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미우라 시온 지음, 김은경 옮김 / 시공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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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게 되었습니다 / 미우라 시온

보통은 작품을 먼저 읽고 작가에 대한 사심이 커져 에세이를 찾는 경우가 많은데 미우라 시온의 경우는 에세이를 먼저 만났어도 분명 그 매력에 빠졌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좋아하게 되었습니다>는 여러 매체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엮었기 때문에 주제는 조금 다를지라도 저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부터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보니 내가 좋아하는 지점과 일치하는 내용이 등장할 때마다 열광하며 읽었지만 많은 이야기 중 ‘책과 독서’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 감상을 나누고 싶다.

‘상도를 벗어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덕후’란 대개 이런 것이다. 나도 만화에 관해서는 친구와 도긴개긴 수준이라 “이사하는 참에 조금은 처분하는 게 어떨…..”하는 말은 입이 찢어져도 내뱉을 수 없다. 94쪽

유명 관광지 한복판에는 책방이 없을 때가 많아서 관광하며 책이나 잡지를 사고 싶은 나로서는 언제나 금단증상으로 괴로웠던 까닭이다. 161쪽

취미가 없다. 아니 책고 만화를 읽는 건 무엇보다 좋아하지만, 너무 좋아해서 사회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이기 때문에 이력서의 취미란에 경솔하게 ‘독서’라고 써도 좋을지 자신이 없다. 밤새워 책을 읽고 늦잠을 잔 날을 셀 수가 없다. 207쪽

위의 발췌한 부분 외에도 저자의 책 사랑은 자주 만날 수 있는데 특히 저 세 부분은 “저요, 저요!” 하면서 읽었던 부분이다. 먼저 다소 거칠게 표현한 것 같지만 이사를 하거나 집안 정리를 할 때면, ‘책을 좀 버려!”라는 잔소리를 들어본 사람들은 책을 처분한다는 게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는 걸 알 것이다. 만난 횟수나 기간과 상관없이 사랑에 빠진 연인이나 영혼의 단짝 같은 사람을 집이 좁다고 하루아침에 내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또 함께였어도 좋았지만 혼자 떠난 런던과 도쿄 여행이 편한 이유 중 하나가 블록마다 있는 서점을 매번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 중에 무거운 책을 잔뜩 사는 내가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지금처럼 외서를 손쉽게 구할 수 없었던 20여 년 전에는 가져간 짐을 버리더라도 새 책을 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세 번째의 경우는 밤새 책을 읽으면서 돈도 버는 직업에 종사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저 작가가 부럽고 부러울 뿐이다. 유사한 점도 있지만 또 나와는 다른데 싶은 부분도 당연히 존재했다. 겨울과 여름 중에 고르라고 했을 때 저자는 추운 것을 견딜 수 없어 여름을 택했지만 정확히 반대의 이유로 난 겨울이 좋다. 하지만 역시나 여름에는 ‘소면’을 찾는 취향은 또 같았다. 일본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한여름에 물을 타고 내려오는 면을 건져먹는 장면은 봐도 봐도 침샘이 고이고 덩달아 더위가 가신다. 저자가 국수를 삶을 때 ‘추가 물’과 하는 눈치게임, 삶아본 자들은 알지 않을까.

출판사까지 운영하는 한 배우의 말처럼 진짜 재미있는 책은 OTT 마저 별거 아니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스마트폰에 중독되어 책을 덜 읽는 것만은 아니라는 저자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렇게 공감도 되고, 때로는 다른 의견을 주고받다 보면 자연스레 책에 빠져든다. 그리고 세상에는 저자가 추천해 준 작품들처럼 흥미로운 책들이 많다. 이름 모를 화분을 꾸준히 키우고, 빈틈이 보이지만 그 또한 곁을 내주는 것이기에 저자의 글을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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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코올과 예술가
알렉상드르 라크루아 지음, 백선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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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코올과 예술가

책을 읽기 전에는 단순히 술을 즐기는 예술가들의 일화를 흥미롭게 소개하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오래전 과제를 위해 밤새 술을 마시며 그림을 그렸던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문학과 철학, 정신분석학을 넘나들며 작가와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19세기 전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알코올이 미치는 영향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술을 오랜 시간 마셔야 하거나 혹은 극단적으로 금욕에 가까운 상태로 글을 써야했던 작가들도 있었다. 그런 대목들을 밑줄 치며 읽다 보니 다음 내용이 기대되면서도 쉽게 페이지를 넘길 수 없었다. 덕분에 200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분량임에도 완독하는 데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 무엇보다 지나친 음주가 인간을 파괴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문학이 왜 그토록 오랫동안 술을 이야기해 왔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내게는 유익한 충격이었달까.

