남성에게 있어 기묘한 상황을 만들어내는데, 특정 여성에 대해 진심일 경우엔 성의 대상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성의 대상으로 볼 경우 진심으로 대해서는 안 되는 자가당착적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여성의 객체화, 타자화를 여성 혐오라고 했는데, 이런 여성 혐오는 여성에게서도 나타납니다. 저자는 어떤 의미에서 여성이라는 사실을 혐오하는 감정은 모든 근대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의 보편적인 감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성 혐오는 여성에게는 자기 혐오로 발현되는데, 사회적으로 여자의 가치는 여성에게 있정받는 가치와 남성에게 인정받는 가치 두 가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딸에게 '아들로서 성공하라'와 '딸로서 성공하라'를 동시에 보냅니다. 사회적 성공이라는, 아들로서 성공한 딸은 집안일에 소홀하다느니 여성스럽지 않다느니와 같은 비난을 받기 쉬우며, 딸로서 성공하는 것은 남자에게 시집가서 지배당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즉 여성은 '명예남성'이냐 '노예'냐의 길을 강요당하는데, 사회적 약자는 그 종류를 막론하고 모두 비슷한 범주 폭력을 받고 있습니다. 범주는 지배적인 집단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존재하는 언어 세계 속에 뒤늦게 태어난다. 언어는 자신의 것이 아니며 타자에게 속해 있다. '여성'이라는 범주는 나 이전에 존재하며 '너는 여자다'라고 타자에 의해 지명된다. 그리고 '그래, 나는 여자야'하고 스스로가 스스로를 정의했을 때 여성은 태어난다. 그리고 그 범주를 받아들일 때에는 그 범주가 역사적으로 짊어진 모든 하중을 동시에 떠안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 이외에 '자유'로운 선택은 없다. - p.157 

사회적 통념으로 인해 우리들은 습관처럼 남성은 능동의 성, 여성은 수동의 성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구도는 자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푸코 또한《성의 역사》에서 섹슈얼리티는 자연적인 것도 본능적인 것도 아니고 문화와 역사의 산물이라 지적한 바 있습니다. 사회적인 환경이 갖춰진다면 여성은 능동적으로 변합니다. 여학교에 딸을 보내는 많은 부모들은 딸이 '여성스럽게' 자라주길 바라고 있을 것이지만, 연구 결과는 남녀 공학 출신 여학생이 이성애적 젠더 아이덴티티를 보다 일찍 발달시키는 것에 비해 여학교 학생에게는 반대로 리더십을 발휘할 기회가 더 많이 부여되기 때문에 더 '남성스러운' 모습을 보인다고 말합니다. 대니얼 버그너 역시《욕망하는 여자》에서 통념과 다르게 여성은 남성만큼 또는 그 이상 성욕이 강하며, 문화와 훈육 때문에 욕망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혹은 강압당하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저자는 사회에 내재된, 젠더 관계의 핵심인 여성 혐오를 지적함으로써 이성애 질서, 동성애 혐오, 젠더 비대칭성, 여성 차별 등과 같은 문제를 해결해나갈 것을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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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20
브램 스토커 지음, 이혜경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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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사회구성원인 사람들이 육체보다 정신을 더 많이 쓰는 일들을 함으로써 정신병은 점점 증가되어 왔다. 혹은, 발명되었다. 미셸 푸코는《성의 역사》에서 근대 이후의 성적 욕망의 장치를 네 가지로 드는데, 그 중 하나가 성도착의 정신병리화다. 성도착의 정신병리화란 성기 접촉을 수반하는 이성 간 성애 이외의 다양한 성이 도착적 쾌락으로 간주되어 정신병리학에 의해 이상시된 것을 가리킨다. 중세에는 도덕적 일탈이었던 동성애가 근대에는 정신의학적 병리로 취급되어 치료와 교정의 대상이 되었다. 소설《드라큘라》에 나오는 렌필드 역시 'a zoophagous maniac', 즉 '생명체를 먹는 정신병자'라고 시워드는 정의한다. 소설《드라큘라》가 쓰여질 당시인 18세기엔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렌필드와 같은 색다른 정신질환자들이 출몰했으리라 본다.

