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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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봄부터 다시 한국문학, 소설을 집중적으로 읽고 있는데 그 중 최은영의<쇼코의 미소>는 우왓! 하는 감탄이 나올만큼 맘에 들었다. 맘에 들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다소 건방지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저 좋았다라는 정도로는 뭔가 아쉬운 것 같아 그런 염려에도 불구하고 '맘에 들었다'라고 표현하고 싶었다. 마치 공선옥 작가의 소설을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우선 표제작 <쇼코의 미소>부터 감상을 적자면 타인의 불행이 별볼일 없는, 그나마 불행마저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단조로움 삶이 행복처럼 느껴지게 만들어 우월감마저 느끼게 할 때가 있다. 작품 속 소유와 소코는 서로에게 있어 일정 기간 그런 존재가 되어주었다. 타인의 불행을 보고 안도하고 좀 더 힘차게 나아갈 발판을 마련하는 그런 존재. 지금은 모르겠지만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20여년 전(이렇게 적고 흠칫 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벌써 그렇게 되다니!)한일 교류가 분명 있었다. 아쉽게도 나는 일본어를 전혀 하지못해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두살 위의 언니는 당일로 마무리되긴 했어도 짝을 이루었던 일본인 친구와 편지를 한동안 주고 받았고 선물로 직접 만든 테디제어를 받았던 것도 기억한다. 아마 이 인형을 부모님 댁 창고에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암튼 그런 추억도 새록새록 떠오르면서 기분좋게 읽어가다가 쇼코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멈칫하게되었고, 소유가 대학생이 되어 쇼코를 방문했을 때 또 한번 멈칫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방문, 기왕이면 가장 잘 보이고 싶은 이에게 그렇지 못한 모습을 보여줄 때는 평소에 제정신이었던 사람도 정신을 놓고 싶어질텐데 쇼코의 상실감과 부끄러움과 절망이 어느정도 였을지, 또 그 모습을 보고 이상한 우월감에 사로잡혔을 소유의 마음은 왜 또 납득이 되는지에 대한 좌절감이 동시에 느껴져 얼굴이 후끈거렸다. 그러다 영화감독이 되겠다며 집에 내려오지 않는 소유를 찾아 아픈몸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온 소유 할아버지의 모습속에서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얼굴이 떠올라 사람들이 많은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런 내가 참 맘에 들었다. 소설을 읽고 울 수 있는 내 닫히지 않은 감성이 좋았고, 이런 나를 깨닫게 해줄 수 있는 소설을 써준 작가들이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할아버지는 허허 웃으면서 나에게 우산을 씌어줬다. 할아버지가 쓰고 가라고 해도 막무가내 였다. 비는 점점 더 거세졌다. 정류장까지라도 같이 가자고 하니 할아버지는 괜찮다고, 그냥 이대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하는 할아버지의 눈이 빨개졌다. 울고 싶으니까 그냥 풀어달라는 눈빛이었다.

 -[쇼코의 미소] 중에서-



수록된 모든 작품이 다 이야기 나누고 싶을만큼 만만치 않은 내용들이지만 혼자 고민끝에 한 편만 더 이야기 하자면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이어야 할 것 같다. 서두에 공선옥 작가의 소설이라고 언뜻 내비친것처럼 한국 현대사에 아픈 사건들이 참 많았다. 아니 많다. 과거형으로 끝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비단 한국뿐 아니라 세계 어느곳에서도 사건은 늘 현재진행형이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내용은 인혁당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나의 작은 '순애 언니'는 결혼 후 겨우 행복한 가정을 꾸리나 했는데 그마저도 참 쉽지 않다. <쇼코의 미소>가 타인의 불행을 보며 우월감을 느끼는 참 못난 내 모습을 마주했다면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는 순애언니의 고통을 차마 곁에서 제대로 바라봐주지 못하고 모른척 살기로 결심한 비겁한 혹은 나약한 나를 깨닫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읽고 났을 때 절망이나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겠다'라는 힘을 얻게 한다는 점이 최은영 작가의 놀라운 필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못나고 비겁한 나이지만 이제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되지 않겠냐며, 그래서 다시 제대로 살아보지 않겠냐고 이끌어주는 작가의 손길이 글에 묻어났다. 내용은 참 아프고 먹먹한데 전체적인 분위기가 참 따스했다.