현대 작가는 매몰된 기억과 문장들이 내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게 해야 한다. 그는 연료 부족으로 기관이 정지된 상태라면 신을 향해 돌아서서 기도를 올리기보다는 새 술병을 딸 것이다. 61쪽

저자는 여러 시대의 작품을 통해 술이 단순히 인간을 망가뜨리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절망과 욕망, 반항과 자기파괴를 드러내는 매개였음을 보여준다. 어떤 작품은 술이 초래하는 비극을 경고하기 위해 쓰였고, 또 어떤 작품에서는 사회와 현실에 저항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 선택하는 마지막 반항의 방식으로 술이 등장한다. 저자가 설명하듯 19세기 문학에서 술은 인간의 혈기와 열정을 폭발시키는 불처럼 묘사된다. 반면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술은 오히려 인간을 차갑게 만들고, 삶의 의지마저 잠식하는 냉기의 이미지로 변한다. 술꾼은 점차 ‘알코올 중독자‘라는 존재로 바뀌고, 사회 역시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변화시킨다. 지금 우리가 알코올 중독을 질병과 치료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 역시 이러한 변화의 연장선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흐름을 보들레르, 케루악, 랭보, 베이컨, 뒤라스 등과 같은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 그리고 들뢰즈와 야스퍼스, 프로이트와 뒤르켐의 철학과 사상을 연결하는 과정이 정말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들의 작품과 생애를 읽으며 찾아본 책들이 절판 상태일 때 찾아오는 허무와 아쉬움이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렇다. 알코올이 간절해졌다. 작품을 해설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문학과 철학이 서로를 비추며 인간의 취기와 욕망을 분석하는 과정 자체가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익숙한 작가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만나게 되고, 철학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추상적인 개념들이 문학 작품 속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뒤르켐이 쓴 충격적인 한 문장은 알코올 중독자를 주제로 쓴 건 아니지만 알코올 중독자의 성향을 완벽하게 요약하는 문장이다.
“해소되지 않는 갈증은 영원이 되풀이되는 자살이다.” 145쪽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긴 세월 ‘취한 자’들의 세상이었던 문학과 예술은 현대에 이르러 환각제의 등장과 사회적 인식의 변화 속에서 그 신비와 반항의 가치를 잃어버렸다. 이제 술은 예술적 영감의 상징이라기보다 중독과 질병, 그리고 금주와 금단 사이에서 오간다. ‘문체가 무엇보다 하나의 육체 속에 담긴 무엇임을 인정(37쪽)’ 해야 한다면 아마도 나는 술에 대해서는 그저 모든 일을 마치고 마시는 한 잔의 맥주의 시원함을 표현하는 데에 그칠 것이다. 저자가 말한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책은 빈 껍데기처럼 공허(178쪽)’ 할 것이란 말은 그런 점에서 지나친 겸손처럼 느껴졌다. 적어도 이 책은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이해하게 했고, 밑줄을 긋게 만들었던 수많은 문장들처럼 이전에는 단지 혐오하거나 외면했던 인물들을 다른 시선으로 읽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은 다른 독자들은 어떤 문장에 밑줄을 그었을지 궁금해진다.

#알코올과예술가 #알렉상드르라크루아 #을유문화사
#작가 #문학사 @euly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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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가 삶의 위로가 될 때 - 흔들리는 어른을 위한 ‘마음 한자’의 짧은 지혜
우승희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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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남을 위한 공부, “위인지학”이 아니라, 나를 위한 공부, “위기지학”을 해야 한다고 했다. 공부는 세상에 대한 무기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이해로 나아가기 위한 길이어야 한다.
182쪽

우승희 저자의 <한자가 삶의 위로가 될 때>의 부제는 ‘흔들리는 어른을 위한 마음 한자의 짧은 지혜’로, 아이와 달리 어른이라고 하면 나 자신보다는 상대와 이웃을 더 많이 생각하고 배려해야 한다고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책을 다 읽고보니 ‘너’와 ‘우리’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다름아닌 ‘나’를 잘 아는 것, 제대로 들여다 볼 용기를 내야 하는 것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단어의 의미가 달라지듯, 사용되는 한자도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고, 특히 ‘사랑’이 맹목적인 것에서 이제는 좀 더 유연해졌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무조건 ‘변함없이 곧아야만 할 것 같은’ 단어들이 자세히 들여다보니 고정되어 있지 않은 삶, 행운과 고통이 언제든 교차될 수 있는 삶 가운데에서는 흔들릴 수 있는 것도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참지 못해 터뜨린 말은 결국 나를 더 무력하게 만든다. 나를 향해 들어오던 그 칼날이 사실은 바람결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인내는 그 깨달음을 미리 살아보는 감정이다. 40쪽

