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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의 성정치 - 여혐 문화와 남성성 신화를 넘어 페미니즘 - 채식주의 비판 이론을 향해 ㅣ 이매진 컨텍스트 68
캐럴 J. 아담스 지음, 류현 옮김 / 이매진 / 2018년 10월
평점 :
어느날 저녁, 고기를 구워먹는 예능의 흔한 장면을 보고 있던 옆지기가 물었다. 그런데 육식이랑 페미니즘은 관계가 있나? 어떻게 연관이 되는 거야? <육식의 성정치>를 절반 정도 읽은 상태였던 나는, 아직 정리 안된 머릿속을 열심히 헤집었다. 정리가 안 되었으므로 말도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나왔다.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일목요연하게 정리 안 되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육식이 가부장제 문화를 상징하는 한 가지라는 말은 할 수 있겠다. 얼핏 스쳐본 그 예능에서는 몽실몽실 귀엽게 움직이는 양을 무슨 이유인지 데려다 놓고, 그 옆에서 불판에 소고기를 구워먹었다.
몇달 전, 또 어느 프로그램에 채식하는 할머니 연예인이 나와 무척 반갑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내가 이런 말을 했다. 저 사람은 페미니스트일 수도 있을 거야. 편견이라 할 수도 있지만, 채식과 페미니즘이 크게 다른 방향의 것이 아니라는 걸, 뭘 모르면서도 어렴풋이 느꼈던 듯하다. 어떤 것이 먼저든 그 두 가지는 언젠가 만날 것이라는. <육식의 성정치>에는 내가 몰랐던 그 이유가 나온다.
생각 없이 하는 말들과 욕들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욕을 싫어하고 욕하는 사람을 싫어하고 큰소리로 마구 욕하는 사람은 더 싫어하는데, 그런 내가 하는 최고최대의 욕(?)은 개뻥 개빡침 같은 '개' 붙은 말들과 아주 드물게 지랄, 정도. 일상에 만연해서 욕으로 들리지 않는 말들이지만 이젠 그것도 되도록 자제하기로 한다. 동물에 빗대어 무언가를, 사람을 비하하지 않기. 동물비하표현 뿐만 아니라 욕의 어원들을 찾아보면서 그 뜻에 한번 더 경악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육식을 비판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 또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을 읽으면서도 같은 이유로 놀라웠었다. 책을 읽으며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는 것은 정말이지 즐겁고 신나는 일이다. 이 책에 언급된 많은 작품들을 모두 찾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조라 닐 허스턴의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는 이 책 뿐만 아니라 지금 읽고 있는 앨리스 워커의 책 <엄마의 정원을 찾아서>에도 나온다. 버지니아 울프는 말할 것도 없다. <육식의 성정치>의 국내 초판 제목은 <프랑켄슈타인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였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또한 찬찬히 다시 읽어야 할 책의 목록에 올랐다.
육식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수많은 요인들이 그물망처럼 얽혀 있다. 저자는 그 그물망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헤치면서 생각할 문제들을 던져준다. 권력, 젠더, 차별과 혐오, 전쟁, 신화, 문학작품, 상징과 언어와 침묵, 폭력과 억압 등등. 심지어는 스쳐지나가는 문장이나 인용구 하나도 화두를 던진다. (ex. "스포츠는 전쟁을 위한 예행연습일까?" "여성은 유행-식욕-의 노예이고, 남성의 노예이며, 특히 의사의 노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여성이 '대상'이라는 점이다. 동물과 같이, 동물처럼 도살되고 해체되고 먹히는, 대상. 사람인데도 사람으로 보지 않(을 수 있)는 그 기술은 어떻게 그렇게 쥐도새도 모르게 연마되는지. 집에서, 거리에서, 직장에서, '여자'인 나를 대하는 그 기술적인 시선들, 과거였으며 현재이고 아마도 미래일, 나의 '몸'. 언뜻 어려운 단어처럼 보이는 '부재 지시 대상'의 뜻은 그래서 쉽게 이해된다. 살면서 겪는 것들을 언어로 표현해내는 것이 새삼 중요하다는 걸 느낀다.
