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폴리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 줄리엣 비노쉬 외 출연 / 캔들미디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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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비그뉴 허버트의 '포위된 도시(The Report from the Besieged City)' 중 '들쥐를 화폐로 썼다(a rat became the unit of currency)'는 인용구로 시작하는 영화 [코스모폴리스]는 한마디로 현대 금융자본주의 시스템의 암울한 지옥도다. 기승전결 구분 없이 유영하는 카메라는 유년 시절 추억이 어린 단골 이발소(시민 케인의 '로즈버드'와 유사 오브제)에서 이발을 하겠다며 고급 리무진을 타고 무리하게 뉴욕 도심을 가로지르는 젊은 갑부 에릭 패커(로버트 패틴슨 扮)의 심란한 하루 일정을 따라 붙는다. 수억 달러의 막대한 자금을 위엔화 가치절하에 배팅했다가 파산 직전까지 몰린 상태에서 그는 반나절 동안 리무진이라는 자본의 성(城)에 찾아드는 전산전문가, 회계사, 큐레이터, 인문학자, 주치의 등 각 분야 관계자들과 회합하는가 하면, 신혼인 아내를 탐하나 거부당하고 자신의 결혼 소식을 뉴스로 알게 됐다는 섹스파트너와 얕은 육체관계를 맺는다. 리무진 밖 꽉 막힌 시가지는 유산계급을 타도하자는 시위대로 들끓는데 대통령 행사 차량 진입, 흑인 래퍼의 장례식 행렬까지 겹치고 에릭을 호시탐탐 노리는 암살자가 잠복해 있다는 보고가 끊임없이 타전된다. 호사스런 실내 장식과 달리 폐색된 리무진 내부의 공기와 복작대는 거리 풍경이 차창을 경계로 극명하게 대비되는 와중에 IMF 총재가 암살되면서 세계 경제는 공황에 빠진다.


영화 서두에 인용된 즈비그뉴 허버트의 싯구 이상으로 작품에 결정적인 단서조항 격의 문장이 나온다. 시위대가 점거한 뉴욕 거리 전광판에 현시되는 '자본주의라는 유령이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는 차용문.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던 맑스의 공산당 선언 첫 문장을 작품에 맞게 뒤집어 제시한 것이다. 원작이라는 돈 드릴러의 소설과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영화에선 주인공 에릭의 캐릭터 자체가 그대로 자본주의 시스템의 모순을 반영하고 있다. 냉철하면서도 늘 뭔가 들뜬 듯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에 창백하고 공허한 표정, 멀끔한 겉과 달리 전립선 비대칭으로 뒤틀린 육체, 즉흥적인 성격과 강박적인 행동들... 무료한 차 안과 삭막한 차창 밖으로 불쑥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에릭과 접촉하는 주변 인물들과 결말부에 이르러서야 정체를 드러내며 서로 팽팽히 맞서게 되는 암살자는 물론 작품 전반적인 분위기 묘사 자체가 모두 자본주의를 향한 메타를 품고 있지만 주인공 에릭 패커 자신이야말로 자본의 결계를 맴돌며 부유하는 몽유병자요 유령이고 금융자본의 혈관을 따라 끝없이 순환하는 헤모글로빈이다.


허나 이십대 젊은 나이로 외환시장을 쥐락펴락하는 월가의 투자가, 코스모폴리스의 최상위 포식자 에릭 패커가 자본의 극점을 상징한다는 안이한 표현만으론 부족하다. 보는 내내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초기 대표작 [플라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에릭 패커는 자본의 DNA가 이식된 개체다. 세드 브런들 - 더 플라이 - 가 파리 형질을 품고 변형되어 죽어가면서 자신의 머리에 스스로 연인의 총구를 갖다 댔듯 자본의 유전자와 합성, 융합된 에릭은 목적지였던 이발소 - 자신만의 로즈버드 - 에서도 구원받지 못한 채(혹은 거부당한 채) 스스로 암살자가 기다리는 지옥으로 향하며 파국을 맞는다. 그리고 그의 죽음 직전 크로넨버그의 카메라는 야멸차게 렌즈를 닫아 버리고 엔딩 자막을 올린다. 내게 있어 [코스모폴리스]는 자본주의 구조에 관한 클리셰, 의례적 비판이라는 혐의를 가뿐히 넘어선다. 크로넨버그는 결코 '자본이 나쁘다'고 섣불리 단죄하지 않는다. 선택 불가, 제어 불능으로 개체에 늘러붙어 체화된 고도자본, 그에 잠식된 지금, 여기, 우리 현황에 대고 묵묵히 해부를 집도한다. 두 시간 러닝타임이 혼돈스럽고 나른하면서 섬뜩한, 출구 없는 악몽에 다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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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6-18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리뷰 좋습니다. 자본의 dna가 이식된 제2의 세드 브런들.........

풀무 2015-06-18 20:07   좋아요 0 | URL
악! 저 문장을 제목으로 딸 걸요! 지금 바꿔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