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최초의 인류 김영사 모던&클래식
도널드 조핸슨 지음, 진주현 해재, 이충호 옮김 / 김영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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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현생인류가 원숭이에서 진화했다는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선 많은 장애물들이 존재했습니다. 무수한 장애물들을 극복하고 진화론이 승리하게 된 요인 중 하나는 수많은 고인류학자들의 노력, 그리고 그들이 발견한 부정할 수 없는 증거들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진화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고인류학자들은 사막과 오지를 넘나들었고, 잃어버린 고리들을 찾았습니다. 어떤 보석보다 값진 이 보물들은 우리의 발 밑에서 수백만 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보물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전문기술을 배운 기술자이면서 청소년과 같은 열정과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엄청난 행운아여야 합니다. 저자 도널드 조핸슨은 이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젊을 적 모습은 해리슨 포드가 열연한 인디아나 존스를 닮았습니다.

오늘날 과학자들이 밝힌 진화경로는 사족보행을 하던 원숭이에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를 거쳐 호모 사피엔스로 이어지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200만년 전에 살았던 호모 하빌리스는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루이스 리키와 메리 리키가 탄자니아에서 발견했습니다. 리키와 고고학 탐험을 하던 조핸슨은 모든 고인류학자들의 꿈인 호모 하빌리스 이전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조핸슨은 논문을 제출해 학위를 따야 하는 상황이었고, 재정적 지원도 전혀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새로운 도전을 했다가 성과가 없다면, 학위를 받을 타이밍도 놓치고 재정적으로도 큰 빚을 지게 되어 인생이 몰락할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에디오피아에 갔습니다.

경이로운 과학적 업적은 때론 느닷없이 찾아옵니다. 세계적인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새로운 발견은 우연히 찾아온다“고 말하며 LHC 가동 하루 전만 해도 힉스 보손이 발견되지 않는다는데 내기로 100달러를 걸었습니다. 비록 스티븐 호킹이 힉스 입자에 대한 내기에선 졌지만, 도널드 조핸슨의 사례를 두고 내기를 걸었다면 승리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정말로 불현듯 찾아왔습니다. 에디오피아에서 탐사작업을 하던 조핸슨은 그날 뭔가가 일어날 것 같다고 일지에 쓴 뒤 그녀를 발견했습니다. 조핸슨은 그녀의 이름을 비틀즈의 노래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에서 따왔습니다. 그녀는 최초의 인간, 루시였습니다.

아주 드물게 일련의 뼈들이 확실한 증거를 제공하는 경우도 있다. 루시가 바로 그러한 확실한 증거를 제공했다. 초기의 호미니드가 두발도행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전의 추측에 대해 루시가 일도양단의 결론을 내려준 것이다. 유인원의 뇌를 가졌으면서도 기능 면에서 골반과 다리뼈는 현생 인류와 거의 동일한 존재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지만 확실한 증거를 제공하는 모든 화석과 마찬가지로 루시 역시 새로운 의문을 몇 가지 제기했다. 만약 뇌의 확대가 시작되기 전에 직립보행을 시작했다면 직립보행을 초래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 p.286

그녀는 그동안 발굴된 인류 화석에 비해 훨씬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어 과학적인 입증도 간단했습니다. 연대측정법 결과 그녀는 320만년 전에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됬습니다. 호모 하빌리스 이전의 존재,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였습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인 루시는 머리는 작은 뇌를 가진 유인원처럼 생겼지만, 신체는 완전한 직립보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직립보행이 뇌가 확대되는 것과 발맞추어 진화했다고 하는 기존의 학설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걷기 시작하면서 뇌가 커진 것입니다. 또한 이브 코팡은 루시의 무릎을 연구해 루시가 두발로 보행했을 뿐만 아니라 수상생활도 했다고 말합니다. 아파렌시스 종은 두발보행과 수상생활에 적합한 운동능력을 지닌 최초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였던 것입니다.