렌필드는 정신병원에 있었다. 렌필드의 주치의 시워드는 렌필드의 병세를 기록하면서 특징적인 면으로 이기심, 은밀함, 그리고 목적성을 들고 있다. 렌필드는 파리를 모아 거미에게 먹이로 주고, 또 거미를 모아 새 한마리에게 먹이로 제공하고, 새들이 많아지자 새들을 처치할 고양이를 요구한다. 렌필드의 이러한 행동은 자연계의 피라미드 모형을 표현하고 있다. 웰스는 렌필드나 드라큘라가 비정상적 인물로 표현되는 것은, 그들이 다윈주의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며, 정상적인 인물로 표현되는 반 헬싱과 같은 기독교 세력과 투쟁한다고 말한다.

다윈주의에 따르면 우리의 존재는 단순한 우연이다. 만일 우리가 설계되지 않은 목적없는 과정의 부산물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성경적인 교리는 틀린 것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설계에 의해서 인간을 창조하셧다는 것은 바로 기독교 뿐만 아니라 다른 유신론적인 종교의 중심 교리이다. 많은 사람들은 창세기의 연대기가 기독교와 다윈주의 사이의 충돌의 근원이라는 인상을 받아 왔다. 어떤 유신론자들은 다윈주의자들의 설계에 대한 거부만을 제외하고서 다윈주의자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모든 것들을 다 수용하는 것으로서 문제를 피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다윈주의는,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자연주의는 객관적인 실재의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설명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 그들 자신들을 자윈주의적인 진화에 적응시키려는 유신론자들은 일반적으로 그들 스스로가 보호되고 사회적으로 처지게 된 것을 발견한다.

반 헬싱을 비롯한 주인공 일행은 전부 착실한 기독교인들이었다. 조나단은 "영국 국교회인인 나로서는 그런 행위를 우상 숭배로 배웠기 때문에 그것(십자가)으로 도대체 어찌해야 할 지를 몰랐다"고 말한다. 주인공 일행은 드라큘라와 싸울 때 십자가나 성체의 빵 등을 사용하는데, 이러한 대립구도는 다윈주의에 반하여 물질 지향적인 세계에 합리성과 기계문명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 있으며, 그것은 기계문명과 공존해야 할 영적인 세계라는 메시지가 들어있는 것이다.

정신병동에 감금되어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렌필드의 존재는 정상인으로 활동하는 반 헬싱을 비롯한 다른 주인공들과 대비를 이루며 드라큘라와 같은 존재로 부각된다. 렌필드가 비정상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정상으로 간주되는 다른 이들과는 전혀 다른 비상식적인 행동과 말을 하기 때문이다. 렌필드가 다른 인물들처럼 철학을 논하며 상식적으로 통하는 세련된 신사처럼 말하자, 시워드는 그가 완벽한 정상의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보고 놀란다. 더구나 주인공들 앞에서 렌필드는 그들의 말과 행동 양식을 완벽히 모방해 냄으로써, 신사나 정상으로 간주되는 것 또한 일종의 관습이며 모방 행위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렌필드는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었는데, "제발 꽉 조이는 조끼 입히지 말아 주시오. 난 생각하고 싶어요. 그런데 내 몸이 묶여 있을 때는 도대체 자유롭게 생각할 수 없단 말이요" 라고 한 대사에서 그가 이성적인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체면과 가식과 허위로 가면을 쓰고 속의 마음을 숨길 경우, 충분히 자신도 정상인으로 불리는 사람들과 구분이 전혀 불가능해질 정도로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렌필드의 연설을 듣고 시워드는 렌필드의 "이성이 되돌아왔다"고 한다. 렌필드는 자신의 행동을 통해 단순히 생존 경쟁이나 약육강식의 구조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렌필드에게 있어서 '나의 주며 주인'인 드라큘라가 미나에게 접근하자 렌필드는 미나만은 드라큘라에게서 멀어지라고 경고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렌필드는 스스로 자신을 '이상한 믿음을 지닌 사람의 예'로 들고, 바로 그 때문에 친구들이 자신을 감금했다고 설명한다. 렌필드의 예처럼 우리는 흔히 정신분열증 같은 정신질환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비정상'이라 부르며 사회에서 격리한다. 그러나 충분히 '정상인'으로 불리는 사람들과 구분이 전혀 불가능해질 정도로 행동할 수 있는 '비정상인' 렌필드의 모습은 우리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구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혹은 무의미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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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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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는 역사적으로 내란이나 전쟁, 경제 불안 등의 위기 상황을 배경으로 나타납니다. 위기 상황을 극복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독재를 탄생시키지만 대부분의 경우 독재는 위기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독재는 본질적으로 위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위기를 지속시키거나 악화시킵니다. 그래야 독재가 공고화되고 장기화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향은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김일성, 박정희, 카스트로, 후세인 등 모든 독재자들에게 발견됩니다. 독재는 권력이 집중되기 때문에 독재자를 멈출 방법이 존재하지 않으며, 점점 더 심한 독재와 폭정을 일삼게 됩니다.

