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정말 애국이었을까 - 나의 극우 가정사
클레어 코너 지음, 박다솜 옮김 / 갈마바람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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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정말 애국이었을까 : 나의 극우 가정사


 


이 책을 읽기 전이나 책의 초반을 읽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전달하고싶은 메세지가 잭 이브라힘과 제프 자일스의 [테러리스트의 아들]과 같은 선상에 놓여있을 줄 알았다. 극우라는 것이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 뿐 아니라 가정내에서도 크나큰 '폭력'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내용 전부를 읽고 난 후 내 시선은 극우는 무조건 '악'이라는 단순한 결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선 책의 저자 클레어 코너는 원하는 바는 아니었겠지만 스스로 인정한 것 처럼 부모로부터 행동하는 '정치가'로서의 성향을 제대로 물려받았다. 낙태금지법을 맹렬하게 주장했고, 설사 그것이 산모의 생명을 위협해도, 강간이나 심지어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이라 할 지라도 낙태는 결코 안된다는 내용을 모른척했다. 다시말해 이 책의 타이틀 '그것은 정말 애국이었을까'에서 '그것'이 극우단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의도에서 출발했다고 믿고 있는 '나의 주장'과 뜻을 달리하면 무조건적으로 선과악의 기준에서 '악'으로 떠미는 행위나 단체활동이라고 보여진다. 저자의 부모, 코너 부부는 존 버치 협회에서 인정할 정도로 열성적인 회원이었다. 심지어 저자가 겨우 열 세살밖에 안되었을 때 협회에 가입시켰으며 제대로 간호를 받지 못하면 평생 누워지내야 할 지도 모르는 위험에 놓인 자녀를 역시나 어리기는 마찬가지인 손위 형제에게 맡기도 협회활동에 집중하는 '비도덕적인'행위도 서슴치 않는다. 놀라운 것은 사랑과 생명존중을 목숨처럼 여기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이다. 그들의 행동과 사상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대의를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아껴서는 안되는 것이다. 설사 그것이 자식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라도 말이다. 물론 아브라함이 이삭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는 상황을 떠올리면 그것이 결코 잘못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신이 아브라함에게 원한 것은 '피'가 아니었다. 아들마저 내놓을 수 있을정도로 자신의 '믿느냐'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다.  이렇게만 보면 기독교 사상이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안타깝게도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멀리갈 필요없이 한국의 상황을 보자면 한국전쟁을 직간접적으로 겪은 우리 부모님 세대와 '자유'라는 단어가 가장 '비자유'스러웠던 시대가 과거라고 보이지 않는다. 종전이 아닌 휴전국으로서 당사자인 우리는 태평한 듯 받아들이지만 보수파들에게는 여전히 전쟁의 공포는 현재 진행형이다. 코너 부부에게도 공산주의는 '공포'로 그 자체와 다름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당장 눈앞에서 자식을 하나 잃더라도 아직 남아있는 수많은 후손들을 공산주의자들 손에 죽임당하지 않기 위해서 맞서 싸워야만 했다.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민중은 늘 누군가로부터 '적'의 존재를 주입당해왔기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저자 클레어가 부모의 극단적인 행동이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자신 역시 '낙태'를 합법화 하는 것이 자신의 아이를 죽이는 것과 같다고 느끼는 극단적인 공포에 빠져드는 것이라 믿게되는 상황이 결코 부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명절에 가족들이 모여 앉아 즐겁게 놀이를 하고 덕담을 나누는 그림은 이제 동화속에서나 접하는 생소한 모습이 되었다. 취업여부와 결혼여부를 물어오는 어르신들에게 조금이라도 예의없이 대답하면 '요즘 젊은 것들'이라는 비난을 받아야하고 그 젊은 것들은 역으로 그 어르신들을  판단력을 상실한 '꼰대'로 치부해버린다. 서로에 대한 배려도 없고, 나와 다른 의견에 있어서는 '의견'이 아니라 '무지한 존재' 심지어 적으로 인식해버리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단순히 공산주의라던가, 현 정권에 대한 무조건적으로 비판하는 극단적인 상황만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미국의 근대사에서 빠질 수 없는 '색깔논쟁'또한 당연히 언급된다. 백인들 사회에서만 살아가고 있을 때 저자 역시 인종차별이란 것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다. 남부지역을 대학에 입학했을 때 비로소 '차별'이라는 것이 단순히 혜택을 덜 누리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부모님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여기서 또 중요한 사실은 저자가 결코 부모님의 행동을 '틀린 행동'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데에 있다. 잘못된 것일수는 있어도 그들의 행동 자체를 이해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긍정직인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다. 만약 저자가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부모를 비방하고 틀렸다고 전면으로 고발하거나 부정했다면 안타깝게도 생물학적인 의미로서의 코너 주니어가 아니라 극우단체가 끊임없이 반복되어 탄생하는 과정을 받아들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보면 세상의 둘도 없을 것 같은 클레어의 아버지가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딸을 매질하기를 서슴치 않는 불행한 환경속에서 그녀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깨달을 뿐 아니라 최소한 덜 극단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준 형제들과 남편의 역할에 큰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마치 오랜 세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당하던 신데렐라 왕자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같은 나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희망을 보았던 것과 같았다. 다만 저자에게 다가온 구원의 날개는 보았지만 이 세상 전체를 보자면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는 극우단체를 위한 구원의 날개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뿐만아니라 심각할 정도로 왜곡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내가 사는 이 나라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극우주의자들은 가장 용기없고 극심한 두려움에 빠져있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언제고 나를 해치고 나의 가족을 살해할 수 있는 위협으로부터 목숨을 걸고 투쟁해야 하는 그들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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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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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 / 킬러 안데르스로 인해 어른이 친구 둘