인류는 진화하면서 여러 종으로 분화했고, 그 중에서 살아남은 종이 바로 현재의 우리입니다. 어째서 호모 사피엔스로의 진화가 다른 호모와의 경쟁 끝에 살아남는 종이 될 수 있었냐는 질문은, 그것이 가장 생존에 적합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두 발로 달리는 것은 네 발로 달리는 것보다 에너지 효율성이 낮아 속도가 느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발로 달리게 진화했다는 것은, 강자가 생존한다는 적자생존론이 틀렸음을 말해줍니다. 인간은 더욱 머리가 커졌고, 완력이 약해졌고, 임신기간이 길었고, 갓난아이 시절에 무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오언 러브조이는 인간이 왜 두 발로 대지에 섰느냐는 흥미진진한 질문에 혹시 섹스Sex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던집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한 가지 교훈은 네발보행이 분명히 더 유리하더라도 더 유익한 적응을 위해서라면 네발보행을 포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잘 달릴 수 있는 능력을 포기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 동물의 전체적인 생존 전략을 고려하면 그러한 이점은 사라지고 만다. - p.500

루시의 발견 이후에도 고인류학은 계속 발전하고 있습니다. 케냔트로푸스 플라티오프스, 아르디피테쿠스, 오로린 투게넨시스가 등장했고,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의 경우엔 무려 700만 년 전의 화석입니다. 진화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를 찾고자 하는 고인류학자들은 지금도 오지의 현장에서 땀방울을 흘리고 있습니다. 값진 보물을 찾는 그들은 마치 현대의 해적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도널드 조핸슨은 그 해적들 가운데서도 행운아였고, 대중들을 휘어잡을만한 문장력마저 가지고 있습니다. 도널드 조핸슨이 말해주는 고인류학의 흥미진진한 세계는 독자들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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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크 선장의 보이지 않는 손 - 알려지지 않은 해적의 경제학
피터 T. 리슨 지음, 한복연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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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에 대한 이미지를 묻는다면, 코믹하고 능글맞은 블랙펄의 선장을 떠올릴 수도 있고, 몸이 늘어나는 밀짚모자 선장이 생각날 수도 있으며, 삼호 주얼리 호를 피랍한 소말리아 해적이 생각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가장 전통적인 이미지라면, 블랙비어드(검은 턱수염)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악명 높은 해적, 에드워드 티치와 같은 해적일 것입니다. 기괴한 외모, 자유분방함, 잔혹함, 보물, 범법자 같은 이미지를 지닌 해적들은 2세기동안 무시무시한 소문을 몰고 다니며 바다에서 활약했습니다. 그러나 저자 피터 T 리슨은 이런 해적의 전통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해적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피터 T 리슨이 보여주는 해적들은 폭력적인 평화주의자들이고, 이성을 욕망하는 동성애자들이며, 자유주의적인 사회주의자들이였습니다. 또한 자본주의적인 공산주의자였고, 요란하게 자신을 홍보하는 비밀스러운 범죄자들이자, 권위적인 민주주의자들이었습니다. 해적들은 잔인한 사람들이라는 이미지와 다르게, 역사학자 앵거스 컨스텀에 의하면, 당시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고 무서웠던 해적 에드워드 티치는 로버트 메이너 해군 대위와 마지막 전투를 벌여 죽을 때까지 단 한 명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해적들의 모순적인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 저자는 경제학적 관점에서 그들의 행동을 해석합니다.

해적들은 놀랍게도 오늘날 민주주의라 부르는 체제를 완성했고, 사회복지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독재자를 견제하고 1인 1투표에 근거한 선거를 실시했습니다. 인종적인 평등을 구현했고, 빈부격차를 억제했습니다. 21세기인 오늘날에도 많은 국가들이 달성하지 못한 이런 가치를 실현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저자는 해적들의 경제적인 동기, 이윤추구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윤을 추구하려는 욕망이 이런 가치들을 언제나 구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해적 특유의 환경과 이윤추구가 만났을 때, 오늘날 우리가 선하다고 인정하는 가치들이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해적들의 동기는 결코 선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돈을 벌고자 했고, 남의 돈을 빼앗고자 했을 뿐입니다.

