딕테
차학경 지음, 김경년 옮김 / 문학사상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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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출간


지금까지 참여했던 펀딩 중 가장 기다렸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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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보는 기술 - 명화의 구조를 읽는 법
아키타 마사코 지음, 이연식 옮김 / 까치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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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가 무엇이든, 세계적인 명화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림이라는 것이 보고 싶은 대로 보면 된다고는 해도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보아야 할지 알기란 어렵습니다. p.13

글의 시작부터 저자는 ‘보는 것‘과 ‘관찰‘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그림을 볼 때에도 단순히 보는 것에 그치지 말고 ‘관찰‘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사전 지식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떤 작품을 ‘바라볼 때‘의 차이점도 분명 존재한다. 그냥 보는 사람은 그림을 볼 때 전체적으로 그리고 세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 곳에 머물거나 집중되어 있다. 감상평을 말할 때도 구조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데 이부분에 있어서는 일반적인 글쓰기도 ‘말하듯 쓰라‘고 했던 것이 생각난다. 글도, 그림도 보고서 ‘말할 줄 알아야‘한다.

이 책은 총 6장에 걸쳐 그림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기술‘을 소개한다. 구조를 파악하게 해주고, 주연과 조연을 구분할 줄 알게 되며 특정 선을 중심으로 그림의 분위기와 성격을 짐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물과 함께있는 소장품을 통해 대상을 짐작할 수 있는 방법도 알려준다. 하지만 이보다 더 와닿았던 부분은 이전에 알지 못했던 부분을 알려준다는 점이다. 가령 고흐의 작품은 색채가 주는 영향력이 상당한데, 그의 작품이라고는 믿기 힘들었던 몇몇 작품의 색상에 대한 오해와 관련된 부분이었다.

그런데 2010년에 시작된 상세한 과학적 조사 결과, 제라늄 레이크라는 분홍색을 띠는 붉은 안료의 색소가 시간이 지나면서 탈색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
과학이 반 고흐가 편지에 슨 내용이 그림과 어긋나지 않았다는 것을 밝혀서 그의 명예를 회복시켜준 것입니다. 174쪽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스킴에 대해 설명할 때 여러 작품을 다루기도 하지만 한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분석도 경험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가령 표지에 실린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만 보더라도 배치에 따라 인물이 가지는 지위의 높낮이는 휘어진 구조선을 통해 느낌을 온화하게 표현되었을 뿐 아니라 나선형 구도로 의도적으로 황금비를 사용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 ‘푸티카‘포즈라고 해서 비너스를 그릴 땐 사용되었던 자세를 통해 인물이 누구인지를 타이틀없이도 알 수 있다. 이렇게 저자의 안내를 따라가다보면 책에 실려있지 않은 작품을 감상할 때에도 좌우 배치에 따라, 래버트먼트 패턴에 의해 안정적인 구도로 화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인지를 짐작해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기술이 여전히 필요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책을 읽어야 할 진짜 이유는 바로 아래 발췌문에서 깨달을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미의식을 알기 위한 간단한 방법을 소개할까합니다. 좋아하는 그림이라면 어떤 장르라도 좋으니 세 점을 고릅니다. 그리고 이 세점의 그림을 늘어놓고 이 책에서 살펴본 ˝그림의 조형을 보는 포인트˝를 떠올리며 공통된 사항을 찾아봅시다. 이 공통 분모야말로 여러분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에 나타나는 특징일 것입니다. 334쪽

최근 유명 전시의 경우 한 두 시간의 대기는 물론 예약 마감으로 취소표를 기다리기 위해 이른 시간부터 줄을 서는 경우도 왕왕 보인다. 유행에 휩쓸리듯 감상하는 것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들인 수고에 비해 맘에 들지 않아 크게 아쉬웠던 적이 있다면 그 어떤 때보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그림, 혹은 예술작품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만약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이 있다면 오히려 더 궁금하지 않을까. 어떤 구조나 색상 혹은 구도 때문인지를 안다면 작품을 넘어 취향을 알아가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또 누군가에게 특정 작가의 작품을 전하는 것에 더해 어떤 이유로 이유로 좋아하는지 특징을 정확하게 전달한다면 같은 영화, 책 등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기쁨을 더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림을 보는 기술‘과 함께 ‘나에 대해 더 잘 아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제대로 알아가는 것‘까지 기대해 볼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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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시간으로부터 - 발아래에 새겨진 수백만 년에 대하여
헬렌 고든 지음, 김정은 옮김 / 까치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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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고든의 저서, 깊은 시간으로부터의 도서 분류는 ‘과학‘이다. 우리가 밝고 서있는 땅 아래, 암석과 지층은 물론 연대를 증명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 중 하나인 얼음층과 지형을 표기하는 지도, 다시 그 지도 위에서 태어나고 다시 쇠퇴한 생명체에 관한 역사와 다시 땅위로 올라와 인류가 미치는 영향에 따라 변화된 기후에 이르기까지 이 한 권의 책에서 등장하는 전문가와 그들의 직업군, 관련 전공은 실로 다양하고 흥미로우며 무엇보다 정말 재미있다. 글을 쓰는 소설가였던 저자가 땅 아래, 지층에 관심을 보이게 된 계기는 마치 재난관련 영화에서 마주하는 도입부, ‘그러던 어느 날‘처럼 우연처럼 다가온다.