인내라는 단어를 읽을 때는 잘 몰랐는데 뒤에 나오는 ‘의지’라는 단어의 의미를 읽고서야 저자처럼 나도 긴 세월을 자책하고 원망하고 그래서 방황하는 것조차 나의 나약함이라며 부정하고 살았구나 싶어 안쓰러웠다. 물론 그 시절 누가 내게 참아낸다는 것의 참의미와 흔들림도 당연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 줄 수 있다한들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후회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고 보니 결국 후회란 건 무조건 나쁘거나 부정적인 것, 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가하면 상형문자인 ‘비참’이란 단어는 ‘날개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것’을 뜻한다. 생각만해도 아찔한데 그저 절절하게 슬프고 좌절한 모습이라고만 생각해왔다.

날 수 있음에도 날지 못하는 상태, 그때의 슬픔은 땅으로 나동그라진다. 갈 수 있었지만 가지 못한 길, 날 수 있었지만 추락한 순간, 그때 마음은 무너진다. 날개가 함께하지 못한 슬픔은 몸이 아니라 마음을 떨어뜨린다. 82쪽

비참을 ‘질투’라는 단어를 읽을 때에 다시한번 떠올렸는데 질투라는 게 애초에 내가 바라는 이상향 혹은 나와 전혀 다른 대상을 두고는 갖지 않는 마음이라는 부분이 그랬다. 타인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 너무나 먼 거리에 있는 성공을 보면서 비참한 기분이 들진 않는다. 오히려 ‘그때 나도 그런 선택을 했더라면’에서 출발할 때 질투가 생기고 비참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감정을 떨쳐내려면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감사해야 할 이유를 찾는 그 여유가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든다. 행복을 위해 중요한 과정중에 하나인데 버릴 것은 버리고, 기억할 것은 기억하는 것이 다름아닌 ‘망각’이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이 있을까. 그건 아마도 타인의 기준이 아니라 고독한 시간에서 들여다보는 진짜 나의 모습일 것이다. 나를 망각하지 않을 때 비로소 타인을 위로할 수 있고 그 아픔에 지워지지 않을, 지겨워 하지 않을 연민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아픔에 ‘아직도’라는 말을 붙이는 이들에게 다음의 문장을 꼭 읽히고 싶었다.

고통을 공유하려는 기꺼운 마음이 없으면, 연민은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나 문턱을 넘으면,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 된다. 나의 일을 지겨워하는 사람은 없다. 142쪽

서평에서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소개된 단어와 그 단어를 이루는 부수 하나하나를 다 어떻게든 공유하고플 정도로 좋았다. 어떻게 하면 이 책을 많은 독자들이 찾을 수 있을까, 그야말로 간절해졌다. 간절이라는 단어에는 ‘슬픔’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한다. 왜냐면 나의 이 서평이 내 바람처럼 잘 전달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내 마음이 가닿지 않더라도 분명 어느누구도 아닌 내 자신은 ‘지금의 나를 살게하고 지금의 나를 어떤 것에 몰입하도록 만든(259쪽)’ 책이라는 것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꼭 추천하고 싶다.

#한자가삶의위로가될때 #우승희 #동양고전 #마음 #심리
@chungrim.offi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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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항복 미술관
두브라브카 우그레시치 지음, 조서현 옮김 / 아트북프레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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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항복미술관 / #두브라브카우그레시치 / #아트북프레스