누군가 집에 와서 물건을 가져가려고 하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당연히 싸우겠지요. 바로 그겁니다. 불법 어업의 희생자가 되느니 사냥을 하는 것이 낫습니다. -《해적국가》p.61

당시 뱃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두 가지였습니다. 그들은 합법적인 상선에서 종사할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해적이 되는 길이었습니다. 해적은 언제든 사형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상선을 타지 않고 자진해서 해적선을 탔습니다. 상선은 소수의 선주들에 의해 운영되었고, 그들에 의해 임명된 선장이 전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재자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독재자였던 상선의 선장 역시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에 반해 해적들은 투표를 통해 해적선장을 선출했습니다. 선장 뿐만 아니라 사무장 등 선장을 견제할 수 있는 직책도 투표를 통해 선출함으로서 권력을 분산시켰습니다. 권력자들을 견제하는 수단을 가지게 됨으로서 해적들은 월등한 노동환경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1695년에 헨리 에브리 해적 함대는 600,000파운드 이상의 귀금속과 보석을 운반하던 선박을 나포했다. 그 결과 해적 1인당 1,000파운드의 배당금을 받았는데, 이 금액은 당시 경험 많은 상선 선원의 약 40년치 수입에 해당했다. 1721년에 존 테일러 선장과 올리버 라 부쉬 선장의 해적 연합은 단 한번의 공격으로 해적 1인당 4,000파운드의 경이로운 수입을 올렸다. - p.35

해적들을 지켜줄 것들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해적들은 스스로를 지키고 돈을 벌기 위해 평등하고 평화로운 정책들을 만들었습니다. 해적일을 하다가 부상을 당할 사람들을 위해 복지기금을 만들었고, 약탈품을 분배할 때 가장 많이 분배받는 선장도 선원 2인분 이상을 받지 못하도록 빈부격차를 최소화했습니다. 열심히 활동하는 선원에게 전투시 가장 좋은 무기를 지급하는 등의 시스템을 통해 평등적 정책을 펼치면서도 경쟁을 독려했습니다. 그들은 망망대해에서 해적선이란 좁은 공간에서 같이 살아가는 가족과 같은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질서를 준수했습니다.

해적들은 본질적으로 범죄자들이었고, 잔혹무도하기도 했습니다. 포로들에게 상상하기 힘든 고문을 가하기도 했고, 무법자답게 전투를 했습니다. 그러나 해적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그런 상황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해적기라는 것을 사용합니다. 항복한다면 자비를 베풀지만 저항한다면 모두 죽이겠다는 의사표현은 징기스칸 당시 몽골군이 사용했던 전략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해적기라는 신호효과를 사용해 자신들의 피해를 줄이면서도 이윤을 추구할 수 있었고, 약탈당하는 상선측에서도 목숨을 뺏기지 않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양측 모두가 이득이 되는 해적기의 효과를 유지하기 위해선 저항할 경우 무엇보다 무자비해져야 했고, 항복한다면 대단히 자비로워야 했습니다.

해적들의 이러한 모든 행위는 이윤창출을 위한 행위이고, 약탈당하는 측에선 대단히 억울한 일이지만 해적들의 행위는 개인의 이기심이 사회의 이익이 되기도 한다는 사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해적들의 약탈행위 덕분에 상선의 선장들이 가혹한 행위를 쉽사리 하지 못했습니다. 과거에 괴롭혔던 선원이 해적선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적들은 선원들의 평가가 나쁜 상선의 선장들은 가혹한 처벌을 가했지만, 선원들에게 평가가 좋은 상선의 선장들에겐 정중하게 대접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가진 공포라는 이름의 브랜드는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줬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악행을 하는 동기를 견제했던 것입니다.

해적들은 또 다른 목적, 즉 착취적인 선장들에게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야만적인 고문을 가했다. 해적의 정의를 두려워했던 상선의 선장들은 선원들을 덜 가혹하게 다루게 되었고, 이런 점에서 해적들은 상선 선원들의 복지에 이바지했다고 볼 수 있다. - p.206