런던을 돌아다니면서 조금 관심을 가지면, 우리의 발아래에 수많은 암석층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암석층 대부분은 하 번도 인간의 눈에 띈 적이 없다. 암석들이 처음 형성되었을 때 인간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암석들의 오랜 이야기가 파묻히고 감춰져서 잊혔기 때문일 수도 있다. 14쪽

본문만 3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단숨에 읽었을 만큼 흥미로운 ‘소설‘처럼 다가왔지만 서두에 밝힌 것처럼 엄연히 과학분야에 속해있다. 그렇다보니 수백만 년 전 플라이스토세를 지나 홀로세를 살고 있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질학의 변천사 혹은 관련 이론이 어떻게 정립되고 수정되었는지를 요약해야 하는 어떤 의무감 같은 것이 느껴져 서평을 적는 것이 쉽지 않았다. 헌데 이런 이론이야 일단 이 책을 읽기만 하면 저절로 알게되는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가 인기를 얻으면서 상대성 이론이 화제가 되었던 것처럼) 부분이니 읽으면서 아! 하거나 오! 했던 부분 위주로 적을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제일 처음 오! 했던 부분은 빙하학 교수이자 얼음코어 기록 보관소의 학예사 스테펜션과의 만남이이었다. 도서관 사서 자격증과 학예사 자격증을 준비하면서 나름 어떤 기관의 사서 혹은 학예사가 될 수 있을지 상상해보던 때가 있었다. 헌데 ‘얼음코어 기록 보관소‘라는 장소는 뜻밖이었다. 그야말로 영화 속 재난전문가를 찾아나설 때 엄청난 이력이 소유자이자 미모의 소유자이면서 돌싱(그것도 배우자와 심각한 성격차이로 인한 결별)의 인물이 절로 연상이 되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스테펜션 부부는 같은 직무에 종사할 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사적인 배경도 이 책이 흥미롭게 읽혔던 주된 이유 중 하나다. 지질학자에 대한 호기심을 넘어 관심도 생겼는데 지질학자가 마치 시인처럼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들을 밝혀내는 사람들이라는 표현도 좋았다. 두 번째로 오! 했던 부분은 운석 경매에 관한 부분이었다. 운석을 수집한다는 게 엄청난 부자이거나 연구기관 혹은 학자들에게 한정된 것인 줄 알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았다. 시장에서 물건을 구입하듯 쉽고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의외로 소장 경로가 엄청나게 까다롭진 않았다. 아! 했던 부분은 백악에 관한 부분이었다. 백악기 하면 공룡을 포함 해 지금은 볼 수 없는 멸종된 동물들의 이야기 속에서만 등장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백악을 만날 수 있다.

백악의 세계는 약 1억-8,000만 년 전에 시작되었다. (...)지질학자들은 이 시기를 라틴어로 ˝백악˝을 뜻하는 Creta르 따라 배각기라고 부른다. (...) 백악기가 끝난 후로 지금까지 6,500만 년이 흘렀ㅇ니, 얼마나 기 시간인지 알 수 있다. 138쪽
백악은 영국 남부 해안에서 영국 해협 아래로 내려갔다가 또다른 하얀 절벽으로 다시 나타난다.(...)
백악은 프랑스 북부의 상당지역과 스칸디나비아의 일부 지역, 네덜란드 림뷔르흐 지방, 독일 일부 지역에도 있다. 142쪽