박정희는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부터 때때로 영구집권에 대한 흑심을 드러냈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옮긴 것은 1968년 삼선개헌의 정지작업으로 김종필 직계를 제거하면서부터입니다. 1인 파쇼권력을 획책한 것은 71년 대선 전후로 알려져 있는데, 72년에 유신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박정희는 유신 반대운동이 치열하게 일어나지는 않았을 거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박정희는 유신권력에 반대할 소지를 깨끗이 청소해 놓았다고 믿을만한 근거가 있었는데, 여당의 경우 김종필계를 숙청해놨고, 언론 또한 장악한 지 오래였습니다.

1974년 10월에 젊은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한 뒤, 동아일보는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이 저지른 민주화운동 탄압과 인권 유린을 보도했습니다. 최근 있었던 철옹성같은 30년 독재를 자랑하던 이집트 독재자, 무바라크가 실각한 사건은 언론이 민주화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권력자들에게 언론은 가장 효과적인 무기인 동시에 가장 두려운 적이기도 합니다. 1972년에 유신을 선포한 이래 효과적으로 종신지배체제를 굳히고 있었던 박정희도 마찬가지로, 자신에 대한 언론인들의 저항은 최대의 도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동아일보의 반 독재적 움직임에 대해 중앙정보부는 동아일보에게 광고금지라는 압력을 행사합니다. 현재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많은 미디어가 광고수입에 의존하고 있고, 이것은 미디어 콘텐츠를 변형시키는 가장 강력하고도 영향력 있는 압력 중의 하나였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보여준 광고를 통한 효과적인 탄압은, 광고와 자유시장은 미디어 소비자가 최종구매자로서 자신의 선택을 결정하는 중립적인 체제를 양산하지 못하며, 결국 미디어의 번영과 생존에 영향을 행사하는 것은 광고주의 선택임을 보여줍니다.

동아일보사는 광고 탄압으로 인한 기구 축소와 사원들의 징계 명목으로 박정희에게 저항한 160명을 대량 해직했습니다. 해직당한 언론인들은 동아일보사 건물 안에서 항의 투쟁을 벌였는데, 동아일보 언론인들이 사옥에서 농성투쟁을 벌이자 박정희는 실전적인 해결책을 지시합니다. 200명이 넘는 괴한들을 동원해 투쟁중이던 피디, 아나운서, 엔지니어들을 폭력을 사용해 몰아냈습니다. 이들은 당시 실시되던 야간통행금지에도 불구하고 지프에 언론인들을 싣고 갔습니다. 박정희에게 저항하다 강제해직되어 실업자가 된 113명에겐 정보기관의 감시와 미행, 취업 방해, 구속과 연행과 고문, 공민권 제한 등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언론탄압 덕분에 주요 언론들은 박 정권의 비위를 거스를 내용은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박정희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 중 하나는 학생운동인데, 71년에 학원병영화를 반대하는 학생들에 대해 위수령을 발동해 1,889명의 학생을 연행했고 학생운동세력에 심각한 타격을 줍니다. 유신 이후에도 민우지 사건, 검은 10월단 사건, 함성지 사건 등을 통해 학생들을 또 다시 위축시킵니다. 하지만 73년의 김대중 납치사건, 서울대 문리대에서 벌어진 반유신 투쟁 등은 박정희 정권에 큰 타격을 줍니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박정희 유신체제의 악랄함을 국제사회에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고, 서울대의 투쟁은 전 대학으로 퍼져나가 동맹휴학, 시험 거부 등의 투쟁을 일으킵니다. 박정희정권은 학생투쟁에 대해 문리대에서만 180명을 연행하고 20명을 구속하는 등 초강경 처벌로 나섰지만, 12월에 구속학생 전원을 석방하고 모든 처벌을 백지화하는 항복선언을 합니다.