비록 범죄조직을 효율적으로 이끌기 위해서였긴 하지만 해적들이 프랑스 혁명이나 영국 의회의 역사보다도 빠른 시기에 확립한 민주적 장치들은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해적들은 자유인들이 모여 어떻게 하면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느냐는 대답에 경제학적인, 민주주의적인 해답을 내놓은 것입니다. 해적 조직은《파리대왕》의 학생 사회보다 세계 500대 기업에 더 가까웠습니다. 해적들은 경제적 이득을 추구한다면 조직의 부를 최대한 평등하게 분배하고, 권력자를 견제하며, 합리적으로 조직원의 의욕을 고취시키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대한민국호라는 배가 운행함에 있어서 해적선이 내놓았던 이러한 교훈은 경청할 만한 내용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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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 - 태평양 전쟁에서 배우는 조직경영
노나카 이쿠지로 외 지음, 박철현 옮김, 이승빈 감수 / 주영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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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군대를 바탕으로 서쪽으로는 미얀마, 북쪽으론 쿠릴열도, 남쪽으론 파푸아뉴기니, 동쪽으론 태평양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강대했던 일본 제국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습니다. 아시아에서 승승장구하던 일본 제국이 패배한 원인으로 여러 가지가 지목되고 있지만, 저자 노나카 이쿠지로, 스기노오 요시오, 데라모토 요시야, 가마타 신이치, 도베 료이치, 무라이 도모히데는 조직론적 평가를 도입해 일본의 실패원인을 일본군대라는 관료제 조직의 특징에 주목합니다. 가장 발달된 관료제 조직이라고 자랑하던 일본군대지만, 그 내부는 비합리성으로 가득했던 것입니다. 저자들은 일본군대가 조직으로서 큰 패배를 경험한 노몬한 사건, 미드웨이 작전, 과달카날 작전, 임팔 작전, 레이테 해전, 오키나와 전투를 예로 들면서 일본군이, 일본이 실패한 원인을 찾고자 합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한 이후 중일전쟁, 러일전쟁의 승전국가라는 강렬한 사건을 통해 세계무대에 데뷔합니다. 특히 러일전쟁의 결과는 세계를 놀라게 했는데, 이는 일본으로서도 놀랄만한 전과였습니다. 서양의 강대국을 이겼다는 경험으로 인해 러일전쟁 당시 사용된 육군의 총검돌격전술과 해군의 함대결전전술은 하나의 사상으로 굳어질 정도였습니다. 일본이 성장할 당시에 큰 성공을 가져왔던 이런 전략들은 당시 놀랄만한 위력을 보여줬고, 그 결과 일본은 아시아를 호령하는 제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말해주듯이 무패를 자랑하던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패배를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저자들은 전쟁 당시에 일본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황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게 밀리기 시작하게 된 이유는 일본군, 더 나아가 일본이라는 조직 내부의 문제점이라고 지적합니다. 일본군이 그동안 자신보다 많이 약한 나라들을 침공했을 땐 드러나지 않았던 조직의 약점들이 강대국들과 싸우기 시작하면서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미드웨이 작전만 하더라도 일본은 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의 4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해 미군과 싸울만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고, 야마토급, 공고급 등 일본 연합 함대 함정의 80퍼센트를 투입한 레이테 해전만 하더라도 훗날 구리타 반전 사건만 아니었더라면 이길 수 있었을것이라고 평가할 정도였습니다. 즉 실패의 요인은 물질적인 차이보다는 관료제 조직끼리의 충돌에서 더 비합리적인 조직구조가 패배한 것입니다.

당시 육군과 해군 사이에는 은근한 알력이 있었다. 쌍방 수뇌부는 이전부터 줄곧 대립 관계를 형성해 오면서 자신들의 체면을 중시하는 바람에 나약한 소리는 내지 못했다. 당연히 어느 한쪽이 철수 의사를 보일 때까지 다른 쪽은 절대 그 말을 꺼내서는 안 된다는 경향이 뚜렷했다. - p.133

노몬한 사건, 미드웨이 작전, 과달카날 작전, 임팔 작전, 레이테 해전, 오키나와 전투는 여러 사단이 참여한 전투 또는 해군과 육군이 같이 참여하는 복합적인 전투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또한 대국적인 관점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일본 본토의 대본영과 실제로 전투에 참여하는 현장 부대의 의견이 엇갈린 전투이기도 합니다. 일본군은 애매한 전략 목적을 설정했을 뿐 아니라, 러일전쟁부터 이어져 내려온 단기기습전술에 너무 의존했고, 패배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패배를 가정한 의심은 나약함으로 간주되어 비상시의 대책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비상시에 적용할 대책을 강구하지 않아 계획이 빗나갔을 때 사태를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일본군은 전투강령이 엄격했는데, 고급 지휘관의 행동을 세밀하게 규제하는 일본군의 강령은 지휘관의 시각이 좁아지고, 상상력이 빈약해지며, 사고가 경직되는 현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엔 이런 지휘관에게 반대의견을 제시할 사람이 부족했습니다. 인맥 편중의 조직 구조는 장교들에게 체면과 보신 위주로 행동하게 했고, 조직 내 융화를 중시하느라 원리나 논리보다는 감정과 분위기로 상황을 판단했습니다. 부하 장교들이 자신의 안색을 살펴서 심중을 읽어주길 원했다던 무타구치 렌야의 말은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의 지휘관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일본군이 개인 및 조직이 공유해야 할 전투에 대한 과학적 방법론을 가지지 못했던 것에 비해, 미국은 그야말로 논리실증주의가 구현된 전투프로세스를 전개했다. 이에 비해 일본군 엘리트 중에는 하나의 개념을 창조하고 이를 실제 작전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작전 계획서는 "전기가 무르익었음", "결사 임무를 수행하여 성지에 따를 것", "천우신조", "신명의 가호" 등의 추상적이고 허무맹랑한 문구로 가득할 뿐, 그 문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할지라는 방법론은 찾아볼 수 없었다. - p.291