수선집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오 분 거리였지만 엄마와 이모는 일부러 길을 돌아가곤 했다. 이모는 하교하는 여고생들을 가만히 바라보기도 했고, 문방구 앞에 멈춰 서기도 했고, 전봇대에 묶여 있는 개를 오래 쓰다듬기도 했다. 그리고 엄마는 그런 이모의 머리 위에 내리비치는 햇빛을 바라봤다. 그럴 때면 시간은 부드럽게 흘러갔고, 모든 일들이 잘 풀려가리라는 이상한 낙관이 마음에 배어들었다. -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중에서-




이렇듯 좋았던 소설집 <쇼코의 미소>를 출간된지 수개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읽은 까닭은 표지가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라고 적지 않을 수 없다. 여인의 뒷모습, 그것도 완벽하게 뒷모습도 아니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옆모습이 보이는 표지가 난 무서웠다. 찰랑거리지 않은 머리결이라 무서웠고 주머니에 넣은 손에 무엇을 쥐었을지 몰라 무서웠고 조금만 돌려도 눈빛이 보일텐데 그 눈빛이 어떨지 몰라 무서웠다. 지은 죄가 많아 그런 모양이다. 결코 핑계가 아님을 꼭 적고 싶다. 그래서 책 사진은 책등으로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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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다니구치 지로 지음, 신준용 옮김 / 애니북스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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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고향이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돌아오는것이라고... - 에필로그-


다니구치 지로의 [아버지]가 내 마음속의 고향이 돌아오게 만들어주었다. 이렇게 결론부터 미리 밝혀두는 것은 어쩌면 이 리뷰가 이 책의 줄거리나 작화에 관련된 이야기가 아닌 내 과거와 내 고향, 그리고 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풀어놓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진부하게 느껴지거나 혹은 맘에 들지 않는 분들은 살포시 지나가시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나름의 배려랄까.


15년. 작품 속 주인공이 아버지를 만나러 가지 않은 기간이 15년이다. 그렇게 오랜 기간 바쁘다는 핑계로 고향에 내려가지 않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음 부음을 듣고서야 고향에 내려간다. 이때도 그저 발인에만 맞추어 가면 될일이라 생각한 것을 아내의 강한 권유에 등떠밀리듯 먼저 내려가게 되고, 그 덕에 자신이 몰랐던 아버지와의 일들을 전해 듣게 된다. 늘 이발소 일로 바빴던 아버지, 어머니를 외롭게 만들어 이혼까지 이르게 만들었고 그리해서 자신에게서 어머니와의 사랑을 상실하게 만든 아버지였다. 분명 그렇게 냉정하고 모른 척 살아도 될 것 같은 아버지가 알고보니 늘 자신을 마음에 두고 염려했으며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어찌보면 그다지 놀라울 것 없는 내용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개인의 이야기로 들어와 내 마음속 고향을 되돌려 놓는 순간 큰 의미를 갖게 만들었다.


나와 아버지의 사이는 어떤가. 아들을 염원했던 할머니와 엄마의 바람과는 달리 낳고보니 '딸'이었던 나를 엄마는 며칠 간 부정했다고 했다. 그럴리 없다고. 그렇다고 사랑을 덜 받은 것은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이런저런 이유로 늘 짧은 커트머리로 유년기를 보내야했고 신기하게도 언니와는 달리 반바지차림을 좋아했던 내 모습은 사진만 봐서는 영락없는 남자아이다. 그런 내게 아빠는 늘 귀한 공주님 대접을 해주느라 풀밭에 앉을 때면 늘 손수건을 깔아주거나 무릎위에 앉혔고, 아저씨들이 많은 장소에 갈 때면 손을 꼭 잡고서는 놓치 않으셨다. 언제나 나를 보호해주셨던 그런 아빠를 나역시 작품 속 주인공처럼 어떤 계기로 인해 조금씩 멀리하다가 스무살 무렵에는 거의 안보고 살다시피 했던 것 같다. 다행인 것은 주인공처럼 공부를 잘했다던가 결심을 완고하게 지켜내는 타입이 아닌터라 다시금 아빠에게 새로운 기대를 하고 또 다시 무너지기를 반복하면서도 지나치게 오랜기간 멀어져 지내지 않았다는 것, 그 덕에 다시금 이전처럼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는데 어째서 이 만화가 고향을 되돌려주었냐 하고 묻는다면 역시나 미처 사라지지 못한 조금의 앙금마저 씻어주었기 때문이다.


