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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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는 역사적으로 내란이나 전쟁, 경제 불안 등의 위기 상황을 배경으로 나타납니다. 위기 상황을 극복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독재를 탄생시키지만 대부분의 경우 독재는 위기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독재는 본질적으로 위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위기를 지속시키거나 악화시킵니다. 그래야 독재가 공고화되고 장기화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향은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김일성, 박정희, 카스트로, 후세인 등 모든 독재자들에게 발견됩니다. 독재는 권력이 집중되기 때문에 독재자를 멈출 방법이 존재하지 않으며, 점점 더 심한 독재와 폭정을 일삼게 됩니다.

박정희는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부터 때때로 영구집권에 대한 흑심을 드러냈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옮긴 것은 1968년 삼선개헌의 정지작업으로 김종필 직계를 제거하면서부터입니다. 1인 파쇼권력을 획책한 것은 71년 대선 전후로 알려져 있는데, 72년에 유신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박정희는 유신 반대운동이 치열하게 일어나지는 않았을 거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박정희는 유신권력에 반대할 소지를 깨끗이 청소해 놓았다고 믿을만한 근거가 있었는데, 여당의 경우 김종필계를 숙청해놨고, 언론 또한 장악한 지 오래였습니다.

1974년 10월에 젊은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한 뒤, 동아일보는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이 저지른 민주화운동 탄압과 인권 유린을 보도했습니다. 최근 있었던 철옹성같은 30년 독재를 자랑하던 이집트 독재자, 무바라크가 실각한 사건은 언론이 민주화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권력자들에게 언론은 가장 효과적인 무기인 동시에 가장 두려운 적이기도 합니다. 1972년에 유신을 선포한 이래 효과적으로 종신지배체제를 굳히고 있었던 박정희도 마찬가지로, 자신에 대한 언론인들의 저항은 최대의 도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동아일보의 반 독재적 움직임에 대해 중앙정보부는 동아일보에게 광고금지라는 압력을 행사합니다. 현재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많은 미디어가 광고수입에 의존하고 있고, 이것은 미디어 콘텐츠를 변형시키는 가장 강력하고도 영향력 있는 압력 중의 하나였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보여준 광고를 통한 효과적인 탄압은, 광고와 자유시장은 미디어 소비자가 최종구매자로서 자신의 선택을 결정하는 중립적인 체제를 양산하지 못하며, 결국 미디어의 번영과 생존에 영향을 행사하는 것은 광고주의 선택임을 보여줍니다.

동아일보사는 광고 탄압으로 인한 기구 축소와 사원들의 징계 명목으로 박정희에게 저항한 160명을 대량 해직했습니다. 해직당한 언론인들은 동아일보사 건물 안에서 항의 투쟁을 벌였는데, 동아일보 언론인들이 사옥에서 농성투쟁을 벌이자 박정희는 실전적인 해결책을 지시합니다. 200명이 넘는 괴한들을 동원해 투쟁중이던 피디, 아나운서, 엔지니어들을 폭력을 사용해 몰아냈습니다. 이들은 당시 실시되던 야간통행금지에도 불구하고 지프에 언론인들을 싣고 갔습니다. 박정희에게 저항하다 강제해직되어 실업자가 된 113명에겐 정보기관의 감시와 미행, 취업 방해, 구속과 연행과 고문, 공민권 제한 등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언론탄압 덕분에 주요 언론들은 박 정권의 비위를 거스를 내용은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박정희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 중 하나는 학생운동인데, 71년에 학원병영화를 반대하는 학생들에 대해 위수령을 발동해 1,889명의 학생을 연행했고 학생운동세력에 심각한 타격을 줍니다. 유신 이후에도 민우지 사건, 검은 10월단 사건, 함성지 사건 등을 통해 학생들을 또 다시 위축시킵니다. 하지만 73년의 김대중 납치사건, 서울대 문리대에서 벌어진 반유신 투쟁 등은 박정희 정권에 큰 타격을 줍니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박정희 유신체제의 악랄함을 국제사회에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고, 서울대의 투쟁은 전 대학으로 퍼져나가 동맹휴학, 시험 거부 등의 투쟁을 일으킵니다. 박정희정권은 학생투쟁에 대해 문리대에서만 180명을 연행하고 20명을 구속하는 등 초강경 처벌로 나섰지만, 12월에 구속학생 전원을 석방하고 모든 처벌을 백지화하는 항복선언을 합니다.

이 조치로 인해 반유신투쟁은 학원가를 넘어서게 되었고, 장준하 등 각계인사 30명이 헌법개정청원운동을 시작합니다.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전복하려는 불순분자의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담화를 발표하지만 반유신투쟁이 멈추지 않자 결국 74년 긴급조치 1호를 선포합니다. 유신헌법을 반대하면 15년 징역형을 내리겠다는 협박이였습니다. 긴급조치 1호 위반을 통해 첫번째로 구속된 장준하씨를 시작으로 23명이 1호를 통해 처벌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긴급조치1호 만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박정희 정권은 같은 해 4월 3일에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는데, 이는 박정희 독재정권에 반대하면 죽일 수 있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명이였습니다.