‘백발백중의 포1문이 백발일중의 포 100문을 제압한다.’는 해군의 정신론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군은 정신론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정신론은 모든 것을 정신의 책임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게 합니다. 성공할때는 괜찮지만, 실패할 때 정신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는 해석은 전쟁과 같은 상황에서 특히나 치명적이었습니다. 정신적인 부분을 강조했기 때문인지 일본군은 기계화된 전투부대, 보급, 정보통신, 후방지원이 연결된 통합 근대전이 시작되었음에도 그런 전환기에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미군이 특정 전투에서 불리한 전력과 전황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데는 이러한 통신을 통한 정보전에서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임팔 작전 당시 제15군 사령부에서 열린 병단장 회동에서 우스이 보급참모가 보급이 원활할 것 같지 않다고 말하자, 무타구치 군사령관이 벌떡 일어서서 "뭐라고? 그딴 걱정은 하지 마. 적을 만나면 총구를 하늘에 대고 3발만 쏘아보라고. 그러면 자동으로 항복하게 되어 있어" 결국 적의 식량을 탈취해 충당한다는 방침이 통과되고 말았다. - p.292

결국 일본제국이 전쟁에서 패배하게 된 원인으로 조직의 목적이 불명확하고, 전략이 단기적이며, 대안이 좁고,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한 인맥주의의 폐해, 정신론만을 강조하는 불합리성과 같은 일본군 관료제가 지닌 조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일본군이 이런 폐해들을 가지게 된 원인 중 하나로 러일전쟁의 승리를 지목합니다. 러일전쟁의 승리가 너무나 강렬했고, 과거의 성공에 얽매인 나머지 조직으로서 자기 혁신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2차세계대전 당시의 일본군은 변화하지 않는 조직은 몰락하고 만다는 교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일본군대라는 조직의 실패를 오늘날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전쟁이 끝난 뒤 일본군이 가지고 있던 조직 특성을 계승한 곳이 일본 기업이고, 일본 기업의 조직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 한국 기업조직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한국 조직의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한다면,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의 모습을 면밀히 살펴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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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기계 시대 - 인간과 기계의 공생이 시작된다
에릭 브린욜프슨 & 앤드루 맥아피 지음, 이한음 옮김 / 청림출판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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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유튜브에 인상적인 동영상이 올라왔습니다. 영상엔 자동차로 주차를 하는 장면과 고속도로를 주행하는 장면이 담겨 있었는데, 인상적인 점은 그것이 모두 인간의 손을 거치지 않은 자동이라는 점입니다. 자동차는 전진, 후진, 평행정렬을 하며 자동으로 주차에 성공했고, 고속도로에선 액티브 크루즈 컨트롤, 스티어링 어시스트 기능을 이용해 사실상 무인운전을 해냈습니다. 더 인상적인 점은 이 차량들이 연구소에서 연구중인 시험용 차량이 아닌 현재 시판되고 있는 차량이라는 점입니다. 구글은 자사의 시험용 차량으로 자동주차, 고속도로주행에 이어 시내주행에 성공했다고 발표했습니다. SF영화나 소설에서나 볼 법한 일이 바로 눈 앞의 현실에 다가와 있습니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운전하고, 춤추고, 사고하는 일들은 로봇은 해낼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기계의 가능성은 점점 넓어지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승리한 유명한 체스 컴퓨터 딥블루를 시작으로 자동 주행 자동차가 등장했고, 뉴스를 쓰는 기계마저 등장했습니다. 인간의 전유물로 생각했던 영역으로의 침입은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운전자라는 직업이 사라질 시대, 대부분의 기자들이 사라질 시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에릭 브린욜프슨과 앤드루 맥아피는 그것을 제2의 기계 시대라 부릅니다.

