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후 기억에 가장 오래 남는 것은, 멍하게 무엇인가를 바라볼 때 불쑥 마음을 훑고 지나가는 찰나의 무심함이다. 화려한 볼거리나 멋진 경치보다 오히려 아무런 의미도 없어보이는, 이를테면 생선바구니 앞에 앉아있는 고양이의 하품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기도 한다. 일상에서는 눈도 돌리지 않는 아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장면에 나뭇잎 떨어지듯 툭하고 마음이 가라앉기도 한다.

발리 우붓에 있는 유일한 운동장(또 있나?)에서 동네 청년들이 축구하는 장면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 여행자들.

여행지에서는 마음껏 텅 빈 채로 지낼 수 있다. 그게 여행이지 싶다.
그렇게 텅 빈 나날들이었지만 밤마다 꿈에 시달렸다. 여행 초반에는 이틀에 한번꼴이다가 후반에는 매일 밤마다 꿈에 시달렸다. 꿈의 내용은 한결같았다. '학교'였다. 수 년 전에 담임을 맡았던 꾸러기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는데 내가 담임을 다시 맡게 되었다는, 생각하기조차 두렵고 겁나는 일도 일어났다. 꿈 속에서도 '설마 이게 현실이 아니겠지.' 하면서 내내 안절부절하다가 불쑥 잠이 깨어서 안도의 숨을 내쉬곤했다. 그런 연속된 악몽으로 새벽을 맞는 날들이었다. 그러다가 여행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니 더 이상 꿈 속에 '학교'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이번에는 현실 속의 '학교'에 들어갈 시간이 다가왔다.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아직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