이 조치로 인해 반유신투쟁은 학원가를 넘어서게 되었고, 장준하 등 각계인사 30명이 헌법개정청원운동을 시작합니다.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전복하려는 불순분자의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담화를 발표하지만 반유신투쟁이 멈추지 않자 결국 74년 긴급조치 1호를 선포합니다. 유신헌법을 반대하면 15년 징역형을 내리겠다는 협박이였습니다. 긴급조치 1호 위반을 통해 첫번째로 구속된 장준하씨를 시작으로 23명이 1호를 통해 처벌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긴급조치1호 만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박정희 정권은 같은 해 4월 3일에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는데, 이는 박정희 독재정권에 반대하면 죽일 수 있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명이였습니다.

박정희는 흔히들 유신독재 등의 어두운 면과 경제개발이라는 빛이라는 두가지 면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두가지는 따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가 남긴 가장 어두운 유산은 경제적인 면이며, 박정희를 몰락시킨 큰 이유 중 하나도 경제적인 면이었습니다. 박정희는 재벌체제와 비대한 토건 부문을 특징으로 하는 산업구조와 정부의 통제 아래 이들 부문에 자금을 지원하는 관치금융이라는 왜곡된 경제구조를 만들어냅니다.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 전략은 일본의 메이지 근대화를 의식적으로 모방합니다. 당시 박정희는 국유기업 중심의 경제개발을 원했지만,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는 작은 국가에서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정권이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채택한다면 미국과의 관계를 더 악화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박정희는 국유기업 중심의 성장을 제한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재벌기업들은 국유기업이 아니면서도 국가의 대리인으로서 국유기업과 비슷한 면모를 보였습니다. 박정희에게 이것은 반공산주의적 입장을 유지하는 동시에 재벌기업을 확실히 통제하여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국제적으로 발전 당시 한국의 소득분배가 비교적 괜찮은 것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본격적인 경제개발이 시작되기 전의 역사적 특수상황에 기인합니다. 토지개혁이 단행되었고, 한국전쟁과 이에 따른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실물자산과 금융자산이 파괴됨으로써 자산의 하향평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게다가 극도로 낮은 소득수준에도 불구하고 건국 초기부터 의무교육을 실시해 인적자본의 분배 또한 비교적 고른 편이었으며, 교육시스템이 계층 상승의 주요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유리한 초기 조건 하에서 1960년대의 고도성장은 실제로 동반성장의 양상을 띠었습니다. 분배와 관련한 박정희 정부의 정책은 전무하다시피 했고, 오히려 급속한 자본축적을 위해 노동자와 농민을 쥐어짜는 저임금, 저곡가 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동반성장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경제의 구조적 특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반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적 장점도 1970년대 이후 중화학공업화 정책에 의해 변하게 되며, 박정희정권 중후반에 가서는 극심한 양극화 현상을 보여줍니다.

비민주주의적인 통제경제정책은 상명하달식 권위주의, 특정 경제집단에 편중된 지원, 성장만능주의, 전투적인 성장 속도라는 네 가지 핵심적인 특성을 지닙니다. 독재와 억압으로 경제개발을 추진하면 결국 공정한 룰이 정착되지 못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역량을 키우지 못하기 때문에, 갈수록 적대적 노사관계나 각종 개발을 둘러싼 갈등 및 님비현상 등 갈등비용이 증폭될 수밖에 없습니다. 비민주적이고 비합법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차지한 박정희는 빠른 시간 안에 경제성장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정치적으로 계속 불안한 입장에 서 있거나 권력에서 쫓겨날 수 있다고 판단했고,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한 방안으로 몇 개의 선택된 기업에 집중하는 강압적인 방식을 선택합니다. 결과적으로 일반 시민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소수가 이익을 독점하는 시스템이 유지되어 왔습니다.

박정희 체제를 붕괴시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 체제의 최대 수혜자인 재벌의 성장이 큰 역할을 차지합니다. 독점자본으로 성장한 재벌은 정부의 개입을 거부했으며, 이것은 박정희 체제의 성공 조건을 해체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초기 단계에는 재벌 육성정책이 중소기업의 동반성장과 고용의 확대를 수반하는 효과가 강하게 나타났으나, 재벌이 스스로의 힘으로 독점적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국민경제의 재생산 과정을 통제하면서부터는 이러한 순선환 효과 또는 적하효과가 크게 감소하기 시작합니다. 재벌의 독점적 지배력은 국민경제의 균형발전을 저해하는 힘으로 작용해 재벌의 이익과 국민경제의 이익이 괴리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재벌의 선도적 성장을 통해 국민경제 전체의 순선환적 동반성장을 이끌어낸다는 이른바 적하효과 논리는 1980년대를 거치면서 현실적 유효성을 상실한 이데올로기적 구호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대기업의 고용회피 경향으로 가속화된 제조업 고용의 감소와 서비스경제로의 이행 및 재벌에 의한 경제력 집중의 강화와 중소기업의 피폐화라는 두 가지 구조적 변화는 양극화 추세를 가속화했고 이는 급속한 사회불만을 일으켜 체제의 종말을 가져오게 됩니다. 결국 독재정권은 무너졌지만 독재정권이 낳은 가장 큰 위험, 재벌은 아직 우리 곁에 있습니다.

