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이따금 불쑥 아무 상관없는 일들이나 음모론을 늘어놓는 사람 중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지만, 내 경험상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자신감이 넘쳐서 정면 대결을 일삼는 사람은 유독 한쪽 성에 많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그리고 다른 여자들을 가르치려 든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든 모르든. 어떤 남자들은 그렇다." (p.15)


이런 성향을 가진 남자가 내 옆에도 있다. 그의 별명은 설명맨이다. 옛날에는 그의 말이 다 맞는 줄 알았다.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렇게 빠삭하게 다 알고 그것을 확신할 수 있는지 부럽기까지 했다. 언젠가부터 조금씩 의문이 떠올랐다. 그거, 아닌 거 같은데.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래도 내 생각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는 확신이 없었으니까. 몇 해가 더 흐르자 의문이 생기면 확신이 없어도 말을 내뱉었다. 그거 아닌 거 같은데. 이렇게 해야 될 것 같아. 내 의견은 쉽게 무시되었고 나도 내 의견을 주장하고 행동으로 옮길 의지는 없었다. 더 시간이 흘러 그 일에 관해 결국 내 의견이 맞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번이 아니라 여러번. 결국 내 생각이 맞았네. 조금씩 그런 일을 겪으면서, 나는 확신 없이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제는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 그거 아닌 것 같다고 대거리를 한다. 넌 어찌 그리 확신하냐고 묻는다. 다른 시각의 예를 든다. 편견이라고 비판한다. 그래서 그와 나는 종종 다툰다. 


리베카 솔닛도 서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듯, 이 책은 맨스플레인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강간, 살해 이야기로 흘러간다. 사실 구분짓고 분류하는 것이 늘 바람직하지는 않다. 어떤 현상은 한 가지 원인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니까. 연결되어 있으니까. 그래서 페미니즘 책을 읽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대거리를 할 때 유용하다. 바로 이런 주제의 이야기를 할 때. 강간하고 살해하는 남자들이 왜 그러는 것일까를 이야기할 때. 처음에 설명맨은 그 남자들이 이상한 거라고 했다. 다음엔 정신적인 문제가 있어서, 어릴 때의 트라우마 때문에, 성적 학대를 당해서 등등의 이유를 들었다. 그럼 그 수많은 여자들, 트라우마와 성적 학대를 당한 여자들은 왜 범죄를 저지르지 않지? 왜 남자들만 저지르지? 여자를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인식은 어떻게 가지게 되었을까? 나는 설명맨의 성향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설명에 종종 실패한다. 설명맨은 아직 이해가 힘들다. 이제 겨우 벨 훅스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을 읽기 시작하며 아 요론 것이 페미니즘이군 하는 아주 단순한 단계이기 때문이다. 나는 설명맨을 대하며 페미니즘 책들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간접적으로, 그러나 온몸으로, 다시, 23년어치를, 새롭게, 느낀다. 


"사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조차도 모를 때가 허다한데, 하물며 그 질감과 반영이 우리와는 달랐던 시대에 살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야 어떻겠는가. 빈틈을 메운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알지는 못하는 어떤 진실을 완전히 안다고 착각하는 어떤 거짓으로 바꾸는 일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다 안다고 착각할 때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보다 사실 더 모른다. 완결된 지식을 가진 척하는 이런 태도는 어쩌면 실패한 언어의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대담하게 단언하는 언어는 뉘앙스와 모호함과 성찰을 간직한 언어보다 더 간명하고 덜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후자의 언어에서라면 울프는 달리 비길 상대가 없다." (p.125) 


" "나는 최선을 다해서 그녀를 죽였다. 만일 내가 법정에 서야 한다면, 내 행동은 정당방위였다고 변명하리라.  ... 집안의 천사를 죽이는 것은 여성 작가의 격분에 포함되는 일이었다. 이제 천사는 죽었다. 그러면 무엇이 남았는가? 잉크병과 함께 침실에 앉아 있는 젊은 여자라는 단순하고 흔한 것이 남았다고 말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이제 젊은 여자는 자신에게서 허위를 제거했으므로, 앞으로는 그저 그녀 자신이기만 하면 된다. 아, 그러나 대체 그 '그녀 자신'이란 무엇인가? 그러니까 여성이란 무엇인가? 장담하건대, 나는 모른다. 당신이 알 것 같지도 않다."   "집안의 천사 죽이기, 그 문제는 내가 해결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죽었다. 그러나 두번째 문제, 하나의 육체로서 나 자신의 경험을 진실되게 이야기하는 문제는 내가 해결한 것 같지 않다. 누구든 해결한 여성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여성을 막아선 장애물들은 여전히 엄청나게 강력한데, 그럼에도 정확히 규정하기는 대단히 까다롭다." " (버지니아 울프 인용 부분, p.145~146) 


나는 집안의 천사를 죽일 수 있을까? 이미 시작했을 지도 모르겠다. 설명맨은 내가 달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 시각은 여전히 설명맨, 그의 것이다. 아직은 좁고 편협한. 나는 달라졌을까? 만약 그렇다면, 어디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잘 모르겠다. 리베카 솔닛의 울프 이야기를 읽으면서 울프 작품을 더 많이 읽어보고 싶어졌다. 