 

 


요나스 요나손의 신간 [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은 이야기를 끌어가는 세 사람의 배경이 다소 과장된 것처럼 보이지만 과장된 것을 굳이 따져보자면 그들의 현실이나 과거가 아니라 그들의 미래가 과장이고 허구에 가깝다는 것이 씁쓸하다. 하지만 이 씁쓸함이 안타까운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었기에 씁쓸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볼 수 없다는 이유라는 것이 작가의 작품을 자꾸만 찾게 되는 이유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경우 어찌보면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고도 능청스러운 100세 노인의 모습이 다가왔던 반면 이번 작품은 초기에 능청스러움이 정도를 넘어선 것 같아 과연 웃어도 될까 싶은 불안함이 살짝 들기는 했었다. 특히 친구 두 사람을 위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수입을 가져다 준 안데르스를 속이기까지 하는 모습에서는 과연 그들의 행동이 과거에 상처로 용인되고 이해받는 한계를 넘어섰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목  '킬러 안데르스의 그의 친구 둘'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친구 둘 이라는 명백하고 분명한 표현에 있다. 만약 안데르스를 중심으로만 이야기가 펼쳐진다면 그의 친구 둘 이아니라 그냥 안데르스의 친구들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수를 명시한 것은 안데르스를 통해 요한나가 신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면 페르에게는 조부와 아버지에게서 받지 못한 경제적 지원과 부양해주는 '부양자'로서의 역할을 대신하는 등 상대에 따라 그 역할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리셉셔니스트도 목사도 부동산 임대 방면에는 경험이 없었다. 성년이 된 이후로 페르는 호텔 접수 데스크 뒷방이나 캠핑카에서 자면서 살아왔다. 요한나는 아버지의 목사관이나 웁살라의 학생 기숙사 외에는 살아 본 데가 없었다. 그리고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아버지가 자유롭게 놔주질 않았기 때문에, 어린 시절의 침실과 거기서 20키롤미터 떨어진 직장 사이를 시계불알처럼 왕복해야 했다. 381쪽

