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시인이랑 철학자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거 같애. 그렇지 않아?"
책상 위에 있던 시집을 펼쳐 시를 하나 소리내어 읽더니 작은넘이 이런다.
스마트폰과 컴퓨터가 한몸 되다시피 일상인 아이들의 삶에서 어떻게든 책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나 혼자만의 바람으로 오전에 함께 책 읽는 시간을 강요한다. 어려운 책 질색하는 건 둘 다 똑같아서 매번 책을 고르는 것도 일이다. 큰넘은 좀 쉬어가는(?) 의미로 구병모의 <아가미>를 프랑스어판으로 읽고 있다. 고 1을 마치고 여름방학 중인 작은넘은 3학년이 되면 철학 수업을 들어야 한다. 어떻게든 철학과 친해보라고 이것저것 권해보지만 뜬구름 잡는 소리만 늘어놓는 것같은 철학책이 마음에 들 리가 없다. 사둔 책들 중 칸트 철학을 우스개 농담에 버무려 이야기하는 책이 있어서 챕터마다 짜증을 내는 아이에게 억지로 읽히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읽어야 할 거라고 겁 아닌 겁을 주면서.ㅠㅠ 그나마 농담들이 나오니 수시로 그걸 나에게 읽어주면서 화도 내고 짜증도 내고 웃기도 하고.
"시 한번 읽어봐. 장난 아닐 걸?"
책상 위의 시집은 김혜순의 <피어라 돼지>였고 아이가 펼쳐 읽은 시는 「좀비 레인」이었다. 시를 읽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종종 읽어달라고 해야 겠는걸? 귀에 쏙쏙 들어온다. 혼자 눈으로 읽을 때와는 다르다. 이래서 시 낭독을 하고 듣고 하는 거구나.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새삼스레. 마구잡이로 읽는 거였는데도. 이게 무슨 말이야, 정말 생각 너무 많이 하네, 도대체 왜 그렇게 생각을 많이 하는 거야? 아이는 툴툴거린다. 제 나름의 시론을 잠시 이야기했지만 나는 금세 잊었다.
좀비 레인
좀비 내리는 날
다른 세상이 오는 날
내 마음이 죽었으므로
앞서 죽은 사람들의 이름과
고양이 울음과
톱 바이올린의 울음소리를
마음 대신 간직하기로 한다
(파란 하늘과 환한 꽃나무 아래
깎지 낀 두 손 같은
끈적거리는 뇌를 가진 적도 있었지만)
좀비 자욱이 내리는 날
좀비는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닌다
그리하여 나는 다리를 질질 끌고 나간다
그러나 나는 밤의 칠판에 추적추적 편지를 쓰는 선생
(선생은 머물고 학생은 떠난다)
나는 아마 달력 위에 영원히 빗금을 그으며 내릴 것만 같아
젖은 행주 같은 머리칼로 칠판을 지운다 무서워서 또 쓴다
어둠 속에 가만히 숨어 있겠다고 약속해줄게
어둠 속에 이빨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약속해줄게
그렇지만 죽음을 전파하러 무덤에서 일어납니다
살지도 죽지도 못하지만 제발 안아주세요
추적추적 처마 아래 좀비 내려서
나는 물속에서 뭉개지는 흐린 안경을 쓰고
대학본부의 중앙계단 아래서 피 흐르는 것들의 숨소리를 듣는다
좀비는 눈알이 빨개져도 괜찮아 그리하여 눈알이 빨개진다
좀비는 깡통을 걷어차도 괜찮아 그리하여 깡통을 걷어찬다
그리하여 밥을 안 먹어도 괜찮아 잠을 자지 않아도 괜찮아
젖어도 괜찮아 구겨져도 괜찮아 하염없이 축축한 편지를 쓴다
좀비 자욱이 내리고 또 내려 무덤에 손톱만 한 창들이 꽂히는 날
살아 있는 척하는 거 쉬워, 그리하여 괜찮아
내 그림자를 뜯어먹고 배불러도 괜찮아
사방에 내린다
시를 옮겨치고 나서야 아이가 시를 읽다가 말았다는 걸 알았다. 나도 처음 읽는 거라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