백악이 처음 연구되기 시작하던 시기에는 약 3개층으로 이루어졌다고 짐작했지만 판구조론자들의 연구가 더해져 100년이 지난 이후, 무려 9개의 층으로 세분되기 시작되었다. 백악만 오차가 컸던 것이 아니다. 지구의 나이 자체가 만 년도 안되었다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다. 이렇게 몰랐던 것을 하나씩 밝혀가는 과정도 재밌었지만 안타까운 내용도 분명 있었다. 영국의 유용한 지도를 개발한 스미스의 경우는 같은 학자들 끼리도 무상으로 베끼거나 제대로된 보상없이 차용 당하는 등 지도제작 비용을 회수하지 못하기도 했다. 특히 아! 했던 부분은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특정 시기, 시대를 한 단어 혹은 ‘~시대‘라는 말로 함축시키기도 하고, 마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이 영원할 것처럼 착각하는 데 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홀로세‘로 저자 뿐 아니라 이 책을 읽거나 이렇게 서평을 쓰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같은 시기를 살고 있다. 지질학자들의 삶은 1~2년 혹은 수십년 동안 일어난 사실들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짧아도 수 천년 수 만년에 이른다. 맨 처음 오! 했던 얼음코어 기록소에 있는 얼음은 그렇게 오래 전 내렸던 쌓인 눈을 통해 지구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저자의 말처럼 홀로세 이후의 누군가에 의해 지금 지상에서 내리는 눈을 통해 같은 방식으로 지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화석 역시 마찬가지의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베리는 나무로 만들어진 오래된 수집가용 수납장을 열더니, 만찬 접시만한 크기의 나작하고 둥근 클라도그실론류의 화석을 꺼냈다. 그는 ˝이 화석을 처음 봤을 때 완전히 넋이 나갔다˝고 말했다. 208쪽

저자는 같은 화석을 보고 어떤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아마 내가 봤어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표본이 이전에도 발견된 것인지 어떤지의 여부를 알 수 없을 뿐더러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위의 언급한 표본은 나무의 생장방식이 이전과 다를 수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 거였고, 새로 발견한 만큼 이름을 붙일 수도 있었다. 그저 땅 아래를 파헤치는 굴삭기를 보았고, 층이 나뉘어진 구덩이를 보았을 뿐인데 저자의 관심과 행동은 이 한 권의 책을 완성하는데까지 미쳤다. 마지막 아! 했던 부분이 이 지점이었다. 조개 껍질에도 층은 보이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공룡에 대한 책을 함께 읽는 그 많은 순간, 내게도 이런 기회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인류세란 말을 처음 들으며 기후의 심각성을 깨닫는 순간에도 그런 기회는 곁에 와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던 순간만큼 지질학에 대해, 기후에 대해 무엇보다 지구와 시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앞으로 어떤 행동으로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이 책은 그 어떤 재난영화도, 기후관련 정책에서도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무조건 추천 또 추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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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인생공부 - 인간의 마음을 해부한, 67가지 철학수업
김태현 지음, 블레즈 파스칼 원작 / PASCAL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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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미워하는지를 결코 말하지 못했다. 109쪽

파스칼 인생 공부는 그의 저서 팡세의 내용 중 일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적절한 사례와 함께 4개의 주제로 선별하여 엮은 책으로 삶의 지혜는 물론 개인적으로는 감정과 이성과의 적절한 조화의 중요성을 강조한 부분이 크게 와닿았다. 특히 서두에서 언급한 ‘감정 표현의 부재’와 관련된 부분을 다른 내용들과 연결지어 이야기하자면, 감정을 어루만지는 것,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특히 아직 어린 영유아 아이들은 감정부터 살펴주는 것이 맞지만 정작 어른이 되어, 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서툴게 된다. 부모님으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았어도 어려워지는 것은 이성적 사고를 성장하는 동안 내내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MZ세대라고 특정 세대를 구분지어 사고하는 편은 아니지만 회사에서 부당한 처우를 받았을 때 상사나 동료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이 자신의 감정을 우선시 하는 그 세대들만의 특징일까. 진정을 담아 위로하고 함께 성장하는 것을 버거워하면서도 혼자있는 것을 극도로 기피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어쩌면 파스칼의 말처럼 끊임없이 불행하기 위해, 견뎌내기 위해 고통을 찾아다니는 모습처럼 보였던 것 같다.

파스칼은 우리의 삶이 다른 사라들과의 관계 속에서 더 큰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상기시켜 줍니다. 138쪽

적절한 감정표현은 나와 이웃의 관계를 좋아지게 만들고 불화를 낮추지만 ‘침묵’을 상황에 맞게 사용하는 것도 중요한 방법 중 하나다. 불의를 보았을 때 침묵하는 것은 회피를 넘어 동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지만 상대가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곁에서 묵묵히 기달려주는 침묵은 그 어떤 위로보다 큰 힘을 발휘한다. 산다는 것은 모순 투성이며, 때로는 미치지 않은 것이 더 미친 것처럼 느껴진다는 파스칼의 말은 과격하고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럴 땐 제대로된 감정 표현과 적절한 침묵을 지키는 정도로도 충분히 나와 이웃의 삶을 평안하게 해줄 수 있다 내용이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크고 확실한 조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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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하지 못한 말
임경선 지음 / 토스트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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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하지못한말 #임경선

평소에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나오면 다른 사람들의 후기가 올라오기 전 서둘러 구입부터 해둔다. 그리고 바로 근처 카페로 가서 읽거나 택배 상자가 도착하자 마자 소파로 가져가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난 후로는 일주일 혹은 한 달도 더 지나서 ’가장 좋은 때‘에 읽을 것을 기대하며 견뎌본다. 임경선 작가의 <다 하지 못한 말>은 그 때가 참 더디게 왔다. 봄에 나온 소설을 가을에 읽어도 좋긴 하다. 사랑이야기가 그런 것 처럼.