가부장적인 그것도 보수의 극단이라 할 수 있는 목사의 딸 요한나에게 신은 자비롭고 평화로우며 사랑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발언권을 빼앗아가고 자유를 박탈한 존재일 뿐이다. 어쩌면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그녀에게 일말의 양심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 될 지도 모른다. 페르는 또 어떤가. 성인이 되기 전부터 이미 좋은 어른들이 아닌 나쁜 어른들의 세계에 발을 내밀었던 그는 그저 자신의 목적에 부합되느냐에 따라 옳고 그림, 좋고 나쁨이 정해져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요한나는 초반에는 자신의 목적에 반하는 위험천만한 인물로 킬러 안데르스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점차 자신의 목적과 그녀의 목적이 다르지 않고 같은방향이 되면서 요한나의 양심을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안데르스가 성경 말씀을 상기하며 범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그야말로 '기적'이자 요한나가 그토록 부인했던 '신'의 진짜 모습을 만나게되는 계기가 된다. 좀 더 종교적으로 접근하자면 안데르스에게 요한나가 신과의 만남을 연결해준 사도가 되는 것처럼 역으로 요한나에게도 강요된 종교가 아닌 신앙으로서의 진정한 만남을 안데르스가 이어준 것이기도 하다. 뿐만아니라 '딸', 즉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아빠'인 남자에게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성적인 불평등 또한 안데르스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킬러 안데르스는 그녀의 이야기 중에서 뭔가 귀담아들을 만한 것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집중해서 들었다.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처음 몇 마디 들었을 때부터 킬러 안데르스는 그 영감탱이는 한번 찾아가서 늘씬하게 패줄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 문제가 깔끔히 해결되리라. 필요하다면 한 번 더 찾아갈 수도있고. 97쪽

두 사람모두 킬러 안데르스의 '친구 둘'이 되기 전까지는 몸만 어른이 되었을 뿐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는 어른이 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킬러, 사람을 죽이던 안데르스 또한 '친구 둘'을 만나기 전까지는 '유'를 '무'로 만들었던 과거를 완벽하게 뒤집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정리하자면 태생적으로 혹은 과거에 천착해서 자신의 삶을 단정짓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나와서 뜻하지 않은 '우연'이라 쓰고 '인연'이라 정의내리는 인간관계를 통해서 충분히 회복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부분 삶을 통해 기대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서두에 밝힌 것처럼 '희망'에 기대를 걸 수도 있지만 '안데르스'가 성경구절을 떠올리지 않았다면이라는 단 하나의 가정만으로도 모든 것이 허물어진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들러라면 물론 이런 경우를 두고 스스로가 의미를 어떻게 부여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을 성경을 가볍게 다루면서도 상황에 따라 절묘하게 어울러지는 위트에 중점을 두고 읽어도 흥미롭지만 위의 경우처럼 세 사람의 관계를 분석하거나 서로에게 주어진 역할을 주목하며 이미 다 자란 어른들의 성장기로 받아들이며 미성숙한 자신의 모습을 대입시켜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세심하고 유려한 묘사와 문장으로 마음을 빼앗는 소설도 있지만 이렇게 한 글자 한 글자를 쫓다가 어느 순간 여러가지 면을 마주할 수 있게 만드는 것역시 이 작가의 대단한 능력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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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6-11-13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시리얼 CEREAL Vol.12 - 영국 감성 매거진 시리얼 CEREAL 12
시리얼 매거진.임경선 지음, 최다인 옮김, 선우형준 사진 / 시공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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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얼 12호에는 화가 이우환과 작가 임경선의 글이 실려있다. 이우환, 임경선 두 사람에게도 그들만의 리츄얼이 있었다. 다르게 말하면 스스로에게 엄격한 사람들이었다. 이우환 화가의 경우는 엄청난 집중력을 요하는 화법을 나이가 들어서까지 꾸준히 할 수 있었던 것이 체력관리를 잘 해왔기 때문인데 지금도 매일 아침 8시30분이면 30분씩 잊지 않고 운동을 한다고 한다. 임경선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매일은 아니지만 격일로 유산소 운동과 근력운동을 하면서 글쓰는 작업이 체력저하로 소홀해지지 않도록 자기관리를 하고 있었다. 이우환 화가의 경우는 어릴 때 부터 부모님께 노는 시간과 공부하는 시간을 철저하게 분리하도록 배웠고 임경선 작가 역시 혼자 작업을 하는 사람일수록 자기관리를 소홀히 하면 안된다고 강조한다.


 

 

 

언뜻 내 그림은 아주 쉬워 보입니다. 누구든 그런 선을 그 자리에 그을 수 있을 것 같지요. 하지만 작품 앞에 섰을 때 무언가가 살아있다는 것을 실제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해요. 모든 획은 살아있고, 이 살아있는 획으로 나는 특정한 진동을 창조합니다.