공제욱이 지적하듯, 당시 박정희 정권이 필요로 했던 조국 근대화의 논리는 일사불란한 동원, 효율적 생활, 근검절약, 강도높은 노동, 발전된 미래를 위한 희생 감수 등이었습니다. 이러한 원칙에 입각하여 어떠한 비효율성도 적극적으로 배제시켜야 했고, 전 국민은 군대와 같은 조직으로 거듭나야 했습니다. 군대는 필연적으로 피라미드 구조를 지니며, 가장 위에 오롯이 존재하는 통치자가 있습니다. 그것이 독재자이고, 독재자의 시대는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인 것입니다. 알라스테어 스미스는《독재자의 핸드북》에서 독재자들의 통치규칙을 지적하며 독재자의 권력기법이 비단 독재정권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민주주의사회, 다원주의사회에서도 은밀히 숨어있는 독재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재자에 대한 견제는 독재사회에만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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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파리 - 생물학과 유전학의 역사를 바꾼 숨은 주인공
마틴 브룩스 지음, 이충호 옮김 / 갈매나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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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은 현재 세계의 거의 모든 교과서에서 정론으로 채택된 이론이지만, 다윈이 생존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진화론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이론이었습니다. 당시 진화론의 아킬레스건은 유전을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없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한 종 내에서 변이가 나타난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이 변이가 어떻게 나타나고, 물질적 기반은 무엇이며,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어떻게 전해지는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결국 다윈의《종의 기원》은 살아남은 이론이 되었습니다. 진화론이 살아남은 것은 다윈과 후대의 수많은 학자들, 그리고 초파리의 힘이 컸습니다.

생물학은 과거엔 신학의 연장이었습니다. 생물학의 목적이 신이 이룬 위대한 설계의 복잡성을 관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생물학을 이끌던 사람들은 박물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생물학자들이 다윈의 진화론적 관점에서 자연계를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생물학적 유물론이 대두하게 되었고, 생물학은 신학을 버리고 실험생물학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생물학이 실험을 받아들이면서 동물행동학, 진화론, 생리학 등의 분야로 분화해 가기 시작했고, 생물학자들은 자신의 이론, 개념을 검증하기 위해 실험용 생물로 적합한 동물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에는 개, 고양이, 비둘기, 쥐 등이 가장 이상적인 실험동물로 여겨졌습니다. 어떤 동물을 실험용으로 선택하느냐로 인해 생물학자들 개개인의 운명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틀림없이 다윈은 무덤 속에서 통곡했을 것이다. 그는 유전의 매커니즘을 제대로 알지 못해 평생 동안 자신의 진화론을 더 설득력 있게 주장할 수 없었다. 다윈이 제시한 진화론의 증거는 생물과 환경의 비교 연구와 화석기록, 동식물 사육에서 얻은 게 전부였다. 그 증거들은 특별한 것이었지만, 기술적이고 간접적인 것에 그쳤다. 그런데 초파리 염색체에 대한 연구는 실험적 증거라는 정통성을 더해 주었다. 초파리 대신 핀치를 조사했던 것이 그의 불운이었다. - p.141 