박정희는 흔히들 유신독재 등의 어두운 면과 경제개발이라는 빛이라는 두가지 면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두가지는 따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가 남긴 가장 어두운 유산은 경제적인 면이며, 박정희를 몰락시킨 큰 이유 중 하나도 경제적인 면이었습니다. 박정희는 재벌체제와 비대한 토건 부문을 특징으로 하는 산업구조와 정부의 통제 아래 이들 부문에 자금을 지원하는 관치금융이라는 왜곡된 경제구조를 만들어냅니다.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 전략은 일본의 메이지 근대화를 의식적으로 모방합니다. 당시 박정희는 국유기업 중심의 경제개발을 원했지만,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는 작은 국가에서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정권이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채택한다면 미국과의 관계를 더 악화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박정희는 국유기업 중심의 성장을 제한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재벌기업들은 국유기업이 아니면서도 국가의 대리인으로서 국유기업과 비슷한 면모를 보였습니다. 박정희에게 이것은 반공산주의적 입장을 유지하는 동시에 재벌기업을 확실히 통제하여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국제적으로 발전 당시 한국의 소득분배가 비교적 괜찮은 것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본격적인 경제개발이 시작되기 전의 역사적 특수상황에 기인합니다. 토지개혁이 단행되었고, 한국전쟁과 이에 따른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실물자산과 금융자산이 파괴됨으로써 자산의 하향평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게다가 극도로 낮은 소득수준에도 불구하고 건국 초기부터 의무교육을 실시해 인적자본의 분배 또한 비교적 고른 편이었으며, 교육시스템이 계층 상승의 주요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유리한 초기 조건 하에서 1960년대의 고도성장은 실제로 동반성장의 양상을 띠었습니다. 분배와 관련한 박정희 정부의 정책은 전무하다시피 했고, 오히려 급속한 자본축적을 위해 노동자와 농민을 쥐어짜는 저임금, 저곡가 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동반성장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경제의 구조적 특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반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적 장점도 1970년대 이후 중화학공업화 정책에 의해 변하게 되며, 박정희정권 중후반에 가서는 극심한 양극화 현상을 보여줍니다.

비민주주의적인 통제경제정책은 상명하달식 권위주의, 특정 경제집단에 편중된 지원, 성장만능주의, 전투적인 성장 속도라는 네 가지 핵심적인 특성을 지닙니다. 독재와 억압으로 경제개발을 추진하면 결국 공정한 룰이 정착되지 못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역량을 키우지 못하기 때문에, 갈수록 적대적 노사관계나 각종 개발을 둘러싼 갈등 및 님비현상 등 갈등비용이 증폭될 수밖에 없습니다. 비민주적이고 비합법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차지한 박정희는 빠른 시간 안에 경제성장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정치적으로 계속 불안한 입장에 서 있거나 권력에서 쫓겨날 수 있다고 판단했고,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한 방안으로 몇 개의 선택된 기업에 집중하는 강압적인 방식을 선택합니다. 결과적으로 일반 시민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소수가 이익을 독점하는 시스템이 유지되어 왔습니다.

박정희 체제를 붕괴시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 체제의 최대 수혜자인 재벌의 성장이 큰 역할을 차지합니다. 독점자본으로 성장한 재벌은 정부의 개입을 거부했으며, 이것은 박정희 체제의 성공 조건을 해체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초기 단계에는 재벌 육성정책이 중소기업의 동반성장과 고용의 확대를 수반하는 효과가 강하게 나타났으나, 재벌이 스스로의 힘으로 독점적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국민경제의 재생산 과정을 통제하면서부터는 이러한 순선환 효과 또는 적하효과가 크게 감소하기 시작합니다. 재벌의 독점적 지배력은 국민경제의 균형발전을 저해하는 힘으로 작용해 재벌의 이익과 국민경제의 이익이 괴리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재벌의 선도적 성장을 통해 국민경제 전체의 순선환적 동반성장을 이끌어낸다는 이른바 적하효과 논리는 1980년대를 거치면서 현실적 유효성을 상실한 이데올로기적 구호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대기업의 고용회피 경향으로 가속화된 제조업 고용의 감소와 서비스경제로의 이행 및 재벌에 의한 경제력 집중의 강화와 중소기업의 피폐화라는 두 가지 구조적 변화는 양극화 추세를 가속화했고 이는 급속한 사회불만을 일으켜 체제의 종말을 가져오게 됩니다. 결국 독재정권은 무너졌지만 독재정권이 낳은 가장 큰 위험, 재벌은 아직 우리 곁에 있습니다.

공제욱이 지적하듯, 당시 박정희 정권이 필요로 했던 조국 근대화의 논리는 일사불란한 동원, 효율적 생활, 근검절약, 강도높은 노동, 발전된 미래를 위한 희생 감수 등이었습니다. 이러한 원칙에 입각하여 어떠한 비효율성도 적극적으로 배제시켜야 했고, 전 국민은 군대와 같은 조직으로 거듭나야 했습니다. 군대는 필연적으로 피라미드 구조를 지니며, 가장 위에 오롯이 존재하는 통치자가 있습니다. 그것이 독재자이고, 독재자의 시대는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인 것입니다. 알라스테어 스미스는《독재자의 핸드북》에서 독재자들의 통치규칙을 지적하며 독재자의 권력기법이 비단 독재정권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민주주의사회, 다원주의사회에서도 은밀히 숨어있는 독재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재자에 대한 견제는 독재사회에만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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