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뒤에 숨은 사랑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소설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페미니즘 책을 읽다가 어려움에 조금 지쳐서 펼쳐들었는데, 이런 내용인 줄 몰랐... 한 권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들의 삶에 나를 대입하고 내 생활을 돌아보고 가까운 미래를 상상해보는 일은 괴로운 일일까 다행한 일일까. 




"아시마는 요즘 들어 외국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평생 임신한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했다. 기다림은 끝도 없고, 언제나 버겁고, 끊임없이 남과 다르다고 느끼는 것이다. 한때는 평범했었던 삶에 이제는 불룩하게 괄호가 하나 삽입되었고, 이 괄호 속에는 끝나지 않는 책임이 들어 있었다. 이를 통해 이전의 삶은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 그 삶은 오히려 더 복잡하고 힘든 무엇인가로 대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외국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임신했을 때처럼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호기심과, 그리고 동정심과 이해심이 묘하게 뒤섞인 감정을 자아내는 어떤 것이라고, 아시마는 생각하였다." (71) 


언제나 버거운 일, 기다림, 차별, 격하게 공감하면서 동시에 '평생 임신한 것과 다름없다'는 말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인가 싶었다. 적절한 비유가 아닌 것 같으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적절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 임신한 여자를 쳐다보는 시선이 너무나 제각기 다르다는 게 비유의 본질을 흐릴 수 있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그는 가게에서 점원들이 부모님의 억양을 비웃는다는 것, 그리고 세일즈맨들은 그의 부모님이 마치 바보나 귀머거리라는 듯 고골리에게 말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93) 


할 말 없음. 아이들은 늘 나와 옆지기의 발음과 억양을 꾸짖(?)는다. 내가 들어도 어이없다. 발음과 억양만 문제면 다행이다. 문법도 엉망이다. 어려운 문장은 구사하지 못한다. 상대방이 조금만 어렵게 말하면 알아듣기 어렵다. 밖에 나가서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부끄러워 하는 게 느껴진다. 이 때 정확히 사용할 수 있는 말이 '바보'이다.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나라 말을 제대로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머릿속에 든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는 거. 분명히 바보는 아니지만 표현할 길이 없어 바보가 되어버리는 거. 프랑스에 살면서 가장 싫은 점이다. 그래서 말은 내게 두려움이다. 고골리 아버지 아쇼크는 대학교수다. 억양은 우스울 수 있어도 말은 잘 할 것이다. 교수라도 외국인으로 업신여김을 당한다. 우리는 교수가 아니며 교수도 아니다. 



앞부분에 아시마가 인도의 가족들에게 주려고 선물을 엄청 사서는 지하철을 타고 졸다가 물건들을 두고 내리는 사건이 나온다. (61~)  아시마는 자책을 하며 울었고, 남편 아쇼크는 집에 와서 지하철 분실물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이 부분을 읽으며 기분이 이상했다. 물론 아시마는 혼자 아기를 유모차에 태워 나갔고 아직은 낯설 수 있는 외국에 적응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며 겁도 났을 것이다. 그러나 아시마는 캘커타에서 영어를 전공했으며 아이들도 가르쳤다. 전공했다고 해서 회화를 잘 하는 것은 아닐 수 있지만 그래도 지하철 역에서 물어보는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라도 자책은 했겠지만 지하철역 직원에게 물어보는 정도는 생각했을 것 같다. 뭣 때문일까. 아시마는 무엇 때문에 그냥 울면서 집에 갔을까. 내내 마음에 걸린다. 이런 부분들이 소설 전체에 흩어져 있다. 모든 인물들이 왠지 모르게 마음에 걸리는 부분들을 갖고 있다. (특히 모슈미가 더 그렇다. 제대로 표현되지 않은 느낌. 상황에 잠식되는 인물.) 


