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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라이즌
배리 로페즈 지음, 정지인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2월
평점 :
그는 자기가 지나간 바다에 표시가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어쩌면 언제까지나 그런 상태로 남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유일한 경계선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과 마음으로 상상만 할 수 있는 것을 가르는 수평선, 바로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경계선이었다. 117쪽
아주 오랜 기간 여행을 한 사람이 있다. 배리 로페즈. 그의 자서전 격인 이 책 ‘호라이즌’은 그가 여행을 떠나게 된 배경과 여행을 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은 물론 여행지에서 가져온 물건에 관한 이야기다. 시간과 물질적 여유가 생긴다면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다. 또 누군가에겐 낯선 환경에서 마주할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거울이 되어 바라볼 수 있는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배리의 여행은 앞서 나열한 모든 것이지만 휴양지만을 좇는 여행과는 결코 다르다. 그가 마주한 섬, 바다, 개척지에서 사람들이, 동물들이 죽거나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은 영원한 고통에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가 여행지에서 가져와 잠자리에, 그리고 글을 쓰는 장소에 두는 기념품의 의미를 언급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장소가 어디든 잠을 잘 때 곁에 두는 화살촉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빼앗아야만 현실과 부양의 의무를 기억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글을 쓰는 책상위에 두는 돌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내게 과거와 현재에 인간이 겪고 있는 파국적 고통에 대한 세계적인 무관심을, 내가 살아오는 동안에는 시베리아와 캄보디아에서, 피노체트 치하의 칠레에서 일어난 것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학살을 겪어온 인류의 운명에 대한 전 세계의 무관심을 상기시키는 물건이다. 79쪽
최근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소설 리뷰에 ‘크든 작든 우리는 모두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라고 쓴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저자가 말하는 ‘세계적인 무관심’이란 단어가 낯설거나 부당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가하면 소설 ‘라이프 임파서블’에서 그레이스가 마주한 심해의 신비로움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도 있었다.
심해 해저로 내려가는 동안 트리에스테호는 태평양에서 우리 인간이 아직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소리 터널 중 하나를 통과했을 가능성도 있다. (...) 127쪽
긴 시간 역사와 사건 그리고 삶의 방향성을 뜨개질 처럼 쉼없이 이어지는 서술구조라 과학, 역사, 인문 그리고 배우 박신양에서 화가로 또 다른 출발을 이끈 래릭과 같은 예술가들의 이야기까지 연결되어 있다. 에스프레소 잔의 길이만크 두꺼운 책인게 다행일만큼 흥미롭고 진중하게 마음을 건드린다. 올해도 이제 얼마남지 않았다. 새해는 곧 찾아오는데 당장의 여행이 아니라 영원의 여행을 희망하는 이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호라이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