초기 실험생물학에서 초파리는 하등생물로 취급당했고, 젊은 학생들의 실습용 동물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 초파리의 가능성을 알아챈 사람이 컬럼비아대학의 토머스 헌트 모건이었습니다. 모건은 우연히 초파리의 눈 색깔이 자연발생적으로 변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모건은 돌연변이를 통해 역으로 진화과정을 설명하고자 했는데, 문제는 돌연변이는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돌연변이가 나타날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개체수를 높이는 방법을 선택했는데, 이러한 조건에 초파리는 아주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초파리는 과일 껍질만 있어도 풍족하게 키울 수 있었기 때문에 경제성이 탁월했고, 일 년 내내 번식하며, 12일마다 새로운 세대가 생기기 때문에 진화의 과정을 압축해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선형적이고 이성적이며 질서정연한 세계에서 성장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가정하면 발생의 소용돌이를 제대로 포착할 수 없다. 기형들은 그런 소용돌이를 반영한다. 기형은 우리의 감각을 거스르며 우리의 자기만족에 도전장을 내밀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고정관념에 맞서게 한다. -《자연의 농담》p.56 

결국 모건과 초파리가 현대 유전학의 기초를 세우게 됩니다. 모건은 초파리에서 유전의 물리적 바탕이 세포 속의 염색체이 있음을 입증했고, 유전자들이 염색체에서 직선으로 늘어서 있는 것을 보여준 최초의 유전자 지도 또한 초파리의 것이었습니다. 초파리의 장점이 알려지면서 초파리는 가장 선호하는 실험동물로 떠올랐습니다. 초파리 몸의 청사진은 일반적인 생물의 신체 형성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 주는 유익한 안내자가 되었습니다. 초파리를 연구한 학자들은 권위 있는 학술지에 일상적으로 발표할 수 있었고,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성공을 거뒀습니다. 제인 구달과 같은 사례를 제외한다면 초파리를 선택한 것은 탁월한 일이었습니다.

초파리가 인간에 대해 알려주는 것들은 놀라운 것들이 많습니다. 틸리는 초파리 연구를 통해 학습 장애를 유전자적으로 치료할 수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더 나아가서 뇌졸중 환자, 알츠하이머병 환자를 치료하는 미래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기억 조작과 같은 SF적인 가능성까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초파리는 인간이 왜 술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진화적 기원에 통찰을 제공해주며, 짝짓기를 둘러싼 진화 게임에서 암컷과 수컷에 대한 관계에 많은 부분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장수 유전자의 발견입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이 붙은 이 유전자는 평균 수명을 35퍼센트나 연장시킬 뿐만 아니라 신체 또한 보통 초파리보다 훨씬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오래 살고 싶다면, 섹스를 아예 포기하는 쪽이 나을지 모른다. 만약 무성 생식이 노화를 막는 열쇠라면, 우리에게 불로 장생은 생각만큼 먼 목표가 아닐지 모른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전체 인류 중 절반인 '여성'만 가리킨다. 어느 모로 보나 수컷은 무성 생식을 하기에 부적합하다. 여러분이라면 영원한 삶을 얻기 위해 섹스를 포기하겠는가? - p.225 

초파리는 유전학을 탄생시켰고, 유전학과 진화생물학을 결합시켰으며, 20세기 생물학에서 일어났던 거의 모든 획기적인 사건들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초파리는 거의 모든 생물학의 주인공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초파리를 연구하고 이해함으로써 개구리, 생쥐 등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사람에 대한 이해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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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베스트셀러 - 조선 후기 세책업의 발달과 소설의 유행,문학 이야기 지식전람회 26
이민희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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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탕하고 추한 어조가 사람의 심령을 허무 방탕하게 하고, 사특하고 요사스러운 내용이 사람의 지혜를 미혹에 빠뜨리며, 황당하고 괴이한 이야기가 사람의 교만한 기질을 고취시키고, 시들고 느른하며 조각조각 부스러지듯 조잡한 문장이 사람의 씩씩한 기운을 녹여냅니다."

조선 후기 최고의 유학자 중 한 명이었던 정약용이 묘사한 이것은 바로 패관잡서, 요즘말로 하면 소설책이었습니다. 정약용은 사람이 만들어낸 재앙으로 소설책을 으뜸으로 지목하는데, 한번 소설책을 들면 공부하는 학생이나 종묘사직을 책임져야 하는 고위 관료, 집안 살림을 맡은 부녀자들 모두 책읽기를 마칠 때까지 다른 일을 소홀히 하여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소설에 빠져 든 이들은 모두 패가망신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소설책을 모두 모아 불태우고 중국으로부터의 소설 수입을 금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제안은 마치 과거 우리나라에서 만화책을 모아 불태운 일이나 현재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를 외치며 게임, 만화 등의 문화를 탄압하는 것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근세에 안방의 부녀자들이 경쟁하는 것 중에 능히 기록할 만한 것으로 오직 패설이 있는데, 이를 좋아함이 나날이 늘고 달마다 증가하여 그 수가 천백 종에 이르렀다. - p.22 

