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에 대해서든 말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라고, 나는 가끔 느낀다. 단어란 사실 중요한 방식으로 다른 것들을 하나로 뭉치는 일반 범주다. 파랑은 천가지 색을 뜻하고, 말은 순혈종과 조랑말과 장난감을 뜻하고, 사랑은 모든 것을 뜻하면서 아무것도 뜻하지 않는다. 언어란 연속된 일반화를 통해 불완전한 그림들을 스케치해나감으로써 무엇이 되었든 뜻을 조금이라도 전달하는 것이다.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범주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범주는 필수적인 만큼 위험하다." (p.210) 



일상에서 겪는 일을 책 속에서 보는 것, 책에서 본 구절이 일상의 경험으로 나타나는 것은 때로는 유쾌하고 때로는 신기하고 때로는 풀이 확 죽는 일이다. 


지난주 어느 하루는 풀이 확 죽는 일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옆지기와 나는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렸는데 이렇게 집에만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일념으로 따라나선 길이었다. 내가 들고 나간 책은 리베카 솔닛의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햇빛이 쏟아지는 초록색 들판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책 제목을 본 옆지기가 화두를 던진다. 시작은 어찌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거나 화두는 군 가산점,이었다. 십중팔구 군대 이야기가 나오면 흔히들 빠지는 구렁텅이로 새는 게 분명할 터, 몇번 그런 일을 겪고 나서는 신중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도 어느날 갑자기 재치 있는 토론자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어서, 예의 바락바락모드가 마구 충전되고 말았다. 그렇게 시작된 논쟁(?)은 과연 서로의 논리가 적절하고 맞춤한 것인지도 모르는 채 달리는 한시간 내내 이어졌고, 나는 열불이 터졌고 아마도 반대의 이유로 옆지기도 열불이 터졌겠고, 또 어김없이 화두에 오른 강간과 무고에 대해 내 나름의 논리로 반박하다 열받아서 책 속의 구절을 찾아 큰소리로 읽기도 했다. 다행인 건, 이제 이렇게 논쟁 아닌 논쟁을 해도, 서로 열받아도, 논쟁은 논쟁, 거기까지, 다음에 또, 이렇게 넘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서로 조금씩 포기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길을 되짚어 돌아오는 길,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 또 던진다. 나는 저 위의 인용구를 어렴풋이 떠올렸다. 저 글을 읽기 전에도 그렇게 느꼈고 읽고 나서도 그렇게 느꼈고 지금도 그렇게 느낀다. 언어라는 것, 단어 하나가 덧씌우는 이미지들. 말로 설명하려 애써본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알수록 넓어지는 그 의미를 어떻게 한정된 언어로 표현한단 말인가. 

범주를 생각해 본다. 범주가 얼마나 생각을 갇히게 하는지를 생각해 본다. 나의 답답함과는 조금 다른 답답함을 느끼고 있을 옆지기가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벽?! ㅠㅠ (그건 넌데!) 나는 아직 멀었구나,와 말을 조심해야 겠다,를 동시에 생각하면서(그런데 나만 조심하면 될 일인가?) 서로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꼴이네 했다. 내가 안 변하는 것처럼 너도 변하지 않을 것이고, 아니, 한 사람은 너무 느리게 한사람은 너무 빠르게 변할 것이고,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함께 잘 살 수 있을 것인가. 입 밖으로 내어보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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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3-11 0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쉽지 않은 일이더라구요. 배운대로 옆에있는 짝꿍을 변화시키고. 같은 여자이지만 또 다른 생각을 키워온 엄마를 설득시키는 것도요. 그러니 이 세계는 오죽할까요..😳뜨헉

난티나무 2021-03-11 00:42   좋아요 1 | URL
변화가 올까요???ㅠㅠ 벽에 금 내는 중인데 다시 쫙쫙 붙어버리는 이 느낌...ㅎㅎㅎ
엄마는...하아... 답도 없습니다. 결정판 그 자체! 요즘은 여동생과도 자주 의견충돌해요. 흑흑 미미님 슬프다요...

라로 2021-03-11 02: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난티님은 책을 많이 읽으셔서 그럴까요? 아니면 조분조분 잘 표현하시는 분이라 그럴까요? 위로(?)드리고 싶다는 생각보다,,왜 이렇게 글을 잘쓰지?? 작가 해도 되겠다...뭐 그런 생각 했어요. ^^;;;

난티나무 2021-03-11 17:12   좋아요 0 | URL
우왓!! 이거슨 최고의 위로가 아닙니까!!!!! 기분 완전 좋아요. 으흐흐흐흐 🎶🎵🎶🎵

다락방 2021-03-11 08: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페미니즘 책 읽기 시작하면서 주변 남자사람들하고 엄청 싸웠어요. 사소한 의견 차이부터 시작해서 알게 모르게 스며있던 여성혐오를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러다보면 아무리 애정을 가지고 있어도 어떤 부분에서 한계를 느끼고 생생하던 애정이 사그라들기도 하고 그러더라고요. 싸우지말자고 제가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되새기지만, 어쨌든 그렇게 끊어낸 인연도 있고 그 뒤에 새로이 맺은 인연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나마 남동생은 저랑 같이한 시간이 길어서 조금이나마 달라지게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아마 제 생각만 그런 걸지도 모르겠어요.

난티나무 2021-03-11 17:17   좋아요 0 | URL
새롭게 사람을 발견하는 기분....^^;;;;;; 이랄까요. 새롭다기보다는... 절망적이라고 말하는 게 더 맞을 수도...ㅠㅠ

남동생분 분명 영향 받았을 거예요. 그리고 인연을 끊어낼 수 있는 다락방님의 상황(?) 위치(?) 가 초큼 부럽다고 합니다.... 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