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들 - 숭배와 혐오, 우리 모두의 딜레마
클레어 데더러 지음, 노지양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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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제공 #을유서포터즈5기 #을유문화사 #에세이추천 #몬스터즈 #괴물들 #클레어데더러

그제야 나는 생각만으로 로만 폴란스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았다. 시인 윌리엄 엠프슨은 인생이란 결국 분석으로 풀 수 없는 모순 사이에서 자신을 지키는 일의 연속이라고 했다. 나도 그 모순 한가운데에 있었다. 20쪽

저마다 좋아하는 예술가(혹은 아이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의 작품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부디 헤드라인 기사로 마주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자라난다. 혹은 이미 괴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작품을 계속 찾아보려는 마음을 억제하기 힘들어지기도 한다. 이 책은 그런 이중적인 마음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몇 해전 한 여가수의 생애를 다룬 영화를 보면서 가족이란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 자녀를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도 이겨내지 못하는 우울, 중독증세에 관해 안타까움을 넘어 정리되지 않은 감정으로 불편했던 적이 있었다. 저자의 말처럼 내 침대에서 혹은 내 집 안에서라는 안전하고 편안한 울타리 안에서 그들을 마주하는 것은 온전하게 그를 마주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개인적으로 가족이 가족에게 주는 상처가 큰 이유도 극과 극의 감정을 처리하지 못하는 감정적 장애를 불러오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헤밍웨이가 개자식이었다는 평판은 피카소와 마찬가지로 그를, 혹은 그의 작품을 앞선다. 헤밍웨이라는 이름은 난투극과 여성 편력과 폭력의 동의어다. (...) 그는 아들들을 너무나 사랑하면서도 괴롭혔다. 특히 아들 그레고리와는 점점 소원해지다 만나기만 하면 서로 폭력을 행사해 결국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되기도 했다. 129쪽

위의 사례처럼 드러내놓고 괴물의 면모를 보여주었지만 대중의 뇌리에 ’천재‘의 모습만 남은 예술가들을 보여준다면 이번에는 작품에서 보여지는 인물의 성격 혹은 성향을 작가에게 투영시켜 그를 괴물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우리는 주제 때문에 그 예술가를 벌할 수는 없다.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한다. 예술가의 주제 때문에 예술가를 항상 비난한다. (...) 과연 ’롤리타‘가 오늘날 출간될 수 있었을까? 난 아닐 거라 생각한다. 177쪽

과거 드라마에서는 나이차이가 많은 남녀의 사랑, 특히 키다리 아저씨를 표방한 내용을 보며 희망을 갖기도 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방영하기도 전에 시청자의 항의로 인해 두 사람 사이의 러브라인은 실현될 수 없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시금 열 세살 어린 소녀를 성폭행 한 폴란스키를 소환한다. 그리고 그 비열함에 다시금 분노한다. 왜냐면 그런 일들이 소설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한 저자의 비정상적 사고와 잘못된 호기심이 아닌 지금 어딘가에 여전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끔찍한 일들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괴물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또한 다른 모든 인간처럼 살면서 나쁜 행동들을 저질러 최소한의 내 몫을 채우기도 했다. 더 나아가 이딴 행동을, 그러니까 책을 쓰는 짓을 저질렀다. 203쪽

이 책의 서평은 처음부터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자극적인 사건(혹은 아티스트의 유명도에 따른)을 배치할 것인가, 아니면 저자의 괴로움의 공감하는 내용들을 기반으로 할 것인가, 이것도 아니라면 이렇게 집필 자체도 고통스러운 책과 독자도 만만치 않은 괴로움을 느끼게 하는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필요성과 당위를 적어야 할 지 고민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누군가의 엄마라는 존재로서 책 쓰기와 읽기에 관한 유대감. 그러다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넣어 쓰고 있다. 그러니 이제는 ’엄마‘에 대해 쓸 차례다.

다음은 아이 버린 엄마로 매도당할 가능성이 있는 행동들이다.