부모를 생각하지 않는 자식은 있어도 자식을 생각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는 말, 외삼촌이 주인공에게 '넌 너밖에 모른다'라고 꾸짖는 말들 모두가 찰나의 머뭇거림도 없이도 그대로 스며들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주인공이 가족사진을 찍었던 카메라 브랜드'YASHICA'는 아버지가 내게 처음으로 주신 카메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난 그 카메라로 우리 가족을 찍어본 적이 없다. 들판에 꽃, 친구들 그리고 책 사진 혹은 여행중에 기념이 될 만한 피사체를 찍느라 정작 카메라를 주신 아버지는, 내 가족은 내 첫 필름에 담기지 못했다.


15년. 어떻게 그 긴 시간동안 아버지를 찾아가지 않았나 나중에서야 후회하고 안타까워 하는 모습을 보며 나보다 덜하다, 더 하다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부모님의 시계에는 15년이나 15일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식을 기다리는 그 시간 내내 늘 자식의 건강과 행복을 염려하는 그들의 시계는 늘 같은 크기와 부담으로 흐르고 있다. 15일 만에 만나도 마치 15년만에 만난 것처럼 기쁠테고, 15일을 못봐도 15년을 못본 것처럼 아쉬워 할 그 분들. 아, 다음주면 어버이날. 아버지, 아니 아빠가 주신 그 카메라에 필름을 넣어야지, 그리고 요이치처럼 '가족사진'을 찍어야겠다. 요이치처럼 찍되 요이치와는 조금은 다른 마음으로 그렇게 가족사진을 찍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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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의 여자들
캐롤라인 무어헤드 지음, 한우리 옮김 / 현실문화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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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노벨문학상 소식을 접한 후 그녀의 작품 중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읽고 전쟁속에서 늘 군인들에게 짓밟히고 당하기만하는 약한 존재가 아니라 사상의 옳고 그름을 떠나 주체적으로 참전했던 여성들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몇 달 뒤 캐롤라인 무어헤드의 이 책 <아우슈비츠의 여자들>를 만나게 되었지만 이런저런 프롤로그만 읽은 뒤 해를 넘겼고 이제는 계절마저 지나 영화<나는 부정한다>관람을 계기로 이제서야 다 읽어냈다. 읽었다가 아니라 읽어냈다라고 표현해야 맞을 것 같다. 분량도 분량이지만 겨우 진정된 가슴이 다시금 먹먹해졌기에 특히 어느 독자의 말처럼 페이지를 넘길수록 '여자들'의 시련도 커졌기에 소설을 읽듯 페이지를 넘기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유령들의 이야기를 믿어야 하죠? 돌아오기는 했지만 어떻게 돌아왔는지 설명하지는 못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17쪽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출판사에서 소개한 것처럼 아우슈비츠에 있었던 유대인도 아닌데다 남성도 아니었던 제 의지로 독일 나치에 대항했던 여성들 중 생존자들 혹은 그들의 유족들과 만나 나눈 이야기들과 관련 문헌을 정리했다. 초반에는 레지스탕스로 활동하게 된 계기를 개별적인 사연과 함께 들려주고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졌던 참상 또한 함께 이야기 한다.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목격된 경우도 있지만 그마저도 그저 '연기가 되었다'라는 표현처럼 사망했음을 짐작할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부끄러웠던 것은 프랑스 여자들을 떠올릴 때 '파리지엔'을 떠올릴 뿐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여성들을 그 뒷전으로 생각했던 것이고, 고민이되었던 부분이 제국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반유대주의가 같지도 않지만 서로 대립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에서 그리고 남한에서 나고 자란 내게 공산주의는 부정되는 것이고 제국주의역시 부정되는 것이며 동시에 반유대주의도 마찬가지로 부정되어야 하는 것인데 이 책을 읽다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고 어느 순간 무엇이 과연 옳은것인지 그 판단을 명확하게 내리기가 애매해졌다. 다만 한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가만히 있는 것' 이 결코 옳지 않다라는 사실이었다. 레지스탕스로 활동하게 된 여성들의 사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모의 영향을 받은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이웃나라 혹은 이웃에게 가해지는 납득될 수 없는 폭력에 반하여 자신의 의견과 모두가 잘사는 사회를 위해 자신의 목숨은 물론 가족의 안위마저 내놓고 투신하는 여성들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은 내가 살아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살아 있지 않다. 나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482쪽