소설 속, ’나‘는 피아노를 치는, 하지만 자신의 희망만큼 운이 따르지 않아 좌절감을 겪는 남자와 사랑했으나 이별을 앞두고 있다. 그 사랑이 솔직한 말들로 깨지기라도 할까 다 하지 못한 말들을 고백하듯 혹은 토해내듯 쏟아낸다.

내 바람대로 아침까지 내 곁에 있어주었음에도 나는 놀라울 정도로 황량한 기분이 들었어. 그래서 불편하게 자는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홀로 남겨진 기분을 느낀 나를 위해서 다시는 이런 무리한 부탁을 하지 말자고 다짐했지. 그런데 무리한 요구를 하지 못하는 관계는 그것대로 또 얼마나 쓸쓸할까. 114쪽

사랑하는 연인 관계는 어떤 요구라도 서로에게는 무리하지 않은 요구가 되는 사이가 아닐까 싶다. 어느 순간 둘 중 한 쪽이라도 ’무리한 요구‘라고 느껴지는 순간이 이별의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연애였던 그 사람도 소설 속 남자처럼 연락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니었고, 장거리 출장 전 잠시라도 만나고 싶은 여자의 마음을 배려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때의 나는 누구에게 묻거나 위로받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팠던 그 마음, 혹시 이대로 헤어지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리석게 굴고 있는 건가 싶어 괴로워하며 많이 울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날 아프게 하는 사람은, 아니 남자는 진정으로 날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소설에서,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넘치게 듣고 보았으니까. 다만 아직 내 마음이 끝난 게 아니니 굳이 확답을 받으려 하지 말고, 그냥 내 마음이 가는대로 가보자는 심산이었다. 다행인것은 그 남자가 아니었다면 나도 평생을 그렇게 모든 남자들을 오해하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남자는 단순하다. 회사가 바빠서, 다른 힘든 일이 있어서 연락을 못 하는 게 아니다. 그냥 연락하기 싫어서다. 여자를 좋아하면 일이 바쁘고 힘들 때 오히려 더 만나서 위로받고 싶은 법이다.
”아무튼 남자들은.... 좀 그래.“ 164-165쪽

하지만 소설 속 남자는 좀 그런 남자였고, 다른 답을 기대했던 여자는 그 아픔을 견디지 못해 피를 쏟고 만다. 소설을 읽는 내내 영화 <3000년의 기다림> ost를 들어서 그런지 ’나‘와 함께 오매불망 기다리고 아파하며 읽게 되었다. 책을 거의 다 읽었을 때 남편에게 말했다. 소설을 읽다보면 연애했던 시절이 정말 그리워지는데 결국 헤어짐을 마주하게 되면 더는 연애하지 않아도 되는 지금이 좋은 것 같다고. 결혼이 이별 없는 연애인 것처럼 살아가는 부부들은 이해가 안될 수도 있다. 너무 많이 아파본 사람은 아픔이 없는 상태야 말로 가장 큰 행복이라는 것을 안다고들 하던데 그게 진짜 이유인지는 아직은 모르겠다.

”어떤 괴로움도 공부가 돼요. 잃는 건 없어요.“ 173쪽

임경선 작가의 작품은 에세이든 소설이든 꼭 챙겨서 읽고 있지만 이상하게 서평을 적지 못했다.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써보려고 해도 자꾸 내 얘기만 잔뜩 늘어놓게 되거나 끝없이 방황하는 중얼거림이 되고 말았다. 이 작품도 출간된지 시간도 좀 지난데다, 이처럼 개인사만 적게 되어 지우고 싶지만 ’희망고문‘일지라도 저 말을 꼭 적고 싶어서 지울수가 없다. 모든 남자가 보고 싶다고 다 연락하고, 바빠도 무조건 연락하고 그러는 건 아니다. 6년을 살아보니 더더욱 그렇다. 연락을 했는데 받지 않거나, 성실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전제해야겠지만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 그 남자는 정말 시간을 필요 할 수도 있다. 나와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한 시간이 아닌 그야말로 숨을 고르기 위한 시간, 그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얼마 전 다른 책 리뷰에서 적었지만 연인, 혹은 부부가 만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리 부부가 이런저런 이유로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던 삶 가운데 쉴 수 있는 여유를 나누라고 만난 것처럼 말이다. 힘들고 아픈 사랑을 하기보다는 그냥 사랑없이 사는 시대에 이렇게라도 이어보려는 게 어리석은 줄 알면서도 어떻게든 서평을 남겨보려고 분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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