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 - 태평양 전쟁에서 배우는 조직경영
노나카 이쿠지로 외 지음, 박철현 옮김, 이승빈 감수 / 주영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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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군대를 바탕으로 서쪽으로는 미얀마, 북쪽으론 쿠릴열도, 남쪽으론 파푸아뉴기니, 동쪽으론 태평양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강대했던 일본 제국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습니다. 아시아에서 승승장구하던 일본 제국이 패배한 원인으로 여러 가지가 지목되고 있지만, 저자 노나카 이쿠지로, 스기노오 요시오, 데라모토 요시야, 가마타 신이치, 도베 료이치, 무라이 도모히데는 조직론적 평가를 도입해 일본의 실패원인을 일본군대라는 관료제 조직의 특징에 주목합니다. 가장 발달된 관료제 조직이라고 자랑하던 일본군대지만, 그 내부는 비합리성으로 가득했던 것입니다. 저자들은 일본군대가 조직으로서 큰 패배를 경험한 노몬한 사건, 미드웨이 작전, 과달카날 작전, 임팔 작전, 레이테 해전, 오키나와 전투를 예로 들면서 일본군이, 일본이 실패한 원인을 찾고자 합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한 이후 중일전쟁, 러일전쟁의 승전국가라는 강렬한 사건을 통해 세계무대에 데뷔합니다. 특히 러일전쟁의 결과는 세계를 놀라게 했는데, 이는 일본으로서도 놀랄만한 전과였습니다. 서양의 강대국을 이겼다는 경험으로 인해 러일전쟁 당시 사용된 육군의 총검돌격전술과 해군의 함대결전전술은 하나의 사상으로 굳어질 정도였습니다. 일본이 성장할 당시에 큰 성공을 가져왔던 이런 전략들은 당시 놀랄만한 위력을 보여줬고, 그 결과 일본은 아시아를 호령하는 제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말해주듯이 무패를 자랑하던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패배를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저자들은 전쟁 당시에 일본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황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게 밀리기 시작하게 된 이유는 일본군, 더 나아가 일본이라는 조직 내부의 문제점이라고 지적합니다. 일본군이 그동안 자신보다 많이 약한 나라들을 침공했을 땐 드러나지 않았던 조직의 약점들이 강대국들과 싸우기 시작하면서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미드웨이 작전만 하더라도 일본은 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의 4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해 미군과 싸울만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고, 야마토급, 공고급 등 일본 연합 함대 함정의 80퍼센트를 투입한 레이테 해전만 하더라도 훗날 구리타 반전 사건만 아니었더라면 이길 수 있었을것이라고 평가할 정도였습니다. 즉 실패의 요인은 물질적인 차이보다는 관료제 조직끼리의 충돌에서 더 비합리적인 조직구조가 패배한 것입니다.

당시 육군과 해군 사이에는 은근한 알력이 있었다. 쌍방 수뇌부는 이전부터 줄곧 대립 관계를 형성해 오면서 자신들의 체면을 중시하는 바람에 나약한 소리는 내지 못했다. 당연히 어느 한쪽이 철수 의사를 보일 때까지 다른 쪽은 절대 그 말을 꺼내서는 안 된다는 경향이 뚜렷했다. - p.133

노몬한 사건, 미드웨이 작전, 과달카날 작전, 임팔 작전, 레이테 해전, 오키나와 전투는 여러 사단이 참여한 전투 또는 해군과 육군이 같이 참여하는 복합적인 전투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또한 대국적인 관점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일본 본토의 대본영과 실제로 전투에 참여하는 현장 부대의 의견이 엇갈린 전투이기도 합니다. 일본군은 애매한 전략 목적을 설정했을 뿐 아니라, 러일전쟁부터 이어져 내려온 단기기습전술에 너무 의존했고, 패배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패배를 가정한 의심은 나약함으로 간주되어 비상시의 대책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비상시에 적용할 대책을 강구하지 않아 계획이 빗나갔을 때 사태를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일본군은 전투강령이 엄격했는데, 고급 지휘관의 행동을 세밀하게 규제하는 일본군의 강령은 지휘관의 시각이 좁아지고, 상상력이 빈약해지며, 사고가 경직되는 현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엔 이런 지휘관에게 반대의견을 제시할 사람이 부족했습니다. 인맥 편중의 조직 구조는 장교들에게 체면과 보신 위주로 행동하게 했고, 조직 내 융화를 중시하느라 원리나 논리보다는 감정과 분위기로 상황을 판단했습니다. 부하 장교들이 자신의 안색을 살펴서 심중을 읽어주길 원했다던 무타구치 렌야의 말은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의 지휘관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일본군이 개인 및 조직이 공유해야 할 전투에 대한 과학적 방법론을 가지지 못했던 것에 비해, 미국은 그야말로 논리실증주의가 구현된 전투프로세스를 전개했다. 이에 비해 일본군 엘리트 중에는 하나의 개념을 창조하고 이를 실제 작전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작전 계획서는 "전기가 무르익었음", "결사 임무를 수행하여 성지에 따를 것", "천우신조", "신명의 가호" 등의 추상적이고 허무맹랑한 문구로 가득할 뿐, 그 문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할지라는 방법론은 찾아볼 수 없었다. - p.291

‘백발백중의 포1문이 백발일중의 포 100문을 제압한다.’는 해군의 정신론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군은 정신론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정신론은 모든 것을 정신의 책임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게 합니다. 성공할때는 괜찮지만, 실패할 때 정신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는 해석은 전쟁과 같은 상황에서 특히나 치명적이었습니다. 정신적인 부분을 강조했기 때문인지 일본군은 기계화된 전투부대, 보급, 정보통신, 후방지원이 연결된 통합 근대전이 시작되었음에도 그런 전환기에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미군이 특정 전투에서 불리한 전력과 전황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데는 이러한 통신을 통한 정보전에서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임팔 작전 당시 제15군 사령부에서 열린 병단장 회동에서 우스이 보급참모가 보급이 원활할 것 같지 않다고 말하자, 무타구치 군사령관이 벌떡 일어서서 "뭐라고? 그딴 걱정은 하지 마. 적을 만나면 총구를 하늘에 대고 3발만 쏘아보라고. 그러면 자동으로 항복하게 되어 있어" 결국 적의 식량을 탈취해 충당한다는 방침이 통과되고 말았다. - p.292

결국 일본제국이 전쟁에서 패배하게 된 원인으로 조직의 목적이 불명확하고, 전략이 단기적이며, 대안이 좁고,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한 인맥주의의 폐해, 정신론만을 강조하는 불합리성과 같은 일본군 관료제가 지닌 조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일본군이 이런 폐해들을 가지게 된 원인 중 하나로 러일전쟁의 승리를 지목합니다. 러일전쟁의 승리가 너무나 강렬했고, 과거의 성공에 얽매인 나머지 조직으로서 자기 혁신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2차세계대전 당시의 일본군은 변화하지 않는 조직은 몰락하고 만다는 교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일본군대라는 조직의 실패를 오늘날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전쟁이 끝난 뒤 일본군이 가지고 있던 조직 특성을 계승한 곳이 일본 기업이고, 일본 기업의 조직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 한국 기업조직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한국 조직의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한다면,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의 모습을 면밀히 살펴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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