에릭 브린욜프슨과 앤드루 맥아피는 사회를 급변시킬 제2의 기계 시대를 디지털로 인한 변화라고 말합니다. 디지털이 사회적 흐름이 된 지는 오래되었지만, 반도체의 성능이 18개월마다 2배로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처럼 초기엔 그 변화치가 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배수로 증가하는 그 성질처럼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엔 그 변화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에릭 브린욜프슨과 앤드루 맥아피는 이런 디지털 시대의 변화가 산업혁명 변화의 과정과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산업혁명도 초기엔 전기와 같은 새로운 혁신이 등장하더라도 그것을 활용해 발전하기까지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일정 시간이 지나자 새로운 혁신은 엄청난 탄력을 받고 신성장동력이 됩니다. 에릭 브린욜프슨과 앤드루 맥아피는 바로 지금이 디지털로 인한 기하급수적 성장기가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오래전부터 동시 위치 추적 및 지도작성(SLAM)이라는 문제에 몰두했다. 대다수의 사람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수행하는 일을 기계에게 가르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임이 드러났다. 2008년의 한 논문에는 로봇공학의 근본적인 도전 과제 중 하나로 지목했다. 이 문제는 너무나 어려웠기 때문에 해결에는 실질적으로 진척이 없었다. 이 논문이 발표되고 겨우 2년 뒤에 150달러짜리 비디오 게임 주변 기기가 등장하기 전까지 말이다. 2010년 마이크로소프트는 엑스박스 게임 플랫폼에 딸린 감지기기인 키넥트를 선보였다. 밴쿠버에서 열린 시그래프 박람회에서 연구진은 키넥트를 이용해 로봇공학의 오랜 도전 과제인 SLAM을 해결했음을 보여주었다. - pp.73~74

디지털이 사회의 신성장동력이 되었다는 것은 모든 것이 디지털화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런 디지털 사회의 특징은 한계비용이 제로에 가깝다는 것과 혁신동력으로 재조합을 이끌어내는데 있습니다. 오늘날 생산성 향상을 이끄는 디지털 요소들은 한계비용이 제로에 가깝기 때문에 과거에 비해 그 제약이 적어 엄청난 속도로 전파될 수 있습니다. 또한 다른 분야의 기술과 아이디어를 사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재조합 혁신은 세계적인 학자들도 풀지 못했던 천체물리학계의 난제를 은퇴한 무선 주파수 기술자가 풀고, 소수의 전문가가 풀지 못하는 문제를 대학교 교양수준의 지식을 익힌 다수의 대중이 풀어내는 시대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재조합은 그 특징상 하나의 새로운 혁신이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시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즉 재조합할만한 것들은 아직도 무궁무진하기에, 우리가 이뤄낼 수 있는 혁신들도 무궁무진하다는 것입니다. 디지털 혁신은 비용이 거의 들지 않으면서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새로운 혁신이기 때문에, 사회의 파이를 더욱 커지게 만듭니다. 즉 풍요의 시대를 만듭니다.

번영의 엔진은 기술 진보이고, 기술 진보의 엔진은 사람이다. 아이디어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사람이 많으면 아이디어도 많아진다. 아이디어가 많으면 우리는 번영한다.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은 아이를 가질 때 그것은 언제든지 기뻐해야 할 경사다. 그 아이들이 당신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게 거의 확실한데, 다른 누군가가 그들의 양육을 모두 떠안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출산에 대해 기꺼이 보조금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발칙한 경제학》

그러나 동시에 디지털 혁신은 빈곤의 시대를 가져옵니다. 그 이유는 운송기술이 개선되고 네트워크가 표준화된 글로벌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디지털이 만드는 풍요는 그 특성상 전세계에 영향력을 미칩니다. 트위터, 페이스북, 그 외 수많은 유용한 앱들, 그리고 디지털 시스템으로 더 효율적으로 변하는 기업들은 우리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디지털이 가져다주는 부는 소수에게 집중됩니다. 과거엔 세계 1위의 실력을 지닌 축구선수라도 봉급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가 동원할 수 있는 관중은 경기장의 수를 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위는 아니더라도 그에 크게 밀리지 않는 사업자들도 나름대로의 성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구선수는 전세계의 소비자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그 봉급도 그 영향력만큼 상승합니다. 과거에 존재했던 공간적, 시간적, 금전적 제약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디지털은 공간을 초월하고, 시간을 통일하며, 한계비용을 제로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장 전체를 독차지하는 슈퍼스타와 다수의 빈자가 존재하는 사회, 승자 독식 사회를 만들어냅니다.