서재나 작업실의 문을 닫고 아이를 들어오지 못하게 (...)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긴다 244쪽

위의 목록을 보고 자유롭지 못해 놀랐다. 역자 서문에 적힌 ’비평서와 자서전의 결합‘이란 내용을 먼저 읽었더라면 좀 덜 놀랐을까 싶기도 하고, 어쩌면 후기를 후기로 읽어서 혼란스러움과 평정의 순서를 차례로 겪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저자는 예술가든 누구든 도덕적 잣대로 그 사람을 추앙하거나 외면해야 한다거나 하는 이분법적인 결론을 내리진 않는다. 하지만 저자처럼 투명한 프리즘으로 들여다 볼 기회를 가져보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이 책에서 언급된 예술가 혹은 그들의 작품을 좋아했던 독자라면 (게다가 누군가의 엄마라면) 함께 읽고 감상을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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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일러스트
이종수 지음 / 아트북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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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그림 감상, 너무 무겁게 시작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

물론 알고 보면 좋은 그림도 있지만, 그림 감상이라는 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설명이 더해지지 않아서 감상할 수 없는 그림이라면, 어느 정도는 그림의 책임이다. 5쪽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너무 어렵게 그림에 접근하지 말라고 말한다. 총 73점을 우리가 느끼는 감각에 맞게 구분하였지만 순서를 따르기보다는 편안하게 아무 페이지나 펼쳐지는대로, 눈(마음)이 가는 대로 보길 권한다고도 말한다. 그런 저자의 제안을 따라 시월이지만 너무 더웠던 지난 어느 날, 내 맘속으로 총총 걸어들어온 몇 작품들을 소개해본다.

김홍도의 '무동'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은 원으로 동그랗게 모여 앉아 화면 바로 앞쪽에 한 아이가 입꼬리를 슬쩍 올려가며 신명나게 춤사위를 보여주는 작품은 나뿐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TV광고를 통해서도 쉽게 접했던 그림이다. 이전에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았던 작품인데 저자의 조언대로 분석하는 마음 대신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까지 두루두루 시선을 던져가며 바라보니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흥'이 느껴졌던 것이다. 동그란 원 안에 빈틈이나 사방 곳곳에 여백이 있는 것이 '삶의 여유'마저 느껴졌다. 한참을 내 맘대로 흥겨워하다가 저자의 부연설명을 읽는 맛이 참 달았다. 이어지는 김홍도의 '황묘농접'은 아이들마저 사랑스러운 고양이와 팔랑거리는 나비의 날갯짓에 눈이 머물거 같다. 이 작품은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품으로 앞서 소개한 작품과 달리 전시작품으로 만난 적은 없었다. 그래서 '묘접도'란 말대신 '모질도'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 노년의 장수와 평안함을 기원한다는 그림의 의도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니 다음의 해석에 '그저 사랑스럽다'라는 말로 퉁쳐서 바라보았던 것도 영 부끄러울 일만은 아닌 듯 싶다.

고양이가 놀리고 있는 게 나비인지 봄볕인지. 어쩌면 볕에겨워 졸고 있는 고양이를 건드린 건 오히려 나비 쪽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마저도 모르겠다. 이 따스한 풍경에 휘둘리는 건 그저 우리들 마음인지도. 83쪽

이번에는 단순히 흥겹거나 사랑스러운 분위기 때문이 아니라 제법 사색에 가까운 상태로 머물게 했던 작품, 윤두서의 '유하백마도'다. 이 작품은 앞서 소개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18세기 작품으로 고산윤선도박물관 소장품이다. 한 가운데 말 한 마리가 서있는데 안장을 채운 것도 아니고 말의 표정 또한 심상치가 않아 더 궁금해졌다. 책 모서리에 당시의 감상을 적었는데, '말의 표정이 얕지도 깊지도 않은 '적당함'이 느껴진다. 그래서 자구 자꾸 보게 된다.'라고 쓰여있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윤두서는 여느 문인 화가와는 달리 사실적인 그림에 능한 인물이다. 대상에 대한 치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그림 연습 또한 성실하게 이어나간 화가(101쪽)'이라고 하니 더더욱 말의 표정을 어떤 까닭으로 저렇게 표현했을지 궁금해진다.

