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에게
에쿠니 가오리
병원이란
네모나고 하얀 두부 같은 장소에서
당신의 목숨이 조금씩 갂여가는 동안
나는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어요
지금 당신의 찻잔은 여기 있는데
당신은 어디에도 없군요
먼 옛날
엄마가 어쩌다 찻잔을 깨뜨리면
당신은 엄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죠
슬퍼해서는 안 돼
형태가 있는 것은 언젠가는 부서지니까
슬퍼하면 엄마를 책망하는 셈이라고
당신의 갑작스런
-그리고 영원한-
부재를
슬퍼하면 당신을 책망하는 셈이 될까요
그날
병원 침대에서
이제는 지쳤다고 말하는 당신에게
사실은
그만 길을 떠나도 좋다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그러지 못했지만.
그 조금 전에
담배를 피우고 싶다던 당신에게도
사실은
그냥 피우라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곧 먼 길을 떠날 테니까
라고.
그러지는 못했지만.
미안해요.
안녕,
저도 곧 갈게요.
지금은 아니지만.
무제
에쿠니 가오리
어차피
백 년이 지나면
아무도 없어
너도 나도
그사람도
아파트에서는 '謹弔(근조)'燈(등)을 볼 수 없다. 아기가 태어나면 대문에 걸치는 '금줄' 역시 볼 수 없다. 누구네에 아기가 태어났는지, 누구네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셨는지 겉으로봐서는 절대로 알 수 없다. 주기적으로 소독해주는 아파트는 태어남도 죽음도 소독해주는 것같다.
에쿠니 가오리의 이 시집은 마치 이런 아파트 풍경처럼 읽힌다. 말끔히 소독처리된 것같은.