아시마는 왜 그렇게 살았을까, 잠시 의문을 가져보지만 그 질문은 곧, 나는 왜 이렇게 살까,로 바뀌고 이내 수긍하게 되고 만다. 어느 면에서는 너무 나 같아서 그만. 소설이니까, 그러지 않고 공부도 계속 하고 일도 하고 그랬다면 좋았을 걸, 하다가 그것 또한 삶이라고, 그렇게. 아시마처럼 주변에 모국어를 쓰며 모일 수 있는 사람들이 내게도 많다면 하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이 없었다면 아시마는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으로 이민간 어떤 이는 한인타운에서 사는데 하루에 영어를 한마디도 안 하고 살 수 있다고, 영어를 쓰지 않아도 불편함이 없다고, 조금 다른 한국에서 사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한인타운도 없고 주변에 한국사람들도 없지만 하루에 프랑스어를 한마디도 안 하고 지낼 수 있는 나도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싶지만 이 또한 삶이라고. 그러나 오래 견딜 수 있는 삶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겐 아시마가 가졌던 가족 같은 이웃들이 이제 없다. 




" "목적론적으로 말해서, ABCD들은 '어디서 왔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발표자 중 한 사회학자가 이렇게 선언하였다. 고골리는 'ABCD'라는 용어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중에서야 그 말이 '미국에서 태어난 방황하는 데쉬 American-born confused desh'의 약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데쉬'라는 말이 '시골 사람'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이지만, 동시에 '인도사람'을 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부모님과 부모님의 친구들이 언제나 인도를 가리켜 그냥 '데쉬'라고 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골리는 인도를 한 번도 데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다른 미국 사람들처럼 그에게 있어 인도는 그냥 인도였다." (156) 


아시마와 아쇼크의 첫아이 고골리에게는 내 아이들을 대입하게 된다. 외국에서 태어나 여기도 저기도 아닌 것 같은 중간 어디쯤에서 혼란을 겪으며 성장해 외국인의 외모를 가지고 계속 살아가야 하는 삶. 나는 무엇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 눌러앉았나 생각한다. 선택이 잘한 것이었는지 되물어도 답은 없다. 내가 선택한 것인지 아닌지도 분명치 않다. 유치원에서 입을 닫고 말하기를 거부했던 아이의 생활이 어떠했을런지 짐작도 가지 않지만 돌이킬 때면 여전히 마음이 아프다. 자꾸만 어긋나는 고골리의 연애사와 결혼생활을 읽고 있자니 나중 내 아이들의 삶은 어떨런지 짐작도 가지 않지만 벌써 마음이 아프다. 고골리가 엄마아빠의 나라 인도로 여행가는 것을 싫어했던 것처럼 내 아이들도 그렇게 될까 생각한다. 여름방학을 이용해 잠깐 다녀오는 것 말고는, 가족들의 집에서 며칠씩 생활하는 것 말고는, 한번도 한국이라는 나라를 제대로 겪어보지 않은 아이들에게 한국은 어떤 의미일까. 


도입부부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내 경우와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소설 전체를 두고 봤을 때 뭔지 모를 아쉬움이 남는데, 나를 대입하다 보니 객관성이 흐려졌다. 그런 것 아닐까, 삶이라는 거. 두리뭉실하고 흐리고 뭔지 모를 아쉬움 같은 거. 그래서일까, 마냥 좋았다고는 할 수 없겠다. 