책을 읽다보면 서문 혹은 본문의 한 두 페이지만 읽고도 ‘인생책’이라는 감이 올 때가 있다. 그런 경험은 읽는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지만 한 장을 다 넘기기도 전에 내 기억을 파묘시키고 해제하는 통에 고통스럽기도 하다. 이 책이 바로 그랬다. 두브라브카 우그레시치를 알기 전 ‘기억’이란 단어를 보고 떠올릴 수 있던 작가는 제발트였다. 역사적 사건보다 개인의 사유물에 침작하여 기억을 좇는 과정은 제발트와 비슷하게 느껴졌지만 기억과 함께 ‘지속적인 상실’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두브라브카 우그레시치의 글들이 내게 더 잘 닿았던 것같다. <무조건 항복 미술관>은 저자 서문에 적힌 것처럼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그녀 자신의 이야기인지 따져가며 읽을 필요가 없다. 책, 편지들, 예술가 그리고 유년의 ‘향수’ 심지어 망명까지 ‘전기 속에 입력(173쪽)’ 된 항목 중 하나일 뿐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장르는 ‘소설’ 이며 그 소설안에서 여성은 자신의 어머니와 이모들, 그녀가 만났던 그렇지 못했던 상관없이 사진을 통해 전해들은 누군가의 ‘미술관’을 관람한 이야기다.

어린 시절, 나는 종종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나 어디있게? 라고 묻곤 했다. 그러고는 손을 다시 열며 “여기 있지!”라고 외쳤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은 늘 기쁜 듯 비명을 지르며 환호했다. “거기 있구나!” 그 가장 단순한 유아적 놀이는 몇 가지 개념을 의식 속에 단단히 새겨주었다. 45쪽

지금도 이따금 아이와 배우자에게 의식없이 던졌던 장난들을 더는 별 의식없이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것이 불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주 하게 된 장난에 대해, 말들에 대해 가만가만 생각하게 만든다. 그녀의 엄마가 새 집으로 옮길 때 마다 ‘새로이’ 맞이했던 모든 가전, 가구, 행위들 조차 이제 가벼운 공감을 넘어서버렸다. 책을 좋아하고, 그래서 집안을 작은 서재화 시켰던 그녀의 어머니가, 또 그녀의 노년을 나의 미래로 가져와 비쳐보니 마치 트레이싱지를 대고 그린듯 비슷하게 느껴져 조금 슬퍼지기도 했다. 내가 아는 단 한 문장의 독어를 거듭 떠올리며 읽었던 3장과 5장에 등장하는 베를린, 베를리너의 특색은 아직 가보지 못한 미지의 장소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래도 역시나 책을 좋아하는 내게는 그녀와 어머니가 가장 좋아했던 책과, 반복해서 읽어도 좋았다는 책 혹은 작가들의 이야기를 대구처럼 배치해 들려주던 기억과 삶에 대한 정의가 아니었을까 싶다.

사실 아이들에 대해서도 내가 얼마나 모르는지 생각하면 가슴이 서늘해져요. “ 어머니가 말한다. (…)
내가 그들을 이렇게나 모르고 있었는데, 우리가 어떻게 함께 살아올 수 있었을까.” 조르지 콘라드가 말했다. 83쪽

책을 읽다보면 이미 지나간 문단이 마치 그새 내용을 잊었냐고 묻기라도 하듯 약간의 조사만 달라져 다시금 등장할 때가 있는데 처음에는 인쇄의 오류인가 싶었는데 앞에 적힌 숫자가 달라지고, 그 지점에서 등장하는 앞뒤 문단의 연결이 매끄러워 조금씩 그런 내용들에는 표시를 하기 시작했다. 특히 다음의 문단은 이 책의 표지 바로 뒤에 등장하는 사진이기도 해서 함께 공유하고 싶었다.

내 책상 위에는 누렇게 바랜 한 장의 사진이 놓여 있다. 사진 속에는 이름도 알 수 없는 세 명의 여자가 물놀이를 하고 있다. 내가 이 사진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 257쪽

처음 저 문장을 보았을 때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사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제목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무조건 항복 미술관>.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 조차 앨범을 정리할 때 보통 연대순으로 한다. 분류학을 공부할 때 왜 이렇게 어려운가 싶었던 일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분류’에 대해, 그리고 큐레이팅과 아카이빙을 새삼 감탄할 만큼 우리 삶에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어설프게 배웠던, 혹은 근무했던 관련 이력에 부끄러운 마음이 일었다. 그녀의 어머니처럼 내 옷장에도 그리고 서랍장에도 정리되지 않은 사진들이 돌아다니거나 책장에서 무심코 꺼낸 책을 펼쳤을 때 ‘이게 언제더라’싶은 사진이 떨어지기도 한다. 나처럼 평범한 삶도 이렇게 나약할 수 밖에 없는데 아예 사라져버린 나라에서 태어나 서로 다르게 불리는 언어를 배우고 자란 사람들의 삶이란 그야말로 ‘무조건 항복 미술관’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전시주제에 따라 반복적으로 가서 보고 또 보듯 이 책은 도저히 한 번으로는 안될 것 같다.