사족 같지만 덧붙여보자면, 19세기 여성들이 채식을 반긴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이 고된 부엌일에서의 해방에 기여하기 때문이라는 부분에 대해, 몇개월의 짧은 경험을 토대로 대체로 동감하는 바이다. 19세기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적용이 될 수 있는 말이다. 식사 준비를 오래 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고기요리라는 것이 가끔은 그냥 소금만 뿌려 굽는 것이 될 수도 있지만, 불고기가, 두루치기가, 탕수육이 될 수도 있다. 어떤 고기 요리를 하더라도 '고기만' 먹지는 않는다. 밥도 반찬도 있어야 한다. 채소도 함께 준비해야 한다. 불고기에도 두루치기에도 탕수육에도 채소가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고기를 준비하는 부분을 뺀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밑간을 해서 두어야 하는 경우 길게는 하루 전부터 요리를 준비해야 할 때도 있다. 채소로 요리하는 경우 하루 전부터 준비해두어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닭고기는 기름기 제거를 위해 뜨거운 물에 한번 데치게 되는데 거기에 껍데기를 벗기는 일까지 추가되면 걸리는 시간은... 그리고 나서 이제야 본격적으로 요리 시작이다. 불 앞에 서 있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나는 무엇보다도 기름기가 남기는 온갖 흔적을 청소하고 씻는 일이 무척 괴로운 일이었음을 이제야 새롭게 깨닫는다. 바닥까지 기름이 튀는 게 싫어서 오븐에 고기를 구울 때에도 어마어마한 기름을 처리하고 닦아야 했고, 고기를 구워 먹는 날 그릇들과 씽크대는 그야말로 기름범벅이 되어 휴지로 일일이 닦은 후에도 뜨거운 물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볶음 요리도 나오는 기름의 양은 같아서, 하수구로 흘러내려간 녹은 기름들은 관속에서 다시 굳어 관을 막아버렸다. 요즘은 볶음요리에도 기름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더럽게만 느껴졌던 씽크볼이 뽀송뽀송하게 느껴질 정도다. 주방세제를 덜 쓰는 건 말할 것도 없다. (기름기 없는 설거지 너무 좋다! 세척기 사용도 마찬가지다. 세제 양을 1/2로 줄여도 되고 아예 안 넣을 때도 많다. 친환경세제를 만들어 쓸 때도 양을 조절해 적게 사용한다.) 내가 고기요리를 안(못) 하게 되면서 가끔의 고기요리를 도맡게 된 옆지기도 육식 식단이 채식 식단보다 더 힘들고 오래 걸린다는데 동의한다.
탈육식과 관련하여, 결국 윤리적인 이유는 따라오게 되는 듯하다. 몇개월 전, 처음 육식을 끊겠다고 결심했을 때에는 어느 정도 건강을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소화가 잘 안되는 배를 끌어안고 고생하던 시기에 읽었던 책들이 축산업의 실태를 보여주기도 했으므로 막연히 안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확실히 안좋은 것,으로 바뀌었다. 동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데도, '고기'를 위해 갇혀 사는 동물들과 죽어서도 '해체'되어야만 하는 동물들에 감정이 이입되었다. 평생의 사회화는 무서운 것이어서, 꺼려지는 마음이 단번에 증폭되기는 어렵다. 내 경우에는 그 마음 먹기에 여러 책들이 큰 역할을 했고, 어느 정도의 과도기를 거쳤으며, 지금도 과도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순간순간 의지가 약해지기도 한다. 강을 건너고 있는 느낌이다. 내가 모호하게 머물지 않고 계속 걸어가 반대편 기슭에 올라서야 하는 또다른 이유를 이 책은 알려준다. 육식을 거부하는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윤리적 이유에서의 거부가 끝이 아니라고 말한다. 나의 육식 거부는, 그동안 읽은 페미니즘 관련 책들과 무관할까? 내 결정의 이유에 대해 나는 오래 생각할 것 같다.
(덧붙임) 이 책이 절판되지 않고 계속 나오면 좋겠다. 이렇게 다른 의미를 알려주고 그래서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드는 책들이 계속 나오면 좋겠다. 널리 많이 읽히면 좋겠다. 아 그러려면 책을 마구 사서 여기저기 뿌려야 하는 것일까.. (2006년판으로 읽었으나 2018년판 책에 글을 쓴다. 구판의 무수히 많은 맞춤법 틀림과 이해하기 좀은 어려운 번역의 문장들이 2018년판에서는 개선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가부장제 문화에서 여성의 의미는 어디로 나아가는가? 언어로 구성된 체계라는 점에서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다면, 의미들은 어디로 가는가? 아마 여성의 의미는 자신들이 스스로 침묵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바로 그 시점에서 다른 방식으로 말해질 것이다. 음식을 입으로 내뱉는 반대 또는 거부의사를 표명하는 일종의 언어로 볼 수도 있을까? 서구 문화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주로 여성이고 고기는 남자의 음식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채식주의는 침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여성의 언어에 의해서만 그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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