"누구나 그처럼 정규 교육에 앞선 사건들, 일상에 불현듯 등장한 사건들에서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 배제된 영향력들을 나는 할머니들이라고 부른다." (p.105) 


할머니들. 할머니들. 가장 가까운 할머니, 그러니까 나의 엄마와 설명맨의 엄마가 떠오른다. 나의 엄마의 엄마가 떠오른다. 나의 아빠의 엄마보다 나의 엄마의 엄마가 더 가깝다고 느끼는 것은 고모보다 이모를 더 가깝게 느끼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엄마의 언니들이 떠오른다. 또다른 할머니들이 연이어 떠오른다. 모든 떠오르는 할머니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들을 한다. 그런 행동들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가끔 아니고 자주. 어려서나 자라서나 늙어서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관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좋은 영향력은 있다. 아마도 대체로 여자들은 공감하고 대체로 남자들은 이해하지 못할, 집안의 천사로 살았던 그들의 삶에서 오는. 아아 이 즈음에서 반성 모드 자체 발동이다. 발동만 될 뿐, 아마도 나의 행동은 바뀌지 않겠지. 트라우마 너무 주셨다고요.ㅠㅠ 애증의 관계들. 


"어떤 여자들은 한번에 조금씩 삭제되고, 어떤 여자들은 단번에 몽땅 삭제된다. 어떤 여자들은 도로 나타난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모든 여자들은 지금도 그들을 사라지게 하려는 세력들과 싸우고 있는 셈이다. 여자의 이야기를 자기가 대신 말하려는 세력들과, 여자를 이야기와 족보와 인권현장과 법률에 기록하지 않으려는 세력들과, 자신의 이야기를 단어로든 이미지로든 스스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은 그 자체로 이미 승리다. 그 자체로 이미 반란이다." (p.112)  


'반란'이라는 단어를 보자 얼마 전 읽은 소설집 <엄마의 반란>이 생각난다. 내가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던 것은, 그 단어가 가지는 일반적인 의미, 반란은 나쁜 것, 좋지 않은 것,이라는 편견 때문은 아니었나? 군사반란, 쿠데타반란, 이런 단어들에 익숙해진 것은 아닌가? 요즘은 책을 읽다가 혹은 글을 쓰다가 단어의 뜻을 찾아보는 일이 잦다. 반란이 꼭 나쁘게만 사용되는 단어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엄마의 반란'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는 괜찮은 제목이 아닐까?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용기내어 한다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 상대방을 납득시키는 것, 그러므로 사라 펜(엄마)의 '반란'은 승리라는 것. 제목이 별로라고 생각했던 생각이 슬그머니 꼬리를 감춘다. 요즘처럼 책 한권을 읽고 생각이 조금 바뀌는 일이 잦다면 나는 일년 뒤엔 어느 정도 거짓말쟁이 혹은 변덕쟁이가 되어있을지도. 


"걸으면서 말하는 동안 머릿속에서 여러가지 생각들이 맞아떨어졌다는 키츠의 일화를 보면, 슬렁슬렁 거니는 산책이 상상력을 거닐게 하고 그럼으로써 무언가를 깨닫게 해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이해는 그 자체로 창조활동이다. 성찰을 야외활동으로 바꿔놓는 활동이다. (p.135) ... 울프가 [거리 떠돌기]에서 묘사한 상상의 산책은 오락에 불과했을지도 모르지만, 울프는 실제로 그런 산책의 와중에 <등대로>를 구상했으며, 책상에 앉은 채로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르는 방식으로 창작을 북돋웠다. 창조작업이란 무릇 예측 불가한 방식으로 이뤄지는 법이다. 배회할 공간이 필요하고, 일정과 체계는 거부된다. 그 방식은 복제 가능한 공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p.139)"


이 부분을 읽고 나도 배회하고 싶어서, '창조활동'을 하고 싶어서 매일의 산책에 도전하고 있다. 비가 내리니까, 추우니까, 더우니까, 어두워졌으니까, 이런 핑계들 꺼져! 나를 바깥으로 나가게 한 책, 힘이 대단한 책, 그러므로 칭찬. 책꽂이에 있던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를 꺼낸다. 페이지마커들이 조로록 붙어있다. 몇개월 전에 읽었지만 다시 읽으면 왠지 느낌이 또 다를 것 같다. 리베카 솔닛의 다른 책들도 더 읽고 싶다. (덧붙임 : 나는 이틀 전에 책을 구입했다. 알라딘은 감사하다며 적립금 천원을 또 쏘아주었다.ㅠㅠ) 















있는 책. 