결국 자신들이 어떻게 돌아왔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저자의 말처럼 어느 누구하나 '혼자'서 살고자 했던 것이 아닌 '함께'살고자 했던 그 마음이 그들을 아우슈비츠로 이끌었으나 같은 이유가 역시나 그들을 그 지옥에서 구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위의 발췌된 생존자 샤를로트의 '나는 살아 있지 않다.'라는 말이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그녀를 살아있지 않게 만드는 것이 과연 나치인가, 아니면 또 다른 그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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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철 한정 딸기 타르트 사건 소시민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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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철 한정 딸기 타르트 사건] 소설은 성장소설?


우선, 과거의 고바토와 소시민이 되기로 한 고바토의 이야기가 중심이라고 생각하면 이 소설의 장르는 성장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등학교에 입학함과 동시에 과거의 '명석한' 고바토가 아닌 누구와도 그럭저럭 잘지내는, 결코 드러나거나 튀지 않는 소시민이 되기로 결심한다. 동병상련의 계기로 오사나이 역시 서로 방패가 되어주기로 약속한다. 얼핏 보면 결국 이 이야기는 고바토와 오사나이가 소시민으로 무사히 성장 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과 대답으로 이어지는 성장소설로만 보이지만 다음의 두 번째 대립구도를 보면 성장소설이자 추리소설인 이유를 알 수 있다. 


​평범한 일상도 두 사람에게 일어나면 사건이 되는 추리소설?


이 두 사람은 이유가 있어 '소시민'이 되기로 결심한 '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의 목적은 결코 튀지 않고 별일 없이 사회의 소시민으로 자리잡는 것이지만 어째서인지 순탄하지만은 않은 사건들이 일어난다. 이렇게만 적으면 소설이니까 당연히 사건과 갈등이 일어나는 것 아니냐고 할테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가령 겐고의 집에 놀러간 두 사람은 세 잔의 코코아를 컵이나 별도의 용기를 사용하지 않고 따뜻한 우유를 섞어 '맛있는 코코아'로 탄생시키는 이유를 찾아내기도 한다. 사실 이런 일들은 소설에서만 등장하지 않는다. 분명 수술한 적이 없는데 방학동안 몰라보게 예뻐진 친구들을 볼 때 우리도 그들처럼 '관찰'과 '추리'를 해볼 수 있다. 아, 그럼 이 소설은 추리소설이구나 하고 정의내리고 싶겠지만 여기서가 끝이 아니다.


고바토와 오사나이는 과연 무슨 사이일지 궁금해지는 로맨스 소설?

고바토와 오사나이는 분명 성별이 다른 '협력자'이지만 묘하게 그 둘의 관계가 조금씩 의심스러워진다. 분명 소시민이 되기 위해 방패로만 삼기로 한 약속과는 달리 기분이 울적하다던가, 화가났을 때 오사나이가 찾는 친구는 '고바토'며, 마초적인 남자를 두려워 하는 오사나이가 의외로 겐고로부터 초대를 받았을 때 망설임없이 수락하는 것을 보면 묘하게 삼각관계가 일어나는 것은 아닌가 싶은 '로맨스 소설'같은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과장되어 표현하자면 때때로 한정판에 목숨을 걸 때가 있다. 그때가 아니면 취할 수 없기 때문인데 그런면에서 책은 일단 출간을 한 뒤로는 언제든 볼 수 있어 좋다고 생각할 지 모른다. 표지나 판형만 달리할 뿐 내용이 크게 달라지는 일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 책을 읽을 때 우리의 마음이 달라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봄날의 내가 이 책을 읽고 장르를 추리하는데 열을 올렸다면 언젠가 사람이 힘들어 삶이 힘들어질 때면 '소시민'이 되려는 고바타의 마음의 위로를 얻게 될 지도 모른다.