마지막 작품은 김홍도의 '포의풍류도'로 화가의 방안을 보여준 듯한 그림으로 개인소장품이다. 저자의 말처럼 '나를 보여주기에 소품만한 것도 없다(169쪽)'. 화가가 자신이 사랑하는 것 혹은 자주 사용하는 것을 모두 펼쳐보이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저자의 말처럼 그렇게라도 무언가를 증명해보이고 싶었거나 아니면 백남준의 '버마 체스트'처럼 반쯤 열린 서랍장처럼 누군가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을 넘어 교류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생각, 나라면 내 방안에 있는 소품 중 무엇을 꺼내어 그렸을까 싶은 것이다. 어쩌다보니 김홍도의 작품이 세 작품이나 소개되었다. 책을 다 읽고 밑줄 그어진 페이지를 펼쳐보다 내 스스로도 놀라며, 이렇게 되뇌었다.

'나 김홍도 좋아하네. 어쩌면 동양화를 좋아하는지도.' 같은 날 한국화와 관련된 책을 산 것도 굳이 숨기지 않겠다. 저자의 말처럼 시작이 이렇듯 자유롭고 가벼우니 오히려 동양화에 관심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무겁지 않게 감상하고 싶은 분들이라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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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테
차학경 지음, 김경년 옮김 / 문학사상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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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참여했던 펀딩 중 가장 기다렸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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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보는 기술 - 명화의 구조를 읽는 법
아키타 마사코 지음, 이연식 옮김 / 까치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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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가 무엇이든, 세계적인 명화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림이라는 것이 보고 싶은 대로 보면 된다고는 해도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보아야 할지 알기란 어렵습니다. p.13

글의 시작부터 저자는 ‘보는 것‘과 ‘관찰‘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그림을 볼 때에도 단순히 보는 것에 그치지 말고 ‘관찰‘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사전 지식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떤 작품을 ‘바라볼 때‘의 차이점도 분명 존재한다. 그냥 보는 사람은 그림을 볼 때 전체적으로 그리고 세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 곳에 머물거나 집중되어 있다. 감상평을 말할 때도 구조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데 이부분에 있어서는 일반적인 글쓰기도 ‘말하듯 쓰라‘고 했던 것이 생각난다. 글도, 그림도 보고서 ‘말할 줄 알아야‘한다.

이 책은 총 6장에 걸쳐 그림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기술‘을 소개한다. 구조를 파악하게 해주고, 주연과 조연을 구분할 줄 알게 되며 특정 선을 중심으로 그림의 분위기와 성격을 짐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물과 함께있는 소장품을 통해 대상을 짐작할 수 있는 방법도 알려준다. 하지만 이보다 더 와닿았던 부분은 이전에 알지 못했던 부분을 알려준다는 점이다. 가령 고흐의 작품은 색채가 주는 영향력이 상당한데, 그의 작품이라고는 믿기 힘들었던 몇몇 작품의 색상에 대한 오해와 관련된 부분이었다.

그런데 2010년에 시작된 상세한 과학적 조사 결과, 제라늄 레이크라는 분홍색을 띠는 붉은 안료의 색소가 시간이 지나면서 탈색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
과학이 반 고흐가 편지에 슨 내용이 그림과 어긋나지 않았다는 것을 밝혀서 그의 명예를 회복시켜준 것입니다. 174쪽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스킴에 대해 설명할 때 여러 작품을 다루기도 하지만 한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분석도 경험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가령 표지에 실린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만 보더라도 배치에 따라 인물이 가지는 지위의 높낮이는 휘어진 구조선을 통해 느낌을 온화하게 표현되었을 뿐 아니라 나선형 구도로 의도적으로 황금비를 사용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 ‘푸티카‘포즈라고 해서 비너스를 그릴 땐 사용되었던 자세를 통해 인물이 누구인지를 타이틀없이도 알 수 있다. 이렇게 저자의 안내를 따라가다보면 책에 실려있지 않은 작품을 감상할 때에도 좌우 배치에 따라, 래버트먼트 패턴에 의해 안정적인 구도로 화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인지를 짐작해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기술이 여전히 필요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책을 읽어야 할 진짜 이유는 바로 아래 발췌문에서 깨달을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미의식을 알기 위한 간단한 방법을 소개할까합니다. 좋아하는 그림이라면 어떤 장르라도 좋으니 세 점을 고릅니다. 그리고 이 세점의 그림을 늘어놓고 이 책에서 살펴본 ˝그림의 조형을 보는 포인트˝를 떠올리며 공통된 사항을 찾아봅시다. 이 공통 분모야말로 여러분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에 나타나는 특징일 것입니다. 334쪽

