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항복 미술관
두브라브카 우그레시치 지음, 조서현 옮김 / 아트북프레스 / 202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조건항복미술관 / #두브라브카우그레시치 / #아트북프레스

책을 읽다보면 서문 혹은 본문의 한 두 페이지만 읽고도 ‘인생책’이라는 감이 올 때가 있다. 그런 경험은 읽는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지만 한 장을 다 넘기기도 전에 내 기억을 파묘시키고 해제하는 통에 고통스럽기도 하다. 이 책이 바로 그랬다. 두브라브카 우그레시치를 알기 전 ‘기억’이란 단어를 보고 떠올릴 수 있던 작가는 제발트였다. 역사적 사건보다 개인의 사유물에 침작하여 기억을 좇는 과정은 제발트와 비슷하게 느껴졌지만 기억과 함께 ‘지속적인 상실’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두브라브카 우그레시치의 글들이 내게 더 잘 닿았던 것같다. <무조건 항복 미술관>은 저자 서문에 적힌 것처럼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그녀 자신의 이야기인지 따져가며 읽을 필요가 없다. 책, 편지들, 예술가 그리고 유년의 ‘향수’ 심지어 망명까지 ‘전기 속에 입력(173쪽)’ 된 항목 중 하나일 뿐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장르는 ‘소설’ 이며 그 소설안에서 여성은 자신의 어머니와 이모들, 그녀가 만났던 그렇지 못했던 상관없이 사진을 통해 전해들은 누군가의 ‘미술관’을 관람한 이야기다.

어린 시절, 나는 종종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나 어디있게? 라고 묻곤 했다. 그러고는 손을 다시 열며 “여기 있지!”라고 외쳤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은 늘 기쁜 듯 비명을 지르며 환호했다. “거기 있구나!” 그 가장 단순한 유아적 놀이는 몇 가지 개념을 의식 속에 단단히 새겨주었다. 45쪽

지금도 이따금 아이와 배우자에게 의식없이 던졌던 장난들을 더는 별 의식없이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것이 불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주 하게 된 장난에 대해, 말들에 대해 가만가만 생각하게 만든다. 그녀의 엄마가 새 집으로 옮길 때 마다 ‘새로이’ 맞이했던 모든 가전, 가구, 행위들 조차 이제 가벼운 공감을 넘어서버렸다. 책을 좋아하고, 그래서 집안을 작은 서재화 시켰던 그녀의 어머니가, 또 그녀의 노년을 나의 미래로 가져와 비쳐보니 마치 트레이싱지를 대고 그린듯 비슷하게 느껴져 조금 슬퍼지기도 했다. 내가 아는 단 한 문장의 독어를 거듭 떠올리며 읽었던 3장과 5장에 등장하는 베를린, 베를리너의 특색은 아직 가보지 못한 미지의 장소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래도 역시나 책을 좋아하는 내게는 그녀와 어머니가 가장 좋아했던 책과, 반복해서 읽어도 좋았다는 책 혹은 작가들의 이야기를 대구처럼 배치해 들려주던 기억과 삶에 대한 정의가 아니었을까 싶다.

사실 아이들에 대해서도 내가 얼마나 모르는지 생각하면 가슴이 서늘해져요. “ 어머니가 말한다. (…)
내가 그들을 이렇게나 모르고 있었는데, 우리가 어떻게 함께 살아올 수 있었을까.” 조르지 콘라드가 말했다. 83쪽

책을 읽다보면 이미 지나간 문단이 마치 그새 내용을 잊었냐고 묻기라도 하듯 약간의 조사만 달라져 다시금 등장할 때가 있는데 처음에는 인쇄의 오류인가 싶었는데 앞에 적힌 숫자가 달라지고, 그 지점에서 등장하는 앞뒤 문단의 연결이 매끄러워 조금씩 그런 내용들에는 표시를 하기 시작했다. 특히 다음의 문단은 이 책의 표지 바로 뒤에 등장하는 사진이기도 해서 함께 공유하고 싶었다.

내 책상 위에는 누렇게 바랜 한 장의 사진이 놓여 있다. 사진 속에는 이름도 알 수 없는 세 명의 여자가 물놀이를 하고 있다. 내가 이 사진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 257쪽

처음 저 문장을 보았을 때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사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제목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무조건 항복 미술관>.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 조차 앨범을 정리할 때 보통 연대순으로 한다. 분류학을 공부할 때 왜 이렇게 어려운가 싶었던 일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분류’에 대해, 그리고 큐레이팅과 아카이빙을 새삼 감탄할 만큼 우리 삶에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어설프게 배웠던, 혹은 근무했던 관련 이력에 부끄러운 마음이 일었다. 그녀의 어머니처럼 내 옷장에도 그리고 서랍장에도 정리되지 않은 사진들이 돌아다니거나 책장에서 무심코 꺼낸 책을 펼쳤을 때 ‘이게 언제더라’싶은 사진이 떨어지기도 한다. 나처럼 평범한 삶도 이렇게 나약할 수 밖에 없는데 아예 사라져버린 나라에서 태어나 서로 다르게 불리는 언어를 배우고 자란 사람들의 삶이란 그야말로 ‘무조건 항복 미술관’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전시주제에 따라 반복적으로 가서 보고 또 보듯 이 책은 도저히 한 번으로는 안될 것 같다.

@artbookpress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