디지털 혁신이 지닌 이 두가지 특징에 대해 에릭 브린욜프슨과 앤드루 맥아피는 안타깝게도 이대로 계속된다면 빈곤이 풍요를 억압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혁신이 만들어낸 부가 불평등을 만들어내고, 그 불평등이 혁신을 저해한다는 것입니다. 경제학자 제이슨 디베커와 브래들리 하임 연구진은 1987년부터 2009년에 걸친 세금 환급 자료를 조사한 결과를 내놓았는데, 밑바닥과 중간에 있는 사람들은 생애 내내 같은 지위에 머물러있는 경우가 많으며, 그들의 가정 역시 세대가 바뀌어도 같은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이것은 경제나 사회의 건강에 좋지 않은 일입니다.

번영은 혁신에 의존하며 모두를 위한 공평한 경쟁의 장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혁신 잠재력을 낭비하게 된다. 즉 우리는 또 다른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페이스북이 어디서 나올지 알지 못하며, 그것을 창조할 인물이 어쩌다 학교에 들어가지 못해 대학에 진학할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이 실현될 가능성은 크게 줄어든다. 미국은 대체로 혁신과 투자에 보상해왔기에, 지난 200년 동안 수많은 혁신과 경제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것은 진공 상태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엘리트나 다른 편협한 집단이 정치권력을 독점하여 그것을 사회 전체를 희생시키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것을 막는 특정한 정치 제도의 집합이 그것을 뒷받침했다. - p.218

절대다수의 빈곤은 디지털 혁신이 지닌 특징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제2의 기계 시대를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는 데서도 비롯된다고 지적합니다. 오늘날 쓰고 읽고 말하고 외우는 교육체제를 재고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 암기식 교육은 디지털 시대엔 전혀 쓸모가 없으며, 디지털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의 능력들, 창조력, 아이디어 등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산업혁명이 가져다 준 혜택들, 자동차, 전화기 등이 인간의 물리적인 한계를 극복시켜줬다면, 제2의 기계 시대엔 새로운 기술들이 정신의 한계를 극복시켜주면서 동시에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2의 기계 시대에 중요한 것들은 무엇보다도 혁신을 이끌어내는 창의성과 개성,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해줄 민주주의와 자유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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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스 앤 넌센스 - 20세기를 뒤흔든 진화론의 핵심을 망라한 세계적 권위의 교과서
케빈 랠런드 & 길리언 브라운 지음, 양병찬 옮김 / 동아시아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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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천동설과 지동설의 논쟁 과정에서 지동설이 승리해 사회를 변화시켰던 것처럼, 한 시대의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이론이나 방법, 문제의식 등의 체계는 계속 변화합니다. 오늘날 진화론은, 창조설을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의 반발이 있기는 하지만, 명실상부하게 현대의 패러다임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진화론은 더이상 받아들일까 말까의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진화론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점입니다. 진화론을 이용하여 인간성을 연구하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인가에 대해 과학자들은 다양한 형태의 답변을 했습니다. 그 답변들은 때론 센스였고, 때론 넌센스였습니다.