@artbook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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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 아직도 마음이 자라는 우리에게
백영옥 지음 / 김영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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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옥 작가의 에세이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의 부제는 ‘아직도 마음이 자라는 우리에게’다. 10년 만에 완결판이 나왔으니,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의 내 나이도 결코어리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 책을 읽기에 가장 좋은 나이는 없지만, 청소년기를 지나 어른이 되었을 때 한 번 더 맞이하게 되는 ‘오춘기’가 가장 ‘적당한 때’라고 본다면, 나는 ‘때에 맞는 책’을 읽었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배우자가 어릴 때 이미 알았던 위로의 법칙이 적중한 것이랄까.
“인간이 언제 위로받는 줄 알아? 쟤도 나처럼 힘들구나! 바로 비극의 보편성을 느낄 때야.” (195쪽)

10년 전 처음 이 책을 읽고 한두 해쯤 지났을 때, 저자를 한강연장에서 본 적이 있었다. 저자의 강연이 아니기도 했고, 무엇보다 조용히 강연을 듣고 있는 모습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컸다. 그래서 아쉬움보다는 좋아하는작가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는 그 경험 자체가 좋았다. 어떤 부분에서 공감하셨을까 생각하며 끊임없이 상상하기를 즐기는 앤처럼 말이다. 의지만 있다면 언제라도, 어떤 경우에라도 바라는 대로 이야기를 이어 갈 수 있었다. 남자아이가 아니라는 이유로다시 보육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전 이 드라이브를 마음껏 즐기기로 작정했어요. 즐기겠다고 결심만 하면 대개 언제든지 그렇게즐길 수가 있어요!” (69쪽)

누구도 불행을 계획하거나 즐기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내게 찾아온 불행이나 시련이라면 ‘이번에는 또 어떤 선물을 주시려고 시련으로 포장하셨을까?’ 하고 앤처럼 생각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잘 안 되는 거다. 중요한 건 실수를 자기 몸으로 감당해 내는 것이다. 어쩌면 그 사람만 하는 특이한 실수가 그 사람의 캐릭터가 되기도 하니까.” (191쪽)

내가 요즘 자주 하는 실수는 배우 서현철 님의 배우자분처럼 발음이 비슷한 전혀 다른 단어를 가끔 사용하는 것이다. 에어컨에게 ‘냉방 모드로 켜줘’라고 말해야 하는데 ‘냉동 모드로 켜줘’라고 하는 식이랄까. 이 책에 등장하는 작가와 배우자분의 사연도 참 다정하고 사랑스럽다.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이라고 적어 문자를 보냈다는 이야기도 귀엽고 좋았다. 생일인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취재를 위해 만든 초콜릿을 선물했을 때도, 모양이 별로라고 말하면서도 몇 개는 더 먹어야 한다며 연인의 솜씨와 마음을 고마워하고 칭찬할 줄 아는 사람과 함께 사는 기분은 어떨까 싶다. 칭찬은 고래는 모르겠지만, 상대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분명하다.

처음 만든 초콜릿 케이크의 점수를 묻는 앤의 눈동자가 반짝거릴 때, 매슈 아저씨는 “백 점”이라고 말하는 대신 앤에게 케이크를 조금 더 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그런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희귀한지, 얼마나 눈물 나게 소중한지앤은 몰랐겠지만 나는 이제 너무 잘 안다. (130~131쪽)

앤을 통해 저자가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축약해 보면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고 생각한다. 언제든 남을 탓하거나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주저앉을 만한상황에서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이름을 붙여 주고, 빨래가 마를 수 있도록 불어오는 바람에도 이름을 붙이며, 난처한 상황에서도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은 결국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세상에 자신만 불행한 것이 아니며, 언제든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완결판을 정리하면서 앤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한 건, 내게 ‘해야 할 말’이 아니라 아직 ‘듣고 싶은 말’이 있어서라는 걸 알게 됐다. (프롤로그)

사는 동안 지치고 힘들 때마다 꼭 맞는 위로를 건네는 친구가 있다는 건 얼마나 멋진 삶일까. 시끄러운 앤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대신 활자라서 다 읽었다던 저자의 옛 친구처럼 내게는 그런 책을 써 준 작가에게 그때 하지 못한 감사의 인사를 이 서평을 통해서라도 꼭 전하고 싶다.

#김영사 #빨강머리앤이하는말 #백영옥 #스테디셀러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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