결국 소설이란 늘 '봄철 한정 딸기 타르트'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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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
가쿠타 미츠요 지음, 박귀영 옮김 / 콤마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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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하나하나가 다 이어지는 거야. 생각해 보니 재미있네. 당신한테 프로포즈를 못 받아서 뭔가를 해 보자는 결의가 생기고, 다음에 만난 사람한테 요리를 못한다는 타박을 받아서 어디 한 번 봐라 하고, 다 이어져 있던 거야. 하나가 없으면 다음 하나도 없고, 또 전혀 다른 데로 흘러가기도 하고. 171쪽

총 여섯 편의 단편이 수록된 가쿠다 미쓰요의 <평범>. 사실 첫 번째 작품을 읽고서는 '불륜'을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불쾌해 읽다가 멈추고 며칠을 다시 펼쳐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배우자가 형편없더라도 폭력으로 이혼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면 충분히 결혼생활을 끝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무능력해서, 남편도 바람을 피니까 라는 비겁한 변명으로 똑같이 행동하는 것에 대해 조금의 동정심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첫 번째 작품은 친구의 불행한 결혼생활이 조금이라도 위로 받을 수 있다면 설사 그것이 불륜일지라도 어느정도 이해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후미코가 제일 나쁜 사람처럼 느껴졌다. 다행히 후미코의 남편 마사토시의 생각은 나와 유사했기 때문에 저자의 생각이 후미코와 반드시 같지는 않겠구나 싶었고 그런 생각으로 두 번째 작품을 다시 읽기 시작했을 때 마지막 작품까지 다 읽을 때까지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흔히 이런 표현은 장르가 추리 혹은 스릴러일 때 해당되겠지만 사실이 그러했으니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만약 그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때 차라리 이혼했더라면 하는 식의 가정이 기혼자들이 하는 생각이라면 반대로 마흔이 되도록 결혼하지 않은 나와 같은 사람들은 그들과는 조금 다르게 '그때 그냥 결혼했더라면'이라던가, '끝까지 매달렸더라면'식의 가정을 하게 된다. 만약이라는 가정은 비단 결혼과 관련된 부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읽으면서 마음이 참 아팠던 마지막 작품 <어딘가에 있을 너에게>처럼 소중한 친구나 가족을 잃었을 때 하게되는 '만약'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아침밥을 먹여보내기 위해 몇 분 늦게 출근한 아들이 사고로 죽었을 때 수천번 혹은 수만번 자신을 책망하고 만약이라는 가정을 해야했던 '요다'의 사연은 앞서 등장했던 그 어떤 '만약'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아픔이었다. 아마도 그랬기 때문에 마지막에 실려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당신이 그와의 헤어짐에 가슴아파도, 그때 이루지 못했던 꿈 때문에 절망스러워도 자식을 잃은 것 만큼은 아닐테니까 말이다. 헤어진 연인에게 잘 보이기위해 행복한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한 선택을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행복한 척하는 <오늘도 무사 태평>의 사토코의 모습은 SNS를 열성적으로 하는 사람들이라면 여러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지금의  나와는 전혀 다른 곳에 있을 무수한 '나'에게 행복한 나를 보여야 했다. 불행해졌으면 하는 것은 아사히가 아니라 아사히와 함께해 온'만일'에 멈춰 서 있는 또 하나의 나다. 134쪽

SNS를 하는 이유가 순수하게 타인과 정보를 교류하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오늘 하루 내가 이렇게 행복하게 잘 살았음을 자랑하기 위해서일까? 자랑한다면 사토코처럼 또다른 자신에게? 아니면 타인을 향한 허세일까? 작품의 순서가 절묘하게 배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작품에서 불륜에 관해 이런저런 생각을 갖게 하고, 두번째 작품<달이 웃는다>에서는 어찌보면 제법 무거운 주제가 될 수도 있는 '용서'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시 세 번째와 네 번째 작품은 결혼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지다가 다섯 번째 작품이자 이 소설집의 표제작 <평범>에서는 과연 '평범'한 삶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생각해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읽다보면 만약이라는 가정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던 '자신'을 한없이 위로해줄 뿐 아니라 설사 앞으로도 계속 지긋지긋한 '가정법'을 버릴 수 없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아들을 잃은 요다가 그렇지 않은 또다른 자신의 모습을 친구처럼 떠올리듯 좀 유연하게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 그리고 그 또한 평범한 삶의 일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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