케빈 랠런드와 길리언 브라운은 인간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진화론이 사용된 여러 시도 중에서, 영향력이 뛰어났던 다섯 가지의 방법론으로 사회생물학, 인간행동생태학, 진화심리학, 문화진화론, 유전자-문화 공진화론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들 방법론의 가정이 지니는 특징들과 개별 접근방법들의 긍정적인 면과 한계를 다원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 다섯 가지의 방법론들은 모두 단점들을 지니고 있는데, 진화론은 때론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인 면모를 보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윈부터 현대의 진화론자들까지 자신의 이론이 가지는 한계를 인식하고 개선해나가는 모습은, 반증 가능성을 가져야 하는 과학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라는 진화론은 생물학 분야를 떠나 거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친 혁명적인 이론이었지만, 다윈 이후 오랫동안 진화론을 이용하여 인간의 행동과 사회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혼선이 빚어졌습니다. 다윈 자신도 유전의 매커니즘을 제대로 알지 못해 평생 동안 자신의 진화론을 더 설득력 있게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우생학, 나치즘, 규제 없는 자본주의, 인종주의적 이민정책, 강제 불임수술 등 진화론이 악용된 사례도 상당수 있었지만, 진화생물학자들은 인종차별과 사회적 편견에 대항하여 싸웠으며 오늘날까지도 살아남는 이론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윈은 진화를 '사다리'보다는 '가지를 뻗은 나무'로 묘사했다. 그러나 사회적 다윈주의자들은 생물학적 진화를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는 과정'으로 오해하여, 경쟁이 장려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사회적 보수주의, 군국주의, 우생학, 자유방임 경제, 규제 없는 자본주의 등과 같은 원칙들을 정당화했다. - p.67

오늘날 진화론의 다섯 가지 주요 방법의 시작은 사회생물학입니다. 사회생물학은 조지 윌리엄스, 로버트 트리버스 등이 개척했지만, 대중들에게 알려진 학자는 에드워드 윌슨과 리처드 도킨스입니다. 도킨스는 사회생물학적 방법론을 인간에게 직접 적용하는데 신중했지만, 윌슨은 과감하고 모험적인 가설들을 제시했습니다. 유전자적 관점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그의 방법론은 인문학과 충돌했고, 생물학자, 사회과학자, 인문학자들은 열띤 논쟁에 참여했습니다. 사회생물학이 협동, 양육투자, 여성의 성적 행동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유전자관점, 혈연선택, 진화적 게임이론 등 인간행동을 탐구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찾아볼 수 있지만, 진화론 이외의 설명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인간행동 연구의 새벽을 열었던 인간사회생물학을 시작으로 그 대안이 여럿 등장했는데, 그중 하나는 인간행동생태학이었습니다. 인류학이 과거부터 가지고 있었던 환경과 생태계가 인간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질문을 진화론적 접근방법에 도입한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은 환경조건에 대응하여 행동을 바꿀수 있으며, 일생동안 생식 성공률을 최적화하도록 진화했다고 말합니다. 인간행동생태학은 정량적이고 엄격하고 논리정연하며 상당한 통찰력을 제공할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행동을 이해하는 방법론을 놓고 진화심리학계와 대립해 왔으며, 인간행동생태학은 각계각층의 비난에 휩싸여 사면초가의 상황에 처했습니다.

인간사회생물학과의 차별화를 추구했던 신진 연구자들은 인간의 심리적 매커니즘에 주목했고, 이들은 진화심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게 됩니다.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행동을 이해함에 있어서 행동 수준이 아닌 심리 수준에서 반응패턴을 찾아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정신을 진화이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으며, 문화, 의사결정, 언어, 임신, 낙인찍기 등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데 크게 기여했지만, 빈약한 연구와 근거 없는 서술이 많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인지 프로그램 모델을 구축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이 진화심리학이 지닌 숙제입니다.

연구자들에 따라 강조하는 항목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 본질적인 차이를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다. 이와 비슷한 취미에서, 에릭 올든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의 행동을 완벽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유전 가능한 정보가 심리적 메커니즘을 구축하고, 이렇게 구축된 심리적 메커니즘은 환경의 자극에 대응하여 행동반응을 만들어내고, 그 결과 적합성 효과가 나타난다." - p.397

다섯 개 학파의 연구자들이 사용하는 상이한 가설검증 방법은 본질적인 견해 차이를 반영하지 않습니다. 어느 부분을 강조하고 중점적으로 다룰 것인지에 대한 의견 차이는 존재하지만, 그들은 서로의 방법론을 비판하면서도 활용합니다. 결국 그들은 모두 인간행동을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을 추구하는 진화론자들인 것입니다. 다윈 이후 수백년간 진화론은 많은 도전을 받아왔고, 박해와 조롱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진화와 인간행동이라는 분야의 수많은 학자들이 토론하고 또 토론하고,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이해하고, 반증하고 반증한 끝에 진화론은 살아남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화론은 과학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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