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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로그 십계 세트 (6disc)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 엘라이트 / 2008년 6월
평점 :
도덕이란 나에게는 없다. 물론 이 영화들은 어느 것이나 도덕의 영역과 관계가 있다. 십계명과 관계가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이미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명령과 금령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조심하라. 너희 곁에 다른 사람들도 산다. 너희가 행한 바는 너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너희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도, 혹은 좀 더 멀리 있어서 있는 줄로 짐작조차 못하는 이들에게까지 적용되는 것이다. 이 영화들은 도덕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존재에 대한 이야기이다. -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 연출의 변 -
[데칼로그]는 십계명을 모티브 삼아 폴란드 국영 TV 방송에서 제작하고 키에슬롭스키 감독이 연출한 10부작 연작이다. 전편 모두가 한결같이 폴란드 바르샤바의 한 아파트 단지를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각양각색 사람들의 생활과 그들이 처한 상황들을 폭넓은 스펙트럼으로 밀도 있게 다루고 있다. 따라서 각 에피소드마다 주제가 무겁고 깊이있는 사색을 요구하지만, 극적 재미와 감동이 크기 때문에 결코 지루하지 않다.
키에슬롭스키가 택한 미학적 전략의 의도는, 유장한 세월 계율로 자리잡은 십계명의 명제들과 실제 사람들의 부조리한 실존을 끊임없이 대비하고 충돌시킴으로써 원형적인 인간과 세상을 고찰하고 진실된 삶을 모색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긴 작품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인간 존재, 그들의 삶과 관계의 파장에 관한 심오한 성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과 그들이 이루는 사회를 바라보는 작품의 시선이 매우 섬세하고 신중하며 사려깊다. 인간에 대한 예절과 균형잡힌 시각이야말로 예술 작품이 갖춰야할 최고의 덕목이라고 할 때, <데칼로그>는 그 명성에 걸맞는 진정한 걸작이다.

#1. 어느 운명에 관한 이야기 -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2. 어느 선택에 관한 이야기 -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3.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에 관한 이야기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하라
#4. 어느 아버지와 딸에 관한 이야기 - 네 부모를 공경하라
#5. 어느 살인에 관한 이야기 - 살인하지 말라
#6. 어느 사랑에 관한 이야기 - 간음하지 말라
#7. 어느 고백에 관한 이야기 - 도적질하지 말라
#8. 어느 과거에 관한 이야기 -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언하지 말라
#9. 어느 고독에 관한 이야기 -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
#10. 어느 희망에 관한 이야기 -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바르샤바 시내의 밤거리. 어느 중년 여인이 슬픈 표정으로 가전제품 매장 쇼윈도우의 대형 TV 화면 속 밝게 웃으며 급우들과 내달리는 소년(파벨)을 바라보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초등학생 파벨은 학교를 파하고 귀가하던 길에 개의 시체를 보게 되고 아버지에게 삶과 죽음, 존재와 영혼의 의미를 묻는다. 무신론자이자 합리주의자인 아버지는 '영혼 같은 건 없다. 있다고 생각하면 살기가 쉬워질 뿐이지.'라고 대답한다. 반면 고모 이레나는 파벨에게 카톨릭 신자로서의 다원주의적 세계관을 심어 준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을 스케이트를 미리 발견하고 타겠다며 조르는 파벨에게 아버지는 지난 3일간의 기온과 강물 깊이 등을 변수로 컴퓨터에 입력하여 제곱센티 단위 당 최대 하중이 257kg 이라는 계산 끝에 좋다고 허락한다. 다음날 강가로 스케이트를 타러 나간 파벨은 밤 늦도록 돌아오지 않고, 불길하게도 멀쩡하던 잉크병이 깨지면서 검푸른 잉크가 책상 위로 번진다.

아버지는 파벨을 찾아 나서고, 강의 얼음이 깨진 현장에서 진행되는 어린 아들의 시체 인양 작업을 목격한다. 허탈감과 슬픔에 넋을 잃고 귀가한 아버지의 책상 위에서 컴퓨터는 무심하게 녹색 스크린 위에 값을 입력받을 준비가 돼있다는 메시지만 내보낸다. 아버지는 성모 상 앞에서 오열하며 신을 원망하고, 화면은 오프닝 시퀸스로 돌아온다. 슬픈 표정의 중년 여인은 고모 이레나였고, 화면 속 소년은 파벨이다. 파벨이 살아있을 때 다니던 학교 우유급식 관련 프로그램을 찍은 방송이 전파를 타고 있었던 것.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파벨은 사실 찡그리고 있었다. 묘하게 일그러지는 화면 속 소년의 얼굴을 클로즈 업하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데칼로그]의 에피소드들은 10편 모두 어떤 관점에서 접근해도 그에 상응하는 의미를 끌어낼 수 있을 만큼 극의 내리티브와 구조가 다층적이다. 과학 논리를 신봉하는 언어학자 아버지와 그 아들이 겪게 되는 비극을 다룬 첫번째 에피소드 역시 마찬가지. 현대의 우상으로 자리매김한 컴퓨터와 결정론적 세계관에 대한 우화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잔인하고 부조리한 운명과 신의 부재로 읽을 수도 있다. 내 경우, 그 어떤 과학 이론이나 계율 하나만으로 설명하거나 규정지을 수 없는 인간 세상의 상호연관성과 우연성 속에서 절대주의적 맹신과 독단의 위험을 읽게 된다. 과연 한가지 교리만으로 복잡한 세상 이치를 단순히 설명하고 인간 실존을 옭아맬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나 종교가 있다면, 그 자체가 교만이고 또다른 우상은 아닌지 넌즈시 되묻는 것이 키에슬롭스키 감독의 연출 의도였으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