이우환 화가의 작업실은 현재 파리9구에 있지만 나오시마 섬에 개관당시에는 한국작가로서는 유일하게 개인 전시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그 이야기를 책을 통해 접할 때는 엄청나게 유명한 사람이구나 하는 정도였는데 시리얼 기사를 통해 이우환 화가가 스무살 이후부터 일본에서 철학과 문학을 공부했을 뿐 아니라 근대 예술가 그룹에 합류, 활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과 화법에서만큼은 엄격하지만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자신의 의도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방문객들이 내 작품과 마음으로 만났으면 합니다. 논리나 이론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지만 작품을 보고 느끼는 감정에 비하면 그런 것들은 부차적일 뿐이죠."


 


임경선 '혼자만의 시간' 에 대하여 기사를 보면 혼자만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누군가는 작가가 되기도 한다.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해외 여러곳에서 살아 볼 수 있는 혜택을 누린 그녀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혼자만의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더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때 그녀를 도와준 것이 다름아닌 책이였다고 한다.


홀로 시간을 보낼 때 나는 나 자신과 차분히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마음속 정직한 소리를 듣는다. 나는 이를 통해 자신도 몰랐던 부분들을 많이 발견했고 내가 인생에서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서서히 알아갔다. 나는 예기치 않게 글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 글쓰기는 오로지 혼자서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고 나는 당연히 온종일 단 한마디도 말하지 않고 일했다.

 


시리얼을 읽다보면 그동안 읽어왔던 책들의 내용이 연쇄적으로 떠오르는 데 정해진 스케쥴을 따라가는 작가들의 모습에서는 <리츄얼> 딱 하고 떠올랐다. 그런가하면 최근에 읽었던 마스다미리의 <너의 곁에서>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도 있었는데 임경선 작가가 1년 마다 혼자 여행을 다닌다는 글을 접했을 때였다.


아이가 태어난 후, 나는 1년에 한 번씩 혼자 여행을 다니고 있다. 말하자면 가족에게서 휴가를 받는 셈이다. '아무개의 아내'도 '아무개의 엄마'도 아닌 '임경선'이라는 이름으로 며칠간의 고독을 갈망한다.


철저하게 혼자가 되기 위해 숙박하는 장소도 알려주지 않고 연락도 하지 않는다는 그녀를 보니 여행을 떠난 뒤 가족 생각에 휴대폰만 들여다보는 사람들과 비교가 되었다. 양쪽 모두 내가 그동안 여행을 떠났을 때 번갈아가며 보였던 패턴인데 기왕 떠난 여행이라면, 나를 위해 떠나왔을 때는 후자의 행동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호에서 눈에 들어온 지역은 인도 라자스탄의 조드푸르였다. 부제가 푸른도시인데 이 푸름이 말이나 글로 설명할 수 없다. 스티브 맥커리. 이름을 들으면 낯설지만 사진을 보면 아, 하고 알 수 있는 작가의 그 유명한 사진이 바로 라자스칸의 조드푸르가 배경이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사진을 꼭 찾아보길 바란다. 원래 퍼핀이라는 새의 사진을 리뷰에 꼭 담고 싶었다. 마치 포즈를 취하는 것처럼 렌즈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 거리거나 귀여운 표정을 짓고 날아오는 모습이 미소를 짓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포스팅 하려고 사진을 보는 순간 흠칫 했다. 너무 무서워 보여서. 그래도 퍼핀 봉제인형은 갖고 싶어졌다. 안타깝게 시리얼에서 봉제인형 사진은 실어주지 않았다. 직접 퍼핀이 사는 페로 제도로 가야하는가 부다.  12호 브랜드 기사는 올슨 자매의 '더 로'가 실렸다. 수영장이 딸려있는 숍이라니 독창적이기도 하고 참 괜찮은 아이디어라 탐나기도 했다. 그 두 사람이 만드는 상품이라기 보다 작품에 가까운 제조마인드도 멋지게 느껴졌다.


 


적어도 우리가 생각하는 럭셔리란 여성의 삶을 편안하게 하는 무언가라고 생각해요.


여성의 삶 속에 럭셔리란 의미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 더 좋은 가전을 사는 것도, 고급스러운 소재와 재단의 의류와 소품을 구입하는 것도 결국 편안함을 위해서이긴 하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당장 지불해야 할 돈이 너무 크다는 것이 안타깝다. 국내에 출간된 시리얼 잡지를 거의 가지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베스트 3에 꼽을 정도로 12호는 기사 내용이 하나같이 다 좋았다. 사진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미처 리뷰에 소개하지 못한 남극대륙의 이야기는 기사 서문에 실린 괴태의 명언으로 마무리 한다. 마치 지금 내게 들려주려고 일부러 준비해둔 것처럼 느껴진다.