최근 유명 전시의 경우 한 두 시간의 대기는 물론 예약 마감으로 취소표를 기다리기 위해 이른 시간부터 줄을 서는 경우도 왕왕 보인다. 유행에 휩쓸리듯 감상하는 것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들인 수고에 비해 맘에 들지 않아 크게 아쉬웠던 적이 있다면 그 어떤 때보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그림, 혹은 예술작품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만약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이 있다면 오히려 더 궁금하지 않을까. 어떤 구조나 색상 혹은 구도 때문인지를 안다면 작품을 넘어 취향을 알아가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또 누군가에게 특정 작가의 작품을 전하는 것에 더해 어떤 이유로 이유로 좋아하는지 특징을 정확하게 전달한다면 같은 영화, 책 등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기쁨을 더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림을 보는 기술‘과 함께 ‘나에 대해 더 잘 아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제대로 알아가는 것‘까지 기대해 볼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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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시간으로부터 - 발아래에 새겨진 수백만 년에 대하여
헬렌 고든 지음, 김정은 옮김 / 까치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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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고든의 저서, 깊은 시간으로부터의 도서 분류는 ‘과학‘이다. 우리가 밝고 서있는 땅 아래, 암석과 지층은 물론 연대를 증명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 중 하나인 얼음층과 지형을 표기하는 지도, 다시 그 지도 위에서 태어나고 다시 쇠퇴한 생명체에 관한 역사와 다시 땅위로 올라와 인류가 미치는 영향에 따라 변화된 기후에 이르기까지 이 한 권의 책에서 등장하는 전문가와 그들의 직업군, 관련 전공은 실로 다양하고 흥미로우며 무엇보다 정말 재미있다. 글을 쓰는 소설가였던 저자가 땅 아래, 지층에 관심을 보이게 된 계기는 마치 재난관련 영화에서 마주하는 도입부, ‘그러던 어느 날‘처럼 우연처럼 다가온다.

런던을 돌아다니면서 조금 관심을 가지면, 우리의 발아래에 수많은 암석층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암석층 대부분은 하 번도 인간의 눈에 띈 적이 없다. 암석들이 처음 형성되었을 때 인간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암석들의 오랜 이야기가 파묻히고 감춰져서 잊혔기 때문일 수도 있다. 14쪽

본문만 3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단숨에 읽었을 만큼 흥미로운 ‘소설‘처럼 다가왔지만 서두에 밝힌 것처럼 엄연히 과학분야에 속해있다. 그렇다보니 수백만 년 전 플라이스토세를 지나 홀로세를 살고 있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질학의 변천사 혹은 관련 이론이 어떻게 정립되고 수정되었는지를 요약해야 하는 어떤 의무감 같은 것이 느껴져 서평을 적는 것이 쉽지 않았다. 헌데 이런 이론이야 일단 이 책을 읽기만 하면 저절로 알게되는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가 인기를 얻으면서 상대성 이론이 화제가 되었던 것처럼) 부분이니 읽으면서 아! 하거나 오! 했던 부분 위주로 적을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제일 처음 오! 했던 부분은 빙하학 교수이자 얼음코어 기록 보관소의 학예사 스테펜션과의 만남이이었다. 도서관 사서 자격증과 학예사 자격증을 준비하면서 나름 어떤 기관의 사서 혹은 학예사가 될 수 있을지 상상해보던 때가 있었다. 헌데 ‘얼음코어 기록 보관소‘라는 장소는 뜻밖이었다. 그야말로 영화 속 재난전문가를 찾아나설 때 엄청난 이력이 소유자이자 미모의 소유자이면서 돌싱(그것도 배우자와 심각한 성격차이로 인한 결별)의 인물이 절로 연상이 되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스테펜션 부부는 같은 직무에 종사할 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사적인 배경도 이 책이 흥미롭게 읽혔던 주된 이유 중 하나다. 지질학자에 대한 호기심을 넘어 관심도 생겼는데 지질학자가 마치 시인처럼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들을 밝혀내는 사람들이라는 표현도 좋았다. 두 번째로 오! 했던 부분은 운석 경매에 관한 부분이었다. 운석을 수집한다는 게 엄청난 부자이거나 연구기관 혹은 학자들에게 한정된 것인 줄 알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았다. 시장에서 물건을 구입하듯 쉽고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의외로 소장 경로가 엄청나게 까다롭진 않았다. 아! 했던 부분은 백악에 관한 부분이었다. 백악기 하면 공룡을 포함 해 지금은 볼 수 없는 멸종된 동물들의 이야기 속에서만 등장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백악을 만날 수 있다.