작가는 인물 설정을 일부러 이렇게 했을까, 아니면 이것이 한계였을까? 소설을 읽을 때마다 질문을 한다. 내가 소설을 쓴다면 이 인물을 이렇게 그렸을까? 이렇게 그린 이유는 뭘까? 질문을 뒤집어봐도 잘 모르겠다. 줌파 라히리의 다른 소설을 읽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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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이야기. 집중을 흐트러뜨리는 부분들이 있다. 특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는 단어들. 잘못 표기된 단어들. 예를 들면 '상케르'(257)는 프랑스식으로 읽어야 하며 '상세르' 정도로 표기해야 한다. 역시 프랑스어 '도르세이 미술관'(299)은 '오르세 미술관' 정도로 표기해야 한다. 'ㄷ'은 앞에 뮤제musée 가 붙을 경우 전치사가 연음되는 것이다.(Musée d'Orsay) '오렌지 카드'(300)는 파리 지하철 '1주일권'을 가리키는데 지금은 없어진 걸로 알고 있다. 같은 페이지 '플랜 드 파리'도 영어와 프랑스어를 섞은 표현이라 아예 프랑스식 발음으로 '플랑 드 빠리'라고 적거나 아니면 '빠리지도'나 '빠리가이드' 정도가 맞는 듯하다. (작은 가이드북이라는 설명이 따라나온다.) '걸어 들어가는 옷장'(307)은 또 무엇인가. 드레스룸? '파케트 마루'(340)에서 파케트는 나무를 이어 만든 바닥이라는 뜻을 가진다. 마룻바닥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한번에 알 수 없는 외국어가 많이 나온다. 반대로 지나친(?) 한국어번역도 눈에 띈다. '섬형 조리대'(354)는 요즘의 아일랜드 조리대를 말하는 것 같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다가 중간 즈음부터 체크하기 시작했기에 앞부분에도 이런 곳들이 있을 수 있다. 2004년판이니 번역을 손본 개정판이 나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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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21-03-20 06: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보가 아니지만 표현할 길이 없어 바보가 되는 거 너무 잘 알고 있죠. 저도 이 책 읽으면서 저와 제 아이들 대입하며 읽었던 생각이 나네요.
번역은 별 생각이 없이 읽었는지 이런 부분이 있는 줄 몰랐네요. 걸어들어가는 옷장은 walk in closet을 그대로 번역한 듯? 말씀대로 드레스 룸이라고 하면 될 거 같고 ‘섬형 조리대‘는 진짜 좀 어색하네요. 한국에서도 아일랜드 조리대라는 말을 쓸 거 같은데.

난티나무 2021-03-20 19:31   좋아요 1 | URL
흑흑. 그냥 웁니다.ㅠㅠ
번역이 좀 그랬어요. 다시 번역되면 좋겠어요. 읽다가 자꾸 단어들이 걸리는 바람에 ㅎㅎㅎㅎㅎ (울다가 웃네요?ㅋㅋ)

라로 2021-03-23 00:44   좋아요 0 | URL
걸어들어가는 옷장은 구글 번역기를 사용한 것일까요??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넘 심하네.ㅋㅋ

미미 2021-03-20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 동안 기분이 묘하셨을것 같아요. 한국에서 바라볼땐 해외나가 살아보는거 너무 좋을것만 같은데 저도 어릴때 1년 안되는 동안 이국땅에서 무슨 정신으로 살았나 싶기도 하거든요. 적응좀 하려니 들어온느낌? 난티나무님의 경우에 불어는 더군다나 어려운 외국어라..ㅠ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혹시 안읽어보셨음 느닷없이 추천드려요. 헤헤 유쾌해서 이곳저곳에서 기분전환되실듯!

난티나무 2021-03-20 19:36   좋아요 1 | URL
음 그래서 책 읽는 동안 나와 이야기에 동시에 들락거리느라 정신이 좀...^^;;;;;;
저도 어릴(?) 때는 잘 살 줄 알았는데 그런 성격인 줄 알았는데 몇 년 지나고 보니 전혀 아니더라고요.ㅠㅠ 나도 나를 모른다. 하아~
추천해 주신 책은 안 읽어봤는데 소개는 많이 봤고요, 목차나 인용구 훑어본,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느낌으로는 선뜻 손이 가진 않겠다, 기회가 되면 읽어봐야지 했었던 거 같아요. 글쎄 이게 뭐랄까 설명이 힘든 묘한 감정이 있어요.^^;;;;;; 뭔 말인지...ㅎㅎㅎㅎ 추천 감사해요~ 기회 되면 읽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