 


 


할 수 있는 일, 또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다면 시작하라.

대담함 속에는 비범함과 힘 그리고 마법이 숨어있다. 당장 시작하라. -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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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6-11-13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느닷없이 서른다섯, 늦기 전에 버려야 할 것들 - 내일을 바꾸는 8주 마음정리법
나카타니 아키히로 지음, 이선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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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개발서를 가장 많이 읽었던 때가 꼭 10년 전 이맘때였다. 전공뿐 아니라 첫 퇴사 후 과감하게 서른이 되기전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며 낯선 세계로 뛰어들었다가 내 인내와 능력부족을 깨닫고 다시 무엇을 해야할 지, 어떻게 그동안의 시간을 내 자신에게 변명하고 위로해야할 지를 알기위해서였다. 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말, 남보다 늦을 순 있어도 아예 멈춰버린 것은 아니라는 말로 가득찬 자기개발서는 큰 위로가 되었고 평균보다 늦게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환경이 나보다 더 열악했는데도 성공한 저자들의 모습은 10년 뒤 마치 나의 미래를 보는 것 과도 같아 희망이 생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나는 다시금 자기개발서에 파묻혀 있다. 잡지를 읽어도, 소설을 읽어도 인문학 서적을 읽어도 모든 내용이 자기개발서처럼 다가왔다.  안타까운 것은 이제 나이가 완벽하게 늦어버린 상태라 조금 늦은 정도의 나를 위로하거나 용기를 낼 수 없었다. 바로 그때, 10년 전 내게 <20대에 하지 않으면 안될 50가지>로 만났던 작가의 신간 [느닷없이 서른 다섯, 늦기 전에 버려야 할 것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아, 나처럼 지난 10년동안 똑같은 작가의 책을 다시금 읽는 독자들이 어딘가에 있을거라 생각하니 왠지 더 서글퍼졌다.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확연한 차이, 20대에는 무언가를 무조건 흡수하고 받아들여야 할 때라면 30대는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버려야 할 때라는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하면 쾌락주의자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대부분 금욕주의자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금욕적인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49쪽

 

위의 발췌문을 보면 '버려야 할 때'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금욕이라는 표현이 수도자와 같이 어둡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절제하는 삶, 자신을 철저하게 관리할 수 있는 것, 육체가 정신을, 정신이 육체를 속박하지 않는 삶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성공여부를 떠나서 성숙한 삶이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뭘까? ​

얼마를 들여도 아깝지 않은 일

얼마를 써도 아깝지 않은 사람

얼마인지 애초에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

 

10년 전보다 오히려 지금이 내가 정말로 무엇을 좋아하는 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왜냐면 좋아하는 일에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무엇보다 벌써 10년이라는 시간이 허비했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20대에는 좋아한다는 그 열정하나로 나를 받아들여주는 곳이 많았다. 당시에도 고마운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와 뒤돌아보니 초심을 잃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제는 정말이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돈을 지불해야 하는 나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만약 이런 상황에 지불 할 능력이 없었다면 크게 좌절했을 것 같다. 소설이나 드라마속에서 10여년간 아이와 남편만 바라보다 안타까운 일들로 홀로 남겨진 30대 여성들이 왜 자살을 결심하고 폐인이 되는지를 알 것 같았다. 마음을 추스리기도 버거운데 금전적으로 여유가 없다면 그들의 좌절이 과연 나약하기 때문이라고 비난만 할 수 있을까.



어제의 실패와 성공을 모두 잊어버려라.


오늘부터 새로 시작하라.

 

나처럼 지난 10년간 손익으로 따졌을 때 실패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이제서야 비로소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기위해 안정된 현재를 벗어나려고 이 책을 읽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나와 그들 모두 과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자학해서도 안되고 자만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내일이 주어질지 어떨지 아직 오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그것이 바로 내일부터가 아니라 오늘부터 시작해야 할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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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6-11-13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카타니 아키히로의 책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새로운 책이 나왔군요. 한 번 보고 싶네요. 좋은 책 소개 감사드립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금욕주의자가 된다는 말에 공감이 가네요ㅠ
 
선택하지 않을 자유 - 결혼과 비혼에 관한 새로운 태도
이선배 지음 / 허밍버드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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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싱글은 가족부터 국가까지 관여하는 거대한 오지랖을 뚫고,