백악의 세계는 약 1억-8,000만 년 전에 시작되었다. (...)지질학자들은 이 시기를 라틴어로 ˝백악˝을 뜻하는 Creta르 따라 배각기라고 부른다. (...) 백악기가 끝난 후로 지금까지 6,500만 년이 흘렀ㅇ니, 얼마나 기 시간인지 알 수 있다. 138쪽
백악은 영국 남부 해안에서 영국 해협 아래로 내려갔다가 또다른 하얀 절벽으로 다시 나타난다.(...)
백악은 프랑스 북부의 상당지역과 스칸디나비아의 일부 지역, 네덜란드 림뷔르흐 지방, 독일 일부 지역에도 있다. 142쪽

백악이 처음 연구되기 시작하던 시기에는 약 3개층으로 이루어졌다고 짐작했지만 판구조론자들의 연구가 더해져 100년이 지난 이후, 무려 9개의 층으로 세분되기 시작되었다. 백악만 오차가 컸던 것이 아니다. 지구의 나이 자체가 만 년도 안되었다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다. 이렇게 몰랐던 것을 하나씩 밝혀가는 과정도 재밌었지만 안타까운 내용도 분명 있었다. 영국의 유용한 지도를 개발한 스미스의 경우는 같은 학자들 끼리도 무상으로 베끼거나 제대로된 보상없이 차용 당하는 등 지도제작 비용을 회수하지 못하기도 했다. 특히 아! 했던 부분은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특정 시기, 시대를 한 단어 혹은 ‘~시대‘라는 말로 함축시키기도 하고, 마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이 영원할 것처럼 착각하는 데 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홀로세‘로 저자 뿐 아니라 이 책을 읽거나 이렇게 서평을 쓰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같은 시기를 살고 있다. 지질학자들의 삶은 1~2년 혹은 수십년 동안 일어난 사실들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짧아도 수 천년 수 만년에 이른다. 맨 처음 오! 했던 얼음코어 기록소에 있는 얼음은 그렇게 오래 전 내렸던 쌓인 눈을 통해 지구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저자의 말처럼 홀로세 이후의 누군가에 의해 지금 지상에서 내리는 눈을 통해 같은 방식으로 지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화석 역시 마찬가지의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베리는 나무로 만들어진 오래된 수집가용 수납장을 열더니, 만찬 접시만한 크기의 나작하고 둥근 클라도그실론류의 화석을 꺼냈다. 그는 ˝이 화석을 처음 봤을 때 완전히 넋이 나갔다˝고 말했다. 208쪽

저자는 같은 화석을 보고 어떤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아마 내가 봤어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표본이 이전에도 발견된 것인지 어떤지의 여부를 알 수 없을 뿐더러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위의 언급한 표본은 나무의 생장방식이 이전과 다를 수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 거였고, 새로 발견한 만큼 이름을 붙일 수도 있었다. 그저 땅 아래를 파헤치는 굴삭기를 보았고, 층이 나뉘어진 구덩이를 보았을 뿐인데 저자의 관심과 행동은 이 한 권의 책을 완성하는데까지 미쳤다. 마지막 아! 했던 부분이 이 지점이었다. 조개 껍질에도 층은 보이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공룡에 대한 책을 함께 읽는 그 많은 순간, 내게도 이런 기회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인류세란 말을 처음 들으며 기후의 심각성을 깨닫는 순간에도 그런 기회는 곁에 와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던 순간만큼 지질학에 대해, 기후에 대해 무엇보다 지구와 시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앞으로 어떤 행동으로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이 책은 그 어떤 재난영화도, 기후관련 정책에서도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무조건 추천 또 추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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