조선의 유명한 학자 중 한명이었던 정약용이 심각한 어조로 언급할 정도로 조선시대에 소설책은 막강한 파급력을 가져왔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중국 통속소설이 대량 유입되면서 사람들은 소설의 맛을 알아버렸고, 중국의 소설을 번역한 국문소설, 국문창작소설이 등장하면서 소설의 대중화를 이끌었습니다. 이 책《조선의 베스트셀러》는 이러한 조선의 시대상, 조선시대에 성행했던 출판문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의 출판문화를 이끈 것은 기득권층이 장악하던 점잖고 품격있는 것들이 아니라, 정약용의 표현대로 음탕하고 사특하고 황당하고 괴이한, 상류사회가 멸시하던 천한 문화였습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아마 이런 것이었을 것입니다.

(C01) [笑笑生] 금병매(金甁梅) (번역).zip

조선시대에 소설책이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한문소설이 아닌, 국문소설이 등장하면서부터였습니다. 소설책이 높은 인기를 얻게 되자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었고, 17세기 후반부터 시장경제가 발달하면서 소설을 필사해 대여하는 세책업이 성행했습니다. 세책점에서 사용하는 세책본 고소설은 요즘말로 하면 대여점용 소설 혹은 만화책인데, 이 대여점용 책과 대여점이 조선중기부터 조선말기까지 출판문화의 핵심에 서게 됩니다. 세책본에 대한 고위관료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세책점은 판서, 참판 등 고위층 인사부터 진사, 생원 등 일반인은 물론이고 노비들마저도 애용했습니다.

조선에서 상업적인 목적으로 유통되던 책들은 대여용인 세책본과 개인용인 방각본이 있었습니다. 현재의 대여점과 비교했을때 독특한 점은 현재는 똑같은 책을 대여용으로도 사용하고 개인판매용으로도 사용하는 반면, 조선시대에는 세책본과 방각본의 생김새가 달랐다는 것입니다. 세책본과 방각본의 차이라면, 현대의 책으로 비유하면 세책본은 양장본이고, 방각본은 페이퍼백이었습니다. 대여점 책인 세책본이 더 고급 책이었던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써야 하기 때문에 튼튼해야 했고, 현재의 대여점용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빌려간 사람이 낙서하기 등의 행태가 조선시대에도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세책본《금령전》에서는 책에 낙서가 많으니 다시 보수하지 않으면 세책점 주인의 어머니를 어떻게 하겠다는 패드립을 낙서해놓는가 하면, 세책본《김홍전》에서는 단권인 책을 네 권으로 만들어 대여했다며 세책점 주인을 잡놈이라 부르는 낙서도 있었습니다.

세책의 특성상 필사해 만든 책을 많은 사람들이 돌려가며 보아야 했기 때문에 무척 견고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표지를 삼베 같은 것으로 싸서 일반 책에 비해 훨씬 두껍게 만들고, 손이 자주 가는 본문의 경우 찢어지기 쉽기 때문에 배접을 하거나 두꺼운 종이를 사용했다. 또한 책장마다 들기름을 칠해 책장이 해지는 것을 방지하기도 했다. 이렇게 여러 조건을 갖추다보면 다른 것보다 세책본의 단가가 더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세책본은 사대부가 여성을 비롯한 중산 계층 사람들이 즐겨 찾았고, 하층민들은 세책본보다 비교적 값이 저렴한 방각본을 즐겨 찾았다. - p.61 

문화의 발달, 전파과정에서 대여점 문화, 세책업의 등장은 전세계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세책업이 등장했고, 중국의 경우는 한 세기 뒤에 세책업이 융성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직지심체요절이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으로 인정받는 등 인쇄술 자체는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세계적으로 본격적인 인쇄술로 인정받는 것은 그 기술이 어떻게 활용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기술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기득권층이 소설과 같은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서브컬처를 무시하고 배척한데 그 원인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소설책을 보고자 하는 열정, 열의는 그런 장애물들을 극복하고 다른나라 부럽지 않는 소설강국을 만들어 냈습니다. 남성 사대부 주도의 유교사회에서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멸시하거나 배척하던 국문소설과 세책 문화는 규방의 여성 독자를 중심으로 문학 창작 및 독서 문화의 고양을 이끌어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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