어떤 삶을 살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프롤로그 중에서



사실 결혼이 더이상 의무나 당의가 아니라 선택이라는 것을 적어도 '미혼'상태의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문제는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비혼'주의자임을 선포하고 싶어도 낳아주신 부모눈치에, 주변 사람들 눈치에 아니 도대체 결혼안한 것이 마치 '죄'인것처럼 들이대는 '잘나신 당신들'때문에 받아들일 수도 없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무엇인지 아닌가. 결혼을 안하기로 '선포'한 비혼주의자들이 주변눈치보느라 선포하지 '못하는'이들에게 무능 혹은 겁이 많다며 또다시 폭력을 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점에서 이 책 [선택하지 않을 자유]의 이선배저자는 그야말로 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글속에 단 한번도 결혼 못하는 사람에 대한 비난이나 무시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위로해주고 진심으로 '네 탓'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기 때문이다. 아, 고마운 사람!




행복해져야만 한다는 집착 때문에 스스로 눈을 감아 버린건지,

정말로 주위 사람들이 억지스러운 참견을 하는 건지 진지하게 살펴야 한다. 83쪽




세상의 시선이 버거워 결혼을 선택한 사람들일수록 주변의 의견에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럴수록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상대방을 감싸고 돈다. 그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던 그 수많은 까닭과 사연이 도대체 왜 필요했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들이 흔하게 내세우는 변명이 '그 사람을 언제 봤다고!'였다. 맞다. 우리는 그 사람을 단 한번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결혼하려는 당사자를 꽤 오랜세월 봐왔다. 시간이 전부가 아니고, 정작 나 자신을 잘 모를 때도 있지만 적어도 내가 못보는 나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누가 결혼이 선택인 걸 모르나. 현실이 문제고, 하고 싶어도 못하니까 문제인거지.'




아마 이 책의 타이틀, 저자 약력, 그리고 홍보글만 보고 이렇게 평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알면서 결정내리지 못하는 것은 분명 우리의 잘못이다.  [느닷없이 서른 다섯 늦기 전에 버려야 할 것들]의 저자 나카타니 아키히로는 서른이 넘어간 이후에는 더이상 칭찬과 당근만을 바라는 어린애와 같은 사고를 버리라고 말한다. 선택인걸 알았다면 주변의 의견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 눈이 아니라 마음이 동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 까지 기다리고 싶으면 당당하게 그렇게 말하면 그만이다. 억지스레 좋은 사람을 만나려고 애쓰면서 착한 척 할 필요도 없고, 모든 사람의 마음을 만족시키려고 노력해봤자 결과는 같다. 그대가 결혼을 할 때까지, 심지어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아이를 낳고 살아도 힘들다 어쩌다 고민을 털어놓는 다면 그 고민이 살아질 때 까지 주변사람들은 당신이 주는 먹이를 놓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당신의 삶에 관여할 것이다. 그것이 설사 가족이라고 할 지라도 말이다.





세상에는 남이 결혼했는지, 애인이 있는지, 결혼 유무에 따라 성격이 좋은지, 나쁜지를 판단하려는 오지랖이 넓은 사람들이 많다.

배고픈 하이에나 같은 그들에게 먹이를 주지 않아야 한다. 125쪽



서평 제목은 '제발 좀 읽어주세요 당신들!'이라고 적어놓고 슬쩍 그안에서 나를 빼놓으려는 것처럼 보일테지만 저기서 말하는  당신, You 결혼이 선택이라고 말만 하는 사람들, 심지어 말조차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포함하는 이야기다. 결혼 할 준비도 안되어있으면서 사회제도를 탓하는 사람들, 자신과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도무지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이기적으로 생각하면서 언제나 결혼을 하고 싶다고 죽는 소리하는 사람들, 비혼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이 정의인것 처럼 상대를 사회부적응자로 모는 사람들 등을 모두 포함한다. 그리고 한 부류 더, 결혼했다는 이유로 보통사람이 되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결혼을 준비하는 것이 최소한 인간의 도리를 한 것이며, 자신의 능력과 삶의 수준이 보통은 된다며 자만에 빠진 당신들이여, 결코 당신들의 결혼은 당신들의 선택이 아니었음을 나중에라도 깨닫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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