아래는 읽고 싶은 책. 일단 요만큼만 읽고 싶다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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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1-01-29 00: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들을, 전부 가지고 있는... 리베카 솔닛의 글은 예전 알랭 드 보통의 글을 대할 때와 비슷한 느낌을 주어서.. 나오면 다 사게끔 되는.. 뭔 책인들 안 그렇겠냐고 뭐라 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ㅎㅎㅎ ㅠㅜㅜㅜ

난티나무 2021-01-29 00:45   좋아요 2 | URL
우와!!!! 저도 한권씩 천천히 읽어봐야 겠어요! 3월에 또 한 권이 나온다고 합니다!^^ 아실 듯~~~^^

비연 2021-01-29 00:47   좋아요 1 | URL
3월에 사야할 책들이 차곡차곡 쌓여갑니다.. 흐미... ㅜㅜ

난티나무 2021-01-29 00:53   좋아요 0 | URL
📦 ^^;;;;; 역시 개미지옥!!!ㅎㅎㅎ

2021-01-29 0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29 2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1-01-29 07: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걷기의 인문학을 소장하지 못했네요. 소장욕 부르는 페이퍼입니다.

저도 처음에 리베카 솔닛 읽고 너무 좋았던 기억이 나요. 페미니즘 책들은 처음에 다 그랬어요.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부터 시작해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강한 충격은 물론 삶에 의문을 갖게되었던 것들에 대한 답을 알 수 있었죠. 맞아요, 난티나무님. 대거리 할 수도 있었고요.

페이퍼에 언급하신 것처럼 설명맨 한두명쯤 안만나본 사람이 어디있을까요. 한두명이 다 뭐야, 저는 일상적으로 만나는 대부분의 남자들이 다 설명맨이더라고요. 잘 몰라도 확신을 갖고 설명한다는 것에 있어서도 그래요. 저 역시도 그런 점 때문에 상대를 천재인줄 알았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하는 것들이 생겨났고 그러다 제 말이 맞다는 것도 알게 됐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참동안을 상대가 더 똑똑하다고 생각해왔어요. 지금은 그것이 다 제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요.. 아, 갑자기 과거 생각나서 가슴이 답답해지네요.

세상에 읽을 책들이 많아서 좋으면서 싫고 싫으면서 좋으네요. 리베카 솔닛 아무 책이나 집어서 읽고 싶어져요. 집에 항상 책은 준비되어 있으니까요. 후훗.

난티나무 2021-01-29 21:03   좋아요 0 | URL
<페미니즘의 도전> 이것도 다시 읽어봐야 겠습니다. 왠지 몇개월 전이랑 지금은 또 다르게 다가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지금껏 사서 읽은 페미니즘 책들을 모두 다시 읽어볼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하~ 읽을 책도 쌓여있는데 다시 읽기까지 하려면 도대체 어째야 하는 걸까요?ㅎㅎㅎㅎ 마지막 말씀 동감합니다. 좋으면서 싫은 마음! 격하게 공감!!! ㅠㅠ

2021-01-29 2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21-01-29 0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 사진, 아니 그림도 정말 강렬하죠? ^^ 책 읽고, 화가의 사이트에서 한참 놀았던 기억이 나네요. 그림 사진 중 퍼블릭 도메인에 놓인 건 한장도 없었지만.

난티나무 2021-01-29 21:09   좋아요 1 | URL
맞아요! 사진인 줄 알았어요.^^;;; 그림도 말을 한다! ㅎㅎㅎ 저도 사이트 찾아봐야 겠습니다!

수이 2021-01-29 12: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알라딘 나한테만 천원 준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나한테만 주는 것처럼 이야기했으면서 흥!!! 저도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다시 읽고싶어지게 만드는 글이야.

난티나무 2021-01-29 21:10   좋아요 0 | URL
그러게 왜 자꾸 나만 주는지 알라딘이 절 사랑하는 줄 착각할 뻔 했잖아요.

라로 2021-01-31 16:48   좋아요 0 | URL
천원 주면 뭐합니까? 줬다가 금방 뺐어가 버리고 더구나 전자책에는 사용도 할 수 없는 것을. 놀리는 것 같아서 천원 볼 때마다 빈정 상해요. 거부하고 싶어. 수신 메일 체크하는 것처럼 춴원 안 받을래,,뭐 이렇게요.ㅋ

난티나무 2021-01-31 19:59   좋아요 0 | URL
줬다가 뺏고 ㅎㅎㅎㅎㅎㅎ 맞아요 전자책에 쓸 수 있음 좋겠어요. 해외거주 하는 사람들에게 전자책 쿠폰을 허하라!!! ㅋㅋ
춴원 아 또 써야 하나 ㅠㅠ 제가 그래서 종이책을 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